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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식 육상공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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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식 육상공격기는 일본 해군이 개발한 장거리 육상 공격기로, 1941년 제식 채용되었다. 96식 육상 공격기의 후계기로 개발되었으며, 잎담배형 동체와 대구경 엔진을 통해 항속 거리와 고속 성능을 높였다. 태평양 전쟁 초반 주요 작전에 투입되어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어력 부족으로 인해 연합군 전투기에 취약했다. 미군 조종사들은 이 기체를 "베티" 또는 "원샷 라이터"와 같은 별칭으로 불렀다. 전쟁 후반에는 카미카제 공격이나 오카(자폭 공격기) 운반에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몇몇 잔해와 복원된 동체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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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식 육상공격기
개요
명칭미쓰비시 해군 1식 육상 공격기
일본어 명칭一式陸上攻撃機 (잇시키 리쿠조 코게키키)
약칭1식 육공 (잇시키리쿠코)
별명하마키 (葉巻, "시가"라는 의미)
형식중형 폭격기/뇌격기
개발
개발사미쓰비시 중공업
설계자혼조 키로
첫 비행1939년 10월 23일
도입1941년 4월 2일
퇴역1945년
생산 기간1939년–1945년
생산 대수2,435대
운용
주요 운용국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기타 운용국인도네시아 공군
중화민국 공군
이미지
미쓰비시 G4M2a 24형
미쓰비시 G4M2a 24형, 763 항공대 소속

2. 개발 배경

1930년대 일본 제국 해군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및 런던 조약으로 인해 주력함 건조에 제한을 받게 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육상 기지에서 발진하여 해상의 적 함선을 공격하는 장거리 공격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배경 아래 미쓰비시의 혼조 키로(本庄季郎) 기술사가 설계를 맡아 96식 육상 공격기(G3M)가 개발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에 투입되었다.[4] 그러나 96식 육상 공격기는 실전에서 방어 능력의 부족함을 드러냈고, 이에 일본 해군은 운용 시작 불과 두 달 만에 미쓰비시에 후계기 개발을 요청하게 된다.[4]

1937년 9월, 해군은 '12시 육상 공격기'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쌍발 육상 공격기의 개발을 미쓰비시에 발주했다. 이때 요구된 사양은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매우 도전적인 것이었다. 최고 속도 시속 398km, 순항 고도 3000m, 폭탄이나 어뢰 없이 비행 시 4722km의 항속 거리, 그리고 800kg의 어뢰 또는 동일 무게의 폭탄을 탑재했을 경우 3700km의 항속 거리를 요구했다.[4]

다시 설계를 주도하게 된 혼조 키로 기술사 팀은 해군의 요구 사양, 특히 장거리 항속 능력과 고속 성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체의 무게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장갑판 설치를 포기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4] 혼조 기술사는 설계 초기 단계에서 방어력 부족을 우려하여 엔진 4개를 탑재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당시 해군 항공기술창장이었던 와다 미사오(和田操)는 "용병에 관한 것은 군이 결정한다. 미쓰비시는 묵묵히 군의 사양대로 만들면 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설계상의 타협은 훗날 1식 육상 공격기가 피탄 시 연료 탱크가 쉽게 발화하여 '비행 라이터'(Flying Lighter)[4], '하마키'(葉巻, 시가)[4] 등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39년 10월, 첫 번째 시제기가 완성되었고[4], 같은 해 10월 23일 시험 비행 조종사 시마 가쓰조(志摩 勝三)에 의해 초도 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4] 시험 비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잠시 이 기체를 다른 폭격기를 호위하는 중(重)호위 전투기(G6M1)로 개조하는 방안을 검토하며 양산을 보류했다.[4] 그러나 G6M1 계획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결국 G4M1의 양산이 결정되었고[4], 1941년 4월 1일부로 '1식 육상 공격기'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받고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3. 특징

본토 상공을 비행하는 1식 육상 공격기.


