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지발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지발도는 1380년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시 이성계에게 패배한 왜구의 수장으로,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고려 측 기록에 따르면 15, 6세의 미소년으로 묘사되며, 백마를 타고 용맹하게 싸웠다. 아지발도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관련 기록이 없어 여러 설이 존재하며, 몽골계 제주도인, 고려인, 류큐인 등 다양한 출신설이 제기된다. 아지발도는 한국 아기장수 설화와 연관되어 '실패한 반영웅'의 이미지로 해석되기도 하며, 여러 소설, 드라마, 창극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아지발도는 이성계의 무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2. 고려 측 기록

우왕 6년(1380년)에 고려를 침공한 '경신년 왜구'의 지휘관이었던 아지발도는, 그 이름조차 고려군이 부르던 별명이었다.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황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구출된 고려인의 증언이 《고려사》 변안열열전에 실려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380년 왜구는 500여 척의 배로 진포(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했다. 이들은 나세,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에 배가 모두 격침되었는데(진포 해전), 이때 살아남은 왜구는 옥주로 달아나 내륙을 약탈했다. 이후 왜구는 함양, 남원 등을 공격하며 고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을 맡겼고,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는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약으로 전사했다.

2. 1. 왜구의 침입과 황산대첩

1380년 고려를 침공한 왜구 지휘관 아지발도는 '경신년 왜구'의 지휘관이었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조차 본명이 아닌 고려군이 부른 타칭이었다. 황산 전투 이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 구출된 고려인의 증언(《고려사》 변안열열전)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원래 일본에 있으면서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왜구들이 그의 무용에 탄복하여 지휘관으로 와 달라고 간청하여 고려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5] 왜구 지휘관들은 그를 만날 때마다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으며, 부대 지휘의 전권이 그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높은 신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나이 겨우 십오륙 세"의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는 소년이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그의 모습에 고려군은 '아기바톨'이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고 한다. 이성계 등의 증원군이 온 것을 보고는 "이번 군세는 지난번의 군진과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우왕 6년(1380년) 왜구는 500여 척의 배로 진포(鎭浦, 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했다. 이들은 나세,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에 배가 모두 격침되었으나(진포 해전), 살아남은 왜구는 옥주로 달아나 내륙을 약탈했다.

왜구는 함양 동쪽 사근역(沙斤驛, 사근내역)에서 고려군과 맞붙어 박수경, 배언 등 고려군 500명을 전사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때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주민들이 그곳을 피내(血溪, 경남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에서 분덕 앞으로 흐르는 죽산천)라 불렀다고 한다.[7] 이후 왜구는 남원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치고 다시 남원을 포위했다. 아지발도는 "광주금성에서 에게 물을 먹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겠다"(《역대병요》)고 호언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을 맡겼다. 이성계는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도착하여 황산(荒山) 서북쪽 정산봉(鼎山峯)에 올라 왜구를 공격했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으며, 이성계는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자신도 다리에 화살을 맞을 정도였다.

이때 아지발도가 직접 전투에 나섰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함을 보고 이지란에게 생포를 명했으나, 이지란은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다"[8]며 반대했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이 투구 꼭지를 쏘아 떨어뜨릴 테니 이지란이 쏘라고 했다. 이성계는 활로 투구 꼭지를 맞혔고,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아지발도를 쏘아 죽였다.

대장을 잃은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고려군은 이들을 격파했다. 이때 강물이 피로 물들어 6, 7일이나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군은 1,600필을 얻었고, 지리산으로 달아난 왜구는 70명 남짓이었다(황산대첩).

