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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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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은 프랑스 혈통을 가진 아르헨티나 시민 또는 거주자를 의미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아르헨티나 사회, 문화, 예술, 과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이민은 세 차례의 주요 시기를 거쳤으며, 출신 지역은 프랑스 남서부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 아르헨티나 인구의 일부는 프랑스계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는 프랑스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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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정보
아르헨티나 국기
아르헨티나 국기
프랑스 국기
프랑스 국기
기본 정보
민족명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원어명프랑스어: Franco-Argentin
바스크어: Franko-argentinarrak
스페인어: Franco-argentino
인구
출생 기준9,953명 (2023년)
혈통 기준약 8,000,000명 (아르헨티나 인구의 약 17%)
거주 지역
주요 거주지아르헨티나 전역 (주로 팜파스 지역)
언어
주요 언어스페인어
소수 언어프랑스어
오크어
바스크어
종교
주요 종교로마 가톨릭교
소수 종교무종교
관련 민족
관련 민족프랑스인
프랑스계 미국인
프랑스계 브라질인
프랑스계 우루과이인

2. 프랑스의 아르헨티나 이민

19세기 전반기, 대부분의 프랑스 이민자들은 미국우루과이에 정착했다. 1852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된 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1857년부터 1946년까지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정착했다.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세 가지 주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1890년 이전: 이탈리아인스페인인에 이어 프랑스가 세 번째로 많은 이민자를 보낸 국가였으며, 이민자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1854년까지 프랑스인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그룹을 형성하기도 했다.[9]
  • 1890년 ~ 1914년: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의 유입은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50년대에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는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드누아르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의 마지막 대규모 이주였다.


프랑스 이민은 18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의 5%를 차지했고, 1870년대~1880년대에 최대치(이민자의 약 12%)에 달했으며, 20세기 말에는 4%로 감소했다. 이는 1890년 금융 위기와 프랑스의 인구 변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1914년 아르헨티나 인구 조사에 따른 아르헨티나 지역별 프랑스 이민자 비율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의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특히 바스크 지방, 베른(바스 피레네) (이민자의 20% 이상), 빅고르, 루에르그 출신이었다. 다른 중요한 그룹은 사보이와 파리 지역 출신이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코르도바, 멘도사, 투쿠만 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1895년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인의 37.3%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35.2%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10.9%가 산타페 주에, 5.1%가 엔트레리오스 주에 거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는 주로 탄딜과 아술 파르티도를 연결하는 선의 남쪽에 정착했으며, 특히 피궤 마을에서 그들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2. 1. 이민의 역사

19세기 전반기, 대부분의 프랑스 이민자들은 미국우루과이에 정착했다. 1852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된 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1857년부터 1946년까지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1890년 이전: 이탈리아인스페인인에 이어 프랑스가 세 번째로 많은 이민자를 보낸 국가였으며, 이민자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1854년까지 프랑스인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그룹을 형성하기도 했다.[9]
  • 1890년 ~ 1914년: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의 유입은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50년대에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는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드누아르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의 마지막 대규모 이주였다.


프랑스 이민은 18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의 5%를 차지했고, 1870년대~1880년대에 최대치(이민자의 약 12%)에 달했으며, 20세기 말에는 4%로 감소했다. 이는 1890년 금융 위기와 프랑스의 인구 변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의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특히 바스크 지방, 베른(바스 피레네) (이민자의 20% 이상), 빅고르, 루에르그 출신이었다. 다른 중요한 그룹은 사보이와 파리 지역 출신이었다.