1식 육상공격기(G4M)는 전신인 미쓰비시 G3M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1937년 일본 제국 해군의 요구에 따라 개발된 쌍발 육상 공격기이다.[4] 해군은 최고 속도 398km/h, 순항 고도 3000m, 그리고 800kg의 어뢰나 폭탄을 탑재하고도 3700km에 달하는 장거리 항속 능력을 요구했는데, 이는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고성능이었다.[4]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쓰비시 설계팀은 기체 경량화를 최우선으로 하여 항속 거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방어 장비인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장갑판 설치를 포기했다.[4] 그 결과 G4M은 뛰어난 장거리 비행 능력과 고속 성능을 갖추게 되었지만, 피탄 시 연료 탱크가 쉽게 발화하는 등 방어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심각한 약점을 안게 되었다.[4] 이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G4M을 "비행 라이터(flying lighter)"[4], "원샷 라이터(one-shot lighter)" 등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렀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기체의 굵고 긴 동체 모양 때문에 "하마키"( 葉巻|하마키일본어 , 시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

방어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G3M에 비해 방어 무장을 강화하여, 기수, 동체 상부, 양 측면에 7.7mm 기관총을 설치하고 꼬리 부분에는 강력한 99식 1호 20mm 기관포를 탑재했다.[4] 특히 20mm 꼬리 기관포는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 전투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G4M은 고정된 육상 목표물을 중고도에서 폭격할 때는 장거리 비행 능력과 속도를 활용하여 효과적인 기습 공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연료 탱크에 직접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 한, 심각한 손상을 입고도 비행을 지속하며 기지로 귀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렌넬 섬 해전 당시 일부 G4M은 엔진 하나만으로 비행하여 귀환하기도 했다. 전쟁 중반 이후 방어력 강화를 위해 연료 탱크 주변에 방탄 고무를 추가하고 자동 소화 장치를 설치하는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으나[4], 근본적인 취약점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고 후기형의 생산 및 실전 배치는 제한적이었다.

3. 1. 기체 설계

1945년의 G4M 조종석


미쓰비시 G4M1; 표준형이 아닌 둥근 무늬 - 히노마루를 둘러싼 흰색 원 대신 흰색 사각형


조종석.


꼬리 부분 20mm 기관총 좌석.


