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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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아나 2세는 1312년에 태어났으며, 나바라의 루이 10세와 부르고뉴의 마르가레트의 딸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혼외정사 의혹으로 적통성 논란에 휩싸였으나, 아버지 루이 10세는 사망 직전 호아나를 자신의 적법한 딸로 인정했다. 루이 10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로 프랑스 왕위에서 제외되었지만, 1328년 나바라 총회에서 나바라의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받아 나바라 여왕으로 즉위했다. 호아나는 남편 에브뢰 백작 필리프와 공동 통치했으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샹파뉴와 브리 지역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나바라 왕위를 확립했다. 그녀는 내정과 외교에 힘썼으며, 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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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나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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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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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나바라 여왕 |
재위 기간 | 1328년 4월 1일 – 1349년 10월 6일 |
대관식 | 1329년 3월 5일 (팜플로나) |
선임 군주 | 샤를 1세 |
후임 군주 | 카를로스 2세 |
섭정 | 펠리페 3세 (1328–1343) |
섭정 유형 | 공동 군주 |
배우자 | 필리프 데브뢰 (1318년 결혼, 1343년 사망) |
자녀 | 호아나 데 나바라 마리아, 아라곤 왕비 블랑카, 프랑스 왕비 카를로스 2세, 나바라 왕 필리프, 롱그빌 백작 아녜스, 푸아 백작 부인 루이, 두라초 공작 |
가문 | 카페 왕조 |
아버지 | 루이 10세, 프랑스 왕 (루이 1세, 나바라 왕)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
출생일 | 1312년 1월 28일 |
사망일 | 1349년 10월 6일 |
사망 장소 | 나바라 |
2. 출생과 혈통 논란
호아나는 1312년 나바라의 루이 왕과 부르고뉴의 마르가레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2]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나바라의 후아나 1세의 맏아들이었다.[6]
1314년, 호아나의 어머니 마르가레트는 네슬 탑 사건에 연루되어 간통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호아나 출생 시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호아나의 적통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4]
1314년 필리프 4세가 사망하고, 호아나의 아버지 루이 10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다.[5] 루이 10세는 임종 시에 호아나를 자신의 적법한 딸이라고 선언했으나,[4] 1316년 루이 10세와 그의 아들 장 1세가 사망한 후 호아나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2. 1. 네슬 탑 사건
루이 10세와 부르고뉴의 마르가레트의 딸 호아나는 1312년에 태어났다.[1][2] 1314년, 호아나의 어머니 마르가레트와 후아나, 부르고뉴의 블랑슈는 필리프와 발터 오네 형제와 간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3] 고문 후, 형제 중 한 명은 자신이 마르가레트와 블랑슈의 3년 동안 연인이었다고 자백했다.[3] 오네 형제는 곧 처형되었고, 마르가레트와 블랑슈는 투옥되었다.[3] 네슬 탑 사건 이후, 호아나의 어머니가 호아나가 태어난 해 즈음에 혼외 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호아나의 적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4]1314년 11월 26일, 필리프 4세가 사망하면서 호아나의 아버지 루이 10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다.[5] 마르가레트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지만, 석방되지 못했고 샤토 가야르 감옥에서 사망했다.[3] 루이 10세는 임종 시에 호아나가 자신의 적법한 딸이라고 말했다.[4]
2. 2.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1316년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사후에 태어난 아들 장 1세가 며칠 만에 사망했다. 그러나 호아나는 루이 10세의 딸인지 의문이 제기되었고, 살리카법을 근거로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숙부인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1317년 삼부회(프랑스 귀족들의 회의)는 여성이 프랑스 왕위를 상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필리프 5세의 입지를 강화했다. 필리프 5세는 호아나에게 샹파뉴와 브리를 넘겨주는 것 또한 거부했다.
호아나의 외할머니 부르고뉴 공작 부인 아그네스는 프랑스 유력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필리프 5세의 대관식에 항의했지만, 필리프 5세는 반대 없이 왕위에 올랐다.
1318년 3월 27일, 필리프 5세와 호아나의 외삼촌 오도 4세는 합의를 맺었다. 필리프 5세는 자신의 장녀 조안을 오도와 결혼시켜 부르고뉴와 아르투아의 상속자로 인정했다. 호아나는 사촌 에브뢰의 필리프와 결혼하여 연금 15,000 리브르 투르누아와 필리프 5세가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샹파뉴와 브리를 상속받을 권리를 받기로 했다. 또한 이들은 호아나가 열두 살이 되면 프랑스와 나바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호아나와 필리프의 결혼식은 1318년 6월 18일에 거행되었다.
