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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E. 키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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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즈번드 E. 키멜은 미국의 해군 제독으로, 1882년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1968년 사망했다. 1904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군 차관의 부관을 지냈다. 1941년 2월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그의 책임 유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으며, 사후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완전한 명예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생애

허즈번드 E. 키멀은 1882년 2월 26일 미국 켄터키주 헨더슨에서 태어났다.[28] 그의 아버지는 육군 소령이었다. 1904년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동기로는 훗날 제독이 되는 윌리엄 할시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군 차관의 부관으로 일하며 루스벨트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주로 전함 관련 근무를 거쳐 1937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7 순양함 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41년 1월,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이 함대의 진주만 상주에 반대하다 해임되자, 키멀은 그 후임으로 1941년 2월 1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임 제독 31명(혹은 46명)을 제치고 발탁되었으며,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인사로 평가받는다. 이 인사는 키멀 본인도 놀랄 정도였으며, 당시 항해국장이었던 체스터 니미츠 소장도 사령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한 바 있다. 키멀은 이 직책을 맡으며 중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진주만 공격이 발생하자, 키멀은 공격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12월 17일 대통령 명령으로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소장으로 강등되었다. 1942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68년 3월 14일 코네티컷주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허즈번드 E. 키멀은 1882년 2월 26일 미국 켄터키주 헨더슨에서 태어났다.[28][1] 그의 부모는 시벨라 "시비" 램버트 키멜(1846–1919)과 메이저 매닝 마리우스 키멜(1832–1916)이었다.[1] 아버지 매닝 마리우스 키멜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처음에는 연방 측에서 싸웠으나 이후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남부 연합으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키멀은 허먼 허즈번드의 후손이기도 하다.[2]

키멀은 평생 동안 "킴"(Kim), "허비"(Hubbie)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으며, 나중에는 "무스타파"(Mustafa)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는 그의 성 "키멜"(Kimmel)과 튀르키예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름 "케말"(Kemal) 사이의 발음 유사성(동음이의어)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29][3]

그는 1904년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동기로는 훗날 제독이 되는 윌리엄 할시가 있다. 키멀은 토머스 C. 킨케이드 제독의 여동생인 도로시 킨케이드(1890–1975)와 결혼하여 세 아들, 매닝, 토머스 K. 키멜, 에드워드 R. 키멜을 두었다.

2. 2. 해군 경력

1904년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1] 그의 동기 중 한 명은 훗날 원수가 되는 윌리엄 할시였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카리브해의 여러 전함에서 복무했으며,[1] 1907년에는 대백색함대의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하여 USS 조지아에 배속되었다.[1] 이후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 작전에 참전하여 1914년 4월 부상을 입기도 했다.[1]

1915년에는 잠시 해군 차관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보좌관으로 일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그랜드 함대 소속 제6전투전대 역할을 수행한 미국 전함 제9사단에서 사격 장교로 복무했다.[1]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함 USS 아칸소의 부관을 지냈고, 워싱턴 D.C.와 필리핀 등지에서 근무했다. 또한 해군 전쟁 대학에서 고급 과정을 수료했으며, 두 개의 구축함 사단을 지휘한 경력도 있다.[1]

1926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1] 1937년까지 미국 해군부 내 여러 보직을 거치고 구축함 전대와 전함 USS 뉴욕의 함장을 역임했다.[1]

1937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장 계급으로 순양함 제7사단을 지휘하며 남아메리카 지역 외교 순방 임무를 수행했고, 1939년에는 전투 전력 순양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4] 1941년 2월 1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대장으로 진급했다.

2. 3. 태평양 함대 사령관

키멀(가운데)은 1941년 진주만에서 참모장인 윌리엄 "포코" 스미스, 작전 참모 겸 참모장인 월터 S. 델라니 대위(왼쪽)와 면담하고 있다.


