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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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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은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기념물이다. 1980년대 후반 건립 논의가 시작되어, 1999년 페터 아이젠만의 설계가 최종 선정되었다. 2005년 5월 10일 개관했으며,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과 정보 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물 건설 과정에서 데구사사의 참여 문제로 논란이 있었으며, 완공 이후에도 기념물의 형태와 의미, 기념 대상, 훼손 및 부적절한 행동 등으로 인해 비판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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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위치 정보
기념관 남쪽에서 바라본 전경
기념관 남쪽에서 바라본 전경
기본 정보
명칭학살된 유럽 유대인 기념관
원어 명칭독일어: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위치베를린, 독일
헌정 대상홀로코스트 희생자 유대인
면적1.9 헥타르
웹사이트학살된 유럽 유대인 기념관 재단 웹사이트
디자인
설계자피터 아이젠만
재료콘크리트
건설 정보
착공2003년 4월 1일
완공2004년 12월 15일
개장2005년 5월 10일
건설 비용2500만 유로
특징
비석 수약 2,711개
비석 높이 범위0.2 미터 ~ 4.7 미터
비석 면적가로 0.95미터, 세로 2.38미터
정보 센터 명칭독일어: Ort der Information (정보의 장소)

2. 위치 및 역사적 배경

기념물은 베를린 미테 구역의 코라-베를리너-슈트라세 1번지에 위치하며, 티어가르텐 동쪽,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8][9] 이 지역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한때 "죽음의 지대"라고 불리던 곳이다.[10]

미니스터가르텐(1904년). 이 일대는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무인 지대가 되었고, 후에 그 한 구역이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이 일대는 "미니스터가르텐"(Ministergärten, 장관 정원)으로 불렸다. 18세기 베를린 시가지가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 남쪽 빌헬름가에는 프로이센 왕국 귀족과 군인의 저택이 들어섰고, 그 뒤편에는 에베르트가까지 각 저택에 부속된 긴 정원이 만들어졌다. 19세기 프로이센 정부는 이 저택들을 사들여 관청으로 사용했다. 독일 제국나치 독일 시대를 거치면서 빌헬름가의 양쪽에는 정부 고위 관리의 관저와 관청이 늘어섰고, 뒤편의 정원들은 "미니스터가르텐"으로 불렸다. 나치 시대에는 빌헬름가의 총리 관저가 총통 관저가 되었고, 1939년에는 신 총통 관저가 증축되었다. 미니스터가르텐 남쪽은 총통 관저 정원으로 개조되었고, 그 구역에 만들어진 총통 벙커에서 독소전쟁의 마지막 베를린 전투가 지휘되었다.

베를린 시가지 전투로 총통 관저와 관청가가 파괴되었고, 전후 궁핍기에는 미니스터가르텐 유적의 빈터가 농지가 되었다. 1960년대 베를린 장벽 건설로 관청가 폐허가 철거되었고, 일대는 광대한 무인 지대가 되었다. 현재 기념물은 나치 정권과 관련된 장소의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10]

2. 1. 기념물 건립 논의

1980년대 후반, 텔레비전 언론인 레아 로쉬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야켈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 건립 운동이 시작되었다.[7][11] 로쉬는 1989년에 기념관 건설을 지원하고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단체를 설립했다.[12]

기념 대상을 유대인으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신티와 로마, 동성애자, 강제 노동자, 장애인 등 모든 희생자를 포함할 것인지와 이러한 기념비 건립의 필요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역사학자 죄르지 콘라드는 기념비 설계에 대해 "살해된 유대인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크기로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67]

1999년, 독일 연방의회는 기념물 건설과 재단 설립을 결정하고, 기념 대상을 유럽 유대인으로 한정하였다.[8]

3. 설계 및 건설 과정

이 기념물은 베를린의 코라-베를리너-슈트라세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티어가르텐 동쪽, 국회의사당과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8][9]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이자, 제3제국 시대에는 요제프 괴벨스의 저택과 총리관저, 총통 벙커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10]

198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 언론인 레아 로쉬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야켈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 건립 운동이 시작되었다.[7][11] 1989년, 로쉬는 기념관 건립을 위한 단체를 설립하고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다.[12] 분데스탁 (독일 연방 의회)은 이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999년 6월 25일, 페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기념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8]

기념물은 격자 형태로 배치된 2,711개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acre 면적을 덮고 있다. 블록 사이에는 좁고 곧은 골목길이 있으며, 지면은 굴곡져 있다.