2. 2. 아지발도에 대한 묘사

황산 전투 이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출된 고려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섬(일본)에 있으면서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왜구들이 그의 무용에 탄복하여 지휘관으로 와 달라고 간청하여 고려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5] 왜구 지휘관들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반드시 달려와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으며, 부대 지휘의 전권이 그에게 있었다.[5]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이 '아기바톨'이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성계 등의 증원군이 온 것을 보고 "이번 군세는 지난번의 군진과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이지란에게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이지란은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다"며 반대하였다.[8] 이에 이성계는 "내가 그의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는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는 급히 바로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쏜 화살에 투구가 떨어지고, 뒤이어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3. 아지발도의 정체에 대한 논란

아지발도는 1380년 고려를 침공한 왜구의 지휘관이었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조차 고려군이 붙인 별명으로, 본명은 아니다.[5]

황산 전투 이후 포로로 잡혔던 고려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왜구들의 간청으로 지휘관이 되었고, 왜구 지휘관들은 그에게 깍듯한 예우를 갖췄다고 한다. 이는 아지발도가 높은 신분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5]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아지발도가 "나이 겨우 십오륙 세"의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성계 등의 증원군을 보고 "이번 군세는 지난번의 군진과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

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는 1380년 5백여 척의 배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및 전라북도 군산시 앞바다)에 상륙하여 고려를 공격했다. 이들은 나세,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으로 배를 잃었지만(진포 해전), 내륙으로 진격하여 상주를 불태우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함양 동쪽 사근역(沙斤驛)에서는 고려군과 전투를 벌여 고려군 5백 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때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피내'(血溪)라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7] 아지발도는 광주금성에서 에게 물을 먹이고 북상하겠다는 호언까지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함을 높이 사 이지란에게 생포를 명했지만, 이지란은 갑옷으로 얼굴까지 가려 쏠 틈이 없다고 반대했다.[8] 결국 이성계가 활로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고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아지발도의 죽음 이후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고려군은 지리산까지 달아난 70여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왜구를 격파했다(황산대첩). 고려군은 1,600필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3. 1. 여러 가설

고려사》 등 한국의 기록에 남아 있는 아지발도라는 이름은 고려인들이 지칭해 부른 타칭으로 본명이 아니며, 아지발도라 불린 왜구 수장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일본에서는 「아지발도」라는 왜구 무장의 정체에 대하여 전기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의 잔장(残将)이라고 보는 설이 있으며[14] 일본의 소설가 가이온지 초고로(海音寺潮五郞)는 일본에서 상당히 지위가 높은 어느 다이묘의 후사가 아니겠느냐고 추측하였다.[15] 「아지발도」라는 이름을 두고 당시 규슈(九州)의 무사(武士)였던 아카보시 씨(赤星氏)나 아지히 씨(相知比氏)의 성을 가진 무장의 이름이 고려측에서 와전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거나, 규슈(九州)의 수군(해적) 집단이었던 마쓰라토(松浦党) 소속일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나와 있다. 『니혼 신문』(日本新聞)의 편집국장 등을 지냈던 일본의 후지이 쇼지(藤井尚治, 1888-1951)가 1937년에 발행한 『국사이론기설신학설고』(国史異論奇説新学説考)에서는 아지발도를 「아키후토」(アキフト)로 읽어서 '상인'(商人)이라는 일본어를 의미한다, 라는 설을 제창하기도 하였다.[16] 다만 이에 대해서는 그의 일본 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아지발도' 혹은 '아기발도'라는 한국의 한자 표기를 일본 음으로 읽은 데 불과하다[17]는 지적도 있다.

한국측 기록에서 고려(조선) 사람으로 왜구에 붙거나 혹은 왜구인 척 가장하여 약탈을 자행했다는 '가왜'(假倭) 혹은 '부왜인'(附倭人)의 존재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여, 왜구의 종족 구성이 일본인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인, 몽골인, 고려인, 류큐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는 견지에서 아지발도 또한 몽골 계통의 탐라(제주도)인이거나 고려인, 류큐인으로써 왜구 집단을 거느렸던 수장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의 사학자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는 《고려사》에서 고려군이 황산 전투 이후 수천 필의 말을 얻었다는 기록에 대해 당시 규슈의 무사들은 다량의 마필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15세기 견명선도 조공품으로 보내던 말이 3, 4마리 정도에 많으면 20필 정도로 말의 대량 해상 수송이 곤란해 말 대신 황금 술병을 보낼 정도였다며 왜구 집단이 지니고 있었다는 1천 필이 넘는 말은 해상 수송이 아니라 현지 조달에 의해서일 것이고, 이는 왜구가 당시 말과 소의 밀도살을 전업으로 삼던 고려인 화척과 연합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18] 다카하시 고메이도 기마대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말은 당시 원의 국영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던 제주도 외에서는 공급할 수 없었을 것이며 아지발도가 일본인이 아닌 고려인, 정확하게는 제주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였다.[19]

