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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진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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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여진 국경 분쟁은 10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고려와 조선이 여진족과 겪은 국경 분쟁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고려는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회유하며 조공 관계를 맺었으나, 여진족의 세력 확장과 금나라 건국으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윤관의 별무반을 통한 동북 9성 설치 시도와 반환 과정은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금나라의 압박으로 고려는 굴복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여진족을 회유하고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정책을 병행했으며, 세종대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을 확장했다. 17세기 초 여진족의 후금 건국과 조선 침략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고,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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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진 국경 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한국-여진 국경 분쟁
관련여진족
시기10세기 – 17세기
장소한반도 북동부
원인불명
결과고려: 교착 상태
조선: 초기 승리 후 후금에 패배
교전 세력
교전 1고려
조선
교전 2여진족
금나라
후금
지휘관
고려윤관
조선김종서
여진족오야속
후금아민
기타
비고한국은 함경도를 정복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합병했다.
고려윤관이 여진족을 정복하고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을 묘사한 역사 그림.

2. 배경

고려 건국 이전, 10세기 말 한반도 북방, 특히 압록강대동강 사이 지역은 발해 잔존 세력과 여진족 등 다양한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4] 고려는 이 지역을 병합하려 하였다.[4] 993년, 요나라와 고려 국경 사이의 땅은 여진족 부족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나, 고려 외교관 서희요나라와 협상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것을 근거로 압록강까지의 땅을 확보하였다.[2][3]

압록강 지역 여진족은 고려 태조 때부터 고려의 조공국이었다.[5] 태조는 후삼국 시대 전쟁 중 여진족 기병을 크게 활용하여 후백제를 격파하였다.[5] 여진족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요나라나 고려에 따라 여러 차례 충성을 바꾸었다.[5] 요나라와 고려는 국경 지역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여진족 정착민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였다.[5] 이 여진족들은 공물을 바쳤지만, 그 대가로 고려 조정으로부터 후한 보상을 기대했다.[5] 그러나 공물을 바친 여진족들이 고려 국경을 침략하는 경우가 흔했다.[5]

3. 고려 시대

993년 요나라고려 국경 사이의 땅은 여진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고려 외교관 서희는 과거 고려의 전신 고구려에 속했다며 요나라와 협상하여 압록강까지의 땅을 획득하였다.

태조는 후삼국 시대 전쟁 중 여진족 기병을 크게 활용하여 후백제를 격파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은 태조 때부터 고려의 조공국이었으나, 여진족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요나 고려에 따라 여러 차례 충성을 바꾸었다. 요와 고려는 고려와 요의 방어 시설 너머 국경 지역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여진족 정착민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였다.[5] 이들은 고려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후한 보상을 기대했지만, 공물을 바친 여진족들이 고려 국경을 침략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경 지역은 대체로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고, 여진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많은 선물이 주어졌다. 때로는 여진족이 고려에 복속하여 시민권을 얻기도 했다.[5]

이후, 오야슈의 동생 아구다는 금나라(1115~1234)를 건국했다. 금나라는 건국 당시 고려를 "모국" 또는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10] 금나라는 1125년 요나라를 정복하고 1127년(정강의 변)에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했다. 금나라는 고려에도 압력을 가하여 고려가 그들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했다. 고려의 많은 이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금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자신의 정치적 권력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126년 고려왕은 자신을 금의 봉신(조공국)으로 선포했다.[11][12]

3. 1. 고려-여진 관계의 변화

고려여진 사이의 조공 관계는 완야(完顔) 씨족의 여진 지도자 오야슈(烏雅術, 재위 1103~1113) 통치하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완야 씨족은 고려에 복속한 여진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고려에 대한 씨족들의 충성을 깨뜨리고 여진족을 통합했다.[6] 이로 인해 두 세력 간의 갈등이 발생하여 고려는 여진족 영토에서 철수하고 분쟁 지역에 대한 여진족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12세기 초, 고려는 국경 지역을 되찾기 위해 일련의 군사 작전을 펼쳤다. 고려는 이전부터 여진족과 갈등을 겪었다. 984년 고려는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지 못했다.[7] 1056년 고려는 동여진을 물리치고 20개가 넘는 마을을 파괴했다.[8] 1080년 문종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0개 마을을 정복했다. 그러나 완야 씨족의 부상으로 고려군의 질은 저하되었고, 대부분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여진족과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고, 대개 기마병을 앞세운 여진족이 승리했다. 1104년 완야 여진족은 저항하는 부족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충주에 도달했다. 고려는 임간을 보내 여진족과 대치시켰지만, 훈련받지 않은 그의 군대는 패배했고 여진족은 충주성을 점령했다. 임간은 파면되었다가 복직되었고 1112년 문관으로 사망했다. 윤관이 전쟁을 맡았지만 상황이 불리하여 평화를 맺고 돌아왔다.[9]

