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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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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작가로, 1954년 18세의 나이에 발표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중산층의 삶과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유명하며, 소설, 희곡, 자서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사강은 또한 영화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1960년대에는 희곡 집필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강은 2004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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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
본명프랑수아즈 델핀 쿠아레
출생일1935년 6월 21일
출생지카자르크, 프랑스 제3공화국
사망일2004년 9월 24일
사망지에켐빌, 프랑스
묘지세자크 묘지, 카자르크, 프랑스
직업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극작가
국적프랑스
결혼
배우자기 숄러 (1958년–1960년, 이혼)
밥 웨스트호프 (1962년–1963년, 이혼)
자녀1
작품 활동
활동 시기1954년 - 1996년
데뷔작슬픔이여 안녕(1954년)
대표 작품슬픔이여 안녕(1954년)
학력
모교소르본 대학교
기타
언어프랑스어

2. 생애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6월 21일 카자르(Cajarc)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로트주(Lot)에서 보냈다.[1] '키키'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지주 집안의 딸이었다.[1]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기간 동안 도피네(Dauphiné)와 베르코르 산맥(Vercors Massif)에서 지냈다.[2] 외증조할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인이었다.[3][4]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은 파리의 부유한 17구(17th arrondissement)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6]

사강은 첫 번째 학교에서 "깊은 영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5] 루이즈 드 베티니(Louise-de-Bettignies) 학교에서도 몰리에르(Molière)의 흉상을 끈으로 매달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5] 이후 아템 교육기관(cours Hattemer)에서 두 번째 시도 끝에 바칼로레아를 취득했고, 1952년 가을 파리 대학교(Sorbonne)에 입학했다.[6] 그러나 공부에는 무관심했고 졸업하지는 않았다.

사강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온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7구의 사립 루이즈-드-베티니 학교를 3개월도 채 다니지 못하고 중퇴했다.[18] 그 후, 8구의 사립 쿠방 드 즈와조 기숙학교에 들어갔다.[19] 도피네 지방 그르노블 근교의 가톨릭계 학교 3곳에서 전학을 반복한 후, 파리로 돌아와 8구의 사립 아템메르 학교에 재학했다.[19]

1952년 가을부터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에는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졸업은 하지 않았다.[19] 이 무렵부터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쓰기 시작했다.[21] 당시 여성은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글을 쓸 수 없다면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며 학문이나 연구를 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고, 글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회고했다.[20] 대학 재학 중, 처녀작 원고를 쓰면서 그랑제콜 예비반 시험을 보았지만 불합격했다.[21]

1953년 여름 이후, 사강의 절친한 친구인 플로랑스 말로는 사강의 원고를 어머니 클라라 말로에게 보여주었지만, 작가였던 어머니는 제대로 읽지 않고 드뇌엘 출판사의 총무부장이었던 프랑수아 누리시에에게 원고를 건네주었지만, 동사는 무시했다고 한다.[21] 작가이자 영화 각본가인 코레트 오드리에게는 결말의 고쳐 쓰기를 제안받은 후 출판사 3곳을 소개받고, 1954년 1월 17일, 마침내 쥘리아르 출판사에서 출판이 결정되었다.[21]

1954년 5월, 장 폴랑(Jean Paulhan),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로제 카이요와(Roger Caillois), 마르셀 아를랑(Marcel Arland) 등 거장들이 심사위원이었던 평론가상을 수상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은 서점에서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21] 2004년 「Livre de Poche」판.}}

가족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출판사와 계약하고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실명인 코와레(Quoirez) 성은 표지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반대를 받았다. 그래서 필명이 필요하게 되었고,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제3편 「게르망트 쪽」에 등장하는 사강 공작 엘리 드 타이유랑-페리고르에서 따서 "사강"이라고 지었다..}}

사강은 베르나르 프랑크에게 "문학계의 코코 샤넬(Coco Chanel)"이라고 불렸다. 동세대인 플로랑스 말로, 무용수 자크 샤조(Jacques Chazot), 가수 쥘리엣 그레코(Juliette Gréco)와 그 여동생 샬롯 에요, 이탈리아 출신의 흥행사 마시모 갈지아 등과 친밀하게 사귀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1954년 18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문단에 데뷔했다.[7] 이 소설은 쾌락을 추구하는 17세 소녀 세실과 그녀의 남자 친구, 홀아비인 플레이보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룬다.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 등장하는 사강 공주(Princesse de Sagan)에서 필명을 따왔다.[7]

사강은 새로운 소설(nouveau roman)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프랑스 심리 소설(psychological novel)의 엄격한 스타일을 유지했다.[7] 그녀 작품 속 등장인물 간의 대화는 종종 실존주의(existential)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7] 196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주요 주제가 "고독과 사랑"이라고 말했다.[8]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사강은 회고록 『다정한 마음으로』(With Fondest Regards)에서 젊었을 때 사르트르의 글이 중요했다고 회상한다.[10] 사르트르는 그녀의 글이 "혁신적"이고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새로운 무언가"를 표현했다고 평가했다.[9]

1998년까지 사강은 소설, 희곡, 자서전 외에도 노랫말과 시나리오를 쓰며 수십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7] 1960년대에는 희곡 집필에 전념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이후 소설가로서의 경력에 집중했다.