여기에 대해 한국의 이영은 고려 왕조의 마정(馬政)에서 목장은 내륙뿐 아니라 도서 지역 및 농업에 적절하지 않으면서 관리나 수송이 편리한 연해 곶 지방에도 많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들 도서 및 연안 지역(주로 경상도 전라도 일대)이 왜구의 주요 약탈 대상이 되어 있었던 점을 들어 섬이나 곶을 침공한 왜구들이 고려 목장으로부터 이들 마필을 약탈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암시하는 정황 증거로써 《고려사》 권제134 열전제47 신우(우왕) 5년(1379) 10월 무진조에 실린 명덕태후가 명에 우왕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표문에 "본국의 토종말은 당나귀와 같아서 좋은 것을 구하기가 어렵고, 호마(胡馬)는 백에 한두 마리일 뿐이니, 이 역시 중국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근래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라는 구절과 같은 책 권112 열전제25 류숙전 부(附) 류실전에 "왜구가 또 낭산현(郞山縣)과 풍제현(豊堤縣) 등을 침략하자 류실이 원수(元帥) 류영(柳濚)과 함께 힘써 싸워 30여 인을 쏘아 죽이고 약탈당한 소와 말 200여 마리를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라는 구절을 제시하였다.[20] 아울러 왜구들이 지니고 있던 말들이 일본에서 수송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쓰시마 섬이 예로부터 명마의 산지로 신사에 공급할 말을 바치기도 한 데다, 해적으로 유명한 오자카시마 니시우라베(西浦部) 아오카타 촌(靑方村)의 영주 아오카타 씨의 경우 가마쿠라 말기에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는 곳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었고[21] 이 말을 바닷길로 수송할 경우 규슈에서 동중국해를 가로질러서 본토에 이르는 루트가 아니라 이키-쓰시마를 거쳐 고려 연안부를 섬과 섬을 오가며 건너는 단거리 연안 항로 루트를 이용한다면 5백 척의 대규모 선단으로 1,600필에 이르는 말의 대량 수송도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22]

아지발도의 무장에 대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 쏠 만한 틈이 없었다"고 한 기록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의 갑옷에 턱과 목을 가리는 보호구는 있었어도 얼굴까지 가리는 보호구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한다는 지적도 있다(다만 "구리로 만든 가면을 얼굴에 썼다"고 한 묘사 자체는 이미 북송 시대의 장수였던 적인의 기록에 등장한다).

당시 왜구는 황산이라는 산악 지형을 이용해서 농성하면서 산길로 진군하는 이성계를 기병으로 기습하는가 하면, 아지발도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이성계 등 고려군에 맞서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싸웠는데, 이는 일본 남북조 시대 아쿠토(惡黨)라 불리던 반정권적 무장 집단의 전법과도 비슷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 무렵 일본의 전투 형태는 가마쿠라 시대까지의 평탄한 지형에서 전개되는 기사전(騎射戰) 중심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복잡한 지형과 바위, 수목 등을 전투 조건에 포함시키는 산악에서의 게릴라전, 공성전, 농성전으로 변화하였고, 무기도 의 휘임각이 줄고 을 사용하게 되는 등 사용 무기 및 전술의 변화가 드러나며[23] 황산 전투 당시 왜구의 전투 방식 및 아지발도의 모습에서도 그런 면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24]