3. 2.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윤관(1040~1111)과 그의 군대


윤관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고려 기병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왕에게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별한 부대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9] 별무반은 기병, 보병, 그리고 항마군(악마를 정복하는 군단)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다.[9]

1107년 12월, 윤관과 오연천은 1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9] 고려군은 여진족을 무찌르고 국경 지역에 동북 9성을 쌓고, 경계를 표시하는 비석을 세웠다.[9]

하지만 여진족은 끊임없이 동북 9성을 공격하고 외교적으로 고려를 압박했다. 또한 고려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음모가 일어나, 결국 1108년 윤관은 벼슬에서 쫓겨나고 동북 9성은 여진족에게 반환되었다.[9] 9성은 完顏|완안중국어 씨족에게 넘겨졌다.[9]

브루커에 따르면, 고려는 애초에 9성이 위치한 지역을 실제로 지배하지 못했고, 지배권을 유지하려면 군사적으로 우세한 여진군과 오랫동안 싸워야 했을 것이며, 이는 엄청난 비용을 초래했을 것이다. 9성은 포주(의주)와 교환되었는데, 이 지역은 고려가 여진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주저했을 때 여진족이 다시 다투었던 지역이다.[5]

4. 조선 시대

조선은 여진족에 대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군사력을 동원하는 동시에 벼슬과 작위를 내리고, 여진족이 모피를 조선의 곡식과 교환하게 하여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해주는 등 유화책을 폈다. 이지란의 건의와 사례를 시작으로, 여진족과의 통혼을 통해 이들을 조선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조공 관계, 선물, 문화적 동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진 부족들은 복종과 반란을 반복했다. 1400년대에 명 영락제는 여진족을 조선의 영향력에서 몰아내고 중국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15][16]

먼터무오도리 여진의 수장으로 태조 (조선)을 따랐던 인물이다. 조선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제의를 거절할 것을 요청했으나, 1412년 먼터무가 명나라에 복종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17][18][19][20]

4. 1. 조선의 대여진 정책

조선은 여진족을 상대로 강경책과 회유책을 모두 사용했다. 때로는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기도 했지만, 관직과 작위를 주고, 여진족이 모피를 조선의 농작물과 교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여진족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13][14] 이지란의 건의와 모범을 시작으로, 조선인과 여진족 간의 결혼을 통해 여진족을 조선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공 관계, 선물, 문화적 동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진 부족들은 복종과 반란을 반복했다.[15][16]

맹템무(mnc)는 오도리 여진의 수장으로, 고려 국경 장수 시절부터 조선 태조를 따랐던 인물이다. 그는 이성계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가난한 시절에 살 수 있는 땅을 제공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조선은 맹템무에게 명나라의 제의를 거절할 것을 요청했지만, 1412년 맹템무가 명나라에 복종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17][18][19][20]

세종 대에 조선은 여진족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실시하여 오도리, 마오리안, 우디게 부족을 격퇴하고 함경도를 장악했다. 1450년경 이 지역에 여러 국경 요새가 설치되면서 현재의 한국 국경선이 형성되었다.[21]

4. 2. 세종의 북방 개척과 4군 6진

세종은 여진족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벌여 오도리족, 마올리족, 우디게족을 몰아내고 함경도를 장악했다.[21] 이는 1450년경 이 지역에 여러 국경 요새가 설치되면서 현재의 한국 국경이 형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다.[21]

5. 여진족의 성장과 후금 건국

조선은 강력한 수단과 유인책을 모두 동원하여 여진족을 상대하려 했다. 때로는 직위와 학위를 주며 달래기도 하고,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여진족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 농작물과 모피를 교환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이지란의 권유와 본보기를 시작으로 조선과의 결혼을 통해 여진족을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조공 관계와 선물, 문화적 적응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진족은 한 해는 복종하다가 다음 해에는 반항했다. 1400년대에 명나라 영락제는 여진족을 조선의 영향력에서 몰아내고 대신 중국이 그들을 지배하게 하려고 결심했다.