2003년 10월, 데구사(Degussa)가 기념관 건설에 참여하여 낙서 방지제 프로텍토실(Protectosil)을 생산, 석주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21] 데구사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연루되었고, 자회사 데게쉬(Degesch)는 가스실에서 사용된 치클론 B(Zyklon B) 가스를 생산하기도 했다.[21] 유대인 공동체 대표들은 데구사의 참여 중단을 요구했지만, 공사 중단 및 추가 비용 발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결국 데구사와 계속 협력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24]

2004년 12월 15일, 기념물이 완공되었고, 2005년 5월 10일 유럽 전승 기념일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헌정되었다.[27] 개관식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비롯한 독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비나 볼란스키가 연설했다.[11]

3. 1. 1차 설계 공모

1994년 4월, 독일 주요 신문에 기념관 디자인 공모전이 발표되었다. 528개의 제안서가 제출되었고, 심사위원단은 1995년 1월 15일에 최고의 출품작을 선정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심사위원단은 크리스틴 야콥-마르크스의 디자인과 시몬 운거스의 디자인을 선정했다. 크리스틴 야콥-마르크스의 디자인은 기울어진 콘크리트 판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방식이었고, 시몬 운거스의 디자인은 강철 거더에 절멸 수용소 이름을 뚫는 방식이었다.[11] 그러나 독일 연방 총리 헬무트 콜은 크리스틴 야콥-마르크스 팀의 디자인에 불만을 표명하여 이 결정은 무산되었다.[7]

3. 2. 2차 설계 공모 및 아이젠만 디자인 선정

1997년 11월, 두 번째 공모전에서 피터 아이젠만과 리처드 세라의 협업을 포함한 네 개의 최종 후보가 선정되었고, 그들의 계획이 최종 선정되었다. 그들의 디자인은 원래 흩어져 있는 높이가 다양한 4,000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를 구상했다.[15] 그러나 세라는 "프로젝트의 장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개인적, 직업적 이유를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디자인 팀을 떠났다.[16] 헬무트 콜 총리는 여전히 수많은 변경을 요구했지만, 아이젠만은 곧 이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16] 여러 변경 사항 중, 아이젠만-세라의 초기 프로젝트는 곧 약 2,000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기념물로 축소되었다.[15]

1999년 1월 W. 마이클 블루멘탈의 중재로 아이젠만과 미하엘 나우만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독일 정부가 앞서 반대했던 거대한 돌기둥 밭의 본질이 보존되었다.[18] 기둥의 수는 약 2,800개에서 1,800개에서 2,100개 사이로 줄어들었고, '기억의 집'이라는 건물이 추가되었다. 이 건물은 아카이브, 정보 센터 및 전시 공간이었으며, 검은색 패턴 강철로 만들어진 외부와 유리 내부로 둘러싸여 100야드 길이의 두꺼운 '책의 벽'으로 둘러싸일 예정이었고, 이 벽에는 백만 권의 책이 보관될 예정이었다.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는 책을 담고 있는 '책의 벽'은 기념관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고 상징적인 것뿐만 아니라 교육적이고 유용해야 한다는 슈뢰더 정부의 우려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18]

3. 3. 건설 과정의 논란: 데구사(Degussa) 참여 문제

2003년 10월 14일, 스위스 신문 ''타게스-안차이거''는 데구사(Degussa)가 기념관 건설에 관여하여 낙서 방지 물질 프로텍토실(Protectosil)을 생산, 석주를 덮는 데 사용했다고 보도했다.[21] 이 회사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다양한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데구사의 자회사인 데게쉬(Degesch)는 심지어 가스실에서 사람들을 독살하는 데 사용된 치클론 B(Zyklon B) 가스를 생산했다.[21] 처음에는 이 기사들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공사 관리를 담당하는 이사회가 10월 23일에 이 상황을 논의하고 격렬하고 논란이 많은 논의 끝에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즉시 공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주로 데구사의 참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은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들이었고, 볼프강 티어제를 포함한 이사회 정치인들은 공사를 중단하고 추가 비용을 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나치 범죄에 연루된 모든 독일 기업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티어제는 "과거는 우리 사회에 침투한다"고 말했다.[21] 레아 로쉬 역시 데구사 배제를 옹호하며 "치클론 B는 분명히 한계이다"라고 답했다.[22]