아지발도(阿只抜都)는 고려군이 붙인 이름으로, 한국어로 "아이(아기)", 몽골어로 "용사(바토르)"라는 설이 유력하다. 큐슈의 무사, 아카보시(赤星) 씨나 아지히(相知比) 씨의 이름이 와전되어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그 출신에 대해서는 마쓰우라 당의 무사, 몽골계 제주도인, 고려인, 혹은 류큐인 등 여러 설이 있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제주도는 유수의 말 생산지가 되었고, 몽골계 정착민도 있었다. 큐슈의 무사단조차 천 마리의 말을 갖추는 것은 어려웠기에, 아지발도의 출신은 별개로 하고, 제주도민의 협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고찰이 있다[1]。 아지(아지)나 바토(바두)는 몽골어의 음차에 사용된다(아지르해 등). 1368년, 원나라의 멸망으로 힘이 약해진 제주도의 몽골계 주민의 봉기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고려사》에는 "구리 가면을 쓰고 쏠 틈이 없었다"라는 묘사가 있지만,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턱과 뺨을 덮는 "호아테"(頬当)라는 방어구는 있어도, 얼굴 전체를 덮는 "멘포"(面頬)는 전국 시대(16세기 후반)까지 나타나지 않는다("고려사"는 1451년, "고려사절요"는 1452년에 성립). 중국, 조선, 몽골의 갑옷에도 얼굴 방어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도 출신에 관한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또한, 문중에서는 "구리 가면을 착용"이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표현이 사용된 인물로는 북송의 무장 적인의 고사가 있다.

다른 이설로는, 후지이 나오하루가 1937년 발행의 저서 『국사이론기설신학설고』에서, 아지발도는 "아키후토"로 읽으며, 상인이라는 일본어를 의미한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2]

3. 2. 갑옷에 대한 의문

《고려사》 등 한국의 기록에 남아 있는 아지발도라는 이름은 고려인들이 지칭해 부른 타칭으로 본명이 아니며, 아지발도라 불린 왜구 수장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14][15]

아지발도의 무장에 대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 쏠 만한 틈이 없었다"고 한 기록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의 갑옷에 턱과 목을 가리는 보호구는 있었어도 얼굴까지 가리는 보호구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한다는 지적이 있다. 다만 "구리로 만든 가면을 얼굴에 썼다"고 한 묘사 자체는 이미 북송 시대의 장수였던 적청의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구리 가면을 쓰고 쏠 틈이 없었다"라는 묘사가 있지만,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턱과 뺨을 덮는 "호아테"(頬当)라는 방어구는 있어도, 얼굴 전체를 덮는 "멘포"(面頬)는 전국 시대(16세기 후반)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 조선, 몽골의 갑옷에도 얼굴 방어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도 출신에 관한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4. 아기장수 설화와의 관련성

조선 중기 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남원시 인월면 남천 강변에 있는 피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바위는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라고 한다.[9]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우왕은 이성계 장군을 정왜원수로 삼아 남원 운봉에 급파했다. 이성계는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기다렸는데, 당시 16세의 어린 소년 대장이었던 아지발도는 누이의 경고("황산을 조심하라. 너는 그곳에서 죽는다")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침공했다. 아지발도는 어느 노파에게 황산의 위치를 묻자 노파는 왕산을 가리키며 황산이 아니라고 했다.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진군했지만, 그곳이 바로 황산이었고, 이지란이 쏜 화살에 투구를 맞고 입을 벌린 순간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이때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바위에 남아 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노파는 사실 지리산 산신인 노고였다고 한다.[10]

지리산 산신 노고는 도교와 습합하여 도고(道姑)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황산대첩의 현장인 여원치(女院峙) 마애불에는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새긴 글이 남아 있는데, 지리산 산신 도고가 이성계의 승리를 도왔다는 현지 전승을 전하고 있다.[11] 경상남도 산청군 천왕사에는 지리산성모상이 있는데, 고려 말기 아지발도가 성모상의 귀를 떼어 가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12] 지리산 산신은 1383년 관음포 전투를 앞두고 정지가 날씨가 개기를 기원했을[13] 정도로 현지에서 호국신으로 숭앙받았다.