1960년 알제리 전쟁(Algerian war) 당시, 사강은 121인 선언(Manifesto of the 121)에 서명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극우 테러 단체인 OAS(Organisation armée secrète)가 1961년 8월 23일 그녀의 부모님 집에 폭탄을 설치했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사강은 프랑스 로트주 피자크 인근 카자르크(Cajarc)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형 전기 회사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의 전신인 Compagnie Générale d’Électricité(CGE)의 중역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였다. 사강은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동물들과 함께 성장했다.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동안 리옹(Lyon)과 도피네(Dauphiné) 지방 베르코르(Vercors)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18]

전후, 가족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boulevard Malesherbes)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강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 합격한 후 1952년 가을부터 파리 대학교(솔본느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재학 중에는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졸업은 하지 못했다.[19] 이 무렵부터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쓰기 시작했다.[20]

사강은 베르나르 프랑크(Bernard Frank, 저널리스트)에게 "문학계의 마드모아젤 샤넬(Coco Chanel)"이라고 불렸다. 사강은 프랑크, 플로랑스 말로(Florence Malraux), 쥘리엣 그레코(Juliette Gréco) 등과 교류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옷, 보석, 원고 등을 아낌없이 선물하며 낭비하는 생활을 했다.

미국 여행을 즐기며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에바 가드너(Ava Gardner)와 동행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으며, 외아들 드니 웨스트호프(Denis Westhof)는 사진작가이다.

사강은 젊은 시절의 성공으로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 주변에서 문학가들과 명사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금방 부유하고 태평하며, 캐주얼하고 성적으로 해방된 세대의 상징이 되었다.

2008년에는 그녀의 전기 영화 『사강 -슬픔이여 안녕-』이 실비 테스튀(Sylvie Testud) 주연, 디안 퀴리스(Diane Kurys) 감독으로 제작되었다.

사강은 두 번 결혼했다. 1958년 3월 13일, 아셰트의 편집자이자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기 쇼엘러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60년 6월 이혼했다.[11] 1962년에는 젊은 미국인 플레이보이이자 도예가 지망생인 밥 베스트호프와 재혼했지만, 1963년에 이혼했다.[11]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드니 베스트호프가 1962년 6월에 태어났다.[11]

1962년, 로베르 베스트호프와 결혼 후 신혼여행 중 페리에 오르는 사강


이후 사강은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페기 로슈와 장기적인 관계를 맺었다.[12] 또한, 기혼 수필가인 베르나르 프랑크라는 남성 애인이 있었고,[12] 프랑스 ''플레이보이'' 편집장인 아닉 지이와도 장기적인 관계를 시작했다.[12]

미국 여행을 즐겼던 사강은 트루먼 카포티, 애바 가드너와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 1957년 4월 14일, 자신의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를 고속으로 운전하던 중 사고를 당해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회복 과정에서 처방받은 진통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녀의 논픽션 작품 ''톡식''에서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13] 도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재규어 자동차를 몰고 몬테카를로로 가는 것을 즐겼다.

1990년대에는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아들 드니는 프랑수아즈 사강 상을 설립했다.

프랑스 로트주 피자크 인근 카자르크(Cajarc)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대형 전기 회사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의 전신인 Compagnie Générale d’Électricité(CGE)의 중역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였다.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1939년-1945년) 동안 초반에는 리옹(Lyon)에 있다가, 그 후 도피네(Dauphiné) 지방 베르코르(Vercors)로 피신했다.[18]

전후, 가족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boulevard Malesherbes)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강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1952년 가을부터 파리대학교(솔본느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19]

젊은 시절 성공하여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 주변에서 문학가들과 명사들과 교류했다. 사람들은 사강을 소설 속 인물과 혼동하고 중첩시켰고, 그녀는 금방 부유하고 태평하며, 캐주얼하고 성적으로 해방된 세대의 "여성 버전의 제임스 딘(James Dean)"과 같은 상징이 되었다.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약물(진통제·코카인·모르핀·각성제의 일종인 암페타민 등)과 알코올에 빠졌고, 과도한 낭비벽과 도박벽으로 수백억 엔을 벌었는데 말년에는 생활에 궁핍해졌다. 방탕한 생활을 계속해서 코카인 소지로 체포되거나 탈세로 기소되는 등 전과도 있었다. 바이섹슈얼이기도 했고, 남편 외에도 남녀 양쪽의 애인이 있었다. 그 때문에 국내외의 연예 뉴스지에 스캔들을 써서 올리는 일도 많았고, 연예인 못지않은 스캔들 여왕이기도 했다.

