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카와 노리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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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일본 최초의 지하철 건설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철도원에서 근무하다가 도부 철도의 네즈 가이치로의 심복이 되었으며, 1914년 런던에서 지하철을 보고 일본에도 지하철의 필요성을 느껴 도쿄 지하철 건설을 추진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1920년 도쿄지하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27년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을 개통하여 동아시아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했다. 이후 고토 게이타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1940년 회사를 떠났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청년 도장 설립을 계획했지만 완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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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카와 노리쓰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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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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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야카와 노리쓰구 |
로마자 표기 | Hayakawa Noritsugu |
한자 표기 | 早川徳次 |
출생일 | 1881년 10월 15일 |
출생지 | 야마나시현히가시야쓰시로군미요사키촌 |
사망일 | 1942년 11월 29일 |
국적 | 일본 |
묘지 | 다마 묘원 |
직업 | 기업인 |
학력 | 와세다대학교 법률과 (현재 법학부) |
2. 생애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야마나시현 후에후키시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철도원에 취직했다. 도부(東武)철도의 창업자이자 고향 선배인 네즈 가이치로에게 발탁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1914년 국제사정사찰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하던 중, 영국 런던의 지하철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지하철을 보고 일본에 지하철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2. 1. 출생과 성장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1881년 야마나시현 후에후키시 미요사키에서 정치인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2] 아버지 쓰네토미는 미요사카 촌장을 지냈으며, 어머니 에히(에이)는 하야카와가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했다. 형인 도미헤이는 야마나시현 의원을 지냈고, 후에후키강 폐하천을 개척한 고마쓰 도헤이도 형이다.구제 코후 중학교를 거쳐 제6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병으로 중퇴했다. 이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정치인을 지망했으며, 재학 중 고토 신페이의 서생이 되었다.
1908년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고토 신페이가 총재로 있던 남만주철도(만철)에 입사했다. 고토가 체신 대신과 철도원총재에 취임하자 만철을 사직하고 철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아내의 삼촌인 모치즈키 코타로를 통해 도부 철도의 사장 네즈 가이치로를 소개받았다.
하야카와는 네즈에게 발탁되어 사노 철도와 고야 등산 철도의 경영 재건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그의 심복이 되었다. 1914년 국제사정사찰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하던 중, 영국 런던에서 혼잡한 도심교통의 대안으로 지하철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목했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지하철을 보고 일본에 지하철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야마나시현 후에후키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철도원에 취직하여 근무하였고, 도부(東武)철도의 창업자이자 고향 선배인 네즈 가이치로에게 발탁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1914년 국제사정사찰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하던 중 영국 런던에서 혼잡한 도심교통의 대안으로 지하철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목하게 된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의 심리적 여유까지 배려하여 한 량당 승차인원을 제한하고 있는 점에 충격을 받고 일본에 지하철을 도입하기로 결심한다.
하야카와는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국가 정책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고토 신페이에게 보냈는데, 고토 신페이는 당시 남만주철도(만철)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그 결과 고토는 그에게 비서직을 제안했고, 이것이 하야카와가 철도 업계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야카와는 만철에서 일했으며, 이후 일본 철도국으로 옮겨갔는데, 이는 고토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었다. 고토는 하야카와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대일본 제국의 권력자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미요사카 촌(현재의 후에후키시 이치노미야 정 히가시아라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쓰네토미는 미요사카 촌장을 지낸 인물로, 세 딸과 네 아들을 두었으며, 도쿠지는 막내였다. 어머니 "에히(에이)"는 도쿠지가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했다. 장남 도미헤이는 야마나시현 의원을 지냈으며, 후에후키강 폐하천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고마쓰 도헤이도 형에 해당한다.
구제 코후 중학교(현재의 야마나시현립 코후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제6고등학교(현재의 오카야마 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병으로 중퇴했다. 이후 상경하여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나 형과 같이 정치인을 지망하여, 재학 중에 고토 신페이의 서생이 되었다.