2. 1. 1. 초기 이민 (19세기 초)

19세기 초,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많지 않았다. 주로 정치 망명자와 제국군 장교들이었으며, 1825년부터 이민이 증가하여 어떤 해에는 최대 1,500~2,000명의 프랑스 이민자가 유입되었다.[7] 183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Buenos Aires province)에는 4,000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이 수치는 1842년에 12,000명으로 증가했다.[8]

19세기 전반기에는 대부분의 프랑스 이민자들이 미국과 우루과이에 정착했다. 1820년부터 1855년까지 미국은 195,971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지만, 1833년부터 1842년까지 바스크 지방과 베른(Béarn) 출신의 프랑스인 13,922명만이 우루과이로 이주했다. 이 기간 동안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South America)로 이주한 프랑스 이민자의 대부분을 받아들였는데,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프랑스 정부 간의 갈등으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1852년 로사스가 축출된 후,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를 제치고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지가 되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3명의 프랑스 시민을 포함하여 28,528명의 주민이 거주했다.[6]

2. 1. 2. 주요 이민 시기 (19세기 중반 ~ 20세기 초)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4] 1857년부터 194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했다.[14]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14]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세 가지 주요 시기로 나눌 수 있다.[14]

  • 1890년 이전: 이탈리아인스페인인에 이어 프랑스가 세 번째로 많은 이민자를 보낸 국가였으며, 이민자의 10% 이상을 차지했다.[14]
  • 1890년 ~ 1914년: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수준이었다.[14]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의 유입은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50년대에 최종적으로 중단되었다.[14]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3명의 프랑스 시민을 포함하여 28,528명의 주민이 거주했다.[6] 19세기 초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주로 정치 망명자와 제국군 장교들로 구성되어 많지 않았지만,[7] 1825년부터 증가하여 어떤 해에는 최대 1,500~2,000명의 프랑스 이민자가 유입되기도 했다.[7] 183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는 4,000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1842년에는 12,000명으로 증가했다.[8] 그 후 10년 동안 프랑스인들은 대규모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8]

1852년~1890년(첫 번째 기간) 동안 프랑스 이민은 규모와 특징 면에서 이탈리아인스페인인의 이민과 유사했다.[9] 이는 피레네 산맥 양쪽에서 온 바스크인의 더 큰 이주 운동의 일부였다.[9] 1854년까지 프랑스인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그룹을 형성했다.[9] 1856년 아르헨티나는 1,484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0] 프랑스인은 이탈리아인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이민자 그룹이었다.[11] 18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거주하는 프랑스 이민자 수는 25,000명에 달했다.[11] 1861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14,180명이 거주하는 등 아르헨티나에 29,196명의 프랑스인이 등록되었는데, 이들은 세 번째로 큰 외국인 공동체를 형성했고 인구의 7.5%를 차지했다.[12] 1869년 첫 번째 전국 인구 조사 당시 32,383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7%에 해당했다.[15] 1870년대 전반기(1873년 정점)와 1890년대 후반기(3년 동안 61,382명의 이민자)에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급격히 증가했다.[15] 1888년부터 1890년까지 아르헨티나 정부는 증가하는 이탈리아 이민의 중요성을 줄이기 위해 유럽에 132,000장의 무료 여행 티켓을 배포했고, 그중 45,000장이 프랑스에 제공되었다.[15] 188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433,421명의 주민 중 20,031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했는데, 이는 4.6%에 해당한다.[13]

1890년~1914년(두 번째 단계) 동안 프랑스 이민은 독일인과 영국인의 이민과 유사했으며, 순이동률이 감소하는 특징을 보였다.[15] 1911년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 금지로 인한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프랑스 남부에서 진행한 선전의 결과, 1912년에 이민이 증가한 경우를 제외한다.[15] 1895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 이민자의 가장 큰 물결 이후, 프랑스 이민자는 94,098명으로 전체 인구의 2.3%에 해당했다. (그중 33,185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거주, 세 번째로 큰 외국인 공동체를 형성, 인구의 4.9% 차지).[15] 당시 미국보다 더 많은 프랑스 이민자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있었다.[14] 20세기 초 프랑스에서의 이민이 감소하고 기존 이민자들이 인구와 융합되면서 수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14] 1912년 아르헨티나에는 10만 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는 14만 9,400명의 프랑스인의 67%이며 미국(12만 5,000명)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체였다.[14] 1914년에는 79,491명의 프랑스인이 등록되었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인구의 1%에 해당한다.[15] 1895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이민자는 아르헨티나에서 전체 인구에서 수치(절대치와 상대치 모두)가 감소한 유일한 외국인 그룹이다.[15]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입이 급격히 감소했다.[15] 1918년 이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프랑스 이민자 수는 연간 1,500명이었고 순이동률은 약간 양수였다.[15] 그 후 프랑스 이민자의 유입은 점차 줄어들었다.[15] 1960년대에는 새로 독립한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드누아르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의 마지막 대규모 이주를 구성했다.[15]

2. 1. 3. 이민 감소와 변화 (20세기 후반 ~ 현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4] 1857년부터 1946년까지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 유입은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했다가 1950년대에 최종적으로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는 새로 독립한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드누아르(Pieds-Noirs)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의 마지막 대규모 이주를 구성했다.

