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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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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현우는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후 송진우 암살 사건의 주범으로, 1947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12월, 그는 6명의 행동대원과 함께 한국민주당 총재 송진우의 자택을 습격하여 암살했다. 한현우는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했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6.25 전쟁 중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 교류하며 반공 활동을 했고, 1968년 외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07년 일본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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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현우
출생일1912년 5월 29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기 경성부
본관청주
상훈1968년 당시 최규하 외무부 장관 표창장
사망일2007년 11월 24일
사망지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거주지일본 오사카
배우자초배 강원 춘천댁(1943년 사별)
계배 일본 대판댁(1952년 재혼)
자녀2녀
(1939년생 장녀, 1954년생 차녀)
국적대한민국
학력
학력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법률학과 3학년 1학기 중퇴(1936년 6월)
일본 도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학사 졸업(1942년 3월)
경력
활동 기간1941년 12월 8일~1947년 2월 14일
주요 활동조선독립연맹(朝鮮獨立聯盟)의 대의원 겸 최고위원
기타 정보
친척전병민(첫째 사위)
웹사이트고하 송진우 총재 암살 사건

2. 생애

한현우는 1945년 12월 30일 새벽, 송진우 한국민주당 총재 겸 수석총무를 암살했다.[2] 1946년 4월 8일 체포된 한현우는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옹호하고 민족 분열을 획책했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주장했다.[6] 1947년 2월 14일, 송진우 피살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11]

1948년 9월 5일 옥중 인터뷰에서 한현우는 자신의 행동이 국가적 견지에서 사회적으로 그른 자를 처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2]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으나, 9·28 서울 수복 이후 자수하지 않았다.[13] 1951년 8월 28일 일본으로 건너가 재혼했다.[14]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는 책을 냈고, 박정희 대통령과 서신을 교환하며 유엔군 주둔 필요성 등을 주장했다.[15] 1968년 외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17] 2007년 11월 24일 일본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932년 일본 제국으로 유학, 1941년 12월에 와세다 대학교 정경과 학사과정 졸업 시험에 합격하여 이듬해 1942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학사 졸업하였다. 10년여 만에 경성부로 귀국하였으나,[1] 1943년 4월, 경기 가평군에서 첫 부인(강원 춘천댁)을 병으로 여의었다.

2. 2. 송진우 암살 사건

1945년 12월 30일 새벽 2시 10분, 한현우는 6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송진우 (한국민주당 총재 겸 수석총무) 자택으로 찾아가 암살했다. 이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송진우에게 명중했다.[2]

1946년 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등을 체포했다.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던 중, 자신의 지휘 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4]

한현우는 송진우 암살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송진우가 '근대국가와 민주정치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 민족은 선진국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신탁통치도 선진국의 지도를 받는 훈정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살해할 결심을 갖게 되었다",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지도자는 힘으로 숙청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며 승리라는 생각으로 암살에 착수하였다."[6]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고하 송진우 한국민주당 총재 사살범 한현우 사건(송진우 피살 사건)' 등으로 4명에 대한 최종 언도 공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11]

1948년 9월 5일 옥중 인터뷰에서 한현우는 "송진우 암살 사건에 관해서는, 범행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심경의 변화가 없다. 테러가 당쟁에서 발생하는 것은 배격하지만, 정당·단체를 높은 데서 내려다보며 하는 국가적 견지의 테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나는 국가적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그른 자를 처치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12]

2. 3. 석방 이후의 삶과 죽음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을 이끌고 남침한 리승엽의 인민군 서울 점령으로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9·28 서울 수복으로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3대 부처는 인민군에 의해 특별사면 조처되어 출옥한 죄수들의 자수를 권하였으나 한현우는 자수하지 않았다. 1951년 8월 21일경, 한현우가 경남 부산 시내를 횡행한다는 진술들이 나오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3] 1951년 8월 28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성과 재혼(두번째 결혼)하였다.[14]

1960년대에 이르러 그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는 「왜 군사혁명이 일어났는가」라는 책을 냈고, 박정희 대통령과 30여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며, 박정희의 호출로 서울을 방문하여 「유엔군 절대 주둔 필요」등을 주장했다. 1968년 3월, 박정희의 연락 심부름을 하던 사람은, 훗날 1994년 12월 김영삼 정부 당시 논란이 됐던 전병민이라고 설명했다.[15][14] 그는 범행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전과를 말소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호적에는 고하를 암살한 전과가 없다고 말했다.[14]

일본 체류 중 반공 활동과 칼럼 등을 기고한 공로로 1968년 외무부 장관 표창(제2073호)을 받았다.[17]

2007년 11월 24일, 일본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3. 논란 및 비판

한현우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으로 여러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송건호는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 중에서도 전형적인 갑류(甲類)"라고 평가했다.[16]

3. 1. 송진우 암살의 배후 논란

1945년 12월 30일 새벽, 한현우는 6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한국민주당 총재 겸 수석총무 송진우의 자택으로 찾아가 그를 암살했다. 송진우는 그들이 쏜 13발의 탄환 중 6발을 맞고 사망했다.[2]