여진의 핵심 지도자 먼터무는 오돌리 여진의 수장으로, 태조 시절부터 고려 국경 장수 시절부터 조선 태조의 신하였다. 먼터무는 명나라의 제의를 거부하라는 조선의 요청을 받았지만, 1412년 먼터무가 망하고 명나라에 복종한 이후로 성공하지 못했다.

세종대왕이 이끄는 조선은 여진족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벌여 오돌리족, 마올리족, 우디게족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장악했다. 이는 1450년경 이 지역에 여러 국경 요새가 세워졌을 때 한국의 현대 국경을 형성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신으로서,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 등 여진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자 했다. 1590년대 임진왜란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건주 여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으나, 조선의 의심으로 인해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1618년 칠대고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며 후금을 건국했다.[26]

5. 1. 임진왜란과 여진족

후금의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가신으로서,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 등 여진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자 했다.[22][23] 1590년대 임진왜란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건주 여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겼기 때문에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만 이 제안을 했다. 그러나 조선은 누르하치의 제안을 의심하여 거절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다른 여진 지도자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25]

5. 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누르하치는 명나라가신이었으나,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했다.[22] 여기에는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이 포함되었다.[23] 그는 1590년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건주 여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겼기에,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만 이러한 제안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의심으로 인해 누르하치의 제안은 거절당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다른 여진 지도자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25]

누르하치는 이후 후금을 건국하고 1618년 칠대고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26] 1627년 후금의 조선 침입(정묘호란) 당시 누르하치의 조카 아민이 이끄는 3만 명의 여진 군대가 조선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여진은 조선에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636년,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청 황제인 홍타이지는 인조가 여진(만주) 반대 정책을 고수하자 청나라의 조선 침입(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패배한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중국의 제도에 따라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되었다.[27]

6. 여파



누르하치는 여진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는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이 포함되었다.[22][23] 1590년대 임진왜란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건주 여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겼기 때문에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만 이러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의심으로 인해 누르하치의 제안은 거절당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다른 여진 지도자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25]

이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고 1618년 칠대고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26] 1627년 후금의 조선 침입 당시 누르하치의 조카 아민이 이끄는 3만 명의 여진 군대가 조선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여진은 조선에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636년,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청 황제인 홍타이지는 인조가 여진(만주) 반대 정책을 고수하자 조선에 대한 징벌 원정을 파견했다. 패배한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중국의 제도에 따라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되었다.[27]

참조

[1] 서적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Jimoondang
[2] harvnb
[3] 문서 “自契丹东京至我安北府数百里之地,皆为生女真所据。光宗取之,筑嘉州、松城等城,今契丹之来,其志不过取 北二城,其声言取高勾丽旧地者,实恐我也”(高丽史)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11-25
[5] harvnb https://books.google[...]
[6] 서적 China Under Jurchen Rule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5-03-18
[7] 웹사이트 거란의 고려침입 http://contents.hist[...] 국립한국사편수원 2019-04-22
[8] 웹사이트 김단(金旦) https://encykorea.ak[...]
[9] 백과사전 여진정벌 http://encykorea.aks[...]
[10]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07-30
[11] harvnb
[12] harvnb https://books.google[...]
[13] 서적 https://books.google[...]
[14] 서적 https://books.google[...]
[15] 웹사이트 http://citation.alla[...]
[16] 서적 Ming China, 1368-1644: A Concise History of a Resilient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17] 서적 https://books.google[...]
[18] 서적 https://books.google[...]
[19] 서적 https://books.google[...]
[20] 웹사이트 http://citation.alla[...]
[21] 서적 Historical Atlas of the Medieval World, AD 600-1492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2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9, The Ch'ing Empire to 1800, Part 1
[23]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4] 서적 Ginseng and Borderland: Territorial Boundaries and Political Relations Between Qing China and Choson Korea, 1636-1912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17-09-19
[25]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9, The Ch'ing Empire to 1800, Part 1
[26] 서적 China's Challenges and International Order Transitio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7] 서적 World History EDT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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