1941년 2월, 제임스 O. 리차드슨 제독은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한 태평양 함대가 첫 번째 목표가 될 것이라고 항의하는 등 여러 이유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키멀은 리차드슨의 후임으로 미국 함대 사령관(CINCUS) 겸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CINCPACFLT)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1941년 2월 1일 일반 명령 제143호 발효로 재설정되었으며, 키멀은 이날부터 임시 제독(대장) 계급으로 지휘를 맡았다.[5] 그는 자신보다 선임인 31명(다른 자료에서는 46명)을 제치고 발탁되었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였다. 키멀보다 해군사관학교 1년 후배였던 항해국장 체스터 니미츠 소장도 태평양 함대 사령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너무 젊다는 이유로 고사하여 키멀이 임명되었다. 키멀 자신도 이 결정에 놀랐다고 전해진다.

키멀은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는 근면한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에 집착하여 위임할 수 있는 사소한 일까지 직접 챙겼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 반면, 키멀의 함대 포술 장교였던 윌러드 A. 키츠는 키멀의 지휘 아래 "함대의 효율성과 훈련 수준이 최고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1941년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 기동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으며 훗날 5성 함대 제독으로 승진한 윌리엄 할시 주니어는 키멀을 "이 직책에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

함대 기지는 1940년 5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이전되었다. 키멀의 전임자 리차드슨은 이 이전에 반대하고 함대의 취약성을 경고했다가 해임된 바 있다.[7] 키멀 역시 진주만의 취약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8일, 그는 해군작전부장(CNO) 해럴드 레이스포드 스타크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잠수함, 공습, 또는 합동 공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공격 세력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8]

키멀은 태평양 지역의 방어 강화에도 힘썼다. 1941년 4월 18일, 그는 CNO에게 웨이크 섬 기지 건설과 미국 해병대 해병 방어대대 주둔을 위한 추가 자원을 요청했다.[4] 8월 19일 첫 해병대 부대가 웨이크 섬에 배치되었다. 미드웨이 해군 항공 기지는 활주로와 지원 시설 완공 후 8월에 임무를 시작했고, 곧이어 해병대 부대가 배치되었다.[9] 11월에는 USS 엔터프라이즈에 해병대 전투기와 조종사를 웨이크 섬으로 수송하도록 명령하여 주둔군을 강화했으며, USS 렉싱턴에는 12월 5일 진주만을 출발하여 해병 급강하 폭격기를 미드웨이 섬으로 수송하도록 지시했다. 이 임무 때문에 두 항공모함진주만 공격 당일 진주만에 없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발생하여 2,403명의 미국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공격 당시 키멀의 정보 장교였던 에드윈 T. 레이턴은 키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키멀은 잠수함 기지 사무실 창가에 서서 돌처럼 굳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항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사용된 .50 구경 기관총 탄환 하나가 창문을 뚫고 날아와 그를 스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탄환은 그의 흰색 제복을 찢고 가슴을 스쳤다. 키멀은 그의 통신 장교인 모리스 E. 커츠 중령에게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10][11] 다큐멘터리 The World at War에서는 공격 당시 키멀 제독과 함께 있었던 한 해군 장병이, 키멀이 함대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지휘가 곧 끝날 것임을 직감하고 스스로 4성 어깨 견장을 떼어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12]

결국 키멀은 진주만 공격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41년 12월 17일 대통령 명령으로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서 해임되었으며, 계급도 소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1942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2. 4. 진주만 공격과 해임



1941년 8월, 하와이를 방문한 루이스 마운트배튼(가운데)을 맞이하는 키멜(오른쪽)과 쇼트(왼쪽)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는 1940년 5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이전되었으며, 키멀은 함대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를 인지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8일, 키멀은 해군 작전 참모장(CNO) 해럴드 R. 스타크 제독에게 편지를 보내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잠수함, 공습, 또는 합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공격 세력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8]


키멀은 진주만 방어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941년 4월, 그는 CNO에게 웨이크 섬 기지 건설과 해병대 방어대대 주둔을 위한 추가 자원을 요청했다.[4] 8월에는 미드웨이 섬 해군 항공 기지가 임무를 시작했고 해병대가 주둔했다.[9] 11월에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렉싱턴을 이용해 각각 웨이크 섬과 미드웨이 섬으로 해병대 항공기를 수송하도록 명령했다. 이 때문에 두 척의 항공모함은 진주만 공격 당일 진주만에 없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군 및 민간인 2,403명이 사망했다. 공격 당시 키멀의 정보 참모였던 에드윈 T. 레이턴은 당시 키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키멀은 잠수함 기지의 사무실 창가에 서서 돌처럼 굳은 고통에 휩싸인 채 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는 항구 건너편에서 벌어진 끔찍한 격노를 지켜보면서 다 쓴 .50 구경 기관총 탄환이 유리를 뚫고 날아왔다. 그것은 제독을 스치고 바닥으로 쨍그랑 떨어졌다. 그것은 그의 흰색 재킷을 찢고 가슴에 부어오르게 했다.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키멜은 그의 통신 장교인 모리스 E. 커츠 사령관에게 중얼거렸다.[10][11]

