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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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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촌 사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재일 한국인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유언비어와 내무성의 통제 지침에 따라 자경단이 가가와현 출신 행상단 15명을 습격하여 9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인으로 오인된 부라쿠민 출신자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낳았으며, 이후 오랫동안 은폐되었다가 1979년부터 진상 규명 노력이 시작되었다. 2023년에는 사건 100주년을 맞아 노다시 시장이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했으며, 관련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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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촌 사건
사건 개요
명칭후쿠다무라 사건
다른 명칭후쿠다무라 사건
발생 장소일본,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후쿠다무라
좌표35°56′34″N 139°55′51″E
발생 날짜1923년 9월 6일
공격 측 인원약 200명
사망자9명
피해자6명
가해자후쿠다무라 자경단원, 다나카무라 자경단원
배경
사건 배경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유언비어
관련 정보
관련 영화후쿠다무라 사건
참고 자료내각부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2. 사건 배경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1]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이었던 고토 후미오는 "지진을 틈타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있으며, 도쿄에서는 폭탄을 소지하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지르는 자들이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 조선인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3]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23년 3월 가가와현을 출발한 행상단 15명은 간사이, 군마현을 거쳐 지바현으로 이동하며 약을 판매했다. 간토 대지진 발생 후, 지바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조선인 등을 단속하기 위한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9월 6일, 지바현 후쿠다촌에서 행상단이 자경단에게 둘러싸였다. 자경단은 행상단의 말투가 이상하다며 조선인이 아닌지 의심했고, "15엔 50센"이라고 말하게 하는 등 조선인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후쿠다촌 촌장이 이들이 일본인이라고 했음에도, 군중은 흥분하여 행상단을 공격했다.

당시 행상단이 사용하던 사누키 방언은 지바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표준어 발음에도 억양이 있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 쉬웠다. 또한, 당시 방범 포스터에는 "수상한 행상인을 보면 경찰에 연락하라"는 문구가 있어, 가난한 행상인에 대한 차별 의식도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2. 1.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재일 한국인이 일본 전역에서 범죄를 저지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1] 이러한 소문은 당시 내무성 경보국 국장이었던 고토 후미오의 이름으로 발송된 전문에 의해 부분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전문은 "지진을 틈타 한국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있으며... 도쿄에서는 폭탄을 소지하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지르는 자들이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전문은 지역 국장들에게 한국인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3]

곧바로 칼과 무기로 무장한 린치 폭도들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한국인인지 아닌지 무작위로 질문을 받았다. 한국인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종종 살해되었지만, 중국인과 오인된 일본인도 희생되었다.[3]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조선 독립 운동이 발흥했고, 사건 4년 전인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서는, 데모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어 진압에 군이 출동했다. 일본에서는 왜곡 보도되었고, 방화, 약탈, 학살을 반복하는 집단을 일반적인 정치범으로 간주하지 않고, "토비·비적"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의 말을 듣지 않는 "불령배"로, 일본 전역에서 관민에 의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졌다는 점을 배경으로 들 수 있다.

관동 대지진 당일·다음 날에는, 간토 각지의 경찰이 "조선인을 조심하라", "야습이 있다" 등 관측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린 결과, 후쿠다 마을 주변의 자경단도 "이상한 사태에 흥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2. 자경단의 형성과 역할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서 재일 한국인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1]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이었던 고토 후미오는 "지진을 틈타 한국인들이 방화하고, 도쿄에서는 폭탄을 소지하고 불을 지른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 한국인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칼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한국인인지 질문했고, 한국인으로 확인되면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이나 오인된 일본인도 희생되었다.[3]

간토 각지의 경찰은 "조선인을 조심하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고,이는 후쿠다 마을 주변 자경단을 자극했다.[3]

2. 3. 후쿠다무라 사건 이전의 사회 분위기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 사회에는 재일 한국인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1] 이는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이었던 고토 후미오의 이름으로 발송된 전문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이 전문에는 "지진을 틈타 한국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있으며... 도쿄에서는 폭탄을 소지하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지르는 자들이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3]

이러한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특히, 사건 4년 전인 1919년에 발생한 3·1 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내에서는 이를 왜곡하여 보도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졌다. 조선인을 "불령선인"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는 관동 대학살로 이어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3]

