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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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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2세는 1087년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그는 제국 재건을 위해 검약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갈등, 페체네그족 정복, 헝가리와의 전쟁 등 대외 정책을 펼쳤다. 특히 아나톨리아 지역을 회복하고 십자군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현명하고 관대한 통치로 칭송받았으며, 1143년 시리아 원정 중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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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의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 요안니스 2세의 모자이크
전체 이름요안니스 콤니노스
로마자 표기Iōannēs Komnēnos
별칭칼로요안니스
로마자 표기Kaloïōannēs
칭호포르피로겐네토스(황제 혈통)
통치
작위로마인의 황제와 전제 군주
재위 기간1118년 8월 15일 – 1143년 4월 8일
대관식1092년 (공동 황제로서)
대관식 종류대관식
선임자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후임자마누엘 1세 콤니노스
섭정 유형공동 황제
섭정젊은 알렉시오스
가족
배우자이리니
자녀젊은 알렉시오스
마리아 콤니니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안나 콤니니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테오도라 콤니니
에우도키아 콤니니
마누엘 1세 콤니노스
왕조콤니노스 왕조
아버지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어머니이리니 두케나
출생과 사망
출생일1087년 9월 13일
출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일1143년 4월 8일
사망 장소킬리키아, 동로마 제국(현재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중해 지역)
매장지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 제이렉 모스크)
종교 및 기타
종교동방 정교회
서명

2. 생애

요안니스 2세는 1087년 9월 13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와 황후 이레네 두카이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그의 탄생을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성스러운 세례를 받았고, 아버지에 의해 관을 받았다고 묘사한다.[8]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는데, 그 시기는 1092년 9월 1일과 11월 초 사이였다.[9]

1104년 또는 1105년 초, 요안니스는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의 딸 피로슈카와 결혼했다. 그녀는 비잔티움에서 '평화'를 뜻하는 '이레네'라는 이름을 받았다.[11] 이 결혼은 비잔티움 제국의 발칸 반도와 아드리아 해 지역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1106년 알렉시오스 1세는 세르비아 원정에 나섰는데, 요안니스가 동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 요안니스의 아내는 임신 후기였고, 남편과 함께 원정에 나섰다가 발라비스타에서 쌍둥이 알렉시오스와 마리아를 낳았다.[12]

1118년,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죽음으로 요안니스 2세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누이 안나 콤네나와 어머니 이레네는 안나의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요안니스는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확인하고 서둘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으로 가서 즉위 기정사실을 만들었다. 안나는 요안니스를 암살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남편의 우유부단함으로 실패했다. 요안니스는 누이를 죽이지 않는 관대한 조치를 취했고, 백성들로부터 '선량한 요안니스'라는 뜻의 '칼로요안니스'라고 불렸다. 안나는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쓰던 아버지의 전기(알렉시아스)를 집필하여 여성 역사가가 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현명하고 신중하며 성실하고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로, 제국 재건을 위해 검소한 정책을 펼치고 군사력을 재건하여 대외 정책에 힘썼다.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에서는 패했지만,[47] 북방에서는 제국을 침입하던 페체네그족을 멸망시켰고,[19] 동방에서는 룸 셀주크 제국에게 점령당했던 파플라고니아를 비롯한 많은 소아시아 영토를 회복했다. 1136년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1137년에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복속시켜[62] 제국을 다시 동지중해의 강국으로 부활시켰다. 또한 아버지의 귀족 우대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신분이 낮지만 유능한 인물을 등용하여 귀족 세력과 관료들의 균형을 이루며 국정을 운영했다.