미국 시카고 대학교 교수 브루스 커밍스는 송진우 암살 당시 자료를 근거로 한현우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지목했다.[3]

1946년 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등을 체포했다.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던 중 유근배, 김의현과 함께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4] 경찰 취조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현우는 1942년 3월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년 5월경 일본에서 국수주의자 나카노 세이고와 고이치 호즈미를 숭배하며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연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지하운동을 했다. 1944년 3월, 비밀이 탄로나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45년 2월 25일강원도 춘천의 처가에서 수양하다가 8월 17일 상경했다. 이들은 1945년 11월 초부터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몄으며, 12월 말 신탁통치 문제에 격분하여 12월 30일 송진우를 먼저 암살했다고 한다.[1]

한현우는 송진우가 "근대국가와 민주정치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 민족은 선진국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신탁통치도 선진국의 지도를 받는 훈정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살해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지도자는 힘으로 숙청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며 승리"라고 생각하여 암살에 착수했다고 주장했다.[6]

한현우는 송진우 암살이 단독 범행이며 배후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김구이승만이 자신의 행동을 의거로 칭찬했다고 주장했다.[7][8][9] 한현우 등이 재판에서 '송진우는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고 주장한 것은 12월 29일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의 발언을 의미하며, 강준만은 이 발언이 존 하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7]

1946년 9월 3일, 한현우의 지도자 전백에 대한 공판에서 검찰은 전백이 한현우에게 일본제 권총을 주고 범행 후 그를 칭찬했다고 기소했다.[10]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송진우 피살 사건 등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11]

1948년 9월 5일, 옥중 인터뷰에서 한현우는 "국가적 견지에서 하는 테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사회적으로 그른 자를 처치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수립된 정부는 자주통일국가가 아니고 불완전하지만, 이를 토대로 통일이 될 것을 원한다"고 밝혔다.[12]

3. 2.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한현우는 1950년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의해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9·28 서울 수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자수를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수하지 않았다. 1951년에는 부산에서 그를 봤다는 목격담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13]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혼하였다.[14]

1960년대에 이르러 그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는 책을 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30여 차례 서신을 교환했다. 박정희의 호출로 서울을 방문하여 '유엔군 절대 주둔 필요' 등을 주장했는데, 1968년 3월, 박정희의 연락 심부름을 한 사람은 훗날 김영삼 정부 당시 논란이 되었던 전병민이라고 설명했다.[15][14] 한현우는 범행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전과를 말소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호적에는 고하를 암살한 전과가 없다고 말했다.[14]

일본 체류 중 반공 활동과 칼럼 기고 등의 공로로 1968년 외무부 장관 표창(제2073호)을 받았다.[17]

3. 3. 극단적 민족주의

송건호는 한현우가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 중에도 전형적 갑류(甲類)》라고 촌평 및 평가했다.[16]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초배 부인이름 미상?1943년일제강점기 강원 춘천댁, 1936년 일본 제국 도쿄에서 첫 결혼, 일제강점기 경기 가평군에서 사별.
장녀한씨1939년?일본 제국 도쿄 출생
맏사위전병민1947년 11월 3일[18]?미군정 조선 시대 충청남도 홍성군 출생, YS 문민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 정책수석 비서관 후보자,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 역임
계배 부인이름 미상?2016년일본 오사카 여성, 1952년 일본 오사카에서 재혼.
차녀한씨1954년?일본 오사카 출생
둘째 사위곽모돈1949년?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군 출생


5. 학력

참조

[1] 웹인용 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3]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001
[4] 웹인용 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5] 문서 한현우의 1943년 사별한 첫 부인 춘천댁의 강원도 춘천 친정댁
[6] 웹사이트 고하 송진우 기념사업회 http://goha.or.kr/ma[...]
[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8]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인물과 사상사 2004
[9] 서적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 동아일보사 1990
[10] 웹인용 宋鎭禹암살범 韓賢宇의 지도자 全栢의 공판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11] 웹인용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 4명에 대한 최종언도공판 개정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12] 웹인용 宋鎭禹 암살범 韓賢宇, 朝鮮精版社사건 朴洛鍾 옥중 인터뷰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13] 웹인용 한현우, 안두희의 근황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14] 웹사이트 "朴대통령이 古下암살전과 말소해 줬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null
[15] 뉴스 고하 암살 한현우씨 기자회견 "전(田)씨 박대통령 연락심부름"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3-02-23
[16] 서적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2
[17] 뉴스 "전병민씨 경호실 요원 추측" 고하 암살범 한현우씨 증언(2) 한겨레신문 1993-02-24
[18] 웹사이트 문민정부 3일 수석’ 정치컨설턴트 전병민씨 http://www.hani.co.k[...] 한겨레 2006-02-26
[19] 문서 1993년 당시 YS 문민 정부 청와대 비서실 초대 정책 수석 비서관 후보자
[20] 뉴스 문민정부 5년 재조명 ①YS 개혁인사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99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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