이후 논의에서 몇 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첫째, 데구사의 관여가 스위스에서 공론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낙서 방지 물질을 생산하겠다고 입찰한 다른 회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사 관리를 담당하는 재단과 레아 로쉬는 데구사의 관여를 최소 1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를 중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로쉬는 그 후 데구사와 데게쉬 사이의 연관성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데구사 자회사인 워먼 바우케미 GmbH가 이미 석주의 기초를 부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데구사를 프로젝트에서 배제하는 데 따른 문제점은 많은 석주가 이미 데구사의 제품으로 덮여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회사를 사용하려면 이를 파괴해야 했고, 그로 인한 비용은 약 234만유로가 될 것이었다. 11월 13일까지 지속된 대처 방안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독일 유대인 중앙 협의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대인 단체들이 데구사와의 협력에 반대했으며,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은 이를 지지했다.[23]

11월 13일, 데구사와 계속 협력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24] 독일계 유대인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텔레비전 방송인인 헨리크 M. 브로더는 "유대인에게 이 기념관은 필요하지 않으며, 돼지우리를 코셔(kosher)로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25][26]

3. 4. 완공 및 개관

2004년 12월 15일에 기념물이 완공되었다. 2005년 5월 10일, 유럽 전승 기념일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헌정되었으며, 이틀 뒤 정보 센터와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27]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포함한 독일 정부의 모든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개관식은 히틀러의 지하 벙커가 있던 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기념관 부지 가장자리에 설치된 커다란 흰색 텐트에서 열렸다.[11]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비나 볼란스키는 6백만 명의 사망자를 대표하여 연설했다. 그녀는 연설에서 홀로코스트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동시에 증오와 차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자녀는 부모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강조했다.[29] 연설에 이어진 히브리어와 이디시어 노래 모음곡은 뉴욕 5번가 회당의 칸토르인 요셉 말로바니가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백색 황새 회당 합창단과 저지 슐레지엔 독일-폴란드 필하모닉 유스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불렀다.[11]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방문하는 사람들


홀로코스트 기념비의 일부가 되는 나무

4. 기념물의 형태와 의미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은 크게 지상에 불규칙하게 배열된 콘크리트 석비들과 지하 정보 센터로 구성된다.

불규칙하게 배치된 블록


정보 센터는 기념비 동쪽 가장자리, 석비들 아래에 있다. 나치당 집권(1933년)부터 1941년 백만 명 이상의 소련 유대인 학살까지 최종 해결의 역사를 연대기로 보여준다. 전시는 희생자들의 개인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4개의 방으로 이어진다.[36] '가족의 방'은 15개 유대인 가족의 운명을, '이름의 방'에서는 야드 바셈 기념관에서 얻은 모든 알려진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을 들려준다.[37]

일부 비평가들은 정보 센터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센터의 코퍼 콘크리트 천장은 물결치는 표면으로 위쪽 기둥과 통로 패턴을 반영한다.[10]

4. 1. 추상적 형태와 다양한 해석

아이젠만의 프로젝트 텍스트에 따르면, 기념비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이 조각 전체는 인간의 이성과 동떨어진,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9] 학살된 유럽 유대인 기념 재단 공식 영문 웹사이트[2]는 이 디자인이 기념비의 전통적인 개념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 방식을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이젠만이 기념비의 수와 디자인이 상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40][41]

그러나 관찰자들은 기념비가 묘지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42][43][44] 추상적인 설치물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가장 흔한 해석은 묘지라는 것이다. "기념비는 묻히지 않거나 무덤에 던져진 사람들을 위한 묘지를 연상시키며, 몇 개의 불안하게 기울어진 묘비들은 오래되고, 방치되거나, 심지어 훼손된 묘지를 연상시킨다."[3] 많은 방문객들은 기념비 밖에서 회색 석판들이 관의 행렬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각 석판의 크기와 너비는 관과 거의 같지만, 아이젠만은 어떤 형태의 매장지를 닮게 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부인했다.[45] 기념비의 격자무늬는 부지를 둘러싼 거리의 연장선이자, 학살 기계를 계속 가동하게 했던 엄격한 규율과 관료적 질서를 소름 끼치게 연상시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3] 볼프강 티어제 독일 연방 하원 의장은 이 작품을 사람들이 "고독, 무력감, 절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장소로 묘사했다.[46] 티어제는 기념비가 방문객에게 일종의 치명적인 공포를 조성한다고 말했다. 방문객들은 기념비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이 베를린의 거리 소음과 풍경으로부터 방문객을 막아서기 때문이다.[46]