요안니스 2세는 1143년 시리아 원정 중 사냥 도중 실수로 독화살에 맞아[70][71][72] 사망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넷째 아들 마누일 1세 콤네노스를 황위 계승자로 정했다.[74][75][76]

2. 1. 어린 시절과 즉위

요안니스 2세는 1087년 9월 13일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와 황후 이리니 두케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누나 안나 콤니니는 동생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아 자세한 성장 과정은 알 수 없다. 당대 역사가 티레의 기욤은 요안니스가 키가 작고 매우 못생겼으며, 피부색이 검어 무어인 같았다고 묘사한다.[8]

1091년에서 1092년 사이, 요안니스는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자로서 공동 황제에 올랐다.[9] 1104년 또는 1105년 초, 요안니스는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의 딸 피로슈카와 결혼했다. 피로슈카는 비잔티움에서 '평화'를 뜻하는 '이레네'라는 이름을 받았다.[11]

1118년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병세가 악화되자, 어머니 이리니와 누나 안나는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차기 황제로 밀려 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아들 요안니스를 후계자로 정하고 죽었다.[14] 요안니스는 1118년 황제로 즉위했으나, 즉위 초기에 누나와 매형이 연루된 암살 음모를 겪었다.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요안니스는 관용을 베풀어 매형은 장군으로 다시 기용하고, 안나는 수녀원으로 보내는 데 그쳤다.[19]

요안니스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1119년경 아들 알렉시오스를 공동 황제로 대관했다.[22]

요안니스 2세(왼쪽)와 그의 장남 알렉시오스, 그리스도에 의해 대관됨. 비잔티움 사본, 12세기 초

2. 2. 제국의 방위

요안니스 2세 재위 초기, 제국의 서쪽 변경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은 권력 다툼을 벌였고, 다뉴브 강 북쪽의 쿠만족과 페체네그족도 잠잠했다. 노르만족의 아풀리아 역시 로베르토 기스카르 사후 혼란이 계속되어 제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1128년 헝가리 왕국이 제국을 침략하여 베오그라드니시를 점령하자, 요안니스는 즉각 반격하여 헝가리군을 몰아내고 제국의 도시들을 되찾았다. 이로써 제국 서쪽의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요안니스 2세는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그의 군사 전략은 방어 가능한 국경을 구축하기 위해 요새화된 거주지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약 25차례의 포위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43]

요안니스 2세는 치세 초기에 소아시아 서부에서 비잔티움 제국 국경을 압박하던 터키인들에 맞서 싸웠다. 1119년 셀주크족이 아탈레이아로 가는 육로를 차단하자, 요안니스 2세는 1119년 라오디케이아를 탈환하고, 1120년에는 소조폴리스를 점령하여 아탈레이아와의 육로 교통을 재개했다.[46]

헝가리와의 전쟁이 끝난 후, 요안니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말라티아(멜리테네)에 있는 다니슈멘드 토후국에 대한 원정을 수행했다. 그의 군사 활동으로 소아시아에서 터키의 확장은 중단되었고, 요안니스 2세는 카스타모누(카스트라 콤네논)를 재정복하는 등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다니슈멘드 터키인들의 저항이 강하여 정복 지역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34][56][57]

1139년 봄, 요안니스 2세는 상가리오스 강 지역을 습격하던 유목민 투르크멘인들에 대항하여 원정을 수행했다.[58] 이후 비티니아파플라고니아를 거쳐 흑해 남쪽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트레비존드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의 비잔티움 분리 정권을 종식시키고 칼디아 지역을 제국의 직접 통제하에 두었다. 1140년 네오카이사리아를 포위했지만, 나쁜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59][60][61]

2. 2. 1. 페체네그족과의 전쟁

1119년부터 1121년까지 아나톨리아셀주크 제국으로 원정을 떠나 아나톨리아 남부에 대한 비잔티움의 지배를 다시 찾아온 요안니스는, 그해 페체네그인트라키아를 유린하자 군대를 서방으로 돌렸다.[19] 요안니스는 그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도 각 부족을 이간질시키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완전히 제압하여 다시는 제국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고, 페체네그 족을 제국의 포이데라티로 삼고 제국 군대에 복무시켰다.[19]

2. 2. 2.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갈등

요안니스 2세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1082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맺은 조약의 갱신을 거절했다. 이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광범위한 무역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47]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이 황실 가족 구성원을 학대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해군력에서 베네치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1122년 베네치아 함대는 비잔티움 제국의 코르푸를 공격했고, 이후 3년 동안 로도스, 키오스, 사모스, 레스보스, 안드로스 등의 섬들을 점령했다.[47]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베네치아는 72척의 함대를 동원해 더 큰 보복을 가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크다고 판단하여 1126년 베네치아와의 조약을 재확인하고 통상 특권을 다시 허용했다.[48]