1908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자, 고토가 총재를 맡고 있는 남만주철도(만철)에 입사했다. 고토가 체신 대신과 철도원 총재에 취임하자 만철을 사직하고, 철도원에 입국했다. 하야카와는 아내의 삼촌인 모치즈키 코타로로부터 도부 철도의 2대 사장이 된 동향 출신인 네즈 가이치로를 소개받았다.
하야카와가 철도와 본격적으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고향 선배인 네즈에게 발탁되면서부터이다. 네즈가 주식을 취득했던 사노 철도는 어려운 경영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1911년 네즈에게 발탁되어 요청을 받고 동사에 부임한 하야카와는 훌륭하게 그 경영 재건에 성공했다. 이어서 1912년 연선 개발이 진척되지 않아 예상보다 수송량이 저조했던 점과, 고비용 체질이 원인이 되어 적자 경영이 계속되던 고야 등산 철도도 네즈로부터 맡게 되자, 하야카와는 이 회사도 2년 반 만에 재건하여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로 인해 네즈의 오른팔이 되어 맹활약했다.
3. 지하철 건설 및 개업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1914년 유럽을 방문하여 런던 지하철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귀국 후 철도성과 각 지자체, 자본가들에게 지하철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당시에는 지하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도쿄의 지반이 약하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당했다.
하지만 하야카와는 포기하지 않고, 도쿄 시내 교량에 사용된 지층도를 분석하여 연약한 지반 아래에 굳은 지층이 있음을 확인하고, 단단한 지층에 지하철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6개월 동안 콩을 사용하여 보행자와 차량의 수를 세는 독특한 방법으로 교통량을 측정했고, 이를 통해 아사쿠사, 긴자, 신바시 등 가장 혼잡한 지역을 파악하여 지하철 노선을 구상했다.[2]
이러한 노력 끝에 하야카와는 약 200명에 달하는 투자자와 금융기관 등의 지원을 확보하고, 1919년 11월 17일 "도쿄 경편 지하철"로 지하철 면허를 취득, 1920년 8월 29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2] 1925년 9월 27일,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의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927년 12월 30일, 일본 최초의 지하철 노선(아사쿠사역-우에노역)이 개통되었다. 이는 현재 도쿄 메트로 긴자선의 일부 구간이다.[2]
개통 후에도 하야카와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전강·난연화 차량 도입, 오렌지색 차체색 채용, 타자식 ATS 도입, 6량 편성에 대비한 설비, 사원 교육 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한신 급행 전철을 본보기로 역 출입구에 빌딩을 짓고 점포를 배치하여 수입을 늘렸다.[4] 정기권 이용객을 위해 신문 석간을 역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백화점 근처에 노선을 건설하고 백화점과 직접 연결하여 건설 비용을 받는 등[5] 영업·경리 면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1934년 도쿄 지하철은 신바시역까지 연장되었고, 하야카와는 다른 철도선과의 환승도 고려하는 등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3. 1. 지하철 건설 구상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1914년 유럽을 방문하여 런던 지하철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도쿄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당시 도쿄의 주요 교통 수단은 도쿄 도덴의 노면 전차였는데, 교통 체증이 심각했다. 하야카와는 고속 철도, 즉 고가 철도나 지하 철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귀국 후, 하야카와는 지하철 건설 계획을 세웠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도쿄의 지반이 연약하고 지하수가 많다는 점, 지하철 건설 경험이 있는 기술자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620만 엔(2017년 기준 약 37억 엔)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 등이 문제였다.[2]
하야카와는 철도성과 각 지자체, 자본가들에게 지하철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당시에는 지하철의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모두 거부당했다. 도쿄의 지반이 약하다는 인식도 이러한 거부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하야카와는 포기하지 않고 도쿄 시내 교량에 사용된 지층도를 입수하여 분석했다. 그 결과, 연약한 지반 아래에 굳은 지층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굳은 지층에 지하철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반 년 동안 도쿄 시내의 교통량을 직접 조사하여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노력했다.[2]
그는 6개월 동안 아사쿠사, 긴자, 신바시 거리를 걸어다니며 보행자, 인력거, 노면 전차, 자동차, 트럭 등을 기록했다. 특히 혼잡한 교차로를 파악하기 위해 아내에게 흰색과 검은색 콩을 준비하게 하여, 보행자를 보면 흰 콩을, 자동차가 지나가면 검은 콩을 주머니에 넣게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도시에 얼마나 모여 있는지 파악하고, 가장 혼잡하고 수익성이 높은 지역을 지하철 노선으로 활용하려 했다.[2]
이러한 노력 끝에 하야카와는 약 200명에 달하는 투자자와 금융기관 등의 스폰서를 확보하고 당국의 허가를 얻어, 1920년 8월 29일 도쿄지하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5년 9월 27일에는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의 지하철 공사를 시작했다.[2]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회사의 투자자들이 주저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야카와는 끈기있게 사업을 추진했다. 1924년에는 노무라 류타로가 2대 사장이 되고, 하야카와는 전무 이사가 되었다.