3. 사건 발생

1923년 3월, 가가와현에서 약을 팔러 출발한 행상단 15명은 간사이 지역을 거쳐 군마현을 지나 8월에 지바현에 도착했다.[22]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고, 9월 4일 지바현에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조선인 등을 단속하기 위한 자경단이 조직되었다.[22]

9월 6일 낮 무렵,[24] 토네 강 강변에서 쉬고 있던 행상단은 자경단 200여 명에게 둘러싸였다. 자경단은 행상단의 말투가 이상하다며 조선인이 아닌지 의심했다.[25] 후쿠다무라 촌장이 행상단이 일본인이라고 말했지만, 자경단은 듣지 않았고, 주재소 순경이 경찰 본서에 문의하러 갔다. 그 사이 흥분한 자경단은 행상단을 공격하여 9명이 목숨을 잃었다.[26] 희생자 중에는 임신부와 2, 4, 6세의 어린아이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28][29] 이들의 시신은 토네 강에 버려져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27] 경찰 부장의 설득으로 간신히 6명의 행상단원이 목숨을 건졌다.[26]

3. 1. 행상단의 이동 경로와 자경단과의 조우

1923년 3월, 가가와현 출신의 행상단 15명은 정로환 등의 약을 팔기 위해 간사이 지방을 거쳐 군마현을 지나 8월에 지바현에 도착했다.[22] 이들은 사누키 방언을 사용했는데, 지바현 사람들은 이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2] 또한, 행상단이 표준어를 사용했지만 억양이 있어 조선인으로 오인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고, 9월 4일 지바현에는 계엄령이 발동되었다.[22] 이와 함께 조선인 등을 단속하기 위해 자경단이 조직되었다.[22] 9월 6일 낮 무렵,[24] 토네 강 강변에서 쉬고 있던 행상단은 자경단 200여 명에게 둘러싸였다.[25] 자경단은 행상단의 말투가 이상하다며 조선인이 아닌지 의심했다.[25]

후쿠다무라 촌장이 행상단이 일본인이라고 말했지만, 자경단은 듣지 않았고, 결국 주재소 순경이 경찰 본서에 문의하러 갔다.[26] 그 사이 자경단은 흥분하여 행상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 혼란 속에서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26]

3. 2. 자경단의 폭력과 살해

1923년 9월 6일, 간토 대지진 발생 닷새 후,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 군 후쿠다촌(현재의 노다시) 미쓰보리의 토네 강 강변에서 약을 팔던 행상단 15명이 쉬고 있었다. 이때 흥분한 상태의 자경단 200여 명이 이들을 둘러싸고 "말투가 이상하다", "조선인이 아니냐"라며 시비를 걸었다.[25] 당시 가가와현에서 온 행상단은 사누키 방언을 사용했는데, 지바 현 사람들은 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표준어를 사용하더라도 억양이 있어 조선인으로 오인받기 쉬웠다.

후쿠다촌 촌장 등이 나서서 "일본인이 아니냐"라고 말렸지만, 자경단은 듣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6] 주재소 순사가 상황을 보고하러 간 사이, 자경단은 행상단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갈고리가 달린 작대기로 공격했다.[26] 심지어 총성도 두 발이나 들렸다고 한다.[26]

결국, 주재소 순사가 본서 경찰 부장과 함께 돌아왔을 때는 이미 15명 중 9명이 사망한 뒤였다. 희생자 중에는 임산부와 2, 4, 6세의 어린아이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28][29] 이들의 시신은 토네 강에 버려져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27] 경찰 부장의 설득으로 간신히 6명의 행상단원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살아남은 행상단원의 수기에 따르면, 자경단원들은 "조선인을 때려 죽여라"라고 외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26] 당시 일본 사회는 3·1 운동 등의 영향으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경단의 폭력은 더욱 잔혹하게 자행되었다.