2. 2. 3.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

요안니스 2세는 헝가리 공주 피로슈카와 결혼하여 헝가리 왕국의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렸다.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던 맹인 알모시에게 망명을 허용했기 때문에 헝가리인들의 의심을 샀다. 이슈트반 2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1127년 비잔티움 제국의 발칸 반도 지역을 침략했고, 1129년까지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다.[49][50] 다만, 헝가리의 공격과 비잔티움의 보복이 1125년에 발생하고 1126년에 다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는 다른 연대기적 해석도 제시되었다.[49][50]

요안니스 2세는 헝가리와 동맹 관계를 맺은 세르비아에 대해 응징 작전을 개시했고, 많은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여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로 이송하여 군사 식민지 주민으로 복무하게 하였다. 이는 세르비아를 복종시키고, 터키에 대항하는 동부 비잔티움 국경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46] 세르비아는 다시 비잔티움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51]

헝가리군은 벨그라드, 니슈, 소피아를 공격했고, 트라키아의 필리포폴리스 근처에 있던 요안니스 2세는 다뉴브 강에서 작전하는 해군 함대의 지원을 받아 반격했다. 상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힘겨운 전투 끝에 황제는 하람 또는 크라몬 요새(현재 노바 팔랑카)에서 헝가리와 세르비아 동맹군을 격파했다. 비잔티움군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던 많은 헝가리군이 다리가 무너져 압사했다.[52]

그 후 헝가리군은 브라니체보를 공격하며 다시 적대 행위를 재개했고, 요안니스 2세는 즉시 브라니체보를 재건했다. 코니아테스는 여러 차례의 교전을 언급하며 비잔티움의 추가적인 군사적 성공이 평화 회복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했다.[53][54][55] 비잔티움은 브라니체보, 벨그라드, 제문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1060년대 이후 헝가리령이었던 시르미움(코니아테스는 프랑고코리온이라고 부름) 지역도 수복했다. 1129년 헝가리 왕위 계승자 알모시가 사망하면서 주요 마찰 요인이 제거되었다.

2. 3. 아나톨리아와 십자군 국가 원정

요안니스 2세는 제국 서방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아나톨리아에서는 다니슈멘드1130년 2월 보에몽 2세안티오키아 공국 군대를 격파하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며 소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다. 요안니스 2세는 1130년부터 1135년까지 다섯 차례나 다니슈멘드를 공격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했다. 때마침 다니슈멘드 아미르 가지가 예기치 않게 사망하면서, 아나톨리아 회복은 더욱 수월해졌다.[62]

요안니스 2세는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루지에로 2세에 대비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시칠리아 공격을 요청하고, 자신은 십자군 국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은 보에몽이 아미르 가지에게 죽은 이후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의 섭정을 거쳐, 보두앵의 어린 딸 콩스탕스와 그의 남편 레몽에게 상속되었다. 레몽이 킬리키아를 공격하자, 요안니스 2세는 동방 원정을 준비했다.[62]

1138년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레몽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레몽, 에데사의 조슬랭 2세 등 십자군 가신들과 연합하여 1138년 3월 성전 기사단을 구성하고 시리아의 이슬람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나, 레몽과 조슬랭의 불신으로 원정은 실패했고, 프랑크족 군대의 반감이 커져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62]

요안니스 2세가 샤이자르 공성전을 지휘하는 동안 동맹군이 진영에서 무위도식하는 모습, 1138년 프랑스 사본


요안니스 2세는 레반트에서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안티오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다. 1137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으로부터 타르수스, 아다나, 몹수에스티아를 정복했고, 1138년에는 레봉 1세 왕자와 그의 가족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플로 포로로 잡아들였다.[62][63] 이로써 안티오크 공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안티오크 공작 푸아티에의 레이몽과 에데사 백작 요셀린 2세는 1137년 황제의 봉신임을 인정했다. 트리폴리 백작 트리폴리의 레이몽 2세도 요안니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는 1109년 그의 전임자가 요안니스 2세의 아버지에게 맹세한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다.[64]

