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리스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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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흘리스트파는 17세기 러시아에서 시작된 종교 분파로, 스스로를 "신의 백성" 등으로 불렀다. 이들은 사제직, 성경, 성인 숭배를 거부하고,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살아있는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화신을 믿었다. 흘리스트파는 "라데니"라는 격렬한 춤과 예언을 특징으로 하는 예배 의식을 행했으며, 금욕주의와 자기 채찍질을 실천했다. 이 종파는 성적 부도덕 혐의로 박해를 받았으며, 18세기에는 교리적 변화를 겪어 포스트니키로 분화되었고, 이후 이스라엘인으로 알려진 분파가 생겨나기도 했다. 20세기 초에는 약 10만 명의 신도를 보유했으나, 점차 쇠퇴하여 현재는 소수의 그룹만 남아 있다. 흘리스트파는 스코프치, 두호보르, 몰로칸과 같은 종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고리 라스푸틴과의 연관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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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스트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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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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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흐리스토보예리 (Христововеры) 흐리스티 (Христы) |
어원 | "흘리스트(Хлыст)"는 러시아어로 "채찍"을 의미 "흐리스토베리(Христововеры)"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 |
종교적 특징 | |
역사적 맥락 | |
신앙 체계 및 의례 | |
사회적 특징 | |
논란과 비판 | |
같이 보기 | |
2. 명칭
이 종파의 신봉자들은 스스로를 "신의 백성"(liudi bozh'i|rus), "그리스도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Khristovovery|rus),[1] 또는 단순히 "그리스도들"(Khristy|rus)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2] "흐리스티"(Khlysty|rus)라는 명칭은 이 종파의 비판자들이 붙인 경멸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 집단이 스스로를 칭하던 ''Khristy|rus''가 변형되었다는 것이지만, 종파의 의례적인 자학 행위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러시아어 단어 ''khlyst|rus''는 "채찍" 또는 "가는 막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3]
흘리스트파의 구전 전통에 따르면, 이 종파는 1645년 코스트로마 출신의 농민이자 도망병이었던 다닐로 필리포프(다니일 필리포비치)가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블라디미르주 고로디노 언덕에서 군주의 주가 자신에게 강림하여 "살아있는 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필리포프는 제자들에게 성관계, 음주, 욕설 등을 금지하는 12가지 계명을 전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무롬의 농부 이반 수슬로프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필리포프에 의해 "새로운 그리스도"로 여겨진 수슬로프는 12명의 사도와 "하느님의 어머니" 칭호를 받은 여성을 거느렸다. 전승에 따르면 수슬로프는 러시아 당국에 의해 두 번이나 십자가형을 당했지만 매번 부활했다고 한다.[1][5][6]
흘리스티는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직, 성경, 성인 숭배를 거부했다. 다만 테오토코스에 대한 숭배는 예외로 두었다.[5] 그들은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며, 살아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화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5] 각 흘리스티 공동체, 즉 "방주"(ковчег|코프체크rus)는 전체 지도자가 임명한 자신들만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어머니"를 두었으며, 이들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다.[3][11]
또한, 이 단어가 그리스어 단어 ''khiliaste|ell''("천년주의자" 또는 "밀레니엄주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
3. 기원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기록적인 증거가 부족하며, 필리포프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흘리스트파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러시아 정교회의 17세기 개혁에 반대했던 구교도들의 문서에서 발견된다. 구교도들은 흘리스트파를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1670년대 경의 편지에서 이들에 대한 경고를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 역시 흘리스트파를 비판했는데, 로스토프의 드미트리는 1709년경 저술한 "이단 신앙의 조사"에서 이들을 비난했다.[7]
수슬로프는 1716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프로코피 루프킨이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었다. 구전에서는 루프킨이 필리포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8]
상인이었던 루프킨은 우글리치나 베네프 등지로 자주 여행하며 추종자들을 위한 비밀 집회를 조직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세 손가락 대신 두 손가락으로 십자가 표시를 하는 등 구교도 방식의 예배를 장려하면서도,[9] 동시에 국교회에 출석하여 성찬을 받도록 지시했다. 루프킨의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많은 흘리스트파 신도들이 수도 서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루프킨은 교회에 많은 기부를 함으로써 종파가 박해받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
4. 신앙과 의례
이들의 신앙 생활과 의례의 중심에는 라데니에(Радение|라데니예rus, 환희)라는 독특한 종교적 실천과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있었다. 라데니에 의식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황홀경 상태에서의 춤과 방언 예언 등을 포함했으며,[12] 몸 안에 성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해 금주, 금식, 성관계 금지 등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13] 이러한 육체의 고행의 일환으로 자기 채찍질이 행해지기도 했다.[13] 라데니에 의식과 관련하여 일부 외부 관찰자들은 광적인 성적 난교가 벌어진다고 주장했으나,[15][16] 이는 특정 분파의 행위이거나 근거 없는 비방이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17][18]
4. 1. 라데니에 (Радение)
흘리스티는 사제직, 성경, 성인 숭배(단, 테오토코스 제외)를 거부하고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살아있는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화신 가능성을 믿었다.[5] 각 교단("방주")에는 전체 지도자가 임명한 자체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어머니"가 있었으며, 이들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다.[3][11] 흘리스티는 또한 라데니에(Радение|라데니예ru, 환희)라는 의식 중 도취 상태에서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라데니에 의식은 흘리스티 예배의 중심이었으며, 성스러운 축제일 저녁에 열렸다. 신자들은 미리 정해진 장소(주로 구성원의 집)에 모여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성스러운 공간에 들어갔다. 예수 기도("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노래하거나 외운 후, 일부 신자들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느끼며 격렬하게 춤추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예언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30분 이상 지속되어 춤추는 이들이 탈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에는 견과류, 빵, 페이스트리, 크바스로 성찬식을 나누었다.[12]
흘리스티는 몸 안에 성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종종 며칠 또는 몇 주간 금식했다. 실용적인 이유("아내의 도움이 농부에게 필수적이었기 때문")로 결혼은 허용되었으나, 배우자와의 성관계조차 죄로 여겼다.[13] 이러한 육체의 고행의 일환으로 라데니에 의식과 함께 자기 채찍질을 행하기도 했다.