프랑스 이민은 18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의 5%를 차지했고, 1870년대~1880년대에 최대치(이민자의 약 12%)에 달했다. 20세기 말에는 4%로 감소했으며, 1920년대에는 이민자의 1%만을 차지했다.[15] 1890년은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 감소를 보여주는 시점으로, 아르헨티나로의 대규모 이민 현상이 시작된 때이다. 이는 1890년 금융 위기와 프랑스의 조기 인구 변화 때문으로 추정된다.[15] 1890년부터 1913년까지 인구 증가가 느려, 이웃 유럽 국가와 달리 이민의 필요성이 제한되었다.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의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특히 바스크 지방, 베른(Béarn)(바스 피레네(Basses-Pyrénées)는 이민자의 20% 이상을 차지함), 빅고르(Bigorre) 및 루에르그(Rouergue) 출신이었다. 다른 중요한 그룹은 사보이(Savoy)와 파리(Paris) 지역 출신이었다.[15]

오늘날 아르헨티나인의 최대 17%가 부분적으로 프랑스계 혈통을 가진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 엘리트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16] 19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의 7%가 프랑스계 배경을 가진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그들의 조상은 1840년부터 1880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16]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거의 15,000명의 프랑스 시민[17]이 거주하고 있으며, 공동체는 더 클 수도 있다.

2. 2.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4] 1857년부터 194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14] 1976년까지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코르도바, 멘도사, 투쿠만 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1895년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인의 37.3%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35.2%가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시에, 10.9%가 산타페에, 5.1%가 엔트레리오스에 거주했다.[14] 부에노스아이레스 주(Buenos Aires province)에서는 주로 탄딜과 아술 파르티도를 연결하는 선의 남쪽에 정착했으며, 특히 피궤(Pigüé) 마을에서 그들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의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특히 바스크 지방, 베른(Béarn)(바스피레네) (이민자의 20% 이상), 빅고르(Bigorre), 루에르그(Rouergue) 출신이었다.[14] 다른 중요한 그룹은 사보이(Savoy)와 파리(Paris) 지역 출신이었다.[14] 탄딜(Tandil)의 프랑스 이민자 중 적어도 70%가 프랑스 남서부 출신이고 그중 절반이 바스크 출신이라고 추산되었다.[14] 188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프랑스 이민자의 대다수는 피레네 산맥(Pyrenees) 출신이었다.[14]

2. 3. 아르헨티나 내 프랑스인 정착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4] 1857년부터 1946년까지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했다.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산타페 주, 엔트레리오스 주, 코르도바 주, 멘도사 주, 투쿠만 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1895년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인의 37.3%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35.2%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10.9%가 산타페 주에, 5.1%가 엔트레리오스 주에 거주했다.[19]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는 주로 탄딜과 아술 파르티도를 연결하는 선의 남쪽에 정착했으며, 특히 피궤 마을에서 그들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알레호 페이레는 베른 출신 이민자로 1857년 엔트레리오스 주 산호세에 최초의 농업 식민지를 건설했다. 1864년, 산호세에 거주하는 380가구 중 125가구가 사보이 출신이었다.[18]

오크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이민자 165명은 1884년 루에르그 출신으로 피궤 마을을 건설했는데, 이곳은 아르헨티나에서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진다.[19] 피궤 현대 주민의 30%~40%가 아베롱을 기원으로 삼고 있으며 여전히 오크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86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멘도사 주 이민자의 4분의 1이 프랑스 출신이었다. 1895년에는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각각 26.1%와 17.3%)에 이어 15%를 차지했다. 프랑스인들은 특히 마이푸, 루한의 포도주 생산 지역과 엔지니어 훌리오 헤로니모 발로페트(Julio Gerónimo Balloffet)가 건설한 프랑스 식민지 산라파엘에 많았다.[20]

1904년, 투쿠만 주 주지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 빌라 누게스를 건설했는데, 이는 그의 가족이 뿌리를 둔 프랑스 마을 오트가론 주의 부(Boutx)를 본떠 만든 것이다.

