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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보르자 데 간디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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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보르자 데 간디아 공작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1476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1493년 스페인 귀족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결혼하여 간디아 공작이 되었으며, 교황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1497년 로마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암살 배후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그는 두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후에 예수회 총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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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보르자 데 간디아 공작
기본 정보
조반니 보르지아 추정 초상화
작위간디아 공작
재위 기간1488년–1497년
이전피에르 루이지 데 보르지아, 1대 간디아 공작
계승후안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
배우자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
자녀후안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 3대 간디아 공작
이사벨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
기타 작위교황청 총사령관, 교황청 곤팔로니에레
가문보르지아 가문
아버지교황 알렉산데르 6세
어머니바노차 데이 카타네이
출생일1476년경
출생지로마
사망일1497년 6월 14일
사망지로마, 쥬디카 광장
매장지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이후 간디아 대성당으로 이장)
이름
스페인어Juan de Borja (후안 데 보르하)
카탈루냐어Joan de Borja (주안 데 보르자)

2. 초기 생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초상화


지오반니 보르자는 1476년경 로마에서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정부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체사레 보르자에 이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2] 지오반니와 체사레 형제의 정확한 출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지오반니는 오랫동안 형으로 여겨졌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체사레보다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사레와 지오반니는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아마도 그의 측근인 아드리아나 데 밀라의 감독 아래 함께 자랐다. 1483년 1월 29일 문서에 따르면 지오반니의 후견인은 그의 어머니 가족에서 이복형인 피에르 루이지와 또 다른 친척인 오토 보르자로 변경되었다.

피에르 루이지는 1488년 9월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지오반니가 제2대 간디아 공작이 되었다. 공작령은 보르자 가문의 고향인 발렌시아 왕국에 있었으며, 로드리고 보르자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의 도움을 받아 1485년에 만들었다. 1488년 12월 13일, 지오반니와 그의 형 피에르 루이지와 약혼했던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의 결혼 계약이 작성되었다. 마리아 엔리케스는 아라곤 국왕의 사촌이었다. 신랑이 겨우 12세였기 때문에 결혼은 연기되었다. 4년 후,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라곤 왕국과 교황청 간의 정치적 동맹은 오랫동안 계획된 이 결혼을 양측 모두에게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2. 1. 출생과 가계



지오반니 보르자는 1476년경 로마에서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정부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부부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은 체사레 보르자였다.[2] 지오반니와 체사레 형제의 정확한 출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지오반니가 맏아들로 여겨졌으나, 현대 연구에 따르면 체사레가 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오반니와 체사레는 아버지의 후원 아래, সম্ভবত 그의 측근인 아드리아나 데 밀라의 감독하에 함께 성장했다. 1483년 1월 29일 문서에는 지오반니의 후견인이 그의 어머니 가족에서 이복형 피에르 루이지와 또 다른 친척 오토 보르자로 변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88년 9월, 피에르 루이지가 사망하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 지오반니가 제2대 간디아 공작이 되었다. 간디아 공작령은 보르자 가문의 고향인 발렌시아 왕국에 있었으며, 1485년 로드리고 보르자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1488년 12월 13일, 지오반니와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피에르 루이지와 약혼했던 사이)의 결혼 계약이 작성되었다. 마리아 엔리케스는 아라곤 국왕의 사촌이었다. 당시 신랑의 나이가 12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혼은 연기되었다. 4년 후,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아라곤 왕국과 교황청 간의 정치적 동맹으로 인해 오랫동안 계획되었던 이 결혼은 양측 모두에게 더욱 중요해졌다.

2. 2. 유년 시절

지오반니 보르자는 1476년경 로마에서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와 그의 정부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체사레에 이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2] 지오반니와 체사레 형제의 정확한 출생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오반니는 오랫동안 형으로 여겨졌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체사레보다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사레와 지오반니는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아마도 그의 측근인 아드리아나 데 밀라의 감독 아래 함께 자랐다. 1483년 1월 29일 문서에 따르면 지오반니의 후견인은 그의 어머니 가족에서 이복형인 피에르 루이지와 또 다른 친척인 오토 보르자로 변경되었다.

피에르 루이지는 1488년 9월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지오반니가 제2대 간디아 공작이 되었다. 간디아 공작령은 보르자 가문의 고향인 발렌시아 왕국에 있었으며, 로드리고 보르자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의 도움을 받아 1485년에 만들었다. 1488년 12월 13일, 지오반니와 그의 형 피에르 루이지와 약혼했던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의 결혼 계약이 작성되었다. 마리아 엔리케스는 아라곤 국왕의 사촌이었다. 신랑이 겨우 12세였기 때문에 결혼은 연기되었다. 4년 후,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라곤 왕국과 교황청 간의 정치적 동맹은 오랫동안 계획된 이 결혼을 양측 모두에게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3. 스페인에서의 생활

간디아 공작 영지의 고딕 양식 정문, 보르자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후안 보르자는 스페인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130명의 귀족과 수행원을 거느린 궁정을 유지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의 무모한 지출을 걱정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탕수수 생산 중심지였던 간디아 주변 지역에서 자금난에 시달리는 귀족들의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아들에게 영지 확장을 촉구했다. 조반니는 공작령에서 아버지의 매니저 역할을 했지만, 매입은 제한적이었다.[5]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이 그라나다 왕국에서 대규모 영지를 받고 스페인 궁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는 교황이 자녀들의 승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껴 지원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교황은 나폴리의 알폰소 2세에게 끈질기게 요청하여, 1494년 5월 조반니에게 연간 12000두카트에 해당하는 트리카리코, 카리놀라, 클라라몬테, 라우리아 영지를 하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곧 프랑스의 샤를 8세의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이 영지들은 보르자 가문에게 쓸모없게 되었다.

1494년, 후안 보르자는 향수를 느껴 아버지와 체사레 보르자에게 로마로 돌아갈 배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당시 후안 보르자는 아라곤 가문과 교황청 간의 동맹을 보장하기 위해 스페인에 있는 가톨릭 군주의 인질과 같았다. 그는 형제에게 "최근 며칠 동안 교황 성하께서 곧 보내시겠다고 쓰신 배가 지연되어 하루하루가 1년 같다"고 썼다.[6]

3. 1. 간디아 공작 계승

1493년 8월, 알렉산데르 6세는 17세의 아들 후안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후안은 다량의 직물, 보석, 은, 휴대용 물품을 갖추고 있었다. 만토바의 대사인 조반니 루치도 카타네이는 "그는 약탈품을 가득 싣고 로마를 떠났으며, 다음 해에 더 많은 것을 가져오기를 기대했다"라고 적었다.[3] 조반니 보르자는 가톨릭 군주에 의해 바르셀로나 왕궁(Palau Reial Major)에서 성대한 의식을 치르며 환영받았다. 1493년 9월 말에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아 교황을 당황하게 했지만, 결국 마리아 엔리케스는 두 자녀를 낳았다. 1494년 11월 10일에 후안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훗날 제3대 간디아 공작)가 태어났다. 1497년 1월 15일에는 딸 이사벨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가 태어났는데, 조반니가 로마로 떠난 지 7개월 후였다. 이사벨은 간디아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장이 되어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4]