이후 요안니스 2세는 비잔티움, 안티오크, 에데사의 연합군을 이끌고 무슬림 시리아에 대한 공동 원정을 벌였다. 알레포는 공성전 시도 중 공격하기에는 너무 강력했지만, 발라트, 비자(Bizaah), 아타리브(Atarib), 마아라트 안 누만(Maarat al-Numan), 카파르타브(Kafartab) 요새는 함락되었다.[65]

요안니스 2세는 시리아 원정에서 기독교를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동맹인 안티오크 공작 레이몽과 에데사 백작 요셀린 2세는 진영에 남아 주사위를 굴리고 향락에 빠져 샤이자르 공성전을 돕지 않았다. 십자군 공작들은 서로와 요안니스 2세를 의심했고, 어느 누구도 원정에 참여하여 이득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레이몽은 알레포, 샤이자르, 호므스, 하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요안니스 2세에게 넘겨주기로 했던 안티오크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라틴어와 무슬림 자료는 공성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 요안니스 2세의 활력과 용기를 묘사한다. 샤이자르는 함락되었지만, 성채는 공격을 견뎌냈다. 샤이자르의 에미르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요안니스 2세의 봉신이 되며,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요안니스 2세는 동맹국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젠기 지휘하의 무슬림 군대가 도시를 구원하려고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였다.[66]

요안니스 2세는 킬리키아에 대한 셀주크족의 습격과 서쪽의 상황 때문에 독일과의 동맹을 추구하여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요셀린과 레이몽은 안티오크 성채를 황제에게 인도하기로 한 약속을 지연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요안니스 2세와 현지 그리스계 주민을 겨냥한 도시 내의 대중적 불안을 선동했다. 결국 요안니스 2세는 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67]

2. 3. 1. 아나톨리아 회복

1119년부터 1121년까지 요안니스 2세는 셀주크 투르크를 패배시키고 소아시아 남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1130년부터 1135년까지 다니슈멘드를 다섯 차례나 공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했다. 다니슈멘드의 아미르 가지가 죽자 아나톨리아 회복은 더욱 쉬워졌다. 요안니스 2세는 소아시아 서부의 비잔티움 국경을 압박하던 터키인들에 맞서 라오디케이아를 탈환하고, 1120년에는 소조폴리스를 급습하여 아탈레이아와의 육로 교통을 재개했다.[46]

헝가리와의 적대 행위가 끝난 후, 요안니스 2세는 남은 대부분의 세월 동안 소아시아에 집중했다. 그는 1130년부터 1135년까지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말라티아(멜리테네)에 있는 다니슈멘드 토후국에 대한 연례 원정을 수행했다. 그의 활발한 군사 활동 덕분에 소아시아에서 터키의 확장 시도는 중단되었고, 요안니스 2세는 콤네누스 왕조의 선조의 고향인 카스타모누(카스트라 콤네논)를 재정복했다. 그런 다음 그는 강그라에 2,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요안니스 2세는 적의 요새를 하나씩 함락시키는 벽돌 파괴자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제국이 잃었던 지역들이 회복되어 주둔되었다.[34][56][57] 그러나 카스타모누가 터키인들에게 재탈환되었다가 다시 비잔티움 제국에 점령되는 등 새로운 정복 지역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34][56][57]

1139년 봄, 황제는 상가리오스 강을 따라 있는 지역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가축을 몰아내 생계 수단을 빼앗은 유목민 투르크멘인들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다.[58] 그런 다음 그는 다니슈멘드 터키인에 맞서 마지막으로 진군했고, 그의 군대는 비티니아파플라고니아를 통과하여 흑해 남쪽 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트레비존드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의 비잔티움 분리 정권은 종식되었고, 칼디아 지역은 직접적인 제국 통제하에 들어왔다. 그런 다음 요안니스 2세는 1140년 네오카이사리아 도시를 포위했지만, 나쁜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했다.[59][60][61]