3. 3. 경찰의 개입과 생존자

1923년 9월 6일, 간토 대지진 발생 5일 후, 흥분한 자경단이 토네 강변에서 쉬고 있던 행상단을 둘러싸고 "조선인이 아니냐"며 말을 퍼붓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25] 주재소 순사가 상황을 보고하러 간 사이, 자경단은 행상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6]

주재소 순사가 본서의 부장과 함께 돌아와 사태를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15명 중 어린이 3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한 뒤였다. 시신은 토네 강에 유기되어 유골조차 남지 않았다.[26] 경찰 부장은 철 철사[27] 등으로 묶여 있거나 강에 던져진 행상단원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며 설득하여 6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26]

4. 사건의 피해자

1923년 9월 6일, 간토 대지진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가와현에서 약을 팔러 온 행상단 15명이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후쿠다촌(현재의 노다시) 미쓰보리의 도네강 강변에서 자경단에게 둘러싸였다.[24][25] 자경단원들은 행상단의 말투가 이상하다며 조선인으로 오인하여 폭행했고, 이로 인해 행상단 15명 중 임산부와 2세, 4세, 6세의 유아를 포함한 9명(임산부의 태아를 포함하여 10명으로 보는 경우[28]도 있다)이 목숨을 잃었다.[29] 이들의 시신은 도네강에 떠내려가 유골조차 남지 않았다.[26]

4. 1. 희생자들의 신원과 출신

희생자들은 가가와현 미토요군(현 미토요시) 출신의 약장수 행상인들이었다.[5] 이들은 임산부와 2세, 4세, 6세의 유아를 포함하여 9명이었다(임산부의 태아를 포함하여 10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5] 피해자 일행은 피차별 부락 출신이었다.[9] 생존자나 유족들이 사건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것은 차별로 인한 2차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6]

4. 2. 희생자들의 피해 규모

1923년 9월 6일, 간토 대지진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카가와현 미토요군(현 칸온지 시미토요 시) 출신의 약 행상인 15명 중 9명이 희생되었다.[29] 희생자 중에는 임산부와 2세, 4세, 6세의 유아가 포함되어 있었으며,[29] 임산부의 태아를 포함하여 10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8] 이들은 피차별 부락 출신으로, 사건 이후 생존자와 유족들은 차별로 인한 2차 피해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6]

5. 사건의 가해자

검거된 사람들은 후쿠다 촌과 인접한 다나카 촌의 자경단원 8명이었다.[1] 이들은 소란죄 및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조선인으로부터 향토를 지킨 우국지사이며, 국가 명령에 따라 자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실수로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예심판사는 재판 전부터 형량을 고려하겠다고 신문에 밝히기도 했다.[1]

다나카 촌 회의는 피고인 4명에게 위로금 명목의 변호 비용을 지급하기로 하고, 각 가구에서 균등하게 징수했다.[1]

재판 결과, 다나카 촌 자경단원 1명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1] 나머지 7명은 대심원에서 징역 3~1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쇼와 천황 즉위에 따른 은사로 2년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2] 이후, 출소한 주동자 중 한 명은 선거를 통해 촌장이 되었고, 촌 합병 후에는 시의원을 역임했다.[3][4]

5. 1. 가해자들의 신원과 소속

검거된 사람들은 현장인 후쿠다촌자경단원 4명과 인접한 다나카촌의 자경단원 4명이다.[1]

이들 8명은 소란죄와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피고인들은 "향토를 조선인으로부터 지킨 나는 우국지사이며, 국가가 자경단을 만들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잘못하여 죽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의 예심판사재판 전부터 "형량을 고려하겠다"고 신문에 말하기도 했다.[1] 다나카 촌 회의에서는 4명의 피고인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변호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정하고, 촌의 각 가구에서 균등하게 징수했다.[1]

다나카 촌의 1명에게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제2심 판결이 내려졌고,[1] 나머지 7명에게는 대심원에서 징역 3년에서 10년의 실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수형자 전원은 확정 판결 후 2년 5개월 뒤 쇼와 천황 즉위에 따른 은사로 석방되었다.[2] 사건을 조사한 이시이 야스히로에 따르면, 출소한 중심 인물 중 한 명은 후에 선거를 거쳐 촌장이 되었고, 촌이 합병된 후에는 시의원을 역임했다고 한다.[3][4]