조반니 보르자는 스페인에서 3년을 보냈다. 130명의 귀족과 그들의 수행원을 거느린 상당한 규모의 궁정을 유지했지만, 교황은 그의 무모한 지출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간디아 주변 지역이 사탕수수 생산의 주요 중심지이며, 자금난에 시달리는 지역 귀족들의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 현명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조반니는 공작령에서 아버지의 매니저 역할을 했지만, 그의 매입은 제한적이었다.[5]

알렉산데르는 아들이 그라나다 왕국에서 대규모 영지를 받고 스페인 궁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는 교황이 자녀들의 승진에 너무 집중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껴 어떠한 지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황은 끈질기게 추구하여, 나폴리의 알폰소 2세가 1494년 5월에 조반니에게 연간 12000두카트에 해당하는 트리카리코, 카리놀라, 클라라몬테, 그리고 라우리아의 영지를 하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곧 프랑스의 샤를 8세의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나폴리 영지는 보르자 가문에게 이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1494년에 조반니 보르자는 향수를 느꼈고, 아버지와 체사레에게 로마로 돌아갈 배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 형제에게 "각각의 날이 교황 성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곧 보내시겠다고 쓰신 배의 지연으로 나에게는 1년처럼 느껴진다."라고 썼다.[6]

3. 2.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의 결혼

1493년 8월, 알렉산데르 6세는 17세의 아들 후안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그는 다량의 직물, 보석, 은, 휴대용 물품을 갖추고 있었다. 만토바의 대사인 조반니 루치도 카타네이는 "그는 약탈품을 가득 싣고 로마를 떠났으며, 다음 해에 더 많은 것을 가져오기를 기대했다"라고 적었다.[3] 조반니 보르자는 가톨릭 군주에 의해 바르셀로나 왕궁(Palau Reial Major)에서 성대한 의식을 치르며 환영받았다. 그의 결혼식은 1493년 9월 말에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함께 거행되었다.

처음에 교황을 크게 당황시킨 소문이 돌았는데, 그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11월 30일자 서한에서 아들을 꾸짖었고, 그에게 훌륭한 남편이 되라고 반복해서 조언했다. 결국 마리아 엔리케스는 두 자녀를 낳았다. 후안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후에 제3대 간디아 공작)는 1494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 딸 이사벨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는 1497년 1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조반니가 로마로 떠난 지 7개월 후였으며, 그녀는 간디아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장이 되어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4]

3. 3. 스페인 궁정 생활



1493년 8월, 알렉산데르 6세는 17세의 아들 후안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후안은 다량의 직물, 보석, 은, 휴대용 물품을 가지고 있었다. 만토바의 대사인 조반니 루치도 카타네이는 "그는 약탈품을 가득 싣고 로마를 떠났으며, 다음 해에 더 많은 것을 가져오기를 기대했다"라고 적었다.[3] 조반니 보르자는 바르셀로나 왕궁에서 가톨릭 군주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1493년 9월 말에는 마리아 엔리케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교황을 당황하게 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11월 30일자 서한에서 아들을 꾸짖으며 훌륭한 남편이 되라고 조언했다. 결국 마리아 엔리케스는 두 자녀를 낳았다. 1494년 11월 10일, 후안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훗날 제3대 간디아 공작)가 태어났다. 딸 이사벨 데 보르하 이 엔리케스는 1497년 1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조반니가 로마로 떠난 지 7개월 후였다. 이사벨은 간디아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장이 되어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4]

조반니 보르자는 스페인에서 3년을 보냈다. 그는 130명의 귀족과 수행원을 거느린 상당한 규모의 궁정을 유지했지만, 교황은 그의 과도한 지출을 걱정했다. 교황은 서신을 통해 아들에게 영지를 확장하라고 촉구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탕수수 생산의 주요 중심지였던 간디아 주변 지역의 자금난에 시달리는 귀족들의 토지를 매입하려 했다. 조반니는 공작령에서 아버지의 매니저 역할을 했지만, 그의 매입은 제한적이었다.[5]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이 그라나다 왕국에서 대규모 영지를 받고 스페인 궁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는 교황이 자녀들의 승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껴 지원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교황은 끈질기게 나폴리의 알폰소 2세에게 요청하여, 1494년 5월 조반니에게 연간 12000두카트에 해당하는 트리카리코, 카리놀라, 클라라몬테, 라우리아의 영지를 하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샤를 8세의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나폴리 영지는 보르자 가문에게 쓸모없게 되었다.

1494년, 조반니 보르자는 향수를 느껴 아버지와 체사레에게 로마로 돌아갈 배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당시 조반니 보르자는 스페인에서 아라곤 가문과 교황청 간의 동맹을 보장하는 가톨릭 군주의 인질과 같았다. 그는 형제에게 "각각의 날이 교황 성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곧 보내시겠다고 쓰신 배의 지연으로 나에게는 1년처럼 느껴진다."라고 편지를 썼다.[6]

3. 4. 나폴리 왕국과의 관계

1494년 5월, 나폴리의 알폰소 2세는 대관식에서 조반니에게 연간 12,000 두카트에 해당하는 트리카리코, 카리놀라, 클라라몬테, 라우리아의 영지를 하사했다.[6] 그러나 곧 프랑스의 샤를 8세의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나폴리 왕국 영지는 보르자 가문에게는 이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4. 교황군 총사령관

1496년 10월 26일, 간디아 공작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교황 기수로 임명되었다.[7] 교황은 아들을 위해 오르시니 가문을 상대로 한 작전을 맡겼으나,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함께 브라차노의 오르시니-오데스칼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소리아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1497년 2월에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오스티아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1497년 3월 9일 성공적으로 오스티아를 탈환하고 로마에서 승리 축하 행진을 했다.