필리프 5세는 1322년 초 아들 없이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샤를 4세가 프랑스와 나바라 왕위를 계승했다. 샤를 4세는 1328년 2월 1일에 사망하여 또 다른 계승 위기를 촉발했다. 샤를 4세의 미망인 에브뢰의 잔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섭정 선출을 위해 파리에 모였다. 프랑스 귀족 대다수는 발루아의 필리프가 사망한 왕의 가장 가까운 부계 친척이었기 때문에 섭정 직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샤를 4세의 미망인은 4월 1일에 딸 블랑슈를 낳았다. 이로써 카페 왕조의 직계 남성 계보는 단절되었다. 발루아의 필리프는 5월 29일 랭스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나바라의 잔 1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바라, 샹파뉴, 브리에 대한 주장이 없었다. 필리프 6세는 자신의 프랑스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잔과 그녀의 남편이 나바라를 통치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는 또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샹파뉴와 브리를 프랑스 왕실을 위해 보존하기 위해 그들에게 롱그빌, 모르탱, 앙굴렘 백작령과 교환하여 샹파뉴와 브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3. 나바라 여왕 즉위
1328년 5월 나바라 총회는 호아나 2세를 나바라의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했다. 이는 나바라의 호아나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나바라와 프랑스의 동군 연합을 종식시키는 결정이었다. 이후 호아나 2세와 남편 필리프 3세는 왕국 행정에서 필리프의 역할에 대해 의회와 긴 협상을 벌였다. 나바라 사람들은 호아나 2세의 세습적 통치권은 인정했지만, 필리프 3세 역시 권위를 주장했다. 이 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바라 도시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이 발생했다.
호아나 2세와 필리프 3세는 협상 기간 동안 앙리 4세 드 쉴리와 필리프 드 멜룅|필리프 드 멜룅프랑스어을 나바라로 보냈다. 나바라 사람들은 처음에 필리프 3세가 여왕의 통치를 공유하는 것을 꺼렸다. 1328년 11월 론세스바예스 회의에서 총회 대표자들은 필리프 3세가 나바라 행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관식의 모든 전통적인 요소(새로운 군주를 방패 위에 올리고 구경꾼들에게 돈을 던지는 것)는 오직 호아나 2세에게만 행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앙리 드 쉴리는 필리프 3세가 아내의 왕국에서 통치할 권리를 강조하기 위해 고린토 전서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 사도 바울을 언급했다. 또한 앙리 드 쉴리는 호아나 2세가 남편의 지위 강화를 승인하고 동의했다고 강조했다.
1329년 초, 호아나 2세와 필리프 3세는 나바라에 도착했다. 3월 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둘 다 방패 위로 옹립되었으며, 의식 동안 돈을 던졌다. 이들은 대관 서약을 통해 왕실의 특권을 확립했다. 헌장은 호아나 2세가 나바라의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상속자"임을 강조했지만, "나바라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배우자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바라 사람들은 호아나 2세와 필리프 3세 모두 상속자가 21세가 되면 왕위를 포기하거나 10만 리브르의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호아나 2세는 또한 나바라 획득과 관련된 남편의 경비를 보상했다.
3. 1. 카페 왕조 직계 단절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나바라의 잔 1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바라, 샹파뉴, 브리에 대한 주장은 할 수 없었다.3. 2. 나바라 왕위 계승
필리프 6세는 나바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으므로, 프랑스와 나바라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후아나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샹파뉴와 브리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나바라 왕위를 인정받았다. 후아나는 에브뢰 백작 필리프 (나바라의 필리프 3세)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나바라를 통치했다.4. 통치 기간
호아나 2세는 1316년 아버지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사후에 태어난 이복 동생 장 1세마저 요절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에 어려움을 겪었다. 살리카법을 근거로 왕위에서 제외되었고, 숙부인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가 차례로 즉위했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하자,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면서 프랑스와 나바라 왕국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호아나 2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샹파뉴 백작 영지를 양도하는 대신, 나바라 왕위와 앙굴렘 백작위 등을 받았다. 비록 프랑스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후손인 엔리케 3세가 1589년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와 나바라는 다시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된다.
호아나 2세는 아버지의 사촌인 남편 필리페 3세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1] 필리페 3세는 필리프 3세의 셋째 아들 루이 데브뢰의 아들로 에브뢰 백작령을 상속받았으며, 부부는 노르망디 등 프랑스 북부에 넓은 영지를 소유했다.