묘비


일부 방문객과 베를린 시민들은 또한 회색 평평한 돌과 푸른 하늘의 대비를 홀로코스트의 "암울한 시대"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47] 기념비 입구로 아래쪽으로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면서 회색 기둥은 방문객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점점 더 커진다. 결국, 방문객이 출구를 향해 올라갈 때 회색 기둥은 다시 작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제3제국의 흥망성쇠 또는 유대인 공동체에 그러한 잔혹 행위를 저지를 수 있게 한 정권의 점진적인 권력 모멘텀으로 해석했다. 콘크리트 기둥 사이의 공간은 햇빛과의 짧은 만남을 제공한다. 방문객이 석판을 거닐면서 태양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따뜻하고 밝은 삶의 가능성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공간의 사용을 유럽 유대인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끊임없이 변화했던 불안정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많은 방문객들은 기념비를 걸어 다니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갇힌 느낌을 준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하는 내리막 경사가 제3제국의 점진적인 유럽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의 확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그들은 게토로 강제 이주되어 사회에서 추방되었고, 결국 존재에서 제거되었다. 방문객이 기념비 안으로 더 내려갈수록 외부 세계와의 가시적인 접촉이 전혀 없다. 그들은 완전히 소외되어 세상으로부터 숨겨진다. 방문객 그룹이 기념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서 서로를 잃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것은 종종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 공동체 내의 가족의 분리 및 상실을 연상시킨다.[48]

어떤 사람들은 회색 석판의 모양과 색상을 나치 정권 동안 정체성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념비 안으로 들어가면서 모양 사이의 공간이 넓어진다. 한 정권에서의 정체성은 '동일성'과 "동일한 것의 반복"을 통해 정의되는 소속감에 의해 크게 형성된다.[47] 일부 블록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블록과 격리되어 있다. 이것은 종종 나치 정권 동안 강제적인 유대인의 분리 및 감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치 정권에서의 "동일성"과 통일성의 지속은 배제의 행위에 달려 있었다. 건축 역사가 앤드루 벤자민은 특정 블록의 공간적 분리가 "전체의 사례가 아닌 특정 [것]"을 나타낸다고 썼다.[47] 블록 그룹 내의 통일된 모양의 부재는 또한 "기억의 과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47] 일부 블록은 미완성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미완성적인 외관을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과제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본다. 벤자민은 "기념비는 불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한다"고 말했다.[47] 홀로코스트의 영향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기념비의 구조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구조의 누락된 부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대인 공동체의 누락된 구성원을 보여준다. 홀로코스트의 파괴는 유대인 유산의 누락된 시대를 초래했다.[47]

기념비의 구조는 또한 집단 의식을 부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독일 인구 사이의 집단적 죄의식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다른 사람들은 블록의 공간적 위치를 홀로코스트에 대한 개인적인 죄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일부 독일인들은 기념비를 독일 사회를 겨냥하는 것으로 보고, 기념비가 "과거에 대한 우리비유대인 독일인의 책임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고 주장한다.[49] 이 부지는 또한 나무와 베를린 시내의 경계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경계로부터의 폐쇄는 종종 갇힌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머물도록 강요한 에비앙 회담 이후 유럽과 미국의 국경의 폐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49]

몇몇 사람들은 묘비의 수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페이지 수와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50]

4. 2. 정보 센터

정보 센터의 전시


정보 센터는 기념비 동쪽 가장자리의 '석비' 밭 아래에 있다. 방문객 전시는 국가 사회주의자가 1933년에 권력을 잡았을 때부터 1941년에 백만 명이 넘는 소련 유대인을 살해한 사건까지, 최종 해결의 역사를 보여주는 연대기로 시작한다. 전시회의 나머지는 비극의 개인적인 측면, 예를 들어 개별 가족이나 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수송하는 열차에서 던져진 편지 등에 전념하는 4개의 방으로 나뉜다.[36] '가족의 방'은 15개의 특정 유대인 가족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다. '이름의 방'에서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기념관에서 얻은 모든 알려진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이 큰 소리로 읽혀진다.[37] 각 방에는 위쪽 석비의 시각적 상징, 즉 직사각형 벤치, 수평 바닥 표시 및 수직 조명이 있다.[4]