교황은 아들을 위해 이탈리아에 공국을 만들려고 성 베드로 재산에 속했던 영토를 지정했다. 1497년 6월 7일 비밀 추기경 회의에서 베네벤토 공국과 테라치나, 폰테코르보 도시를 간디아 공작과 그의 적법한 후손에게 부여했으나, 프란체스코 토데스키니 피콜로미니[10] 헤로니모 수리타가 언급한 스페인 대사는 반대했다.[11]

4. 1. 이탈리아 귀환

간디아 공작은 프랑스 군대가 철수한 후 1496년에 마침내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임신한 아내와 스페인에 남아있던 두 살배기 아들을 데려오지 않고 8월 10일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로마에서 성대한 의식으로 환영받았다. 그의 형제를 필두로 모든 추기경들과 대사, 로마 귀족, 관리들이 마르티우스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6일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교황 기수로 임명되었다.[7]

교황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웠고, 로마 캄파냐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항하여 프랑스 편에 섰던 강력한 오르시니 가문을 상대로 한 작전을 그에게 맡겼다. 스무 살의 공작은 지휘관으로서 전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더 지식이 풍부한 콘도티에로인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가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초반에 성공하여 로마에서 브라차노 호수로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여러 오르시니의 거점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브라차노의 오르시니-오데스칼키 성은 교황군에 의한 포위를 견뎌냈고, 군대는 혹독한 겨울 날씨와 비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몬테펠트로는 부상을 입었고, 작전 지휘권은 주로 조반니에게 넘어갔다. 성의 수비병들은 동물을 목에 팻말을 걸고 그들의 진영으로 당나귀를 보내는 것으로 그를 모욕했다. 그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8]

Lassatime andar per la mia via, che vado ambasador al ducha di Chandia|내 길을 지나가게 해줘, 나는 간디아 공작에게 가는 사절이다.it

소리아노 전투에서 교황군을 물리친 비텔로초 비텔리의 초상화


1497년 1월 24일, 보르자 군대는 소리아노에서 비텔로초 비텔리와 카를로 오르시니가 이끄는 오르시니 구원군과 야전에서 싸우려다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몬테펠트로는 포로로 잡혔지만 조반니 보르자는 얼굴에 경미한 부상만 입고 탈출했다.[9]

소리아노 전투에서 "교회의 병사들은 큰 수치와 손실을 겪었다"고 부르차르드는 그의 일기에 적었다. 약 500명의 병사가 죽고 훨씬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오르시니는 모든 대포를 탈취하고 교황군을 흩어지게 했다. 그들은 빠르게 로마 성벽으로 진격하여 잃어버린 거점을 되찾았다. 교황은 이제 1497년 2월에 그의 적들과 평화 조약을 맺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반니의 다음 군사적 시도는 더 성공적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충성하는 군대가 여전히 점령하고 있던 오스티아를 탈환하는 데 참여했다. 작전은 경험 많은 스페인 장군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끌었고, 1497년 3월 9일 수비대의 항복으로 빠르게 종료되었다. 며칠 후 코르도바는 로마에서 승리 축하 행진을 열었고, 조반니 보르자 공작과 그의 매형인 조반니 스포르차가 그를 동반했다. 그러나 코르도바는 3월 19일, 조반니 보르자가 한 개를 받은 후 교황궁 예배당에서 종려주일 기념식 중에 축복받은 종려나무 가지를 받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공작에게 보이는 편애에 대해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르자 가문의 중요한 동맹의 놀라운 질책이었다.

오르시니와의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여전히 아들을 위해 이탈리아에 공국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수세기 동안 성 베드로 재산에 속했던 영토를 지정했다. 6월 7일 비밀 추기경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베네벤토 공국과 테라치나폰테코르보 도시가 간디아 공작과 그의 적법한 후손에게 부여되었다. 참석한 추기경들 중 프란체스코 토데스키니 피콜로미니만이 교황령의 토지 양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10]

4. 2. 오르시니 가문과의 전쟁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교황 기수로 임명된 간디아 공작은 1496년 오르시니 가문을 상대로 한 작전을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함께 맡았다. 그러나 브라차노의 오르시니-오데스칼키 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8]

1496년 조반니 보르자가 함락에 실패한 브라차노의 오르시니 성


오르시니 군대는 간디아 공작을 조롱하는 팻말을 단 당나귀를 보내기도 했다.[8]

1497년 1월 24일, 보르자 군대는 소리아노 전투에서 비텔로초 비텔리와 카를로 오르시니가 이끄는 오르시니 군대에게 패배했다. 몬테펠트로는 포로로 잡혔고, 조반니 보르자는 얼굴에 경미한 부상을 입고 탈출했다.[9] 이 전투로 인해 교황은 1497년 2월에 오르시니 가문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4. 3. 오스티아 탈환

간디아 공작은 1496년에 프랑스 군대가 물러난 후 마침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로마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으며, 10월 26일에는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교황 기수로 임명되었다.[7] 교황은 아들을 위해 로마 캄파냐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오르시니 가문을 상대로 한 작전을 맡겼다.

스무 살의 공작은 경험이 부족했기에 콘도티에로인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가 그를 도왔다. 초반에는 여러 오르시니 거점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브라차노의 오르시니-오데스칼키 성은 교황군의 포위를 견뎌냈다. 몬테펠트로는 부상을 입었고, 작전 지휘권은 조반니에게 넘어갔다. 성의 수비병들은 조반니를 모욕하는 팻말을 건 당나귀를 보내기도 했다.[8]

1497년 1월 24일, 보르자 군대는 소리아노에서 비텔로초 비텔리와 카를로 오르시니가 이끄는 오르시니 군대에게 크게 패했다. 몬테펠트로는 포로로 잡혔지만, 조반니 보르자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탈출했다.[9] 이 전투로 교황군은 큰 피해를 보았고, 결국 교황은 1497년 2월에 오르시니 가문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조반니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오스티아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1497년 3월 9일 성공적으로 오스티아를 탈환했다. 며칠 후 로마에서 승리 축하 행진이 열렸고, 조반니 보르자 공작은 코르도바와 함께 행진했다.

4. 4. 베네벤토 공국 창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가장 아끼는 아들 후안을 위해 이탈리아에 공국을 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교황은 수세기 동안 성 베드로 재산에 속했던 영토를 지정하였다. 1497년 6월 7일 비밀 추기경 회의에서 베네벤토 공국과 테라치나, 폰테코르보 도시를 간디아 공작과 그의 적법한 후손에게 부여하기로 결정했다.[10] 이 회의에 참석한 추기경 중 프란체스코 토데스키니 피콜로미니만이 교황령의 토지 양도에 반대했다.[10] 헤로니모 수리타에 따르면, 스페인 대사 또한 이의를 제기하며 교황에게 이 계획이 용납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고 한다.[11]

5. 의문의 죽음

1493년 스페인 귀족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결혼하여 2대 간디아 공작이 된 후안 보르자는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테사 공작, 산 피에트로 지사 등 많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497년 6월 14일, 로마 시내의 게토 근처인 피아차 델라 주디카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에서 발견되었는데, 30 두카트 금화가 든 지갑이 그대로 있어 강도의 소행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일각에서는 후안의 어리석음에 분노한 체사레 보르자가 암살을 주도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2]

5. 1. 암살 사건

1497년 6월 14일 밤, 조반니 보르자로마에서 살해당했다. 부르차르트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도나 반노차(Donna Vannozza)의 집에서 열린 가족 만찬을 마치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2] 만찬 후, 그의 형제 체사레는 그에게 교황 궁전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의 궁전(현재는 팔라초 스포르차 체사리니) 근처에서 공작은 형제에게 어딘가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수행원을 해산했다. 그는 시종과 가면을 쓴 남자를 데리고 갔는데, 이 남자는 조반니가 저녁 식사에 도착했을 때부터 함께 다녔고, 거의 매일 궁전에서 그를 방문한 지 약 한 달 정도 되었다. 공작은 유대인 광장으로 가서 하인에게 8시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전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면을 쓴 남자를 뒤에 태우고 노새를 타고 떠났다.