정영현은 고려인들이 왜구 장수에게 붙인 '아지발도' 즉 '아기장수'라는 명칭은 한국의 아기장수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아지발도가 남원 지역의 우투리(둥구리) 설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아지발도에게 '아기장수'라는 이름이 붙고, 설화 속 둥구리가 이성계에게 죽는 사건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26]

당시 고려인들은 왜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구는 고려 내륙을 돌며 관군은 물론 백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료들은 아지발도 군단의 잔인성과 아지발도 개인의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기록했는데, 이는 아지발도를 칭찬함으로써 그를 쓰러뜨린 이성계의 위대함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27]

민중의 입장에서 아지발도는 '이방인'이자 '침략자'였지만, 그에게 '민중 영웅' 아기장수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영현은 '침략자' 아지발도에게 '민중 영웅' 아기장수를 투영하는 것은 '가왜'(假倭)나 '부왜인'(附倭人) 같은 일탈로는 해석할 수 없고, 고려 백성들이 아지발도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일반화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28]

그러나 설화 속 '아기장수'는 민중의 염원이 투영된 '민중 영웅'이지만, 체제 전복을 도모할 뿐 새로운 사회에 대한 포부를 제시하지 않는 등 선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며, 선악을 딱 잘라 단정할 요소도 없다.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아기장수는 질서를 파괴하는 안티히어로(반영웅)적인 영웅으로 간주되었고, 기존 지배 체제를 뒤엎으려다 실패하는 아기장수의 이미지를 악인 아지발도에게 투영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제동은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29]

2012년 툴루즈에서 ACTA에 반대하는 시위자가 착용한 가이 포크스 가면.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였던 가이 포크스는 개인적인 인품, 행적, 의도와 상관없이 민중들 사이에 ‘정부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중세 고려 지방 사회에서 피아 구별은 현대의 '민족' 개념과 달랐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횡포와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민중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다. 고려 관군과 맞서 싸우는 아지발도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거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자 지배 계층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이성계와 대립했던 '반영웅' 아지발도를 '실패한 반영웅' 우투리 설화로 되새기며 아기장수의 모습을 투영했을 수 있다.[30]

4. 1. 아기장수 설화의 내용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 영웅 설화인 아기장수 전설은 한반도 전역과 중국 조선족 사회에까지 널리 퍼져있다.[25] 이 설화는 '실패한 민중 영웅'의 이야기로, '성공한 영웅 설화'인 건국 신화와 비교되기도 한다. 국문학자 최래옥은 아기장수 설화의 내용과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단계내용
출생평민 가정에서 산의 정기를 받아 겨드랑이에 날개(비늘)가 있고, 태어나자마자 날아다니며 힘이 센 아기장수가 기적적으로 태어남.
1차 죽음부모는 아기장수가 커서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 것이라 여겨 돌로 눌러 죽임.
재기아기장수는 죽을 때 유언으로 콩 다섯 섬과 팥 다섯 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함.
2차 죽음관군이 와서 아기장수를 찾자, 부모가 무덤을 알려줌.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장수가 일어나려 하지만, 관군에게 들켜 죽임을 당함.
증시아기장수가 죽은 뒤, 그를 태울 용마가 용소에서 나와 주인을 찾아 울다가 용소에 빠져 죽음.



이러한 뼈대에 다른 이야기가 추가되거나 빠지면서 설화가 만들어진다. 1차 죽음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고, 관군에게 진압되는 과정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기장수에게 2차 죽음을 가하는 관군으로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중 한 명이 이성계이다. 이성계가 등장하는 설화는 '우투리 설화'로 대표되며, 경남 함양, 전남 구례, 남원지리산 일대에서 주로 나타난다. 지역에 따라 '둥구리'로도 불리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아기장수 설화의 틀을 유지한다.

정영현은 고려인들이 왜구 장수에게 붙인 '아지발도' 즉 '아기장수'라는 명칭은 한국의 아기장수 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아지발도가 남원 지역의 우투리(둥구리) 설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①아지발도에게 '아기장수'라는 이름이 붙고 ②설화 속에서 둥구리가 이성계에게 죽는 사건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26]

실제 사료를 보면, 왜구는 약탈, 납치, 파괴로 고려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고려인들은 지배층, 피지배층 모두 왜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고려 내륙에서 백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한국 사료들은 침략자인 아지발도 군단의 잔인성과 아지발도 개인의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기록했는데, 이는 아지발도를 칭찬함으로써 그를 쓰러뜨린 이성계의 위대함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27]