1927년 12월 30일, 마침내 아사쿠사역에서 우에노역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지하철 노선이자 현재 도쿄 메트로 긴자선의 일부이다. 하야카와는 장래 교통량 증가를 대비하여 역의 홈을 6량 편성에 맞추고, 사업 확장에 따라 지하철 노선을 대형 상가 및 백화점 등 시내 주요 상권에 맞추는 등, 도쿄 시민의 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4년에는 신바시역까지 노선이 연장되었으며, 이후 도쿄 지하철은 1932년부터 네즈 가이치로가 3대 사장으로 취임하고, 1940년에는 하야카와 자신이 4대 사장이 된다.
3. 2. 난관과 극복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1914년 유럽을 방문하여 런던 지하철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도쿄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이 필수적이라고 확신했다.[2] 귀국 후, 하야카와는 철도성, 지자체, 자본가들에게 지하철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당시에는 지하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도쿄의 지반이 약하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하지만 하야카와는 포기하지 않고, 도쿄 시내 교량에 사용된 지층도를 분석하여 연약한 지반 아래에 굳은 지층이 있음을 확인하고, 단단한 지층에 지하철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6개월 동안 도쿄 시내의 교통량을 직접 조사하여 사업성을 입증하려 노력했다.[2] 그는 콩을 사용하여 보행자와 차량의 수를 세는 독특한 방법으로 교통량을 측정했고, 이를 통해 아사쿠사, 긴자, 신바시 등 가장 혼잡한 지역을 파악하여 지하철 노선을 구상했다.[2]
이러한 노력 끝에 하야카와는 약 200명에 달하는 투자자와 금융기관 등의 지원을 확보하고, 1920년 8월 29일 도쿄지하철주식회사를 설립했다.[2] 1925년 9월 27일,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의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927년 12월 30일, 일본 최초의 지하철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는 현재 도쿄 메트로 긴자선의 일부 구간이다.[2]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회사의 투자자들이 주저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사업은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2] 그러나 하야카와는 끈질기게 사업을 추진했고, 결국 지하철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야카와는 장래 교통량 증가를 대비하여 역의 홈을 6량 편성에 맞추고, 지하철 노선을 대형 상가 및 백화점 등 시내 주요 상권에 맞춰 도쿄 시민의 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큐 전철을 본보기로 역 출입구에 빌딩을 짓고, 지하철 구내에 점포를 배치하여 수입을 늘리는 등 경영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4]
3. 3. 아사쿠사-우에노 구간 개통
1914년 (다이쇼 3년) 국제 정세 시찰을 위해 유럽을 방문,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이 발달한 것을 직접 목격한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귀국 후 철도성 및 각 지자체, 자본가들을 찾아다니며 지하철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모두 거부당한다.[2] 도쿄의 지반이 약하다는 인식과 사업성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1919년 (다이쇼 8년) 11월 17일 "도쿄 경편 지하철"로 지하철 면허를 취득하고, 1920년 (다이쇼 9년) 8월 29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25년 (다이쇼 14년) 9월 27일 아사쿠사 - 우에노 구간의 지하철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쇼와 2년) 12월 30일 아사쿠사역에서 우에노역까지 개통하였다. 이는 현재의 도쿄 메트로 긴자선의 해당 구간이다.[2]