다음 날 아침, 공작이 궁전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의 하인들은 불안해했고, 교황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교황은 공작이 어딘가에서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12] 6월 15일 아침, 유대인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라는 조반니의 하인은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했다. 같은 날 아침, 조반니의 노새는 안장이 잘린 채 궁전으로 돌아왔다.

조반니가 하인을 남겨둔 유대인 광장 안이나 근처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는 살해 장소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로 이어지는 거리의 십자가 근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13] 알렉산데르 6세는 티베르 강둑에 있는 모든 집을 철저히 수색하도록 명령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중에 증인인 슬라브 목재 상인 조르지오(Georgio)가 진술했는데, 그는 살해된 밤에 다섯 명의 남자가 성 제롬 병원의 분수대 옆 강에 시체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빌렘 반 니울란트(Willem van Nieulandt)의 로마의 티베르 강둑(c. 1602-05)
새벽 2시경, 두 남자가 병원 옆 골목에서 나와 주위를 살피고, 다시 골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른 두 사람이 나와 주변을 살피고,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하얀 말을 탄 기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에는 시체가 있었다. 행렬은 쓰레기가 강으로 버려지는 곳으로 향했고, 그들은 시체를 강으로 던졌다. 기수는 시체의 망토가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져 가라앉게 했다.[14] 증인은 이전에 많은 시체가 강에 버려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15]

어부와 뱃사공들이 강을 끌어올렸고, 6월 16일 조반니의 시신이 티베르 강에서 수습되었다. 조반니는 아홉 군데의 상처를 입었고, 허리띠에는 30 두카트가 든 지갑이 있었다.[16]

다른 동시대 자료들은 살인 사건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공했다. 도메니코 말리피에로는 공작이 의붓형제인 조반니 스포르차와 함께 만찬을 떠났으며, 조반니 보르자가 그의 누이이자 스포르차의 아내인 루크레치아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스 베르나데스는 조반니 스포르차가 오스티아 포위 공격 중에 다툼이 있었고, 공작이 스포르차의 부하 4명을 처형했기 때문에 공작을 직접 살해했다고 밝혔다.

테베레 강에 떠오른 그의 시신에서 30두카트의 금화가 든 지갑이 발견되어 강도의 소행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설에는 체사레 보르자의 소행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5. 2. 암살 배후에 대한 의혹

1497년 6월 14일 밤, 조반니 보르자로마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어머니 도나 반노차의 집에서 열린 가족 만찬을 마치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만찬 후, 형제 체사레 보르자는 그에게 교황 궁전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의 궁전(현재 팔라초 스포르차 체사리니) 근처에서 공작은 형제에게 어딘가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며 수행원을 해산했다. 그는 시종과 가면을 쓴 남자와 함께 유대인 광장으로 가서 하인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전으로 돌아가라고 했다.[12]

다음 날 아침, 조반니의 하인은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곧 사망했다. 같은 날 아침, 조반니의 노새는 안장이 잘린 채 궁전으로 돌아왔다.[12]

전통적으로 조반니는 유대인 광장 안이나 근처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살해 장소가 달랐다. "공작은 그날 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로 이어지는 거리의 십자가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범행은 이 십자가 근처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곳에서 기마병과 보행자를 모두 목격했기 때문이다."[13] 그가 묘사한 거리는 조반니의 시신이 유기된 강둑을 따라 이어지는 거리와 동일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티베르 강둑의 모든 집을 철저히 수색하도록 명령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중에 증인인 슬라브 목재 상인 조르지오가 진술한 내용에 따라 조반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남자가 성 제롬 병원 분수대 옆 강에 시체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14] 살인 사건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밤마다 백 구가 넘는 시체가 강으로 버려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15]

어부와 뱃사공들이 강을 끌어올렸고, 6월 16일 조반니의 시신이 티베르 강에서 수습되었다. 그는 아홉 군데의 상처를 입었고, 허리띠에는 30 두카트가 든 지갑이 있었다.[16]

도메니코 말리피에로는 공작이 의붓형제인 조반니 스포르차와 함께 만찬을 떠났으며, 조반니 보르자가 그의 누이이자 스포르차의 아내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스 베르나데스는 조반니 스포르차가 오스티아 포위 공격 중 다툼이 있었고, 공작이 스포르차의 부하 4명을 처형했기 때문에 공작을 직접 살해했다고 밝혔다. 복수를 위해 스포르차는 가면을 쓴 여자를 이용하여 조반니 보르자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한다.[17][18]

1496년 6월 19일 공의회 연설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페사로 영주, 스킬라체 공, 우르비노 공작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누가 그랬든 간에, 신은 죄인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하며 일부 용의자들의 혐의를 명백히 벗겨주었다.

조사는 1년 넘게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결과 없이 종결되었다. 결국 살인은 결코 복수되지 않았고, 이는 가장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지는 데 기여했다.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은 보르자 가문의 흑역사의 일부가 되었고,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범죄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후, 오르시니 가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등이 주요 용의자로 거론되었다.

5. 2. 1. 오르시니 가문

오르시니 가문은 그해 초 나폴리 감옥에서 버지니오 오르시니가 사망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나선 유력한 용의자였다. 이 고대 로마 가문은 보르자 가문에 적대적이었고, 알렉산데르 6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간디아 공작을 전장에서 물리쳤지만, 교황이 아들을 위해 이탈리아에 공국을 만들려는 계획은 여전히 가문의 재산에 위협이 되었다.[12] 살인 직후, 밀라노 사절은 모든 정황이 오르시니의 죄를 가리키지만 교황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썼다. 12월에 산누도는 "교황이 오르시니를 파멸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확실히 그의 아들, 간디아 공작을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보고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이 그 순간이 적절하지 않다고 개입했다.[12] 여러 출처에서 알렉산데르 6세가 이 가문에 복수하기로 결심했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5. 2. 2.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은 사도청 부교황으로, 조반니 보르자 살인 사건의 주요 용의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스포르차 가문과 교황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13] 추기경은 사촌인 조반니 스포르차와 보르자 가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고, 살인 직전 그의 하인이 다툼 중에 간디아 공작을 사생아라고 불렀으며 그 남자는 그 후 살해되었다.[12] 부르차르트에 따르면, 간디아 공작은 운명의 저녁에 부교황 궁 근처에서 그의 형제 체사레 보르자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는 6월 19일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스페인 대사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그가 살인 배후라는 소문 때문에 걱정되어 불참한다고 사과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즉시 그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내가 그를 의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그를 형제로 여기기 때문이다."[16] 6월 20일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는 그의 사람들이 의심받고 있음을 인정했다. "최근 공작과의 다툼 때문에 내 사람들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 후 몇 달 동안 추기경과 교황의 관계는 변동했고, 회의가 열렸지만 로마의 스페인인들 사이에서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여름 동안 스포르차는 도시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베네치아 사절은 로마의 모든 사람이 아스카니오 스포르차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믿는다고 썼다.