빌라 누게스의 예배당

2. 3. 1. 주요 정착촌

제공된 소스는 '주요 정착촌' 섹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아르헨티나 속어(Lunfardo) 목록은 '어원' 또는 '프랑스어의 영향'과 같은 별도 섹션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현재 주어진 소스와 제목, 섹션 제목으로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3. 아르헨티나 사회에 미친 영향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1년 루이 타르디 드 몽트라벨 대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문학과 언어가 널리 퍼져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선호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프랑스인과 아르헨티나인의 비슷한 성격, 즉 가벼움, 재치, 활기, 외국인에 대한 친절함,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보았다.[28] 19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의 7%가 1840년에서 1880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계 조상을 가진 것으로 추산되었다.[16]

3. 1. 문화 및 예술

프랑스 이민은 아르헨티나의 예술, 문화, 과학과 사회에 두드러진 영향을 남겼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코르도바와 같은 도시의 많은 상징적인 건물들은 프랑스의 보자르과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는데,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대성당 또는 중앙은행 건물 등이 그 예이다. 조경 건축가 카를로스 타이스는 1891년 공원 및 산책로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식물원을 조성하고, 도시에 많은 공원과 광장을 만들었는데, 이는 때때로 파리의 유사한 설계와 비교되기도 한다.[28]

국립은행 건물 (부에노스아이레스)


예술 분야에 대한 중요한 기여로는 아르헨티나 영화의 개척자로 여겨지는 외젠 피의 작품과 폴 그루삭이나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같은 작가들이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발한 것을 들 수 있다.

3. 2. 과학

과학 분야에서는 아르헨티나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이 프랑스계였다. 1947년 의학상 수상자인 베르나르도 우사이와 1970년 화학상 수상자인 루이스 페데리코 렐로이르이다.

3. 3. 정치

최고 지도자였던 후안 마르틴 데 푸에이레돈[21]과 호세 론도[22], 대통령 카를로스 펠레그리니[23]이폴리토 이리고옌[24]은 프랑스인 아버지를 두었다. 후안 페론[25]을 포함한 여러 국가 원수들도 프랑스계였으며, 사실상의 군사 대통령인 알레한드로 라누세[26], 카를로스 라코스트, 알프레도 생장도 포함된다. 전 영부인 에바 페론 또한 프랑스계였다.[27]

4.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1940년경 바히아 블랑카의 프랑스 이민자들


탱고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알려진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카를로스 가르델


오베라, 미시오네스주에서 열린 제34회 이민자 축제의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여왕


19세기 전반기, 대부분의 프랑스 이민자들은 미국우루과이에 정착했다. 1820년부터 1855년까지 미국은 195,971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고, 1833년부터 1842년까지 바스크베아른 출신 프랑스인 13,922명이 우루과이로 이주했다. 이 시기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로 이주한 프랑스 이민자 대부분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프랑스 정부 간 갈등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1852년 로사스 축출 이후,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를 제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1857년부터 1946년까지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세 가지 주요 시기로 구분된다.