비평가들은 센터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념비의 동쪽 가장자리에 신중하게 배치되어 있다. 건축적으로, 정보 센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코퍼 콘크리트 천장에 있다. 물결치는 표면은 위쪽의 기둥과 통로의 패턴을 반영하여 방문객이 마치 묘지 컬렉션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10] "미학적으로, 정보 센터는 열린 기념관의 모든 의도에 반합니다. 지하 문서 영역의 지상 파빌리온은 직사각형의 일정한 척도를 손상시킵니다. 인정하건대, 이 교육적 추가에 대한 모든 반대는 정보 센터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 처음 네 개의 방에 들어섰을 때 잠잠해집니다."[38]

방문객 센터는 신중하게 선택된 예시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가장 중요한 순간과 기억 중 일부를 간결하고 도발적인 전시로 담아낸다. 입구는 석비에 의해 정의된 통로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며, 전시 구역은 기념비가 본질적으로 가져서는 안 될 것, 즉 정의된 매력을 제공한다.[38] "전시는 문자 그대로이며, 기념관을 구성하는 비정형 석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치 그들(전시품)이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10]

5. 논란과 비판

이 기념물은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만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51] 그러나 이후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은 동성애자 기념비(2008년)와 국가 사회주의 희생된 신티 및 로마인 기념비(2012년)와 같이 나치의 희생자였던 다른 특정 집단을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건립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설계에 희생자들의 이름, 살해된 사람들의 수, 살해가 발생한 장소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6] 반면, 건축 평론가 니콜라이 아우로소프는 기념관이 "감상에 젖지 않고 홀로코스트 공포의 규모를 전달할 수 있으며, 추상화가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36]

일부 독일인들은 기념물이 단순한 조각상일 뿐 나치 독일 시대에 살해된 사람들을 기리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기념물 건립이 독일이 더 적극적인 형태의 기념에 참여해야 하는 책임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념물 건립이 SED의 전체주의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독일 시민들은 동부 영토에서 독일인의 강제 이주를 기억하는 기념물이 세워지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1998년 초, 귄터 그라스를 비롯한 독일 지식인 그룹은 기념물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몇 달 후, 독일 도서 거래 평화상을 수상하면서[52] 독일 소설가 마르틴 발저는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언급하며 "현재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수치를 이용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는 "기념물화"와 "우리의 수치를 끊임없이 제시하는 것"을 비판했고, "아우슈비츠는 위협의 일상, 항상 이용 가능한 협박 또는 도덕적 클럽[Moralkeule], 또는 단지 의무가 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의례화로 생산되는 것은 형식적인 것과 같은 품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52]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베를린 시장이었던 에버하르트 디에프겐은 기념물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2000년의 기공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디에프겐은 이전에 기념물이 너무 크고 보호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19]

독일 유대인 중앙 협의회 회장이자 2005년 개막식 연설자였던 파울 슈피겔은 기념물에 대한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불완전한 진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대인 희생자가 아닌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기념물이 "고통의 위계"를 시사한다고 말했는데, 그는 "고통과 애도는 모든 고통받는 가족에게 크다"고 말했다. 또한 슈피겔은 나치 가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방문객이 "범죄에 직면"하는 것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11]

2005년, 레아 로쉬는 1980년대 후반 벨제크 절멸 수용소에서 발견한 희생자의 치아를 기념관의 콘크리트 블록 중 하나에 넣는 계획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베를린 유대인 공동체는 기념관 보이콧을 위협했고, 로쉬는 제안을 철회해야 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과 유대인의 신체 부위는 유대인 묘지에만 묻힐 수 있다.[53]

이 기념관은 일부 비평가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르는 것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토론토 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미할 보데만은 전후 독일-유대 관계를 연구하며, 독일이 과거에 집중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의 인종차별적 경향을 간과하고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54]

많은 비평가들은 기념비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콘크리트 블록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부 정보나 언급을 제공하지 않으며, 기념물의 제목에는 "홀로코스트"나 "쇼아"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비평가들은 기념관의 정보 부족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누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또는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히틀러 정권 하의 독일'과 같은 내용이 없으며, 모호함이 불안하다."[3] 이 기념물의 헌정 문제는 더욱 강력하다. "베를린의 돌밭은 기억의 상속된 도상을 급진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어떤 진술도 포기한다. 이 설치는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지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비문이 없다. 살해된 사람들의 이름, 다윗의 별 또는 기타 유대교 상징을 찾으려고 해도 헛수고다."[38] 비평가들은 기념관이 홀로코스트 부정의 증가하는 움직임에 충분히 대처하지 못한다고 우려하며, 기념관이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말한다. "책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 묵시적 사실로 축소하는 것은 잊혀짐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3] 비평가들은 또한 이 기념물이 네오 나치 운동의 순례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46]