민중의 입장에서 아지발도는 '이방인'이자 '침략자'였지만, 그에게 '민중 영웅'인 아기장수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영현은 '침략자' 아지발도에게 '민중 영웅' 아기장수를 투영하는 것은 '가왜'(假倭)나 '부왜인'(附倭人) 같은 일탈로는 해석할 수 없고, 고려 백성들이 아지발도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일반화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28]

그러나 설화 속 '아기장수'는 민중의 염원이 투영된 '민중 영웅'이지만, 체제 전복을 도모할 뿐 새로운 사회에 대한 포부를 제시하지 않는 등 선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며, 선악을 단정할 요소도 없다.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아기장수는 질서를 파괴하는 안티히어로(반영웅)적인 영웅으로 간주되었고, 기존 지배 체제를 뒤엎으려다 실패하는 아기장수의 이미지를 악인 아지발도에게 투영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제동은 없었을 것이다.[29]

중세 고려 지방 사회에서 피아 구별은 현대의 '민족' 개념과 달랐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민중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다. 고려 관군과 맞서 싸우는 아지발도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거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자 지배 계층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이성계와 대립했던 '반영웅' 아지발도를 '실패한 반영웅' 우투리 설화로 되새기며 아기장수의 모습을 투영했을 수 있다.[30]

4. 2. 아지발도와의 연관성

조선 중기 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남원시 인월면 남천 강변에 있는 피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바위는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라고 한다.[9]

전설에 따르면,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우왕은 이성계 장군을 정왜원수로 삼아 남원 운봉에 급파했다. 이성계는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기다렸는데, 당시 16세의 어린 소년 대장이었던 아지발도는 누이의 경고("황산을 조심하라. 너는 그곳에서 죽는다")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침공했다. 아지발도는 어느 노파에게 황산의 위치를 묻자 노파는 왕산을 가리키며 황산이 아니라고 했다.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진군했지만, 그곳이 바로 황산이었고, 이지란이 쏜 화살에 투구를 맞고 입을 벌린 순간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이때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바위에 남아 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노파는 사실 지리산 산신인 노고였다고 한다.[10]

지리산 산신 노고는 도고(道姑)라고도 불렸으며, 황산대첩 현장인 여원치 마애불에는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새긴 글이 남아있다. 이 글은 지리산 산신 도고가 이성계의 승리를 도왔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11] 경남 산청군 천왕사에는 지리산성모상이 있는데, 이 성모상은 고려 말기 아지발도가 귀를 떼어 가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12] 지리산 산신은 1383년 관음포 전투를 앞두고 정지가 날씨가 개기를 기원했을[13] 정도로 호국신으로 숭앙받았다.

한국의 아기장수 전설은 중국조선족 사회에까지 널리 퍼져있으며,[25] '실패한 민중영웅'의 서사로 건국신화와 비교되기도 한다. 아기장수 설화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단계내용
출생평민에게서 태어난 아기장수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1차 죽음부모는 아기장수가 역적이 될까 두려워 죽인다.
재기아기장수는 콩과 팥을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2차 죽음관군이 들이닥치자 콩과 팥은 군사와 말이 되어 아기장수가 부활하려 하지만, 관군에게 들켜 죽는다.
증시아기장수를 태울 용마가 주인을 찾아 울다가 죽는다.



이성계가 등장하는 아기장수 설화는 '우투리 설화'로 대표되며, 지리산 일대에서 주로 나타난다. 정영현은 고려인들이 왜구 장수에게 붙인 '아지발도'라는 이름이 아기장수 설화와 관련이 있으며, 아지발도가 우투리 설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26]

당시 고려인들은 왜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지발도를 쓰러뜨린 이성계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아지발도의 뛰어난 모습을 인정하기도 했다.[27] 정영현은 아기장수가 선악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안티히어로적 영웅이며, 고려 백성들이 아지발도에게 대리만족을 느꼈거나, 이성계에 대한 부정적 감정, 지배 계층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아지발도에게 아기장수의 모습을 투영했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29][30] 이는 중세 고려 지방 사회에서 피아 구별이 현대의 '민족' 개념과 달랐고, 권문세족의 횡포와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고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4. 3. 민중의 인식