후반생 약 12년간은 예금 등을 압류당하여 생활에 곤란을 겪었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물 중독 후유증에 시달렸다. 2002년 2월의 탈세 사건 "엘프 사건"의 영향도 있어서, 많은 벌금과 추징세를 지불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칼바도스주(Calvados) 리쥬(Lisieux)의 별장 "르 마누아르 뒤 브뤼유"(Le Manoir du Breuil, 빌라 또는 파빌용, 웅장한 별장)에 틀어박혀 지내다, 옹플뢰르(Honfleur)의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69세에 사망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2000년대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2002년,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관련된 사건에서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14] 2004년 9월 24일, 칼바도스 주 옹플뢰르에서 폐색전증으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그녀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고향 카자르크 근처 뢰트 주 세자크에 묻혔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추모 성명에서 "그녀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가장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우리 문학계의 걸출한 인물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강은 제롬 가르생이 편찬한 ''작가 사전''에 자신의 부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54년 가는 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다. 즐겁고도 엉망이었던 삶과 작품 활동 후 그녀의 죽음은 오직 그녀 자신에게만 스캔들이었다."[15]

2. 1. 초기 생애 (1935-1953)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6월 21일 카자르(Cajarc)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로트주(Lot)에서 보냈다.[1] '키키'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지주 집안의 딸이었다.[1]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기간 동안 도피네(Dauphiné)와 베르코르 산맥(Vercors Massif)에서 지냈다.[2] 외증조할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인이었다.[3][4]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은 파리의 부유한 17구(17th arrondissement)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6]

사강은 첫 번째 학교에서 "깊은 영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5] 루이즈 드 베티니(Louise-de-Bettignies) 학교에서도 몰리에르(Molière)의 흉상을 끈으로 매달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5] 이후 아템 교육기관(cours Hattemer)에서 두 번째 시도 끝에 바칼로레아를 취득했고, 1952년 가을 파리 대학교(Sorbonne)에 입학했다.[6] 그러나 공부에는 무관심했고 졸업하지는 않았다.

사강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온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7구의 사립 루이즈-드-베티니 학교를 3개월도 채 다니지 못하고 중퇴했다.[18] 그 후, 8구의 사립 쿠방 드 즈와조 기숙학교에 들어갔다.[19] 도피네 지방 그르노블 근교의 가톨릭계 학교 3곳에서 전학을 반복한 후, 파리로 돌아와 8구의 사립 아템메르 학교에 재학했다.[19]

1952년 가을부터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에는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졸업은 하지 않았다.[19] 이 무렵부터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쓰기 시작했다.[21] 당시 여성은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글을 쓸 수 없다면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며 학문이나 연구를 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고, 글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회고했다.[20] 대학 재학 중, 처녀작 원고를 쓰면서 그랑제콜 예비반 시험을 보았지만 불합격했다.[21]

1953년 여름 이후, 사강의 절친한 친구인 플로랑스 말로는 사강의 원고를 어머니 클라라 말로에게 보여주었지만, 작가였던 어머니는 제대로 읽지 않고 드뇌엘 출판사의 총무부장이었던 프랑수아 누리시에에게 원고를 건네주었지만, 동사는 무시했다고 한다.[21] 작가이자 영화 각본가인 코레트 오드리에게는 결말의 고쳐 쓰기를 제안받은 후 출판사 3곳을 소개받고, 1954년 1월 17일, 마침내 쥘리아르 출판사에서 출판이 결정되었다.[21]

1954년 5월, 장 폴랑(Jean Paulhan),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로제 카이요와(Roger Caillois), 마르셀 아를랑(Marcel Arland) 등 거장들이 심사위원이었던 평론가상을 수상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은 서점에서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21] 2004년 「Livre de Poche」판.}}

가족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출판사와 계약하고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실명인 코와레(Quoirez) 성은 표지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반대를 받았다. 그래서 필명이 필요하게 되었고,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제3편 「게르망트 쪽」에 등장하는 사강 공작 엘리 드 타이유랑-페리고르에서 따서 "사강"이라고 지었다..}}

사강은 베르나르 프랑크에게 "문학계의 코코 샤넬(Coco Chanel)"이라고 불렸다. 동세대인 플로랑스 말로, 무용수 자크 샤조(Jacques Chazot), 가수 쥘리엣 그레코(Juliette Gréco)와 그 여동생 샬롯 에요, 이탈리아 출신의 흥행사 마시모 갈지아 등과 친밀하게 사귀었다.