역사가 에버하르트 예켈과 저널리스트 레아 로슈의 제안은 1988년에 시작되었다.[66] 위령 대상을 유대인으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 희생자, 신티와 로마 (집시의 자칭), 동성애자, 강제 노동자, 장애인 등 희생자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또한 왜 이러한 거대한 기념비를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역사가 죄르지 콘라드는 "롤러코스터처럼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는 것은 축제와 같다. 독일의 웅장한 크기에 맞춘 기념비는 불필요하며, 오히려 살해된 유대인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크기로 해야 한다"고 설계에 대해 비판했다.[67]

6. 훼손 및 부적절한 행동

''석판'' 사이를 뛰어넘는 모습


기념관에 있는 커플


이 기념물은 반달리즘과 부적절한 행동으로 논란이 되었다. 초기에 만자가 그려지거나 반유대주의 구호가 발견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55][56] 일부 방문객들이 기념물을 레크리에이션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훼손 논란도 있었다.

2016년 포켓몬 고 게임 장소로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고,[58] 2017년 이스라엘 예술가 샤하크 샤피라가 "욜로코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기념관에서 부적절한 사진을 찍는 행태를 비판했다.[59] 2013년 데이트 앱 그라인더 프로필 사진 배경으로 사용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60] 이러한 사건들은 기념물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희생자들을 모욕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6. 1. 반달리즘

기념물에는 여러 반달리즘 사건이 발생했다. 첫 해에만 만자가 다섯 번이나 석판에 그려졌고,[55] 2009년에는 2,700개의 회색 석판 중 12개에서 만자와 반유대주의 구호가 발견되었다.[56] 2014년에는 한 남자가 기념관 위에서 소변을 보고 사람들이 섣달 그믐에 불꽃놀이를 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논란이 되자, 독일 정부는 기념관 보안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57]

기념물이 레크리에이션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이를 훼손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2016년에는 ''포켓몬 고'' 게임 장소로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고,[58] 2017년 초에는 이스라엘 예술가 샤하크 샤피라가 "욜로코스트"라는 온라인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기념관에서 부적절한 사진을 찍는 행태를 비판했다.[59] 2013년에는 데이트 앱 그라인더 프로필 사진 배경으로 사용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60]

6. 2. 부적절한 행동 논란



이 기념물은 종종 레크리에이션 공간으로 사용되어, 이곳을 유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기념관 훼손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건축 비평가 니콜라이 우루소프는 "내가 그 장소를 방문한 날, 2살 된 남자아이가 기둥 위에서 놀고 있었고,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한 기둥에서 다음 기둥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했다."라고 언급했다.[10]

2016년에는 포켓몬 고 게임과 관련된 논란이 발생했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 기념 재단은 ''더 로컬''에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증강 현실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포켓몬을 찾고 잡을 수 있는 장소로 보고되었다고 밝혔다.[58] 재단 대변인 사라 프리드리히는 "이곳은 6백만 명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 공간이며, 이런 종류의 게임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회사가 이 기념관을 가능한 위치에서 삭제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58]

2017년 초, 이스라엘 예술가 샤하크 샤피라는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틴더, 그라인더)에서 젊은이들이 기념관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거나, 요가를 하거나, 기념관의 석판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춤을 추는 사진을 발견하고, "욜로코스트"라는 온라인 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이미지와 나치 사망 수용소의 기록 사진을 병치하여, 이 엄숙한 장소에서 부적절하게 쾌활한 사진을 찍는 것의 부조화를 아이러니하게 지적했다.[59]

2013년 1월, 블로그 ''토템 앤드 태부''는 데이트 앱 그라인더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 모음을 게시했다.[60] 조엘 심카이(당시 그라인더 CEO,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는 자신의 앱 회원들이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참여하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기념관을 즉석 만남 프로필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있었으며, 이는 무례한 행위로 간주되었다.[61][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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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Information Centre · Yad Vashem Portal http://www.stiftung-[...]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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