2. 3. 2. 십자군 국가와의 관계

1130년 2월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대가 다니슈멘드에게 격파되고 안티오키아가 점령되자, 요안니스 2세는 1130년부터 1135년까지 다섯 차례나 다니슈멘드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때마침 다니슈멘드의 아미르 가지가 예기치 않게 사망하면서, 아나톨리아 회복은 더욱 수월해졌다.[62]

요안니스 2세는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루지에로 2세에 대비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시칠리아 공격을 요청하고, 자신은 십자군 국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은 보에몽이 아미르 가지에게 사망한 이후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의 섭정을 거쳐, 보두앵의 어린 딸 콩스탕스와 그의 남편 레몽에게 상속되었다. 레몽이 킬리키아를 공격하자, 요안니스 2세는 동방 원정을 준비했다.[62]

1138년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레몽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레몽, 에데사의 조슬랭 2세 등 십자군 가신들과 연합하여 1138년 3월 성전 기사단을 구성하고 시리아의 이슬람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레몽과 조슬랭의 불신으로 원정은 실패했고, 프랑크족 군대의 반감이 커져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62]

요안니스 2세는 레반트에서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안티오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다. 1137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으로부터 타르수스, 아다나, 몹수에스티아를 정복했고, 1138년에는 레봉 1세 왕자와 그의 가족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플로 포로로 잡아들였다.[62][63] 이로써 안티오크 공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안티오크 공작 푸아티에의 레이몽과 에데사 백작 요셀린 2세는 1137년 황제의 봉신임을 인정했다. 트리폴리 백작 트리폴리의 레이몽 2세도 요안니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는 1109년 그의 전임자가 요안니스 2세의 아버지에게 맹세한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다.[64] 이후 요안니스 2세는 비잔티움, 안티오크, 에데사의 연합군을 이끌고 무슬림 시리아에 대한 공동 원정을 벌였다. 알레포는 공성전 시도 중 공격하기에는 너무 강력했지만, 발라트, 비자(Bizaah), 아타리브(Atarib), 마아라트 안 누만(Maarat al-Numan), 카파르타브(Kafartab) 요새는 함락되었다.[65]

요안니스 2세는 시리아 원정에서 기독교를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동맹인 안티오크 공작 레이몽과 에데사 백작 요셀린 2세는 진영에 남아 주사위를 굴리고 향락에 빠져 샤이자르 공성전을 돕지 않았다. 십자군 공작들은 서로와 요안니스 2세를 의심했고, 어느 누구도 원정에 참여하여 이득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레이몽은 알레포, 샤이자르, 호므스, 하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요안니스 2세에게 넘겨주기로 했던 안티오크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라틴어와 무슬림 자료는 공성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 요안니스 2세의 활력과 용기를 묘사한다. 샤이자르는 함락되었지만, 성채는 공격을 견뎌냈다. 샤이자르의 에미르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요안니스 2세의 봉신이 되며,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요안니스 2세는 동맹국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젠기 지휘하의 무슬림 군대가 도시를 구원하려고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였다.[66] 요안니스 2세는 킬리키아에 대한 셀주크족의 습격과 서쪽의 상황 때문에 독일과의 동맹을 추구하여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요셀린과 레이몽은 안티오크 성채를 황제에게 인도하기로 한 약속을 지연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요안니스 2세와 현지 그리스계 주민을 겨냥한 도시 내의 대중적 불안을 선동했다. 결국 요안니스 2세는 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67]

2. 4. 마지막 원정과 죽음

1142년 요안니스 2세는 킬리키아를 거쳐 동방으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의 레몽에게 안티오키아를 요구했으나 레몽은 이를 거절했다.[61] 양측이 이듬해 전쟁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중, 1143년 3월 요안니스는 타우루스 산맥에서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날아온 독화살에 손을 맞아 패혈증에 걸렸다.[70][71][72]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셋째 아들 이사키오스 대신 막내아들 마누일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1143년 4월 8일 사망했다.[74][75][76]