2. 2. 작가 경력 (1954-2004)

프랑수아즈 사강은 1954년 18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문단에 데뷔했다.[7] 이 소설은 쾌락을 추구하는 17세 소녀 세실과 그녀의 남자 친구, 홀아비인 플레이보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룬다.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 등장하는 사강 공주(Princesse de Sagan)에서 필명을 따왔다.[7]

사강은 새로운 소설(nouveau roman)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프랑스 심리 소설(psychological novel)의 엄격한 스타일을 유지했다.[7] 그녀 작품 속 등장인물 간의 대화는 종종 실존주의(existential)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7] 196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주요 주제가 "고독과 사랑"이라고 말했다.[8]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사강은 회고록 『다정한 마음으로』(With Fondest Regards)에서 젊었을 때 사르트르의 글이 중요했다고 회상한다.[10] 사르트르는 그녀의 글이 "혁신적"이고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새로운 무언가"를 표현했다고 평가했다.[9]

1998년까지 사강은 소설, 희곡, 자서전 외에도 노랫말과 시나리오를 쓰며 수십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7] 1960년대에는 희곡 집필에 전념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이후 소설가로서의 경력에 집중했다.

1960년 알제리 전쟁(Algerian war) 당시, 사강은 121인 선언(Manifesto of the 121)에 서명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극우 테러 단체인 OAS(Organisation armée secrète)가 1961년 8월 23일 그녀의 부모님 집에 폭탄을 설치했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사강은 프랑스 로트주 피자크 인근 카자르크(Cajarc)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형 전기 회사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의 전신인 Compagnie Générale d’Électricité(CGE)의 중역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였다. 사강은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동물들과 함께 성장했다.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동안 리옹(Lyon)과 도피네(Dauphiné) 지방 베르코르(Vercors)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18]

전후, 가족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boulevard Malesherbes)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강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 합격한 후 1952년 가을부터 파리 대학교(솔본느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재학 중에는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졸업은 하지 못했다.[19] 이 무렵부터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쓰기 시작했다.[20]

사강은 베르나르 프랑크(Bernard Frank, 저널리스트)에게 "문학계의 마드모아젤 샤넬(Coco Chanel)"이라고 불렸다. 사강은 프랑크, 플로랑스 말로(Florence Malraux), 쥘리엣 그레코(Juliette Gréco) 등과 교류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옷, 보석, 원고 등을 아낌없이 선물하며 낭비하는 생활을 했다.

미국 여행을 즐기며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에바 가드너(Ava Gardner)와 동행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으며, 외아들 드니 웨스트호프(Denis Westhof)는 사진작가이다.

사강은 젊은 시절의 성공으로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 주변에서 문학가들과 명사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금방 부유하고 태평하며, 캐주얼하고 성적으로 해방된 세대의 상징이 되었다.

2008년에는 그녀의 전기 영화 『사강 -슬픔이여 안녕-』이 실비 테스튀(Sylvie Testud) 주연, 디안 퀴리스(Diane Kurys) 감독으로 제작되었다.

2. 3. 사생활과 스캔들

사강은 두 번 결혼했다. 1958년 3월 13일, 아셰트의 편집자이자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기 쇼엘러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60년 6월 이혼했다.[11] 1962년에는 젊은 미국인 플레이보이이자 도예가 지망생인 밥 베스트호프와 재혼했지만, 1963년에 이혼했다.[11]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드니 베스트호프가 1962년 6월에 태어났다.[11]

이후 사강은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페기 로슈와 장기적인 관계를 맺었다.[12] 또한, 기혼 수필가인 베르나르 프랑크라는 남성 애인이 있었고,[12] 프랑스 ''플레이보이'' 편집장인 아닉 지이와도 장기적인 관계를 시작했다.[12]

미국 여행을 즐겼던 사강은 트루먼 카포티, 애바 가드너와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 1957년 4월 14일, 자신의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를 고속으로 운전하던 중 사고를 당해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회복 과정에서 처방받은 진통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녀의 논픽션 작품 ''톡식''에서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13] 도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재규어 자동차를 몰고 몬테카를로로 가는 것을 즐겼다.

1990년대에는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아들 드니는 프랑수아즈 사강 상을 설립했다.