5. 2. 재판 과정과 판결

검거된 사람들은 현장인 후쿠다 촌의 자경단원 4명과 인접한 다나카 촌의 자경단원 4명이다.[1] 이들 8명은 소란죄와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피고인들은 "조선인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지킨 나는 우국지사이며, 국가가 자경단을 만들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실수로 죽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예심 판사는 재판 전부터 "형량을 고려하겠다"고 신문에 말하기도 했다.[1] 검거 당시 다나카 촌 회의에서 피고인 4명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정하고, 마을의 각 가정에서 돈을 걷었다.[1]

대심원 판결은 다나카 촌의 1명에게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제2심 판결을 내렸고,[1] 나머지 7명에게는 징역 3년에서 10년의 실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수형자 전원은 확정 판결 후 2년 5개월 뒤 쇼와 천황 즉위에 따른 은사로 석방되었다.[2] 이 사건을 조사한 이시이 야스히로에 따르면, 출소한 중심 인물 중 한 명은 후에 선거를 거쳐 촌장이 되었고, 마을이 합병된 후에는 시의원을 역임했다고 한다.[3][4]

5. 3. 가해자들의 이후 행적

검거된 사람들은 후쿠다 촌의 자경단원 4명과 인접한 다나카 촌의 자경단원 4명이었다.[1] 이들 8명은 소란죄와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향토를 조선인으로부터 지킨 나는 우국지사이며, 국가가 자경단을 만들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잘못하여 죽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 당시의 예심 판사는 재판 전부터 "형량을 고려하겠다"고 신문에 말하기도 했다.[1]

다나카 촌 회의에서는 4명의 피고인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변호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정하고, 촌의 각 가구에서 균등하게 징수했다.[1]

판결은 다나카 촌의 1명에게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제2심 판결을 받아들였지만,[1] 나머지 7명에게는 대심원에서 징역 3년에서 10년의 실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수형자 전원은 확정 판결 후 2년 5개월 뒤 쇼와 천황 즉위에 따른 은사로 석방되었다.[2]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한 이시이 야스히로에 따르면, 출소한 중심 인물 중 한 명은 후에 선거를 거쳐 촌장이 되었고, 촌의 합병 후에는 시의원을 역임했다.[3][4]

6. 사건 이후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건은 묻혀 있었다.[7] 1979년에 사건 유족 등으로부터 연락이 오면서 현지 조사가 시작되었고, 1983년에는 공동 조사 및 청취 조사가 진행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겨우 신문 등에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2000년 3월에는 가가와현에서 "지바 후쿠다촌 사건 진상 조사회"가, 7월에는 지바현에서 "후쿠다촌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모임"이 설립되었다.[8] 설립 총회에서 신무라 카츠오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진상 규명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9월, "후쿠다촌 사건 희생자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2001년 추도비 건립 기금 모집이 시작되었고, 2003년 위령비가 건립되었다.[9] 그러나 위령비에는 희생자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 왜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2022년 8월, 촬영 금지 팻말이 설치되었다.

2022년, 2023년에도 추도 식전이 거행되고 있다.[10][11]

2023년 6월 20일, 스즈키 유 노다시 시장은 사건 100주년을 맞아 조의를 표했다.[12] 2024년 9월 6일, 추도 위령비 옆에 사건 설명을 새긴 석비가 설치되었다.[13][14]

6. 1. 사건의 은폐와 진상 규명 노력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건은 묻혀 있었지만, 1979년에 사건의 유족 등으로부터 "지바현의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실행위원회" 등에 연락이 오면서 현지 조사가 시작되었다.[7] 1983년에는 히라가타 치에코(지바현 역사 교육자 협의회)로부터 가가와현 역사 교육자 협의회의 이시이 야스히로에게 정보가 전달되어 공동 조사 및 가가와현에서의 청취 조사가 진행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겨우 신문 등에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2000년 3월에는 가가와현에서 "지바 후쿠다촌 사건 진상 조사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지바현 "후쿠다촌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모임"이 설립되었다.[8] "후쿠다촌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모임" 설립 총회에서, 사건 당시 5세로 전후에 후쿠다촌장, 노다시장이 된 신무라 카츠오는 "개인적으로는, 피해를 입은 가가와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건의 진상 규명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할입니다.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후쿠다촌 사건 희생자 추도식"이 현지에서 거행되었다.

