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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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산대첩은 1380년 이성계가 지휘하여 왜구를 물리친 전투이다. 1376년 홍산 전투에서 패배한 왜구는 1378년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금강 하구 진포를 공격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를 약탈했다. 이에 이성계가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변안열과 함께 왜구를 격퇴했으며, 황산에서 왜구의 수장 아지발도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 전투는 왜구 격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성계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황산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고, 1977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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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전기 왜구 |
전체 | 전기 왜구 |
날짜 | 1380년 9월 |
장소 | 고려 황산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근방) |
결과 | 고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고려 |
교전국 2 | 무로마치 막부 왜구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이성계 이지란 배극렴 변안렬 |
지휘관 2 | 아지발도 |
병력 1 | 1,500명 |
병력 2 | 1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생존환자 70명을 제외한 전멸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목록 | 오예포 전투 이작도 전투 진해 전투 삼일포 전투 합포 전투 홍산대첩 행안산 전투 해풍 전투 진포 해전 황산대첩 관음포대첩 대마도 정벌 |
2. 배경
1376년 홍산에서 최영에게 패한 왜구는 잠시 주춤했으나,[2] 1378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다.[2]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 해주 등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2] 1380년(우왕 6년) 9월, 황산에서 왜구와 크게 충돌하게 되었다.[2]
2. 1. 왜구의 침입
1376년 홍산에서 최영에게 패한 왜구는 잠시 주춤했으나,[2] 1378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다.[2]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 해주 등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2]2. 2. 이성계의 등장
1376년(우왕 2년) 홍산(鴻山)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다.[2]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해주(海州), 그밖에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2]3. 경과
1380년 8월경 왜구가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금강 하구 진포에 쳐들어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고려 정부는 최무선의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격파하였으나, 배가 불타 돌아갈 길이 없어진 왜구들은 육지에서 활동하던 왜구들과 합류하여 횡포를 부렸다.[3]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을 맡겼다. 이성계는 도체찰사 변안열과 함께 왜구를 무찌르게 되었다. 왜구는 경상도 일대를 노략질한 후 사근내역(沙斤乃驛) 등의 험지(險地)를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지만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공격을 지체했다. 식량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위협까지 받은 이성계는 어쩔수 없이 부서를 재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는 산에 진을 치고 싸우므로 이성계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고, 고전 끝에 승리하였다.[3]
왜구는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호언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5] 이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고, 변안열을 체찰사에 임명하여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2]
우왕은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량씩, 왕복명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량씩을 주었으나, 모두 다 사퇴하면서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3. 1. 진포 해전
1380년 8월경 왜구가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3][4][5] 고려 정부는 원수 나세(羅世)와 최무선을 시켜 화통(火筒)·화포(火砲) 등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하고 모두 불태웠다.[3] 이는 화약 무기를 활용한 최초의 해전 승리로 기록되며, 왜구의 해상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배가 모두 불타 돌아갈 길이 없어진 왜구들은 육지에서 활동하던 왜구들과 합류하여 내륙에서 횡포를 이어갔다.[3]3. 2. 황산 전투
1380년 8월경 왜구가 금강 하구 진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고려 정부는 최무선의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격파하였으나, 배가 불타 돌아갈 길이 없어진 왜구들은 육지에서 활동하던 왜구들과 합류하여 횡포를 부렸다.[3]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을 맡겼다. 이성계는 도체찰사 변안열과 함께 왜구를 무찌르게 되었다. 왜구는 경상도 일대를 노략질한 후 사근내역(沙斤乃驛) 등의 험지(險地)를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지만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공격을 지체했다. 식량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위협까지 받은 이성계는 어쩔수 없이 부서를 재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는 산에 진을 치고 싸우므로 이성계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고, 고전 끝에 승리하였다.[3]
왜구는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호언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5] 이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고, 변안열을 체찰사에 임명하여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2]
우왕은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량씩, 왕복명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량씩을 주었으나, 모두 다 사퇴하면서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4. 결과
4. 1. 고려의 승리
4. 2. 이성계의 위상 강화
5. 평가
국내 학계에서는 황산대첩이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후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6][2]
일본 학계의 일부는 황산대첩의 실상이 이성계의 무공을 드러내기 위해 조작, 과장되었다고 폄하한다.[6]
5. 1. 긍정적 평가
국내 학계에서는 황산대첩이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후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6][2]5. 2. 부정적 평가 (일본 학계)
국내 학계에서는 황산대첩이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후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2] 그러나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황산대첩이 이성계의 무공을 과장하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6. 황산대첩비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새로 복원되었다. 현재 일제강점기에 깨어진 비석 조각들은 파비각(破碑閣)에 보관되고 있다.[2]
6. 1. 일제강점기의 훼손과 복원
황산대첩비는 1577년(선조 10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의 건의로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2] 일제는 한국의 민족정신을 억압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의도로 황산대첩비를 파괴했다. 광복 이후 1977년 깨어진 비석 조각들을 모아 파비각(破碑閣)에 보관하고, 새로운 비를 복원하여 현재는 남원시의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2]7. 대중문화 속 황산대첩
7. 1. 드라마와 영화
7. 2. 소설과 웹툰
참조
[1]
문서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근방
[2]
서적
황산대첩(荒山大捷)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서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4]
문서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5]
문서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인월리
[6]
뉴스
고려-일, 오랫동안 끊긴 외교를 왜구 탓에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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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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