카르디날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는 살인 당시 주요 용의자 중 한 명이었지만 교황은 혐의를 기각했다.

5. 2. 3. 체사레 보르자

1497년 6월 14일, 로마 시내의 게토 근처인 피아차 델라 주디카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암살당했다. 테베레 강에 떠오른 그의 시신에서 30두카트의 금화가 든 지갑이 발견되어 강도의 소행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설에는 후안의 어리석음에 화가 난 체사레 보르자의 소행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조반니의 형제인 체사레 보르자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들 사이에는 경쟁 관계가 있었고, 조반니의 죽음으로 체사레가 교회를 떠나 형의 자리를 무관으로 차지하고 보르자 공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체사레가 형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1498년 2월 22일 베네치아의 페라라 대사 파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는 "최근 캔디아 공작의 죽음이 그의 형제 추기경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이 비난은 살인 9개월 후, 로마가 아닌 베네치아에서 나타났다. 2년 후,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 파올로 카펠로도 이 주장을 보고서에 포함시켰다. 1501년 11월 이탈리아에 나타난 익명의 ''실비오 사벨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소책자는 보르자 가문에 대한 공격이었고, 이는 흑역사의 근거가 되었다. 이 소책자는 체사레에 대해 "그들 모두 [교황]을 두려워하고, 특히 살인을 저지른 추기경으로서 형제 살해자가 된 그의 아들을 두려워한다"고 언급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결국 체사레 보르자가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2]

일부 자료에 따르면 간디아 공작 부인 마리아 엔리케스는 남편 살해 책임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 자료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사망 후, 체사레가 공국을 잃고 1504년 5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체포된 후의 사건을 설명한다. 1504년 6월 18일 외교 파견에서는 "발렌티노에 의해 살해된 캔디아 공작의 아내가 이 보복과 복수의 행위를 조달했으며, 그녀는 스페인 왕의 친척이다."라고 주장했다. 횔러에 따르면, 이는 코르도바가 체포를 통해 안전 조치를 위반한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발생한 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주재 베네치아 사절 안토니오 주스티니아니는 5월 보고서에 같은 내용을 썼다. 10월 19일, 체사레 보르자가 스페인 감옥으로 이송되었을 때, 주스티니아니는 "그의 형제인 간디아 공작의 죽음과 그의 매형의 죽음에 대해 그를 상대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의 범죄로 인해 그를 처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편지가 스페인에서 왔다고 주장했다.[12]

이 소송은 체사레의 탈출과 1507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마리아 엔리케스는 스페인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고, 그녀가 시동생을 비난했다면 스페인 가톨릭 군주에게 그녀의 의견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없었고, 살인 상황은 소문으로만 알 수 있었다.[12]

프란체스코 기차르디니는 1537-40년 저서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체사레 유죄에 대한 주장을 요약했다. 그는 발렌시아 추기경이 "무기를 사용하기를 열망했으며, 그의 형제가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돈나 루크레치아가 그를 더 사랑한다는 것에 매우 질투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주요 동기는 근친상간 욕망과 야망이었다. 파올로 조비오도 Vita e gesta di Ferdinando Consalvo에서 체사레를 비난했다.[12]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는 체사레 보르자가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세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이론을 기각했다.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는 자료를 검토하여 체사레의 유죄를 배제했고, 살인 당시 그런 가정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간디아 공작이 오르시니와 조반니 스포르차의 복수, 또는 그의 방탕함, 또는 둘 다의 희생자가 되었든, 체사르는 이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결론지었다.[12]

콘스탄틴 폰 횔러도 체사레가 살인할 이유가 없고, 교황의 행동으로 이 추측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믿음은 단지 체사레가 로마냐의 작은 폭군들을 제거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1877년, 알로이스 쾨프플러는 체사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헌신했다. 윌리엄 로스코도 같은 의견이었고, 살인에 대한 유일하게 유용한 출처는 부르차르드였으며 "전체 이야기에서 체사르가 거래에 어떤 역할도 했다는 가장 작은 징후조차 없다"고 확립했다. 그는 간디아 공작이 "질투심 많은 라이벌이나 상처 입은 남편에게 발각되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12]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기차르디니 주장을 지지했다.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아마도 정확했을 것이지만, 체사르는 그의 형제를 살해했다"고 썼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아들의 권력 아래 놓이면서 "사실상 도덕적으로 공범"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라파엘 사바티니는 체사레 보르자 전기를 통해 그레고로비우스를 비판했다. 그는 "체사레 보르자에 반대하는 점이 많지만, 그는 형제 살인자였다는 것이 증명된 적이 없고, 증명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살인에 대한 몇 안 되는 실제 알려진 사실은 모두 다른 결론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사바티니는 손목이 묶인 공작이 개인적인 적에게 고문받고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비열한 연애 사건을 가리킨다"고 믿었다.[12]

5. 3. 장례

조반니 보르자는 1497년 6월 14일 밤 로마에서 살해당했다. 부르차르트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도나 반노차의 집에서 열린 가족 만찬을 마치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2] 만찬 후, 그의 형제 체사레는 그에게 교황 궁전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의 궁전(현재는 팔라초 스포르차 체사리니) 근처에서 공작은 형제에게 어딘가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수행원을 해산했다. 그는 시종과 가면을 쓴 남자와 함께 유대인 광장으로 가서 하인에게 8시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전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공작이 돌아오지 않자 그의 하인들이 교황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교황은 공작이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12] 6월 15일 아침, 조반니의 하인은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곧 사망했다. 같은 날 아침, 조반니의 노새가 안장이 잘린 채 궁전으로 돌아왔다.

전통적으로 조반니가 살해된 장소는 유대인 광장 안이나 근처로 추정되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로 이어지는 거리의 십자가 근처였다고 한다.[13] 알렉산데르 6세는 티베르 강둑에 있는 모든 집을 철저히 수색하도록 명령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슬라브 목재 상인 조르지오의 증언에 따라 조반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남자가 성 제롬 병원의 분수대 옆 강에 시체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14] 살인 사건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밤마다 백 구가 넘는 시체가 강으로 버려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15]

어부와 뱃사공들이 강을 끌어올렸고, 6월 16일 조반니의 시신이 티베르 강에서 수습되었다. 그는 아홉 군데의 상처를 입었고, 허리띠에는 30 두카트가 든 지갑이 있었다.[16]

살해 사건 이후, 슬픔에 잠긴 교황은 몇 시간 동안 통곡했고, 다음 주 일요일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6월 19일 추기경 회의에서 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매우 감동적인 말로 애도했다.[19] 교황은 교회를 개혁하기로 결심하고 6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1497년 조반니 보르자가 묻힌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이스라엘 실베스트르의 판화).