2001년에는 "후쿠다촌 사건 추도비 건립 기금 모집"이 시작되었고, 2003년에는 희생자들의 추도 위령비가 노다시 미츠보리의 엔푸쿠지 오오토네 영원에 건립되었다.[9] 하지만, 추도 위령비 뒷면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은 새겨져 있지만, 희생자들이 왜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쓰여 있지 않다. 2022년 8월에는 촬영을 금지하는 팻말이 설치되었다.

2022년, 2023년에도 희생자를 추도하는 식전이 노다시에서 거행되고 있다.[10][11]

2023년 6월 20일, 스즈키 유 노다 시장은 시의회 일반 질문 답변에서, 사건 100주년을 맞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고 조의를 표했다. 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건 피해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은 처음이었다.[12]

2024년 9월 6일, 사건 발생지인 노다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 단체에 의해 추도 위령비 옆에 본 사건의 설명을 새긴 석비가 새로 설치되었다.[13][14]

6. 2. 추모 사업과 기억의 노력

2000년 (헤이세이 12년) 3월, 가가와현에서 "지바 후쿠다촌 사건 진상 조사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지바현에서 "후쿠다촌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모임"이 설립되었다.[8] "후쿠다촌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모임" 설립 총회에서, 사건 당시 5세였고 이후 후쿠다 촌장, 노다시장이 된 신무라 카츠오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며 사건 진상 규명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8] 같은 해 9월, "후쿠다촌 사건 희생자 추도식"이 현지에서 거행되었다.

2001년 (헤이세이 13년) "후쿠다촌 사건 추도비 건립 기금 모집"이 시작되었고, 2003년 (헤이세이 15년)에는 희생자들의 추도 위령비가 노다시 미츠보리의 엔푸쿠지 오오토네 영원에 건립되었다.[9] 그러나 추도 위령비 뒷면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왜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2022년 (레이와 4년) 8월, 시설 관리자인 오오토네 영원은 인권상의 문제 발생 우려로 촬영 금지 팻말을 설치했다.

2022년, 2023년에도 희생자 추도 식전이 노다시에서 거행되고 있다.[10][11]

2023년 (레이와 5년) 6월 20일, 스즈키 유 노다 시장은 시의회 답변에서 사건 100주년을 맞아 피해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노다시가 공식 석상에서 사건 피해자에 대해 애도를 표한 것은 처음이었다.[12]

2024년 (레이와 6년) 9월 6일, 노다시 시민 단체는 추도 위령비 옆에 사건 설명을 새긴 석비를 설치했다.[13][14]

6. 3. 노다시의 공식 사과

2023년(레이와 5년) 6월 20일, 노다시스즈키 유 시장은 시의회 일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사건 100주년을 맞이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고 조의를 표했다. 노다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건 피해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은 처음이었다.[12]

7. 관련 작품

20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기념하여 후쿠다촌 사건을 다룬 영화 '1923년 9월'이 개봉했다.[2] 이 외에도 나카가와 고로의 노래와 모리 타츠야 감독의 영화 '후쿠다 촌 사건'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7. 1. 노래

2014년 나카가와 고로는 이 사건을 주제로 24분 분량의 곡 '1923년 후쿠다 촌 학살'을 만들었다. 이 곡은 료 미치코·강신자·나카가와 고로·스에모리 히데키 좌담회집의 부록 CD와 2017년 라이브 앨범 '부디 알몸이 되어 주세요'(코스모스 레코드)에 수록되었다.[15]

7. 2. 영화

2023년 모리 타츠야 감독이 본 사건을 소재로 한 극영화 후쿠다 촌 사건을 제작하여[15], 간토 대지진 발생 100주년이 되는 2023년 9월 1일에 전국 개봉했다.[16][17] 모리 감독은 2020년 11월에 사에키 토시미치 등과 각본을 쓰기 위한 취재로 가가와현을 방문했다.[18]