개통된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은 순차적으로 노선 연장을 진행했다. 하야카와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전강·난연화 차량 도입, 경계색을 나타내는 차체색(오렌지색) 채용, 타자식 ATS 도입을 실시하고, 장래의 수송량 증가에 대비하여 6량 편성으로의 운전에 대응한 설비를 갖추는 등 노력을 했다.[4][5]
3. 4. 선진적인 지하철 운영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1914년 유럽을 방문하여 영국 런던의 발달한 지하철을 보고 도쿄에도 지하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귀국 후, 철도성과 자치단체에 지하철 건설을 요청했으나, 도쿄의 연약한 지반과 사업성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거절당했다.하지만 하야카와는 포기하지 않고 도쿄 시 교량과의 지층도를 분석하여 연약한 지반 아래에 단단한 지층이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콩을 사용한 교통량 조사를 통해 사업성을 입증하고, 투자자와 금융 기관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1919년 11월 17일, 마침내 철도원으로부터 지하철 면허를 취득하고, 1920년 8월 29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5년 9월 27일, 아사쿠사-우에노 구간의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다.
1924년 하야카와는 전무 이사가 되었고,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영향과 여러 사고를 극복하고 1927년 12월 30일, 아사쿠사역-우에노역 구간을 개통했다. 이는 현재 도쿄 메트로 긴자선의 일부이다.
개통 후에도 하야카와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전강·난연화 차량 도입, 오렌지색 차체색 채용, 타자식 ATS 도입, 6량 편성에 대비한 설비, 사원 교육 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한신 급행 전철을 본보기로 역 출입구에 빌딩을 짓고 점포를 배치하여 수입을 늘렸다.[4] 정기권 이용객을 위해 신문 석간을 역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백화점 근처에 노선을 건설하고 백화점과 직접 연결하여 건설 비용을 받는 등[5] 영업·경리 면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1934년 도쿄 지하철은 신바시역까지 연장되었고, 하야카와는 다른 철도선과의 환승도 고려하는 등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하야카와는 직원 교육과 복리 후생에도 힘을 쏟았으며, 1938년 4월에는 가나가와현 즈시에 연수 시설 "세이치료"를 개설했다. 그는 "어떠한 세상에도 일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라며 사원을 소중히 생각했다.[6]
도쿄 지하철은 1932년부터 네즈 가이치로가 3대 사장으로 취임하고, 1940년에는 하야카와 자신이 4대 사장이 된다.
4. 영단 지하철 설립과 경영 은퇴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지하철 사업 성공 후, 여러 회사들이 지하철 사업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40년 고토 게이타가 이끄는 도쿄 고속 철도와 신바시역을 두고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고, 일본 철도성이 개입하여 양 회사의 화해 조건으로 하야카와의 은퇴를 요구했다. 결국 하야카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양 회사는 당국의 의향에 따라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 지하철)으로 흡수되었다.[3]
4. 1. 고토 게이타와의 갈등

하야카와 노리쓰구의 주요 경쟁자는 도큐 전철 사장 고토 게이타였다. 고토는 도쿄 철도 사업의 지배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특히 도쿄 지하철의 노선 계획에 주목했다.