공작의 시신은 먼저 산탄젤로 성으로 옮겨졌고, 그날 저녁에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으로 옮겨졌다. 120명의 횃불 운반자와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시신은 웅장하고 화려한 의식을 치르며 영구에 안치되었고, 나중에는 지하 묘지에 묻혔다.[21]

교황 율리오 2세의 치세 동안, 간디아 공작부인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는 피에르 루이지와 조반니의 유해를 로마에서 간디아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교황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파문 위협을 가하며 시신 발굴을 허용하도록 명령했다.[23] 간디아 대성당에 있던 두 형제의 무덤은 보존되지 않았다.

5. 4. 수사

조반니 보르자는 1497년 6월 14일 밤 로마에서 살해되었다. 부르차르트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도나 반노차(Donna Vannozza)의 집에서 열린 가족 만찬을 마치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2] 만찬 후, 형제 체사레는 그에게 교황 궁전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의 궁전(현재 팔라초 스포르차 체사리니) 근처에서 공작은 형제에게 어딘가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수행원을 해산했다. 그는 시종과 가면을 쓴 남자와 함께 유대인 광장으로 가서 하인에게 8시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전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공작이 돌아오지 않자 그의 하인들이 교황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교황은 공작이 어딘가에서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 희망했지만, 이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12]

6월 15일 아침, 조반니의 하인은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했다. 같은 날 아침, 조반니의 노새가 안장이 잘린 채 궁전으로 돌아왔다.

전통적으로 조반니가 유대인 광장 안이나 근처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살해 장소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로 이어지는 거리의 십자가 근처였다고 한다.[13]

알렉산데르 6세는 티베르 강둑에 있는 모든 집을 철저히 수색하도록 명령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중에 증인인 슬라브 목재 상인 조르지오(Georgio)가 진술한 내용에 따라 조반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남자가 성 제롬 병원의 분수대 옆 강에 시체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14] 살인 사건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밤마다 백 구가 넘는 시체가 강으로 버려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15]

어부와 뱃사공들이 강을 끌어올리도록 소환되었고, 6월 16일 조반니의 시신이 티베르 강에서 수습되었다. 그는 아홉 군데의 상처를 입었는데, 하나는 목을 관통했고, 다른 여덟 개는 머리, 몸, 다리에 있었다.[16]

다른 동시대 자료들은 살인 사건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공했다. 도메니코 말리피에로는 공작이 조반니 스포르차와 함께 만찬을 떠났으며, 그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고문하고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스 베르나데스는 조반니 스포르차가 공작을 직접 살해했다고 밝혔다.[18]

살해 사건 이후, 슬픔에 잠긴 교황은 몇 시간 동안 통곡했고, 다음 주 일요일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6월 19일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매우 감동적인 말로 애도했다.[19] 교황은 교회를 개혁하기로 결심했지만,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작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을 때, 많은 이탈리아 및 외국 고위 인사들이 교황에게 위로를 전했다. 절망에 빠진 알렉산데르 6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 국왕에게 사임을 고려하고 있다고 편지를 썼지만, 국왕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답했다.[20]

공작의 시신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안치되었다.[21]

1496년 6월 19일 공의회 연설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일부 용의자들의 혐의를 명백히 벗겨주었다.

조사는 1년 넘게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결과 없이 종결되었다. 결국 살인은 결코 복수되지 않았고,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범죄 중 하나로 여겨졌다.




'''주요 용의자:'''

  • 오르시니 가문: 그해 초 나폴리 감옥에서 버지니오 오르시니가 사망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나섰다.
  •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살인 이후 주요 용의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스포르차 가문과 교황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였다.
  • 안토니오 마리아 델라 미란돌라: 조반니 보르지아가 살해되어 시신이 강에 던져진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집이 수색 대상이었다.
  • 체사레 보르자: 조반니의 형제. 개인적인 경쟁 관계가 존재했고, 조반니의 죽음으로 체사레는 원한다면 교회를 떠나 형제의 자리를 무관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교황에 의해 혐의가 벗겨진 인물:'''

페사로 영주 조반니 스포르차

  • 조반니 스포르차: 페사로 영주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남편. 결혼은 더 이상 보르자 가문에 정치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
  • 조프레 보르자: 스킬라체 공은 체사레와 조반니 보르자의 동생. 그의 아내 아라곤의 산차는 남편의 두 형제와 모두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우르비노 공작. 1496년 조반니 보르자와 함께 오르시니에 맞서 교황군을 이끈 용병 대장이었다.





'''체사레에 대한 소송'''

일부 자료에 따르면 간디아 공작 미망인인 마리아 엔리케스가 남편 살해의 책임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료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 발생한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소송은 궁극적으로 체사레의 탈출과 이후 1507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견'''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항상 범인의 정체성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프란체스코 기차르디니는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체사레의 유죄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주장을 요약했다.

19세기에는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이론을 기각했다.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는 소스를 철저히 검토하여 체사레의 유죄를 배제했다.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여전히 기차르디니의 주장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라파엘 사바티니는 체사레 보르자의 전기를 통해 그레고로비우스를 비판했다.

6. 유산과 평가

후안 보르자 데 간디아 공작은 1493년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결혼하여 2대 간디아 공작이 되었으며, 슬하에 후안 보르하 이 엔리케스(훗날 3대 간디아 공작, 프란치스코 보르자의 아버지)와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 보르하를 두었다.

자코포 산나자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인간 어부로 비꼬는 에피그램을 통해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스캔들을 암시했다.[50] 보르자 가문의 이야기는 낭만주의 시대 문학의 단골 소재였으며, 19세기 작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들의 흑역사를 널리 퍼뜨렸다. 특히 간디아 공작이 형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주요 모티프였다.


  • 마시모 다제글리오는 1833년 소설 에토레 피에라모스카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형을 살해하고 시신을 테베레 강에 유기한 반영웅으로 묘사했다.[51]
  •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1837년 서사시 ''사보나롤라''에서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의 대화를 통해 살인 사건을 다루었다.[52]
  • 알렉상드르 뒤마는 1840년 소설 ''보르자스''에서 체사레와 그의 하수인 미켈로토 코렐라의 대화를 추가하여 살인 사건을 상세히 묘사했다.[53][54]
  • 앨저넌 찰스 스윈번은 1908년 드라마 ''간디아 공작''에서 보르자 가문의 부도덕성에 초점을 맞춰 이 사건을 다루었다.[55][56]
  •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1926년 소설 ''보르자스 또는 비너스의 발 아래''에서 후안을 "피상적인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그의 매력에 많은 여성들이 열광했다고 언급했다.[57][58]




2010년 애니메이션 어쌔신 크리드: 어센던스에서는 체사레가 매춘부를 고용해 후안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1년 드라마 보르지아에서는 배우 데이비드 오크스와 스탠리 웨버가 각각 후안 역을 맡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CBBC의 ''끔찍한 역사''에서는 벤 윌본드가 조반니 보르자 역을 맡아 보르자 가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6. 1. 가족

1493년, 후안 보르자 데 간디아 공작은 스페인 귀족 마리아 엔리케스 데 루나와 결혼하여 2대 간디아 공작이 되었다. 부인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다.