  • 1890년 이전: 아르헨티나 이민자 중 프랑스 출신이 세 번째로 많았으며, 이탈리아인스페인인 다음으로 10% 이상을 차지했다.
  • 1890년~1914년: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수준이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 유입이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했다가 1950년대에 중단되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3명의 프랑스 시민을 포함하여 28,528명의 주민이 거주했다.[6] 19세기 초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주로 정치 망명자와 제국군 장교들로 구성되어 크지 않았으나, 1825년부터 증가하여 연간 최대 1,500~2,000명의 프랑스 이민자가 유입되기도 했다.[7] 183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는 4,000명의 프랑스인이, 1842년에는 12,000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8] 이후 프랑스인들은 대규모로 아르헨티나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1852년부터 1890년까지의 첫 번째 기간 동안, 프랑스 이민은 규모와 특징 면에서 이탈리아인, 스페인인의 이민과 유사했으며, 피레네산맥 양쪽에서 온 바스크인의 더 큰 이주 운동의 일부였다. 1854년까지 프랑스인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그룹이었다.[9] 1856년 아르헨티나는 1,484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10] 프랑스인은 이탈리아인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이민자 그룹이었다. 18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거주하는 프랑스 이민자는 25,000명에 달했다.[11] 1861년 아르헨티나에는 29,196명의 프랑스인이 등록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는 14,180명이 거주하며 세 번째로 큰 외국인 공동체를 형성, 인구의 7.5%를 차지했다.[12] 1869년 첫 전국 인구 조사 당시 32,383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여 전체 인구의 약 1.7%를 차지했다.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1870년대 전반(1873년 정점)과 1890년대 후반(3년간 61,382명)에 급격히 증가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 아르헨티나 정부는 증가하는 이탈리아 이민의 중요성을 줄이기 위해 유럽에 132,000장의 무료 여행 티켓을 배포했고, 그중 45,000장이 프랑스에 제공되었다. 188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433,421명의 주민 중 20,031명의 프랑스인(4.6%)이 거주했다.[13]

1890년부터 1914년까지의 두 번째 단계에서 프랑스 이민은 독일인과 영국인 이민과 유사하게 순이동률이 감소하는 특징을 보였다. 1911년 이탈리아의 아르헨티나 이민 금지로 인한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남부 프랑스에서 선전을 진행, 1912년 이민이 증가하기도 했다. 1895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 이민자는 94,098명으로 전체 인구의 2.3%였다(부에노스아이레스 시 33,185명, 세 번째로 큰 외국인 공동체, 인구의 4.9%). 이는 미국보다 많은 수치였다. 20세기 초 프랑스 이민 감소와 기존 이민자들의 동화로 인해 수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12년 아르헨티나에는 10만 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 거주 프랑스인 149,400명의 67%이며, 미국(125,000명)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체였다.[14] 1914년에는 79,491명의 프랑스인이 등록되어 아르헨티나 인구의 1%였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이민자는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에서 수치(절대치, 상대치)가 감소한 유일한 외국인 그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이민 유입은 급격히 감소했다. 1918년 이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프랑스 이민자는 연간 1,500명 수준이었고 순이동률은 약간 양수였다. 이후 프랑스 이민자 유입은 점차 줄었다. 1960년대에는 새로 독립한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에 누아르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의 마지막 대규모 이주였다.

프랑스 이민은 18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 이민자의 5%, 1870년대~1880년대에 최대치(약 12%)를 기록했고, 20세기 말에는 4%, 1920년대에는 1%로 감소했다. 1890년(이민자의 22%)은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 감소 시점으로, 대규모 이민 현상이 시작된 때이다. 이는 1890년 금융 위기와 프랑스의 조기 인구 변화 때문일 수 있다. 1890년부터 1913년까지 프랑스는 인구 증가가 느려 이웃 유럽 국가와 달리 이민 필요성이 제한적이었다. 아르헨티나 이민도 1890년대에 변화를 보였다. 1860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 시골 출신 이민자 대부분이 시골에 정착했으나, 1890년부터 1930년까지는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5] 이는 대부분 시골 출신인 프랑스 이민자가 1890년 이후 토지 소유가 더 쉬운 북아메리카에 정착하는 데 더 끌렸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특히 바스크, 베아른(바스피레네는 이민자의 20% 이상), 비고르, 루에르그 출신이었다. 사부아파리 지역 출신도 중요한 그룹이었다. 탕딜 프랑스 이민자 중 적어도 70%가 프랑스 남서부 출신이고 절반이 바스크 출신으로 추산되었다. 1880년대까지 아르헨티나 이민자 대다수는 피레네산맥 출신이었다. 바스크인들은 1830년대 아르헨티나에 정착, 1870년대 칠레미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인의 최대 17%가 부분적으로 프랑스계 혈통을 가진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 엘리트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 19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 7%가 프랑스계였으며, 그 조상들은 1840년에서 1880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16]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은 전국에 분포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산타페주, 엔트레리오스주, 코르도바, 멘도사주, 투쿠만주에 가장 많이 거주한다. 1895년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착 프랑스인의 37.3%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35.2%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10.9%가 산타페주, 5.1%가 엔트레리오스주에 거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는 주로 탄딜과 아술 파르티도를 연결하는 선 남쪽에 정착했으며, 피궤 마을에서 그 존재가 두드러졌다.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거의 15,000명의 프랑스 시민[17]이 거주하고 있으며, 실제 공동체는 더 클 수 있다.