러시아 작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1964년 체첸 섬에서 목격한 라데니에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4]
:그들은 맨몸 위에 흰색 아마포 셔츠를 입고 농가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의 건조한 지하실에서 그들은 촛불을 켰다. 그들은 희미한 빛 속에서 무언가 성스러운 것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부활절 캐논의 구절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기뻐한다." 그 후 기쁘고 밝은 눈을 가진 작은 노인 - 지역 그리스도 - 이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흘리스트' 기도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에너지로 그는 "환희"를 시작했는데, 즉 제자리에서 격렬하게 빙빙 돌며 십자가를 긋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합창단은 더욱 사납고, 더욱 열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기도를 불렀고, 그중 일부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노인은 빙빙 돌던 것을 멈추고 격렬하게 외쳤다. "형제여! 형제여! 나는 그것을 느낀다, 성령!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는 "오, 성령!" "오, 하느님!" "오, 성령이시여!"라는 단어들이 섞여 있는 일관성 없는 소리를 외치며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 후 "환희"의 주요 공동 의식, 즉 일반적인 휘돌기와 춤이 시작되었다.
라진스키는 이들이 빙빙 도는 춤을 중독 효과 때문에 "영적인 맥주"라고 불렀으며, 춤이 얼마간 계속된 후 예배자들이 바닥에 쓰러졌다고 전했다. 그는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참석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14] 라진스키는 일부 방주에서는 흘리스티가 이 시점에서 "집단적인 죄", 즉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정화된다고 믿으며 광적인 성적 난교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15] C. L. 설즈버거 역시 그의 저서 ''독수리의 몰락''에서 흘리스티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구원은 완전한 회개를 통해 얻어지며 이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용서를 얻기 위해 죄를 지으라")을 언급했다.[16]
그러나 이러한 성적 난교에 대한 소문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기도 했다. 프레데릭 콘월리스 코니베어는 칼 콘라드 그라스의 연구를 인용하며, 라데니에가 대규모 방탕으로 끝난다는 비난은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주장했다.[17]
:[흘리스티는] 그들의 ''라데니아'' 또는 종교 춤을 대규모 방탕으로 끝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조명이 먼저 꺼졌다. 그라스는 증거를 매우 신중하고 공정하게 조사하고 그 이야기를 비방으로 거부한다. 그것에 색을 더하는 유일한 것은 도취 상태가 끝나면 지친 숭배자들이 아파트의 한쪽에는 남자, 다른 쪽에는 여자가 잠들면서 새벽까지 바닥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즉시 집으로 가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은 기후나 늦은 시간에 떼 지어 집에 들어가면 의심을 품을 러시아 경찰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결정된 필수적인 것이다.