이름설명
후안 보르하장남으로 3대 간디아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아들은 후에 예수회 제3대 총장이 되어 성인으로 추대된 프란치스코 보르자이다.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 보르하장녀로 바야돌리드의 수도원에서 수녀가 되었다.


6. 2. 대중 문화

자코포 산나자로의 전집에서 발췌한 목판화 이니셜
자코포 산나자로의 전집에 있는 이 목판화는 "인간 어부" 에피그램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50] 살인 사건 이후, 나폴리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자코포 산나자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해 재치 있고 잔혹한 에피그램을 썼다.[50] 이 시는 교황의 사도적 칭호를 인간 어부로 비꼬며, 아들의 시신이 강에서 끌려 나왔을 때의 스캔들을 암시한다.

보르자 가문의 범죄와 비극은 낭만주의 시대에 빈번한 문학적 주제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팸플릿 작가와 연대기 작가들이 흑역사를 만들었지만, 19세기 시인과 소설가들은 이를 유럽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간디아 공작이 질투심 많은 형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결정적인 요소였다.

마시모 다제글리오의 1833년 역사 소설 에토레 피에라모스카는 리소르지멘토 시대 이탈리아 애국심을 표현한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다제글리오는 체사레 보르자를 반영웅으로 묘사하며, 수많은 범죄 중 하나로 형제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지고 "안장의 손잡이에서 피 얼룩을 씻어내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사라진" 인물로 그렸다.[51]

바티칸으로 옮겨진 조반니 보르자의 시신 (1897년 로도비코 포글리아기의 목판화)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독일 시인 중 한 명으로, 1837년 서사시 ''사보나롤라''에서 조반니 보르자의 살인 사건을 다룬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노래를 헌정했다.[52] 이 노래는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가 늦은 밤에 나눈 상상의 대화를 묘사하며, 체사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고 말한다. 어린 공작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매춘부의 품에 안겨 잠들지 않고 있다. 체사레가 말하는 늙은 창녀는 테베레 강이며,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이 더 큰 죄인을 낳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1840년 소설 ''보르자스''에서 이 살인 사건을 묘사했는데 (조반니 보르자는 프란체스코로 언급됨), 이는 그의 ''유명한 범죄'' 시리즈로 출판되었다.[53] 뒤마의 초기 역사 소설 중 하나인 이 소설은 다큐멘터리 연구를 기반으로 했으며, 나폴리에서 만난 이탈리아 작가 피에르 안젤로 피오렌티노의 협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작가는 부르샤드의 살인 묘사를 면밀히 따르면서, 약간의 이야기 디테일과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하수인 미켈로토 코렐라 사이의 허구적 대화를 추가했다. 이 소설은 동족 살해와 근친상간의 확립된 클리셰에 의존한다. 뒤마의 권위주의적이고 절대적인 정권에 대한 반대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지만, 이 소설에는 강한 반성직자적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이 시리즈는 대중 문학이었으며, 1840년대에 여러 번 재인쇄되었다.[54]

모더니스트 앨저넌 찰스 스윈번은 1908년에 이 살인 사건에 관한 드라마 ''간디아 공작''을 썼는데, 희생자를 프란체스코라고 지칭하고 미켈로토를 체사레의 하수인으로 등장시켰다.[55] 이 퇴폐적인 작품은 화려한 셰익스피어식 언어를 사용하고 살인 후 교황과 체사레 사이의 상상의 대화를 다시 사용하면서 보르자 가문의 부도덕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무대용 연극이 아니라 "증오, 야망, 두려움, 욕망, 아이러니한 악의 정복"에 관한 짧고 극적인 시였다.[56]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1926년 소설 ''보르자스 또는 비너스의 발 아래''는 이러한 문학적 전통의 센세이션과는 대조적으로, 현대 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했다. 스페인 리얼리스트 작가는 헐뜯긴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했다.[57] 사건을 고통스럽게 재구성한 후, 화자는 체사레에 대한 비난은 단지 악의적인 중상모략일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의 형제는 단지 삶을 즐기며 관련된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이일 뿐이었다. 이바녜스는 후안에 대해 "그는 현실적으로 피상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성격은 그의 외부적 화려함에 상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그의 우아함과 남성적인 활력에 열광했다"고 말한다.[58]

2010년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어쌔신 크리드: 어센던스에서 후안의 죽음은 체사레 보르자에 의해 묘사되는데, 체사레는 그를 살해하기 위해 매춘부를 고용한다.

2011년 쇼타임 시리즈 보르지아에서 후안 역은 데이비드 오크스가 연기했으며, 시리즈 시즌 2 "경이로운 세상"에서 체사레에게 살해당한다. 2011년 프랑스/독일 시리즈 보르지아에서 후안 역은 프랑스 배우 스탠리 웨버가 연기했다. 그는 첫 번째 시즌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해당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뱀이 일어선다"에서 사망한다. 이 각색에서 그는 로드리고와 반노차의 장남이며, 그의 살해는 주로 루크레치아에 의해 자행되며, 그녀의 연인인 페드로 칼데스가 돕는다. 두 연출 모두 후안을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잔혹하며, 거의 구원받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CBBC 텔레비전 쇼 ''끔찍한 역사''는 보르자 가문을 묘사하는 노래를 선보였으며, 벤 윌본드가 조반니 보르자 역을 맡았다.

6. 3. 역사적 평가

자코포 산나자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해 재치 있고 잔혹한 에피그램을 썼는데, 교황의 사도적 칭호를 인간 어부로 비꼬며 아들의 시신이 강에서 끌려 나왔을 때의 스캔들을 암시했다.[50]

보르자 가문의 범죄와 비극은 낭만주의 시대에 빈번한 문학적 주제가 되었다. 19세기 시인과 소설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팸플릿 작가와 연대기 작가들이 만든 흑역사를 유럽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처음부터 간디아 공작의 질투심 많은 형제에 의한 살인은 결정적인 요소였다.