공격 발생 10일 후인 12월 17일, 키멀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CINCPACFLT)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그는 웨이크 섬 구출 및 증원 작전을 포함한 반격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제독 윌리엄 S. 파이가 임시로 지휘를 맡았으나, 웨이크 섬 작전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12월 31일,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이 대장으로 승진하여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정식 부임했다. 키멀이 겸임하던 미국 함대 총사령관(CINCUS) 직책은 미국 함대 사령관(COMINCH)으로 개칭되어 대서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어니스트 J. 킹 제독에게 이관되었다.

194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웬 로버츠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로버츠 위원회를 임명하여 진주만 공격을 조사하도록 했다. 위원회는 키멀과 하와이 지구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이 공격에 대비한 판단 착오와 직무 유기의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키멀은 여러 청문회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정을 방어했다. 같은 해 1월 열린 군법 회의에서는 "전쟁 직전이라는 사태가 필요로 했던, 적절한 방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7]

1944년, 해군 장관 대행 제임스 V. 포레스탈은 아돌푸스 앤드류스 제독, 오린 G. 머핀 제독(위원장), 에드워드 C. 칼퍼스 제독으로 구성된 해군 조사 위원회를 소집하여 진주만 공격의 책임을 재조사하도록 했다.[13][14] 위원회는 키멀에게 제공된 정보가 제한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결정은 옳았다고 판단하며 사실상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대신 위원회는 해럴드 R. 스타크 제독이 키멀에게 임박한 전쟁 위험을 충분히 경고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5] 그러나 이 위원회의 보고서는 미국 암호 해독 능력이라는 중요한 군사 기밀 때문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포레스탈 장관은 위원회의 결론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으며, 키멀과 스타크 모두 "그들의 계급과 할당된 임무에 상응하는 지휘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6]

대전 후, 키멀의 아나폴리스 동기였던 할제이 원수는 자서전에서 키멀을 옹호하며 "나의 모든 경험 중에서, 이토록 심한 역경(진주만 공격) 속에서, 함대의 효율을 높이고 전쟁 준비에 이토록 열심히 노력한 미국 함대 사령관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 때 누가 지휘하든, 키멜이 실시한 이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3. 진주만 공격 책임 논란

역사가들은 미국이 모든 면에서 진주만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데 동의하며, 일본군이 훈련, 장비, 경험, 계획 면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태평양 함대의 준비 부족에 대한 키멜 제독의 책임 범위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일각에서는 키멜 제독과 함께 해임된 쇼트 장군이 워싱턴 상급자들의 실패에 대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L. "네드" 비치 대령 등이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며, 키멜의 지지자들은 공격 가능성에 대한 전쟁부의 경고가 악천후로 인해 라디오 대신 전보로 발송되어 전달이 지연된 점 등 통제 불가능했던 상황과 관료적 실수를 지적한다.[18] 실제로 키멜은 공격이 시작된 후에야 경고를 받았다. 키멜의 수석 정보 장교였던 에드윈 T. 레이턴 역시 키멜에게 완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제한된 정보 하에서 정찰 자원을 가장 합리적으로 운용했다고 옹호했다.[19]

반면, 비판자들은 키멜이 공격 10일 전 함대의 "방어 배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된 위협을 파괴 행위로 오판하여 함대를 항구에 묶어두고 경계 태세를 강화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정보 부대가 일본 항공모함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을 때 장거리 공중 또는 해상 초계를 지시하지 않았으며[20], 항구 방어 책임자인 쇼트 장군과 원활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도 비판의 근거가 된다.[21]