요안니스 2세가 마누엘을 후계자로 선택한 이유는 이사키오스의 격렬한 성격과 네오카이사레아 전투에서 마누엘이 보여준 용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74][75] 일설에는 AIMA 예언에 따라 후계자의 이름이 "M"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예언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76] 요안니스 2세의 절친한 친구인 요안니스 악수흐는 죽어가는 황제에게 이사키오스가 더 적합하다고 설득하려 했지만, 마누엘의 즉위에 어떠한 공개적인 반대도 없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6]

14세기 프랑스 사본에 나오는 요안니스 2세의 사냥

3. 평가

요안니스 2세는 동시대 사람들과 후세 역사가들 모두에게 콤네노스 왕조 최고의 황제로 칭송받았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그는 로마 황위에 오른 콤네노스 가문의 여러 황제 중 최고의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79] 현대 역사학자들 역시 요안니스 2세를 역대 동로마 제국 황제 중 최고의 명군으로 꼽는다.[79]

요안니스 2세의 통치는 코므네노스 왕조 시대 중 가장 성공적인 시기로 평가받는다. 역사학자 존 버켄마이어는 그의 저서 『코므네노스 군대의 발전(1081-1180)』에서 요안니스 2세가 전투보다는 포위 공격에 집중하고, 제한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연례 원정을 실시한 전략이 아들 마누엘 1세의 전략보다 더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했다.[77] 요안니스 2세의 원정은 신뢰할 수 있는 국경이 부족한 제국의 중심지를 보호하면서 소아시아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확장하여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77]

요안니스 2세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와 달리 황실 가족 외부 인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통치 방식을 택했다. 이는 황실 가족과 그들의 인맥을 이용하여 거의 모든 고위 행정직과 군사직을 채웠던 아버지와는 급격히 다른 방식이었다. 요한 악수크는 요한 2세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유일한 측근이었으며, 대내무장(그리스어: μέγας δομέστικος, ''megas domestikos'')에 임명되어 비잔티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자 제국의 행정 수반 역할을 수행했다.[23]

요안니스 2세는 아버지의 전직 관리들을 고위 행정직에 임명하고, 여러 '신진 인물'들을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는 과거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던 두카스, 디오게네스, 멜리세노스 가문과 같은 일부 저명한 귀족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25]

요안니스 2세는 검소한 생활을 통해 불필요한 지출을 억제하고, 군사력을 재건하여 대외 정책에 힘썼다.[21]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북방의 페체네그족을 멸망시키고, 동방에서는 룸 셀주크로부터 소아시아 영토를 회복했다.[27] 또한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안티오키아 공국을 복속시켜 제국을 동지중해의 강국으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요안니스 2세는 제국을 그가 물려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로 만들었다. 그의 사망 당시 상당한 영토가 회복되었고, 중앙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권 회복과 유프라테스 강에 국경을 재설정하는 목표는 달성 가능해 보였다.[78] 그러나 아나톨리아 내륙의 일부 그리스인들은 튀르크 지배에 익숙해져 비잔티움의 지배보다 튀르크 지배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78]

4. 가족 관계

요안니스 2세는 1104년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의 딸 피로슈카와 결혼했다. 피로슈카는 그리스식 이름인 "이리니"로 개명했다. 황후 이리니는 1134년 8월 13일 요안니스가 동방 원정에 나서던 중에 사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8명의 자식이 있었다.[80]

요안니스 2세와 헝가리의 이리니의 자녀
이름생몰년비고
알렉시오스 콤네누스1106년 10월 – 1142년 여름1119년부터 1142년까지 공동 황제
마리아 콤네네알렉시오스의 쌍둥이 자매, 요한 로제르 달라세노스와 결혼
안드로니코스 콤네누스? - 1142년
안나 콤네네– 1149년 이후제독 스테파노스 콘토스테파노스와 결혼,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둠
이사악 콤네누스– 1154년 이후1122년 세바스토크라토르로 임명, 두 번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둠
테오도라 콤네네– 1157년 5월 이전군 지휘관 마누엘 아네마스와 결혼, 최소한 4명의 자녀를 둠
에우도키아 콤네네– 1150년 이전군 지휘관 테오도로 바타체스와 결혼, 최소 6명의 자녀를 둠
마누일 1세 콤니노스1118년 11월 28일 – 1180년 9월 21일황제가 되어 1143년부터 1180년까지 통치