조선 중기 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라는 전승을 가진 피바위(지금의 남원시 인월면 남천 강변)에 대한 기록이 있다.[9] 남원 현지 전승에 따르면, 왜구의 노략질에 우왕이 이성계를 정왜원수로 남원 운봉에 급파했고, 아지발도는 "황산을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서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누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침공했다. 아지발도는 길에서 만난 노파(사실은 지리산 산신 노고)에게 황산의 위치를 물었으나, 노파는 엉뚱한 대답을 했고, 결국 아지발도는 운봉(황산)에서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10]

지리산 산신 노고는 도교와 습합하여 도고(道姑)라고도 불렸으며, 황산대첩 현장인 여원치 마애불에는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새긴 글에 도고가 이성계의 승리를 도왔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11] 경남 산청군 천왕사에는 지리산성모상이 있는데, 아지발도가 성모상의 귀를 떼어 가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12] 지리산 산신은 1383년 관음포 전투를 앞두고 정지가 날씨가 개기를 기원했을[13] 정도로 호국신으로 숭앙받았다.

한국의 아기장수 설화는 '실패한 민중영웅'의 서사로, 아기장수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콩과 팥으로 된 군사를 일으키려다 관군에게 진압당하는 내용이다. 이성계가 등장하는 '우투리 설화'는 지리산 일대에서 주로 나타나며, 아기장수 설화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이성계에게 죽는 내용이 추가된다.

정영현은 고려인들이 왜구 장수에게 붙인 '아지발도'(아기장수)라는 명칭이 한국의 아기장수 설화와 관련이 있으며, 아지발도가 우투리 설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26]

고려인들은 왜구의 약탈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아지발도의 뛰어난 무용은 인정했다. 지배층은 아지발도를 칭찬함으로써 이성계의 위대함을 강조하려 했다.[27] 민중은 침략자인 아지발도에게 '민중 영웅' 아기장수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에 대해, 정영현은 '가왜'나 '부왜인' 같은 일탈적 상황으로는 해석할 수 없고, 고려 백성들이 아지발도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일반화할 수도 없다[28]고 했다. 그러나 아기장수 설화 속 아기장수는 선악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안티히어로적 영웅으로, 기존 질서를 뒤엎으려다 실패하는 이미지가 아지발도에게 투영되는 것에 대한 윤리적 제동은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29]

중세 고려 지방 사회에서 피아 구별은 현대의 '민족' 개념과 달랐고, 권문세족의 횡포와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민중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관군과 맞서 싸우는 아지발도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거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불만이 아지발도에게 아기장수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30]는 것이다.

5. 여원치와 지리산 산신

조선 중기 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운봉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 황산(荒山)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위에, 사방 몇 장이 되고 보랏빛으로 피가 스민 듯한 빛이 도는 큰 바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은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라는 전승이 전해진다.[9] 이 바위는 지금의 남원시 인월면 남천 강변에 남아있는 피바위이다. 남원 현지에서는 피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진다.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우왕은 이성계 장군을 정왜원수(征倭元帥)로 삼아 남원 운봉에 급파하였다. 이성계는 황산에 진을 치고 왜병을 기다렸다. 16세의 어린 소년 대장이었던 아지발도는 고려를 치러 가려는데, 그의 누이는 "황산(荒山)을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서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간곡하게 말렸다. 아지발도는 누이를 죽이고 출정했지만, 지리산을 보고 "황산을 조심하라"던 누이의 말을 떠올렸다. 아지발도는 길을 가던 중 만난 노파에게 고려에 황산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고, 노파는 쇠막대기로 산천 왕산을 가리키며 황산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지발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운봉까지 진군했지만, 그곳이 황산일 줄은 몰랐다. 이지란이 쏜 화살에 투구를 맞고 "바람이 세기는 세구나"라고 입을 벌린 순간, 이성계의 화살에 입이 꿰뚫려 쓰러졌다. 그때 아지발도가 쏟아낸 피가 바위 위에 남아 피바위가 되었다. 이때 아지발도가 만났던 노파는 사실 지리산의 산신인 노고였다.[10]