진주만 공격 열흘 뒤인 1941년 12월 17일, 키멜은 월터 쇼트 육군 중장과 함께 해임되었다. 이후 오웬 로버츠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로버츠 위원회 조사와 1942년 군법 회의를 통해 "전쟁 직전 상황에 필요한 적절한 방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7].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1964년 인터뷰에서 키멜이 사전 정보를 얻어 일본 함대를 요격하려 했다면 속도 차이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며, "12월 7일에 우리 함대가 진주만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였다"고 평가했다.[22] 진주만에서는 승무원 구조가 용이했고, 침몰한 전함 8척 중 6척이 인양되어 수리 후 다시 사용될 수 있었다.[23] 이는 Station HYPO 책임자였던 조셉 로쉬포트가 공격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평가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24]

전후 키멜의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1994년 키멜의 가족은 그의 4성 계급 복원을 세 번째로 요청했으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를 거부했다. 1995년 국방부 연구는 다른 고위 장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키멜을 완전히 면죄하지는 않았다. 1999년 5월 25일, 미국 상원은 찬성 52표 대 반대 47표로 키멜과 쇼트를 면죄하고 대통령에게 사후 계급 복원을 요청하는 구속력 없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20] 결의안 후원자 중 한 명인 스톰 서먼드 상원의원은 키멜과 쇼트를 "진주만의 두 최종 희생자"라고 불렀으며, 2000년 상원 조사에서도 키멜의 행위를 옹호하는 보고서가 나왔다.[25]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과 후임자들은 이 결의안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키멜의 아나폴리스 동기였던 할제이 원수는 자서전에서 "나(할제이)의 모든 경험 중에서, 이토록 심한 역경(진주만 공격) 속에서, 함대의 효율을 높이고 전쟁 준비에 이토록 열심히 노력한 미국 함대 사령관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 때 누가 지휘하든, 키멜이 실시한 이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하며 키멜을 옹호했다.

3. 1. 키멜 옹호론



키멜은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는 근면한 인물로 알려졌으나[4],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에 얽매여 부하에게 일을 맡기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키멜 휘하에서 함대 포술 장교를 지낸 윌러드 A. 키츠는 "함대의 효율성과 훈련 수준이 최고 수준이었다"고 증언하며 키멜의 지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당시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이었고 훗날 5성 함대 제독까지 오른 윌리엄 할시 주니어는 키멜을 가리켜 "이 직책(태평양 함대 사령관)에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6]

키멜 자신도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8일, 그는 해군 작전 참모장(CNO) 해럴드 레이스포드 스타크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잠수함, 공습, 또는 합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공격 세력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8] 실제로 그는 웨이크 섬과 미드웨이 섬 등 외곽 기지의 방어력 강화를 추진했으며[4][9], 공격 직전에는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CV-6)USS 렉싱턴(CV-2)을 이용해 이들 섬에 해병대 항공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지시했다. 이 때문에 두 척의 항공모함은 진주만 공격 당시 항구에 없어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공격 당시 키멜의 정보 참모였던 에드윈 T. 레이턴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며 돌처럼 굳어버린 키멜의 모습을 묘사했다. 날아온 .50 구경 기관총 탄환이 그의 옷을 찢고 가슴을 스치자, 키멜은 통신 장교에게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10][11]

진주만 공격 이후 키멜은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임명한 로버츠 위원회는 키멜과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에게 판단 착오와 직무 유기 혐의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키멜은 청문회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전쟁 중인 1944년, 제임스 V. 포레스탈 해군 장관의 지시로 열린 해군 조사 위원회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키멜에게 주어진 제한적인 정보를 고려했을 때 그의 결정은 타당했으며, 오히려 워싱턴의 스타크 제독이 전쟁 임박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확립된 사실에 근거하여, 위원회는 해군에서 어떤 사람도 범죄를 저지르거나 심각한 비난을 받은 바가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리며 사실상 키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15] 하지만 포레스탈 장관은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고 키멜과 스타크 모두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최종적으로 평가했다.[16]

전후, 키멜의 아나폴리스 동기였던 할시 제독은 자서전에서 키멜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나(할제이)의 모든 경험 중에서, 이토록 심한 역경(진주만 공격) 속에서, 함대의 효율을 높이고 전쟁 준비에 이토록 열심히 노력한 미국 함대 사령관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 때 누가 지휘하든, 키멜이 실시한 이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키멜이 부당하게 희생양이 되었음을 시사했다.