프랑스 로트주 피자크 인근 카자르크(Cajarc)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대형 전기 회사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의 전신인 Compagnie Générale d’Électricité(CGE)의 중역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였다.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1939년-1945년) 동안 초반에는 리옹(Lyon)에 있다가, 그 후 도피네(Dauphiné) 지방 베르코르(Vercors)로 피신했다.[18]

전후, 가족은 파리 17구 마르세브 대로(boulevard Malesherbes) 167번지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강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1952년 가을부터 파리대학교(솔본느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19]

젊은 시절 성공하여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 주변에서 문학가들과 명사들과 교류했다. 사람들은 사강을 소설 속 인물과 혼동하고 중첩시켰고, 그녀는 금방 부유하고 태평하며, 캐주얼하고 성적으로 해방된 세대의 "여성 버전의 제임스 딘(James Dean)"과 같은 상징이 되었다.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약물(진통제·코카인·모르핀·각성제의 일종인 암페타민 등)과 알코올에 빠졌고, 과도한 낭비벽과 도박벽으로 수백억 엔을 벌었는데 말년에는 생활에 궁핍해졌다. 방탕한 생활을 계속해서 코카인 소지로 체포되거나 탈세로 기소되는 등 전과도 있었다. 바이섹슈얼이기도 했고, 남편 외에도 남녀 양쪽의 애인이 있었다. 그 때문에 국내외의 연예 뉴스지에 스캔들을 써서 올리는 일도 많았고, 연예인 못지않은 스캔들 여왕이기도 했다.

후반생 약 12년간은 예금 등을 압류당하여 생활에 곤란을 겪었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물 중독 후유증에 시달렸다. 2002년 2월의 탈세 사건 "엘프 사건"의 영향도 있어서, 많은 벌금과 추징세를 지불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칼바도스주(Calvados) 리쥬(Lisieux)의 별장 "르 마누아르 뒤 브뤼유"(Le Manoir du Breuil, 빌라 또는 파빌용, 웅장한 별장)에 틀어박혀 지내다, 옹플뢰르(Honfleur)의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69세에 사망했다.

2. 4. 죽음

프랑수아즈 사강은 2000년대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2002년,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관련된 사건에서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14] 2004년 9월 24일, 칼바도스 주 옹플뢰르에서 폐색전증으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그녀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고향 카자르크 근처 뢰트 주 세자크에 묻혔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추모 성명에서 "그녀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가장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우리 문학계의 걸출한 인물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강은 제롬 가르생이 편찬한 ''작가 사전''에 자신의 부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54년 가는 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다. 즐겁고도 엉망이었던 삶과 작품 활동 후 그녀의 죽음은 오직 그녀 자신에게만 스캔들이었다."[15]

3. 작품 세계

프랑수아즈 사강은 중산층의 다소 평온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작 소설 『슬픔이여 안녕』은 1954년 18세 때 출판되었는데,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한 소녀를 그린 이 작품은 출판과 동시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일런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6년까지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교류가 깊었으며, 작품에는 실존주의의 영향이 보인다. 후반기, 사르트르 사후에 발표된 『수채화 같은 피』, 『여름에 안겨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레지스탕스를 소재로 했다.

2001년 영화 『로열 테넨바움 패밀리』의 등장인물 마고 테넨바움(배우: 귀네스 팰트로)은 사강을 모델로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대담집 『사랑만큼이나 고독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 『돈은 현대 사회에서는 방어 수단이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수단입니다』
  • 『돈은 가지고 있는 측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지배해 버립니다』
  •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돈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간관계와 돈이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생활 태도입니다』
  • 『저는 사람이 가진 안정감이나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과도한 것이 있으면 쉴 수 있습니다』
  • 『저는 고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작은 드라마에 대해 자신을 조롱하고, 유머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머를 가지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1. 주제와 특징

프랑수아즈 사강은 중산층의 다소 평온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작 소설 『슬픔이여 안녕』은 1954년 18세 때 출판되었는데,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한 소녀를 그린 이 작품은 출판과 동시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일런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6년까지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교류가 깊었으며, 작품에는 실존주의의 영향이 보인다. 후반기, 사르트르 사후에 발표된 『수채화 같은 피』, 『여름에 안겨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레지스탕스를 소재로 했다.

2001년 영화 『로열 테넨바움 패밀리』의 등장인물 마고 테넨바움(배우: 귀네스 팰트로)은 사강을 모델로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대담집 『사랑만큼이나 고독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 『돈은 현대 사회에서는 방어 수단이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수단입니다』
  • 『돈은 가지고 있는 측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지배해 버립니다』
  •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돈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간관계와 돈이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생활 태도입니다』
  • 『저는 사람이 가진 안정감이나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과도한 것이 있으면 쉴 수 있습니다』
  • 『저는 고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작은 드라마에 대해 자신을 조롱하고, 유머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머를 가지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2. 주요 작품