5. 아르헨티나 내 프랑스 지명


  • 앙헬 에체베리(Ángel Etcheverry): 프랑스계 바스크인 출신 주 공공사업부 장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 벨록(Bellocq): 마을 건설을 위해 토지를 기증한 벨록 가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베르디에(Berdier): 과거 토지 소유주였던 베르디에 가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보르데나브(Bordenave)
  • 불로뉴 쉬르 메르(Boulogne Sur Mer): 산마르틴 장군이 사망한 프랑스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카드레(Cadret): 카드레 가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카를로스 베구에리(Carlos Beguerie)
  • 다이로(Daireaux): 과거 토지 소유주였던 에밀리오 다이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도르비니(D'Orbigny):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알시드 도르비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두디냐크(Dudignac): 과거 토지 소유주였던 에세키엘 두디냐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뒤포르(Dufaur)
  • 가르데이(Gardey): 베아르네 출신의 후안 가르데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그랑 부르(Grand Bourg):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의 지도자였던 산마르틴 장군이 망명 생활을 했던 프랑스의 그랑 부르 마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현재는 에브리의 한 지역임).
  • 그레고리오 데 라페레레(Gregorio de Laferrère, Buenos Aires)
  • 인헤니에로 아돌포 소르도(Ingeniero Adolfo Sourdeaux): 도시의 설립자인 아돌포 소르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후안 쿠스테(Juan Cousté)
  • 라누스(Lanús): 과거 토지 소유주였던 아나카르시스 라누스(Anacarsis Lanú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라플라세트(Laplacette): 마을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엔리케 라플라세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라르티고(Lartigau)
  • 롱샹(Longchamps, Buenos Aires): 파리의 롱샹 경마장(Longchamp Racecourse)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마누엘 B. 고네(Manuel B. Gonnet):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초대 공공사업부 장관인 마누엘 베르나르도 고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파스퇴르(Pasteur)
  • 퐁토(Pontaut)
  • 푸에블로 구앵(Pueblo Gouin)
  • 링겔레(Ringuelet)
  • 산 프란시스코 데 벨록(San Francisco de Bellocq)
  • 세비녜(Sevigné)
  • 솔라네(Solanet)
  • 수리그(Sourigues)
  • 우다키올라(Udaquiola)
  • 빌라 알프레도 포르타바트(Villa Alfredo Fortabat)
  • 빌라 보르데우(Villa Bordeu)
  • 빌라 두르쿠도이(디에시시에테 데 아고스토)(Villa Durcudoy (Diecisiete de Agosto))
  • 빌라 푸르니에(Villa Fournier)
  • 빌라 프랑시아(Villa Francia)
  • 빌라 사보이아(Villa Saboya): 사보이(Savoy) 출신 이민자 마누엘 카드레가 설립한 식민지.
  • 빌라 소즈(Villa Sauze)

6. 이민 통계

19세기 전반기에 대부분의 프랑스 이민자들은 미국우루과이에 정착했다. 1852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된 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아르헨티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1857년부터 194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239,503명의 프랑스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105,537명이 영구 정착했다. 1976년까지는 116,032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아르헨티나로의 프랑스 이민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1890년 이전: 프랑스는 이탈리아스페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이민자 원산지였다.
  • 1890년~1914년: 프랑스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이민자의 유입은 최소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50년대에 중단되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3명의 프랑스 시민을 포함하여 28,528명의 주민이 거주했다.[6] 1839년에는 4,000명, 1842년에는 12,000명의 프랑스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거주했다.[8] 1859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거주하는 프랑스 이민자 수가 25,000명에 달했다.[11]

1869년 첫 번째 전국 인구 조사 당시 32,383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7%였다. 1895년에는 94,098명의 프랑스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2.3%였다. 1914년에는 79,491명의 프랑스인이 등록되어 아르헨티나 인구의 1%를 차지했다.