3. 2. 키멜 비판론



키멜은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는 근면한 지휘관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세부적인 사항에 얽매인다는 비판도 받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될 사소한 일까지 직접 챙기려 했으며, 이는 자신감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4]

진주만 공격 이후 키멜은 공격 발생 열흘 만인 1941년 12월 17일, 하와이 방면 육군 사령관이었던 월터 쇼트 중장과 함께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임명한 로버츠 위원회는 1942년 조사를 통해 키멜과 쇼트가 공격 직전 상황에서 판단 착오와 직무 유기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같은 해 열린 군법 회의에서도 키멜은 "전쟁 직전이라는 사태가 필요로 했던, 적절한 방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7]. 이는 공격 10일 전 함대 방어 배치 명령에도 불구하고 파괴 행위를 주요 위협으로 간주하여 함대 경계를 소홀히 하고, 일본 항공모함 추적 실패 및 장거리 초계 명령 부재 등 구체적인 지휘 실패로 이어졌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사에서는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1944년 제임스 V. 포레스탈 해군 장관의 지시로 열린 해군 조사 위원회는 키멜에게 주어진 정보가 제한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사실상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오히려 당시 해군 작전 참모 총장이었던 해럴드 R. 스타크 제독이 키멜에게 임박한 전쟁 위험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5]

하지만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 조사 위원회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위원회가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보았으며, 키멜이 가지고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공격을 막거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레스탈은 최종적으로 키멜과 스타크 모두 "그들의 계급과 할당된 임무에 상응하는 지휘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6]

3. 3. 중립적 평가

키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는 근면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지만[4],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써 사소한 일까지 직접 검토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러한 모습이 자존감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4]

그러나 키멜의 지휘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함대 포술 장교였던 윌러드 A. 키츠는 나중에 키멜의 지도 아래 "함대의 효율성과 훈련 수준이 최고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1941년에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 기동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으며 전쟁 중 5성 함대 제독으로 승진한 윌리엄 할시 주니어는 키멜을 "이 직책에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했다.[6]

진주만 공격 이후 키멜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194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임명한 로버츠 위원회는 키멜과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이 공격 직전 판단 착오와 직무 유기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키멜은 여러 청문회에서 자신의 결정을 방어하며,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반면, 1944년 제임스 V. 포레스탈 해군 장관의 지시로 열린 해군 조사 위원회는 키멜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키멜에게 주어진 정보가 제한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결정은 타당했으며, 오히려 당시 해군 작전 참모 총장이었던 해럴드 R. 스타크 제독이 키멜에게 전쟁이 임박했음을 충분히 경고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위원회는 "확립된 사실에 근거하여, 위원회는 해군에서 어떤 사람도 범죄를 저지르거나 심각한 비난을 받은 바가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15]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일본 암호 해독 성공 사실과 같은 중요한 전시 비밀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야 공개되었다.

그러나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 조사 위원회의 결론이 너무 관대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키멜과 스타크 모두 "그들의 계급과 할당된 임무에 상응하는 지휘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최종적으로 평가하며 책임을 물었다.[16]

대전 후, 키멜의 아나폴리스 동기였던 할제이 원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키멜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나(할제이)의 모든 경험 중에서, 이토록 심한 역경(진주만 공격) 속에서, 함대의 효율을 높이고 전쟁 준비에 이토록 열심히 노력한 미국 함대 사령관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더구나 이 때 누가 지휘하든, 키멜이 실시한 이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4. 사후 명예 회복 노력

1999년 5월 25일, 상원은 허즈번드 E. 키멀과 월터 쇼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서 2000년 10월 11일, 하원에서도 같은 내용의 명예 회복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이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았고, 서명 여부 판단은 다음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후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비롯하여 그 이후의 대통령들도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5. 가족 관계

부모는 시벨라 "시비" 램버트 키멜(1846–1919)과 메이저 매닝 마리우스 키멜(1832–1916)이다.[1] 아버지 매닝 마리우스 키멜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연방 측에서 싸우다 남부 연합으로 전향했다.