프랑수아즈 사강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 (1954): 사강의 데뷔작으로, 이렌 애쉬(1955)와 헤더 로이드(2013)가 영어로 번역했다. 애쉬의 번역본은 원문에 삭제 및 수정이 있었으나, 로이드의 번역본은 검열되지 않았다.[16] 안도 지나오 (1954, 다비드사), 아사부키 도미코 (1955, 신초문고), 코노 마리코 (2009, 신초문고)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어떤 미소''' (1955): 앤 그린(1956, 미국 영어), 이렌 애쉬(1956, 영국 영어), 헤더 로이드(2013)가 영어로 번역했다. 애쉬의 번역본은 삭제 및 수정이 있었으나, 로이드의 번역본은 검열되지 않았다.[16] 아사부키 도미코 (1956,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한 달 후, 일 년 후''' (1957): 프랜시스 프레네이(1957, 미국 영어), 이렌 애쉬(1957, 영국 영어)가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58,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1959): 피터 와일즈(1960)가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60, 세계문학전집 신초사), 코노 마리코 (2024, 신초문고)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놀라운 구름들''' (1961): 앤 그린(1961)이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62,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샤마드(La Chamade)''' (1965): 로버트 웨스토프(1966), 더글러스 호프스태터(2009, '''미친 갈증''')가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67,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마음의 수호자''' (1968): 로버트 웨스토프(1968)가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69,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차가운 물 속의 약간의 햇살''' (1969): 조앤나 킬마틴(1971, '''차가운 물 위의 햇살''')이 영어로 번역했으며, 미국 영어판은 테렌스 킬마틴의 이름으로 '''몇 시간의 햇살'''(1971)로 출판되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70,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영혼의 상처들''' (1972): 조앤나 킬마틴(1974)이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73,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잃어버린 얼굴''' (1974): 조앤나 킬마틴(1976)이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75,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정돈되지 않은 침대''' (1977): 아비가일 이스라엘(1978)이 영어로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78, 신초사)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누워있는 개''' (1980): C. J. 리차즈(1984, '''샐러드 데이즈''')가 영어로 번역했다.
  • '''짙은 화장의 여자(La Femme fardée)''' (1981): 리 파네스톡(1983)이 영어로 번역했다. 요시다 아키코 (1983, 슈에이샤)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 '''고요한 폭풍''' (1983): 크리스틴 도너허(1984)가 영어로 번역했으며, 미국 영어판은 1986년에 출판되었다.
  • '''마음의 약혼''' (1985): 크리스틴 도너허(1987)가 영어로 번역했으며, 미국 영어판은 '''주저하는 영웅'''(1987)으로 출판되었다.
  • '''피로 그린 그림''' (1987): 안테아 벨(1991)이 영어로 번역했다.
  • '''목줄''' (1989): 크리스틴 도너허(1991)가 영어로 번역했다.
  • '''회피''' (1991): 엘프레다 파월(1993)이 영어로 번역했다.
  • '''덧없는 슬픔''' (1994): 리처드 시버(1995)가 영어로 번역했다.
  • '''길을 잃은 거울''' (1996)
  • '''마음의 네 모퉁이''' (2019): 소피 R. 루이스(2023)가 영어로 번역했다.
  • 『행복을 홀수에 걸고』 안도 신야 역 신초문고 1974년
  • 『풀 속의 피아노』 안도 신야 역 신초문고 1976년
  • 『때때로 바이올린이……』 안도 신야 역 신초문고 1976년
  • 『사랑은 먼 내일』 아사부키 도미코 역 신초사 1982년 4월 후에 문고
  • 『보르지아가의 황금 피』- ''Le Sang doré des Borgia'' (1977년) 와시미 요이치 역 신초사 1986년 1월 후에 문고
  • 『사랑 속의 한 사람』 아사부키 도미코 역 신초사 1986년 7월 후에 문고
  • 『여름에 안겨서』 아사부키 유키코 역 신초사 1988년 8월 후에 문고
  • 『사랑은 속박』 코노 마리코 역 신초사 1991년 9월 후에 문고
  • 『수채화 같은 피』 아사부키 유키코 역 신초사 1991년 3월 후에 문고
  • 『사랑을 찾아서』 아사부키 유키코 역 신초사 1997년 6월
  • 『탈출구』 코노 마리코 역 신초사 1997년 10월 후에 문고
  • 『짓밟힌 마음은』코노 마리코 역 카와데쇼보 신샤 2021년 11월

4. 한국과의 관계

5. 평가 및 영향

5. 1. 문학적 평가

5. 2. 사회적 영향

6. 작품 목록

6. 1. 소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초기 영어 번역본은 잦은 삭제와 수정이 있었으나, 이후 번역본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개선되었다.[16]