헝가리의 이레네 황후, 성 소피아 대성당의 콤네누스 모자이크에서

5. 외교 정책

요안니스 2세의 서방 외교 정책의 중심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이 발칸 반도의 비잔티움 영토에 위협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했다.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왕위를 칭하며 이 위협은 더욱 커졌다. 로타르 3세 황제는 1136년 노르만족 영토 침공에 대해 비잔티움의 지원, 특히 대규모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이 침공은 바리까지 이어졌다. 로제르 2세가 지지한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 때문에 인노켄티우스 2세 교황 또한 로타르와 요안니스 2세의 동맹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로제르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했고, 로제르는 1139년 교황으로부터 왕위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미냐노 조약).[30] 로타르의 후계자인 콘라트 3세는 1140년 요안니스의 막내 아들 마누엘을 위해 독일 왕족 신부를 요청했다. 콘라트의 처남인 줄츠바흐의 베르타가 선택되어 비잔티움으로 보내졌다.[31] 같은 시기에 로제르 2세는 그의 아들을 위한 황실 신부를 요안니스 2세에게 요청했지만 실패했다.[32]

요안니스의 아내 가문인 헝가리 지배자들에 대한 간섭은 문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헝가리 왕위 계승자들을 환영한 것은 비잔티움인들에게는 유용한 보험 정책이자 정치적 영향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은 이 간섭을 전쟁의 문제로 여겼다.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동맹은 서부 발칸 반도에서 비잔티움의 지배를 지속하는 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33]

동쪽에서 요안니스는 아버지처럼 이코니움의 셀주크 술탄과 아나톨리아 북동부 내륙 지역을 지배하는 다니슈멘드 왕조 간의 차이를 이용하려 했다. 1134년 셀주크 술탄 마수드는 다니슈멘드가 점령한 카스타무누 도시(1133년 비잔티움 정복 직후 재점령됨)에 대한 요안니스의 공격에 군대를 제공했지만, 셀주크 군대가 야간에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이 동맹은 신뢰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34]

십자군 국가에서는 안티오크에 대한 비잔티움의 주장이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지만, 비잔티움 황제가 군사적으로 그 주장을 강화할 수 있을 때에만 실제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레반트에서 요안니스의 외교적 성과는 1137년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트리폴리 백국의 통치자들로부터 공식적인 충성 맹세를 받아낸 때였다. 모든 십자군 국가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를 원하는 비잔티움의 욕망은 요안니스가 풀크 왕에게 성지 순례 계획(1142년)을 알렸을 때 예루살렘 왕국에서 보인 우려에서 알 수 있듯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35]

6. 종교 정책

요안니스 2세의 종교 정책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4세기 프랑스 사본에 그가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된 그림이 전해진다. [7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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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Ostrogorsky
[3] 서적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4] 서적 Runciman
[5] 서적 Choniates
[6] 서적 Dennis
[7] 서적 The World-wide Encyclopedia and Gazetteer The Christian Herald
[8] 서적 Stankovic
[9] 서적 Bucossi and Suarez
[10] 서적 Stankovic
[11] 서적 Stankovic
[12] 서적 Stankovic
[13] 서적 Stanko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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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Choniates
[16] 서적 Angold
[17] 서적 Neville
[18] 서적 Stathakopoulos
[19] 서적 Magdalino
[20] 서적 Choniates
[21] 서적 Angold
[22] 서적 Stathakopoulos
[23] 서적 Magdalino
[24] 서적 Choniates
[25] 서적 Magdalino
[26] 서적 Bernard and Demoen
[27] 서적 Haldon
[28] 서적 Magdalino
[29] 서적 Linardou
[30] 서적 Kinnamos
[31] 서적 Angold
[32] 서적 Kinnamos
[33] 서적 Angold
[34] 서적 Chon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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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적 Byzantium: The Decline and Fall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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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적
[71] 서적 History iarchive:bub gb CSIA[...]
[7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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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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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서적 The Alexiad Penguin Classics
[83] 서적 비잔티움 연대기 제3권 쇠퇴와 멸망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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