1940년 고토 게이타가 이끄는 도쿄 고속 철도와 신바시역을 두고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다.[3] 고토는 시부야에서 신바시까지 자체 노선을 건설했는데, 이는 하야카와가 노선을 연장하려던 경로와 거의 일치했고, 결국 하야카와의 프로젝트를 가로막았다. 1939년 고토는 하야카와와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나미즈 쿠마오로부터 도쿄 지하 철도의 주식 35만 주를 양도받았다. 고토는 3량분의 플랫폼을 계획했지만, 하야카와는 승객 수 증가를 예상하여 6량분의 플랫폼을 요구하는 등, 역 설계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일본 철도성은 양 회사의 화해 조건으로 하야카와의 은퇴를 요구했고, 하야카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3] 결국 양 회사는 지하철 사업의 공영화를 바라고 있던 당국의 의향에 따라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 지하철)으로 흡수되었다.[3]
4. 2. 강제 은퇴와 영단 지하철 설립
1940년 도큐의 총수 고토 게이타가 이끄는 도쿄 고속 철도(긴자선 시부야역 - 신바시역 간 건설)와 경영권 및 역 설계, 열차 직통 운전에 관한 다툼이 발생했다. 1939년에 고토는 하야카와와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나미즈 쿠마오로부터 도쿄 지하 철도의 주식 35만 주를 양도받았다.[3]당시 철도성은 지하철 국영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도쿄 지하 철도와 도쿄 고속 철도의 화해 조건으로 하야카와의 은퇴를 요구했다. 결국 양사의 사업은 신설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 지하철)에 양도되었고, 하야카와는 1940년에 지하철 사업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임 5대 사장에는 나카지마 구마키치가 취임했다.[7]
4. 3. 만년과 죽음
하야카와의 지하철 사업 성공 이후, 지하철 사업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였다. 1940년 고토 게이타가 이끄는 도쿄고속철도와 신바시역을 두고 경영권 분쟁이 발생한다. 일본 철도성이 여기에 개입하여 양 회사의 화해 조건으로 하야카와의 은퇴를 요구했고, 하야카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한편, 양 회사는 지하철 사업의 공영화를 바라던 당국의 의향에 따라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지하철)으로 흡수되었다.1939년 고토는 하야카와와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나미즈 쿠마오로부터 도쿄 지하 철도의 주식 35만 주를 양도받았다. 당시 철도성의 의도(지하철 국영화 계획)도 얽혀, 도쿄 지하 철도와 도쿄 고속 철도의 화해 조건으로 하야카와의 은퇴가 포함되었고, 양 사의 사업은 신설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 지하철)에 양도하기로 결정되었다. 1940년 하야카와는 지하철 사업을 빼앗기는 형태로 실업계에서 물러났다.
고향 야마나시로 돌아온 하야카와는 실의에 빠져 지내다 병환으로 1942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7] 하야카와는 고향에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청소년 도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1942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도장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묘소는 다마 영원지이다.[7]
5. 유산
긴자역과 카사이역에 있는 도쿄 메트로 박물관에는 하야카와 노리쓰구의 청동 흉상이 세워져 있다. 긴자역의 히비야선 중2층 중앙부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하야카와 노리쓰구는 딸에게 "언젠가 분명, 도쿄 전체가 거미줄처럼 지하철로 얽혀지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후에 현실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Wartime Railways and Transport Policies
http://www.jrtr.net/[...]
Japan Railway & Transport Review
2012-12-04
[2]
웹사이트
Heart of gold: The Ginza Line celebrates its 90th birthday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17-12-16
[3]
웹사이트
Why does Tokyo have two separate subway systems?
https://www.quora.co[...]
2016-09-11
[4]
문서
浅草駅に雷門ビルを建てた他、上野や新橋に地下鉄ストアをオープンしている
[5]
문서
三越前駅。これは三越百貨店側からも要請があった。
[6]
웹사이트
地下鉄90年(1) 息づく民間の力、いまも通じる発想 〜地下鉄をつくった男、早川徳次〜 社員を大事にする心、「大切なるは人」
https://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pp.5
2019-09-28
[7]
웹사이트
日本の墓:著名人のお墓:早川徳次
http://www.hakaishi.[...]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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