1960년대에는 새로 독립한 알제리에서 약 4,000명의 피드누아르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프랑스 이민은 18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의 5%를 차지했고, 1870년대~1880년대에 최대치(약 12%)에 달했으며, 20세기 말에는 4%로 감소했다.

20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이민자의 절반은 프랑스 남서부 출신이었다. 탄딜의 프랑스 이민자 중 적어도 70%가 프랑스 남서부 출신이고 그중 절반이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다.

1895년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프랑스인의 37.3%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35.2%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10.9%가 산타페 주에, 5.1%가 엔트레리오스 주에 거주했다.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거의 15,000명의 프랑스 시민[17]이 거주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Datos sociodemográficos por país de nacimiento https://estadisticas[...] 2023-11-15
[2] 웹사이트 Les merveilleux francophiles argentins 1 http://www.canalacad[...]
[3] 논문 Plus d'un siècle d'immigration internationale en Argentine http://www.persee.fr[...]
[4] 웹사이트 Inmigración francesa al Río de la Plata http://genfrancesa.a[...]
[5] 웹사이트 Canal Académie: Les merveilleux francophiles argentins–1 http://www.canalacad[...]
[6] 논문 Les débuts de l'immigration allemande en Argentine http://www.persee.fr[...]
[7] 서적 Une ambition sud-américaine. Politique culturelle de la France (1914-1940) L'Harmattan
[8] 서적 Possible paradises: Basque emigration to Latin America https://books.google[...]
[9] 웹사이트 Franceses e ingleses: una inmigración influyente http://es.argentina-[...] 2010-02-20
[10] 서적 Dictionnaire universel théorique et pratique du commerce et de la navigation https://books.google[...]
[11] 서적 Histoire de l'émigration européenne, asiatique et africaine au XIXe siècle https://books.google[...]
[12] 서적 Les exclus de la terre en France et au Québec, XVIIe-XXe siècles https://books.google[...]
[13] 서적 Historia social argentina en documentos https://books.google[...]
[14] 서적 L'Amérique latine et l'Europe à l'heure de la mondialisation https://books.google[...] 2002-01-01
[15] 서적 Las inversiones francesas en la Argentina, 1880-1920 https://books.google[...]
[16] 서적 Fazer a América https://books.google[...]
[17] 웹사이트 Maisons des Français de l'étranger http://www.mfe.org/i[...]
[18] 서적 La République Argentine
[19] 웹사이트 El mes de Francia en la ciudad de Pigüé http://www.embafranc[...] 2009-01-11
[20] 웹사이트 L'émigration française viticole à Mendoza, en Argentine à la fin du XIXème siècle http://www.msha.fr/c[...] 2009-03-28
[21] 웹사이트 Juan Martín Mariano Pueyrredón O'Doggan https://www.geni.com[...]
[22] 웹사이트 José Casimiro Rondeau Pereyra https://www.geni.com[...]
[23] 웹사이트 Carlos "Gringo" Pellegrini Bevans, Presidente de Argentina https://www.geni.com[...]
[24] 웹사이트 Hipólito Yrigoyen Alem, Presidente de Argentina https://www.geni.com[...]
[25] 웹사이트 Gral. Juan Domingo Perón Sosa, Presidente de Argentina https://www.geni.com[...]
[26] 웹사이트 General Alejandro Agustín Lanusse https://www.geni.com[...]
[27] 웹사이트 María Eva Duarte Ibarguren https://www.geni.com[...]
[28] 서적 Le Correspondant, volume 48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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