  • '''슬픔이여 안녕''' (1954): 이렌 애쉬의 초기 번역본은 사강의 원문을 일부 삭제하고 수정하였으나, 헤더 로이드의 2013년 번역본은 검열되지 않았다.[16] 일본어 번역으로는 안도 지나오 역(1954), 아사부키 도미코 역(1955), 코노 마리코 역(2009)이 있다.
  • '''어떤 미소''' (1955): 앤 그린(미국 영어, 1956), 이렌 애쉬(영국 영어, 1956), 헤더 로이드(2013)가 번역했다. 초기 번역본에는 삭제 및 수정이 있었으나, 로이드의 번역본은 검열되지 않았다.[16]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56)
  • '''한 달 후, 일 년 후''' (1957): 프랜시스 프레네이(미국 영어, 1957), 이렌 애쉬(영국 영어, 1957)가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58)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959): 피터 와일즈가 번역(1960)했다. 아사부키 도미코 (1960)와 코노 마리코 (2024)가 일본어로 번역했다.
  • '''놀라운 구름들''' (1961): 앤 그린이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62)
  • '''샤마드''' (1965): 로버트 웨스토프(1966), 더글러스 호프스태터(2009)가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67)
  • '''마음의 수호자''' (1968): 로버트 웨스토프가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69)
  • '''차가운 물 속의 약간의 햇살''' (1969): 조앤나 킬마틴이 번역했다. 미국 영어판은 테렌스 킬마틴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0)
  • '''영혼의 상처들''' (1972): 조앤나 킬마틴이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3)
  • '''잃어버린 얼굴''' (1974): 조앤나 킬마틴이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5)
  • '''정돈되지 않은 침대''' (1977): 아비가일 이스라엘이 번역했다.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8)
  • '''누워있는 개''' (1980): C. J. 리차즈가 번역했다.
  • '''짙은 화장의 여자''' (1981): 리 파네스톡이 번역했다. 요시다 아키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83)
  • '''고요한 폭풍''' (1983): 크리스틴 도너허가 번역했다.
  • '''마음의 약혼''' (1985): 크리스틴 도너허가 번역했다. 미국 영어판은 다른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피로 그린 그림''' (1987): 안테아 벨이 번역했다.
  • '''목줄''' (1989): 크리스틴 도너허가 번역했다.
  • '''회피''' (1991): 엘프레다 파월이 번역했다.
  • '''덧없는 슬픔''' (1994): 리처드 시버가 번역했다.
  • '''길을 잃은 거울''' (1996)
  • '''마음의 네 모퉁이''' (2019): 소피 R. 루이스가 번역했다.
  • 『행복을 홀수에 걸고』는 안도 신야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4)
  • 『풀 속의 피아노』는 안도 신야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6)
  • 『때때로 바이올린이……』는 안도 신야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76)
  • 『사랑은 먼 내일』는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82)
  • 『보르지아가의 황금 피』는 와시미 요이치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86)
  • 『사랑 속의 한 사람』는 아사부키 도미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86)
  • 『여름에 안겨서』는 아사부키 유키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88)
  • 『사랑은 속박』은 코노 마리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91)
  • 『수채화 같은 피』는 아사부키 유키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91)
  • 『사랑을 찾아서』는 아사부키 유키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97)
  • 『탈출구』는 코노 마리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1997)
  • 『짓밟힌 마음은』은 코노 마리코가 일본어로 번역했다.(2021)

6. 2. 단편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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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s yeux de soie'' (1975, 조앤나 킬마틴 번역, ''Silken Eyes'', 1977)
  • ''Musiques de scène'' (1981, C. J. 리차즈 번역, ''Incidental Music'', 1983)
  • ''La maison de Raquel Vega'' (1985)
  • 『絹の瞳』(Les Yeux de soie프랑스어) - 1975년
  • *朝吹登水子일본어 역, 신초사 1977년 3월, 후에 문고화
  • 『赤いワインに涙が…』 朝吹登水子일본어 역, 신초사 1983년 6월, 후에 문고화

6. 3. 희곡

프랑수아즈 사강은 여러 희곡 작품을 남겼다. 1960년에는 《샤토 앙 쇠드》(Château en Suède)를 발표했고, 1961년에는 《바이올린 때때로》(Les Violons parfois)를 발표했다. 1963년에는 《발렌틴의 보라색 드레스》(La Robe mauve de Valentine)를, 1964년에는 《행복, 홀수 그리고 지나간 것》(Bonheur, impair et passe)을 발표했다. 1966년에는 《가시》(L'Écharde)와 《사라진 말》(Le Cheval évanoui)을 발표했고, 1970년에는 《풀밭의 피아노》(Un piano dans l'herbe)를 발표했다. 1978년에는 《밤낮으로 날씨가 좋다》(Il fait beau jour et nuit)를 발표했다. 1987년에는 《반대의 과잉》(L'Excès contraire)을 발표했다.

《스웨덴의 성》은 이와세 다카시와 스즈키 코우지, 그리고 이와세 다카시와 안도 신야가 번역하여 출판했다. 《낮에도 밤에도 맑게》는 아사부키 도미코가 번역하여 출판했다. 《반대의 과잉》은 미셸 블랑이 연출했다.