마시모 다제글리오의 1833년 역사 소설 에토레 피에라모스카는 동족 살해를 언급했는데, 이는 리소르지멘토 시대 이탈리아 애국심의 매우 인기 있는 문학적 표현이었다. 다제글리오는 체사레 보르자를 형제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진 반영웅으로 만들었다.[51]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1837년 서사시 ''사보나롤라''에서 조반니 보르자의 살인 사건을 다룬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노래를 헌정했다.[52] 이 노래는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가 늦은 밤에 나눈 상상의 대화를 묘사하며, 체사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고 말한다. 체사레가 말하는 늙은 창녀는 테베레 강이며, 알렉산데르 6세는 위대한 죄인으로서 "그가 훨씬 더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1840년 소설 ''보르자스''에서 이 살인 사건을 묘사했는데(조반니 보르자는 프란체스코로 언급됨), 이는 그의 ''유명한 범죄'' 시리즈로 출판되었다.[53] 뒤마는 부르샤드의 살인 묘사를 면밀히 따르면서,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하수인 미켈로토 코렐라 사이의 허구적 대화를 추가했다. 이 소설은 동족 살해와 근친상간의 확립된 클리셰에 의존하며, 강한 반성직자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54]

앨저넌 찰스 스윈번은 1908년에 이 살인 사건에 관한 드라마 ''간디아 공작''을 썼는데, 희생자를 프란체스코라고 지칭하고 미켈로토를 체사레의 하수인으로 사용했다.[55] 이 작품은 화려한 셰익스피어식 언어를 사용하고 살인 후 교황과 체사레 사이의 상상의 대화를 다시 사용하면서 보르자 가문의 부도덕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56]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1926년 소설 ''보르자스 또는 비너스의 발 아래''는 현대 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했다. 스페인 리얼리스트 작가는 헐뜯긴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했다.[57] 이바녜스는 후안에 대해 "그는 현실적으로 피상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성격은 그의 외부적 화려함에 상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그의 우아함과 남성적인 활력에 열광했다"고 말한다.[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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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Cesare Borgia: A Biography Chapman and Hall 1913
[3] 간행물 Isabella d'Este e i Borgia 1914-09
[4] 웹사이트 María Enríquez de Luna https://dbe.rah.es/b[...]
[5] 논문 El nacimiento de un señorio singular: el ducado gandiense de los Borja 2006
[6] 서적 Algunos documentos y cartas privadas que pertenecieron al segundo duque de Gandía, don Juan de Borja Imp. La Voz Valenciana 1919
[7] 서적 Die Borgia: Faszination einer machtbesessenen Renaissance-Familie Callwey, München 1988
[8] 서적 I diarii di Marino Sanuto F. Visentini, Venice 1879
[9] 서적 Delle vita e de'fatti di Guidobaldo I. da Montefeltro, Duca d'Urbino Giovanni Silvestri, Milan 1821
[10] 서적 The History of the Popes B. Herder, St. Louis 1898
[11] 서적 Historia del rey don Hernando el Catholico Zaragoza 1580
[12] 웹사이트 Johannes Burchardus Diary pp. 88-90 https://archive.org/[...]
[13] 서적 The History of the Popes
[14] 웹사이트 Johannes Burchardus Diary pp. 90-91 https://archive.org/[...]
[15] 웹사이트 Johannes Burchardus Diary p. 91 https://archive.org/[...]
[16] 웹사이트 Johannes Burchardus Diary p. 92 https://archive.org/[...]
[17] 서적 Annali veneti dall'anno 1457 al 1500 Gio. Pietro Vieusseux, Firenze 1843
[18] 서적 Historia de los reyes católicos J.M. Geofrin, Sevilla 1870
[19] 간행물 Der Tod des Herzogs von Gandia 1877
[20] 서적 Historia del rey don Hernando el Catholico Zaragoza 1580
[21] 웹사이트 Johannes Burchardus Diary p. 92 https://archive.org/[...]
[22] 논문 Päpstliche Kurie und Reformideologie am Beispiel von Santa Maria del Popolo in Rom 1982
[23] 서적 The Borgias Praeger Publishers 1972
[24] 인용
[25] 서적 Johannis Burchardi Diarium Ernest Leroux, Paris 1884
[26] 편지 Letter of Stefano Taberna to the Duke of Milan 1497-06-21
[27] 인용
[28] 인용
[29] 서적 A History of the Papacy During the Period of the Reformation Longmans, Green, and Co., London 1887
[30] 서적 La vita e gli scritti di Niccolò Machiavelli Ermanno Loescher 1883
[31] 서적 Cesare Borgia. Duca di Romagna: Notizie e documenti D'Ignazio Galeati e figlio, Imola 1878
[32] 서적 The Borgias and Their Enemies Harcourt, Inc. 2008
[33] 서적 Cesare Borgia: His Life and Times London 1976
[34] 서적 Lucrezia Borgia nach Urkunden und Correspondenzen ihrer eigenen Zeit J. G. Cotta'sche Buchhandlung, Stuttgart 1874
[35] 간행물 Relazioni degli ambasciatori veneti al Senato Società Editrice Fiorentina, Firenze 1846
[36] 서적 Johannis Burchardi Diarium Ernest Leroux 1885
[37] 서적 Le opere di Niccolò Machiavelli Tipografia Cenniniana 1874
[38] 서적 Life, Love and Death in Renaissance Italy Viking 2004
[39] 인용
[40] 간행물 Die Katastrophe des herzoglichen Hauses der Borja's von Gandia 1892
[41] 서적 Dispacci di Antonio Giustiniani ambasciatore veneto in Roma dal 1502 al 1505 Successori Le Monnier 1876
[42] 서적 Storia d'Italia Tipografia Elvetica 1836
[43] 인용
[44] 간행물 Don Rodrigo de Borja (Papst Alexander VI.) und seine Söhne 1889
[45] 서적 Life And Pontificate Of Leo The Tenth T. Cadell 1827
[46] 서적 Lucretia Borgia, according to original documents and correspondence of her day D. Appleton and Company 1903
[47] 서적 The Life of Cesare Borgia Stanley Paul & Co. 1912
[48] 서적 Regesto dei documenti di Giulia Farnese Lulu 2012
[49] 서적 La familia de los Borjas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1999
[50] 서적 Iacobi Sannazarii opera omnia Seb. Gryphium 1536
[51] 서적 Ettore Fieramosca, or the Challenge of Barletta Paine & Burgess 1845
[52] 서적 Savonarola: Ein Gedicht J. G. Cotta'sche Buchhandlung 1837
[53] 서적 Les Borgia, in Crimes célèbres Administration de la librairie [Maurice Lachâtre] 1839-40
[54] 논문 Écrire l’histoire au «souffle des passions»: Les Borgia d’Alexandre Dumas https://doi.org/10.5[...] 2023
[55] 서적 The Duke of Gandia Chatto & Windus 1908
[56] 서적 Figures of Several Centuries Constable and Company Ltd 1916
[57] 간행물 La figura de César Borgia en A los pies de Venus, de V. Blasco 2007
[58] 서적 A los pies de Venus (Los Borgia) Prometeo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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