역사학자 조셉 T. 푸어만 또한 "분열된 집단은 '거룩한 성교'를 실천했지만, 대부분의 흘리스티는 그러한 행동을 비난하는 독실한 오순절주의자들이었다"고 지적하며, 성적 난교가 흘리스티 전체의 특징은 아니었음을 시사했다.[18]
4. 2. 금욕주의
흘리스티는 몸 안에서 성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해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종종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금식했다.[13] 실용적인 이유로 결혼이 허용되기는 했지만("아내의 도움이 농부에게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와의 성관계조차 죄로 여겨졌다.[13] 이러한 육체의 고행과 관련하여, 그들은 종종 "라데니"(환희) 의식과 함께 자기 채찍질을 행하기도 했다.[13]
러시아 작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1964년 체첸 섬에서 목격한 "라데니" 의식을 묘사하며, 참가자들이 맨몸에 흰 셔츠를 입고 지하실에 모여 예수 기도의 구절을 노래한 뒤, "지역 그리스도"라 불리는 노인이 기도를 외우고 격렬하게 빙빙 돌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환희"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다른 이들도 점차 격렬하게 기도하고 춤추며 황홀경에 빠졌고, 노인은 성령이 임했음을 외치며 방언과 같은 예언을 했다고 한다. 라진스키는 이 빙빙 도는 춤이 중독 효과 때문에 "영적인 맥주"라고 불렸으며, 춤이 끝난 후 예배자들이 바닥에 쓰러졌다고 보고했다.[14] 그는 일부 흘리스티 분파에서는 이러한 의식 이후 "집단적인 죄", 즉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정화된다고 믿는 광적인 성적 난교에 참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C. L. 설즈버거 역시 그의 저서 ''독수리의 몰락''에서 흘리스티가 구원은 완전한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죄를 지어야만 용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기술했다.[16]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성적 난교에 대한 소문을 일축했다. 프레데릭 콘월리스 코니베어는 칼 콘라드 그라스의 연구를 인용하며, 이러한 이야기는 비방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이 끝난 후 지친 신자들이 단순히 밤이 늦거나 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녀가 분리되어 잠들 뿐이라고 설명했다.[17] 역사학자 조셉 T. 푸어만 역시 "일부 분열된 집단이 '거룩한 성교'를 실천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흘리스티는 그러한 행동을 비난하는 독실한 오순절주의자들이었다"고 지적하며 일반화에 선을 그었다.[18]
5. 박해
흘리스트파는 초기부터 성적인 부도덕에 대한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수많은 정부 조사를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19]
1717년에는 루프킨과 다른 20명의 흘리스트파 신자들이 우글리치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5개월 동안 구금되어 심문과 구타를 당했다. 루프킨은 300RUB의 뇌물을 주고 풀려났지만, 다른 추종자들은 계속 갇혀 있었다.[20] 공식적으로는 잘못을 뉘우쳤다고 했으나, 루프킨은 1732년 사망할 때까지 흘리스트파 운동을 계속 이끌었다.[21]
1733년부터 1739년까지는 특별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어 수백 명의 흘리스트파 혐의자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성적인 문란함과 의식적인 영아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흘리스트파 측은 이러한 혐의를 반복해서 부인했지만, 위원회는 300명 이상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중노동, 구타, 코와 혀를 자르는 형벌을 선고받았으며, 다수가 시베리아나 오렌부르크로 유배되었다.[22]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흘리스트파는 사라지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심지어 유배된 사람들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서 흘리스트파 운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745년,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한 심문 방법"을 사용하는 새로운 위원회가 조직되었다.[23] 이 위원회는 성적 일탈과 식인 풍습에 대한 거짓 자백을 강요하여 받아내고 또 다른 200명을 유배 보냈지만, 결국 흘리스트파 운동을 뿌리 뽑는 데는 실패했다.[23]
6. 후기 역사
1750년경, 흘리스트파 내부에서 교리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들은 포스트니키(Postniki, "금식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종파 지도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또한, 일반 신자들이 ''라데니에'' 의식 중에 성령을 받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이 의식 자체는 여전히 예배의 중심적인 부분으로 유지되었다.[24]
1840년에는 포스트니키에서 새로운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이라고 칭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구 이스라엘과 신 이스라엘(New Israel)로 나뉘었다. 특히 신 이스라엘 그룹의 믿음은 흘리스트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상당히 벗어났으며,[24] 이 종파는 오늘날 우루과이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25]
이러한 분열은 흘리스트파 운동 전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자들의 수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는 흘리스트파 전체 인구가 약 1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러시아 내에는 약 2만 명의 신 이스라엘 신자, 1만 5천 명의 구 이스라엘 신자, 3천 명의 포스트니키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몇몇 고립된 그룹"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24]
7. 영향
흘리스티는 스코프치, 두호보르, 몰로칸과 같은 종파를 낳으면서 "모든 러시아 분파주의의 근원"이라고 전해진다.[27]
7. 1. 그리고리 라스푸틴과의 연관성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흘리스트파 교리를 전파했다는 혐의로 1903년과 1907년 두 차례 토볼스크 신학 공의회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두 번의 조사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지만,[28] 대중적인 소문은 라스푸틴을 이 종파와 계속 연결시켰다.[29]1977년 C. L. 설즈버거는 라스푸틴이 흘리스트파의 "철학을 채택했다"고 주장했으나, 그가 실제 회원이었음이 입증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16]
라스푸틴의 딸 마리아 라스푸틴은 공동 저술한 책 ''신화 속의 남자''에서, 라스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기 전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흘리스트파 모임에 참석했지만 결국 이 종파에 환멸을 느꼈다고 주장했다.[30] 그러나 이 책의 사실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었으며,[31] 브라이언 모이네이한에 따르면 마리아의 주장이 라스푸틴과 흘리스트파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이다.[32] 라스푸틴이 결코 이 종파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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