지리산 산신인 노고는 도교와 습합하여 도고(道姑)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황산대첩의 현장인 여원치(女院峙)에 남아 있는 마애불에는 대한제국 광무 5년(1901년)에 운봉현감 박귀진이 새긴 글이 남아 있는데, 여원치에는 원래 길 옆 바위면에 여자상을 새긴 조각이 있었으며, 박귀진은 지리산 산신인 도고(노고)가 이성계의 황산 승리를 도왔다는 현지 전승을 전하고 있다.[11]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天王寺)에는 지리산의 산신을 새긴 지리산성모상(智異山聖母像)이 모셔져 있는데, 성모상의 귀와 손가락 끝은 없고 코는 옥석으로 만들어 붙인 것으로 고려 말기에 아지발도가 성모상의 귀를 떼어 가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성모상의 목에는 상처가 있는데, 조선 초 김종직이 1472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록」[12]에는 고려 말기 왜구가 (패전의 분풀이로) 성모상의 목을 칼로 쳤던 흔적이 남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지리산 산신은 황산대첩 3년 뒤인 1383년 관음포 전투를 앞두고 정지가 날씨가 개기를 기원했을[13] 정도로 현지에서 호국신으로써 숭앙받았다.

6. 아지발도가 등장하는 작품

;소설


  • 서권 《시골 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다산책방, 2012
  • 표성흠 《목화 - 소설 문익점》 산지니, 2014
  • 김창식 《독도와 청자》 생각나눔, 2015


;드라마

;창극

  • 《이성계, 해를 쏘다》(2016년, 대본 곽병창 연출 김홍승) -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개원 30주년 기념 대표 공연이자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의 제49회 정기 공연이었다. 극중 아지발도 역은 유지준이 맡았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113 최영전) 고려사 1374
[2] 서적 국사이론기설신학설고 https://books.google[...] 1937
[3] 서적 용비어천가 제50장 및 동사강목 권제16상, 청장관전서 권56, 앙엽기3, 발도 용비어천가, 동사강목, 청장관전서 1380
[4] 구비문학 이성계와 아지발도 (피바위 전설) 한국구비문학대계 5-1
[5] 서적 고려사 권제126 열전제39 간신 변안열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권제126 열전제39 간신 변안열; 고려사절요 권31 고려사, 고려사절요 1380
[7]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31 경상도 함양군 제한역 신증동국여지승람
[8] 서적 고려사 권제126 열전제39 간신 변안열; 고려사절요 권31 고려사, 고려사절요 1380
[9] 서적 계곡선생집 제2권, 잠명찬 16수, 혈암명; 지봉유설 권제2 계곡선생집, 지봉유설
[10] 서적 남원의 마을유래 남원시 1998
[11] 보고서 한국 문화 속의 노구와 마고 2008
[12] 서적 점필재집 권제2 점필재집
[13] 서적 고려사 권제113 열전제26 제신 정지 고려사
[14] 서적 瀬戸内水軍史 瀬戸内海文化研究所 1966
[15] 서적 日本歴史を散歩する https://books.google[...]
[16] 서적 국사이론기설신학설고 1937
[17] 논문 倭寇 ‘阿只拔都’의 명칭과 고려民의 시각 2016
[18] 논문 倭寇と東アジア交流圏 岩波書店 1987
[19] 논문 中世東アジア海域における海民と交流 1987
[20] 서적 왜구와 고려·일본 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2011
[21] 논문 日本中世における海民の存在形態 1971
[22] 서적 왜구와 고려·일본 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2011
[23] 서적 中世悪党の研究 吉川弘文館 1990
[24] 서적 왜구와 고려·일본 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2011
[25] 논문 중국 조선족 설화에 나타난 아기장수 설화의 변이 양상 한국언어문학회 2004
[26] 논문 (정영현 논문) 2016
[27] 논문 (정영현 논문) 2016
[28] 논문 (정영현 논문) 2016
[29] 논문 (정영현 논문) 2016
[30] 논문 (정영현 논문) 20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