6. 4. 발레

사강은 1958년에 《르 랑데부 마네》라는 발레 작품을 썼다.[17]

6. 5. 자전적 작품

프랑수아즈 사강은 여러 자전적 작품을 남겼다. 1964년에는 일기 형식의 《톡식》(Toxique)을 발표했고, 1975년에는 《답변》(Réponses)을 출간했다. 1984년에는 《따뜻한 추억과 함께》(Avec mon meilleur souvenir)를 출간했다. 1988년에는 1952년부터 1962년까지의 회고록인 《대리석 위에: 1952-1962년 회고록》(Sur le marbre: chroniques, 1952-1962)을 발표했다. 1992년에는 인터뷰집 《대답》(Répliques)을 출간했고, 1993년에는 《따뜻한 추억과 함께》의 속편인 《...그리고 나의 모든 동정심》(…Et toute ma sympathie)을 발표했다. 1998년에는 자서전 《어깨 너머로》(Derrière l'épaule)를 출간했다.

사후에는 엘른(L'Herne)에서 여러 작품이 출판되었다. 2007년에는 《봉주르 뉴욕》(Bonjour New York)이, 2008년에는 《답변》과 《대답》의 자료를 모은 《어떤 시선》(Un certain regard), 《빌린 집》(Maisons louées), 《자칼들의 향연》(Le régal des chacals), 《영화에서》(Au cinéma), 《아주 좋은 책들》(De très bons livres), 《검은색 미니 드레스》(La petite robe noire), 《스위스 편지》(Lettres de Suisse) 등이 출간되었다.

『나를 위한 다정한 회상』(Avec mon meilleur souvenir)은 아사부키 사미키치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어 신초사에서 1986년 12월에 출간되었고, 1995년 신초문고로 재출간되었다.

6. 6.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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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의 전기에 관한 책으로는 마리-도미니크 르리에브르(Marie-Dominique Lelièvre)가 쓴 『사강, 질주하는 삶』(Sagan à toute allure)이 2008년 파리의 드노엘(Denoë)에서 출판되었고, 2009년 永田千奈에 의해 번역되어 CCC미디어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사강은 브리짓 바르도(1975)와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전기를 썼는데, 사라 베르나르의 전기는 사빈 드스트레에 의해 1988년 ''사랑하는 사라 베르나르''로 번역, 출간되었다.

6. 7. 영화 각본

프랑수아즈 사강은 영화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1963년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랑드뤼》(프랑스어: Landru) 각본을 썼다. VHS판 제목은 《푸른 수염》이다. 1970년에는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오르겔 백작의 무도회》(프랑스어: Le Bal du Comte d'Orgel) 각본을 썼는데, 레이몽 라디게의 소설 《오르겔 백작의 무도회》가 원작이다. 1968년에는 알랭 카발리에 감독의 영화 《별리》에 참여했는데, 이는 사강의 작품 '뜨거운 사랑'을 각색한 것이다.

1974년에는 단편 영화 "다시 한겨울"(Encore un hiver)을 감독했다. 1977년에는 알랭 드노 감독의 TV 영화 Les Borgia ou le Sang doré의 극본을 자크 코와레와 공동 집필했는데, 에티엔 드 몽페자의 저술이 원작이다. 같은 해, 사강은 자신의 단편 '비단 눈'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푸른 고사리》를 감독했다.

참조

[1] 웹사이트 FRANÇOISE SAGAN: LIFE OF EXCESS AND LITERATURE https://www.afsf.com[...] Alliance Francaise de San Francisco 2024-09-24
[2] 뉴스 ''Paris Match'' 2889 Paris Match 2004-09-29
[3] 웹사이트 SAGAN Francoise, photo, biography http://persona.rin.r[...] 2018-04-13
[4] 웹사이트 Fransuaza Sagan - Women http://the100.ru/en/[...] 2018-04-13
[5] 서적 Sagan, Paris 1954 https://books.google[...] Gallic Books, Limited 2015-06-15
[6] 서적 Stardom in Postwar France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7] 논문 Review: Réponses 1954-1974 by Françoise Sagan https://www.jstor.or[...] 2024-09-24
[8] 논문 Do you like Flounder? A talk with Françoise Sagan https://www.jstor.or[...]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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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Bonjour Tristesse and A Certain Smile Penguin 2013
[17] 잡지 Francoise Sagan's Ballet Promising Though Everything Wrong at Break-In https://archive.org/[...] 2021-10-20
[18] 뉴스 2004-09-29
[19] 서적 Sagan, Paris 1954 https://books.google[...] Gallic Books, Limited 2015-06-15
[20] 웹사이트 Bienvenue sur le site de Jean-Luc Delblat http://delblat.free.[...] 2019-02-07
[21] 서적 Sagan à toute allure Denoël
[22] 웹사이트 厚化粧の女のストーリーや出演者 https://www.weblio.j[...] Weblio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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