아내는 도로시 킨케이드(1890–1975)이며, 토머스 C. 킨케이드 제독의 여동생이다. 슬하에 세 아들 매닝, 토머스 K. 키멜, 에드워드 R. 키멜을 두었다. 장남 매닝 키멜은 1935년 애나폴리스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중 소령 계급으로 잠수함 로바로의 함장을 맡았으나, 잠수함이 격침되어 전사했다.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겸 해군 작전 부장이었던 킹 제독은 키멀의 차남 토머스 키멀을 잠수함 부함장에서 육상 근무로 옮기도록 직접 명령했다.

6. 대중 문화


  • 프랑쇼 토운은 1965년 영화 ''인 하름스 웨이''에서 키멀을 연기했으며, 영화는 그를 불운한 상황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 마틴 발삼은 1970년 영화 ''토라! 토라! 토라!''에서 키멀 역을 맡아 동정적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키멀은 열악한 통신, 부적절한 훈련, 시스템적인 준비 부족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 앤드루 더건은 1983년 TV 미니시리즈 ''전쟁의 폭풍''에서 키멀을 연기했다.
  • 콜름 피어는 2001년 영화 ''진주만''에서 키멀 역을 맡았다.
  • 데이비드 휴렛은 2019년 영화 ''미드웨이''에서 키멀을 연기했다.

7. 서훈 내역

"BASE" 버클아시아-태평양 전역 훈장
캠페인 별 1개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훈장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Two https://books.google[...] Facts on File 2017-03-16
[2] 웹사이트 York Co. grandson battles to clear admiral's name https://amp.heraldon[...]
[3] 서적 Countdown to Pearl Harbor : the twelve days to the attack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20-05-26
[4] 웹사이트 Husband Kimmel http://ww2db.com/per[...] 2020-05-26
[5]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U.S. Fleet Forces Command http://www.public.na[...] US Fleet Forces Command 2017-06-08
[6] 서적 Admiral Halsey's Story McGraw-Hill 1947
[7] 웹사이트 The Final Secret of Pearl Harbor http://www.antiwar.c[...] 2020-05-26
[8] 웹사이트 INTELLIGENCE AT PEARL HARBOR https://www.cia.gov/[...] Central Intelligence Agency 2016-12-02
[9] 웹사이트 Midway Atoll National Wildlife Refuge and Battle of Midway National Memorial https://www.fws.gov/[...] U.S. Fish and Wildlife Service 2017-06-08
[10] 서적 Delivered from Evil: The Saga of World War II https://archive.org/[...] Perennial Library
[11] 문서 And I Was There: Pearl Harbor and Midway -- Breaking the Secrets
[12] 서적 The World at War Pimlico 2001
[13] 웹사이트 Vice admiral Adolphus Andrews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Websites 2018-01-28
[14] 웹사이트 Pearl Harbor Inquiry ordered by Forrestal – Santa Cruz Sentinel, Volume 89, Number 168, 15 July 1944; page ONE https://cdnc.ucr.edu[...] cdnc.ucr.edu 2016-08-27
[15] 간행물 Report of Navy Court of Inquiry http://www.ibiblio.o[...] Government Printing Office
[16] 간행물 Fourth Endorsement to Record of Proceedings of Pearl Harbor Court of Inquiry http://www.ibiblio.o[...] Government Printing Office
[17] 서적 Silent Victory: The U.S. Submarine War Against Japan https://books.google[...] Naval Institute Press
[18] 웹사이트 Pearl Harbor Review https://www.nsa.gov/[...] National Security Agency 2016-05-03
[19] 문서 And I Was There: Pearl Harbor and Midway, Breaking the Secrets
[20] 뉴스 Military, lawmakers want Pearl Harbor commanders pardoned 1999-12-01
[21] 문서 December 7, 1941: The Day the Japanese Attacked Pearl Harbor
[22] 저널 Pearl Harbor: Military Inconvenience, Political Disaster The MIT Press
[23] 문서 Miracle at Midway
[24] 문서 Double-Edged Secrets
[25] 문서 Congressional Record, V. 146, Pt. 7, May 24, 2000 to June 12, 2000 https://books.google[...]
[26] 문서 提督ニミッツ
[27] 문서 鷲と太陽
[28]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Two https://books.google[...] Facts on File 2017-03-16
[29] 서적 Countdown to Pearl Harbor : the twelve days to the attack https://books.google[...] 20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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