1331년 9월,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는 나바라를 떠났다.[4] 역사가 엘레나 우드에이커는 이들이 나바라 통치와 프랑스 영토 관리의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호세 마리아 라카라는 호아나와 필리페가 나바라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에 종종 왕국에 부재했다고 언급한다. 이들이 부재하는 동안 프랑스 총독이 나바라를 대신 관리했다.[4]
1335년 피테로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싼 국경 분쟁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1]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4세가 나바라를 지원했고, 1336년 2월 28일 카스티야와 새로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 호아나와 필리페는 1336년 4월에 나바라로 돌아왔고,[4] 두 번째 방문은 1337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4] 이후 필리페 3세는 두 번이나 나바라로 돌아왔지만, 호아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1343년 9월, 필리페 3세가 사망했다. 호아나 2세는 곧 왕실 부부의 이름으로 나바라를 관리하던 멜룬의 필리페를 브라헤의 윌리엄으로 교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헤의 윌리엄을 해임하고 콩플랑의 장으로 교체했다. 엘레나 우드에이커는 이러한 변화가 나바라 행정에 대한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반영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1344년, 지역 로망스어 (''나바라-아라곤어'')로 된 ''나바라의 푸에로스'' 사본이 호아나 2세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ydioma galicanum''(오일어의 변종)으로 번역하기 위한 여분의 열이 있었지만 결국 비어 있었다. 이는 프랑스어가 호아나 2세가 나바라 관련 문제에도 사용했던 자연스러운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호아나 2세는 다시 나바라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지만, 백년 전쟁 동안 가족의 프랑스 영토가 침공당할 가능성 때문에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4. 1. 공동 통치
호아나 2세와 필리프 3세는 공동 통치 기간 동안 긴밀히 협력했다.[1] 두 사람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보존된 85개의 왕실 칙령 중 41건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4] 그러나 필리프가 정부, 특히 입법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 그는 아내의 언급 없이 38개의 칙령에 단독으로 서명했고,[5] 호아나의 이름으로만 발행된 문서는 6건에 불과했다.[5]4. 2. 내정
호아나 2세와 남편 필리페 3세는 공동 통치 기간 동안 긴밀히 협력했다.[1]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된 85개의 왕실 칙령 중 41건이 이들의 공동 통치를 보여준다.[4] 하지만 필리페 3세가 정부, 특히 입법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1] 그는 아내의 언급 없이 38개의 칙령에 단독으로 서명했고,[5] 호아나 2세의 이름으로만 발행된 문서는 6건에 불과했다.[5]대관식 후, 왕실 부부는 반유대인 폭동의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명령했다.[6] 왕실 요새가 수리되었고 카스텔레노에 새로운 성이 건설되었다.[1] 투델라 주변의 건조한 밭의 관개 시스템도 왕실 부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건설되었다.[1] 호아나 2세는 1345년에 올리테에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을 설립했다.[1]
4. 3. 외교 관계
호아나 2세와 남편 필리페 3세는 인접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1] 1329년, 그들은 장녀 호아나를 페드로와 약혼시키는 협상을 시작하여 아라곤 왕국과 혼인 동맹을 추진했다.[1] 1330년 3월 15일, 살라망카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피테로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싼 국경 분쟁으로 1335년 카스티야와 전쟁이 발생했다.[1] 페드로 4세는 나바라를 지원했고, 1336년 2월 28일 카스티야와 새로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
백년 전쟁 시기에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노력했다.[4] 그러나 1346년 11월, 호아나 2세는 필리프 6세의 군사적 실패에 실망하여 랭커스터 백작과 휴전을 맺고 잉글랜드 군대에 앙굴렘 지역 통과를 허용하는 대신 자신의 땅을 보호받기로 약속했다.[4]
4. 4. 흑사병과 사망
호아나는 1349년 10월 6일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2] 그녀는 유언에서 아들이 올리테의 산타 마리아에 예배당을 짓도록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2] 그녀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지만, 그녀의 심장은 남편의 심장과 함께 현재는 철거된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에 묻혔다.[2][3]5. 자녀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호안나 | 1326년경 | 1387년 |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롱샹 수도원의 프란체스코회 수녀가 됨.[2][3] |
마리아 | 1329년경 | 1347년 | 아라곤의 페드로 4세의 첫 번째 아내[4] |
루이 | 1330년 | 1334년 | [5] |
블랑슈 | 1331년 | 1398년 |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두 번째 아내 |
카를로스 | 1332년 | 1387년 | 에브뢰 백작이자 나바라의 왕[6] |
필리프 | 1333년경 | 1363년 | 욜란드 드 담피에르와 결혼 |
아녜스 | 1334년 | 1396년 | 푸아의 가스통 3세와 결혼 |
루이 | 1341년 | 1372년 | 보몽르로제 백작, 마리아 데 리사라주와 결혼, 두라초 여공작 조안나와 결혼 |
호안나 | 1342년 이후 | 1403년 | 로앙의 자크 1세와 결혼 |
6. 가계도
wikitext
참조
[1]
서적
Recueil des historiens des Gaules et de la France
https://gallica.bnf.[...]
[2]
서적
Les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Librairie Ancienne Honoré Champion
[3]
서적
Heroines of the Medieval World
https://books.google[...]
Amberley Publishing
2017
[4]
서적
Reyes de Navarra: Felipe III y Juana II de Evreux
[5]
간행물
The Catholic Encyclopedia
[6]
서적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s://en.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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