참조

[1] 웹사이트 FEATURE: Efforts ongoing to shed light on 1923 Kanto quake's Korean massacre https://english.kyod[...] 2023-09-30
[2] 웹사이트 Director shining a light on the ‘dark history’ of 1923 killings https://www.asahi.co[...] 2022-09-12
[3] 웹사이트 Panic, false rumors and massacre: martial law amid 1923 Kanto quake https://english.kyod[...] 2023-09-06
[4] 뉴스 85年前ありがとう 「福田村事件」保護された少年から、刑事のおじさんへ 2008-04-19
[5] 뉴스 行商人殺も有罪 1923-10-30
[6] 웹사이트 【特集】語り継がれなかった悲劇…森達也監督が「福田村事件」を映画化へ 香川 https://news.ksb.co.[...] 瀨戸内海放送 2023-09-09
[7] 뉴스 虐殺の現場 私はいた 関東大震災の福田村殺人事件 1986-10-14
[8] 뉴스 シリーズ追跡:福田村事件 http://www.shikoku-n[...] 2000-07-10
[9] 뉴스 福田村事件80年で追悼集会ひらく 追悼慰霊碑除幕式も http://www.bll.gr.jp[...] 2023-09-09
[10] 뉴스 人権侵害・差別「問題いまも」 「福田村事件」99年、野田で墓参会 https://www.asahi.co[...] 2023-09-09
[11] 뉴스 (関東大震災100年)福田村事件、漂う空気今も 行商9人虐殺、千葉で遺族ら追悼式 https://www.asahi.co[...] 2023-09-09
[12] 뉴스 福田村事件、初の弔意 野田市長、議会で公式に https://www.chibanip[...] 2023-07-05
[13] 웹사이트 「福田村事件」から101年 現地で追悼行事 千葉 野田市 https://www3.nhk.or.[...] NHK NEWS WEB 2024-09-06
[14] 웹사이트 「福田村事件」史実と異なる映画に憤慨 誤解を解くために語り続ける「この現場で起きたこと」 #ニュースその後 https://www.chibanip[...] 2024-09-12
[15] 웹사이트 「集団に埋没するな」森達也監督インタビュー【福田村事件】 https://www.nhk.or.j[...] 日本放送協会 2024-09-12
[16] 뉴스 「虐殺された日本人」実話映画化 森達也監督 9月1日公開 2023-08-19
[17] 웹사이트 永山瑛太「僕の出番を増やしてくれ」と直談判 役者業で初めての感情 https://www.oricon.c[...] 2023-09-01
[18] 뉴스 福田村事件、100年後の教訓 劇映画化へ 関東大震災後、行商が自警団に虐殺 https://www.asahi.co[...] 2023-09-01
[19] 웹인용 "1923 関東大震災【第2編】" http://www.bousai.go[...] 内閣府2008年3月付 2017-05-02
[20] 간행물 別冊スティグマ 第15号 千葉県人権啓発センター 2003-03
[21] 문서 사건명에 대해서는, 가해자가 속하고 있던 구 "후쿠다무라" 및 구 "[[다나카무라 (지바현)|다나카무라]]", 양쪽의 이름에서 "후쿠다무라・다나카무라 사건"이라고 불러야 한다, 고 조사한 연구자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당시의 신문에서도 "다나카무라 사건"이라고 표기한 것도 있다.石井雍大「福田村事件――朝鮮人と誤認されて殺された人びと」『季論21 第21号』(本の泉社、2013年)所収など
[22] 논문 山田昭次「関東大震災のもとでなぜ朝鮮人・中国人虐殺事件が起こったか」 藤原彰ら編『日本近代史の虚像と実像』所収
[23] 문서 「福田村・田中村の事件」『柏市史 近代編』2000年3月 2000-03
[24] 문서 市川正廣「福田村事件を歩く」など 前掲『別冊スティグマ第15号』所収
[25] 서적 千葉県福田村事件真相調査会『福田村事件の真相』2001年3月1日発行など 2001-03-01
[26] 논문 石井雍大「福田村事件――朝鮮人と誤認されて殺された人びと」『季論21 第21号』(本の泉社、2013年)所収
[27] 서적 辻野弥生『福田村事件』(崙書房、2013年) 2013
[28] 논문 石井雍大「福田村事件――朝鮮人と誤認されて殺された人びと」『季論21 第21号』(本の泉社、2013年)所収
[29] 뉴스 『東京日日新聞』房総版1923年10月30日の記事「行商人殺も有罪」 19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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