1식 육상공격기(G4M)는 장거리 비행 능력과 고속 성능을 최우선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미쓰비시 G3M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 해군이 제시한 까다로운 요구 사양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해군은 최고 속도 398km/h, 순항 고도 3000m, 무장 없이 4722km, 800kg의 어뢰나 폭탄 탑재 시 3700km라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항속 거리를 요구했다.[4]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혼조 키로가 이끄는 미쓰비시 설계팀은 기체 무게를 극한까지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조종사 및 중요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장갑판 설치를 포기했는데, 이는 항속 거리를 늘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심각한 약점을 초래했다.[4] 이 때문에 G4M은 제로센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기관총탄 몇 발에도 쉽게 불이 붙거나 격추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4] 연합군 조종사들은 G4M의 이러한 약점을 비꼬아 "날아다니는 라이터(The Flying Lighter)"[4], "원샷 라이터(One-shot Lighter)", "날아다니는 지포 라이터(Flying Zippo)", "날아다니는 시가(Flying Cigar)"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일본 해군 조종사들은 굵은 동체 모양 때문에 "하마키"(葉巻, 시가)라는 별명으로 불렀다.[4]
동체G4M은 공기 저항을 줄이고 폭탄이나 어뢰를 동체 내부에 탑재하기 위해, 당시 항공 기술 창고의 실험 데이터를 참고하여 단면이 타원형이고 앞뒤가 완만하게 좁아지는 굵은 잎담배 형태의 동체를 채택했다. 이는 동체 하부에 무장을 노출시켜 항력 증가를 유발했던 96식 육상 공격기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굵은 부분의 폭은 2m, 높이는 2.5m에 달했다. 이 굵은 동체 덕분에 내부에 폭탄창을 설치하여 공기 저항을 줄일 수 있었고, 정찰 임무 시에는 추가 연료 탱크를 탑재하여 항속 거리를 더욱 늘릴 수도 있었다. 다만 폭탄창에는 개폐식 문 대신 어뢰용, 대형 폭탄용, 정찰용 등 3종류의 탈착식 덮개가 사용되었으며, 소형 폭탄 탑재 시에는 덮개 없이 비행했다. 초기형에서는 생산 편의를 위해 동체를 앞뒤로 분할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나 곧 폐지되었다.
주익주익은 뿌리 부분에서 12.5%, 날개 끝에서 10% 두께를 가지는 얇은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가로세로비(aspect ratio) 8, 테이퍼비(taper ratio) 1:4의 가늘고 긴 평면 형태를 채택했다. 동체 중간에 주익을 장착하는 중익(中翼) 방식을 채택하여 동체와 주익 연결부(필레)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무게 중심을 고려하여 연료 탱크는 모두 주익의 주 구조물(spar) 사이에 설치된 인테그럴 탱크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주익 구조 자체를 연료 탱크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외판 접합부를 밀폐 처리하여 약 5000L에 달하는 대용량 연료를 무게 중심에 가깝게 탑재할 수 있게 하여 긴 항속 거리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엔진 및 나셀엔진은 대구경의 미쓰비시 화성(火星)을 탑재했다. 엔진을 감싸는 나셀(nacelle)은 엔진 직경보다 약간 더 크게 설계되었고, 최대 직경 부분이 엔진보다 약간 뒤쪽에 위치하도록 하여 공기 저항을 최소화했다. 이는 항공 기술 창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설계로, 기화기 공기 흡입구와 윤활유 냉각기 공기 흡입구를 나셀 내부에 완전히 수납하여 항력을 더욱 줄이려는 시도였다. 초기형(11형 초기)까지는 나셀 전면이 매끄러운 형태였으나, 이후 성능 비교 시험 결과 기화기 흡입구를 카울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것이 엔진 성능(전개 고도, 최고 속도[21], 상승 시간[22], 상승 한계[23]) 향상에 더 유리하다는 것이 밝혀져[21][22][23] 이후 형식에서는 외부 돌출형으로 변경되었다. 윤활유 냉각기 공기 흡입구 역시 냉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저항 증가를 감수하고 외부 개방형으로 바뀌었다. 96식 육공에서는 절반 가까이 노출되었던 주 착륙 장치는 G4M에서는 엔진 나셀 내부에 완전히 수납되도록 개선되었다. 또한, 착륙 장치나 플랩 등의 조작에는 유압 대신 전동 방식을 채택하여 유압 계통의 누유 문제를 방지했다.
조종성 및 기타수평 및 수직 꼬리날개는 면적을 넓게 확보하고, 조종면(舵面)의 크기는 날개 면적의 25% 정도로 작게 설계하여 조종력을 줄이고 조종 편의성을 높였다. 수평 꼬리날개는 가로세로비가 컸지만, 수직 꼬리날개는 가로세로비를 작게 하여 강한 측풍 상황에서도 방향타의 효과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기체 높이를 억제하여 격납고 높이 제한 문제도 해결했다. 숙련된 조종사는 엔진 하나만으로도 비행(편발 비행)이 가능했고, 이 경우 기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전신기, 기관총, 탄약, 기상 레이더, 잉여 연료, 심지어 도시락까지 기체 밖으로 투기하기도 했다.[24] 다만 폭탄 투하 장치의 신관은 매우 민감하여 투기 시 주의가 필요했고,[25] 피탄으로 누출된 연료에 인화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실제로 화재가 발생하여 적 함선에 자폭한 사례도 있었으며, 투하를 포기하고 귀환한 경우에도 기내에 강한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26] 해상 불시착 시에는 빈 연료 탱크의 부력 덕분에 반쯤 잠긴 상태로 수일간 가라앉지 않은 사례도 여럿 기록되어 있다.[27]
방어 화기중일 전쟁의 전훈을 반영하여 96식 육공에서 생략되었던 기수 기관총좌가 설치되었다. 조종석 뒤 동체 상부와 주익 뒤 동체 측면에는 각각 달걀형의 돌출 창(blister)을 갖춘 기관총좌가 마련되었고, 꼬리 부분에는 99식 1호 20mm 기관포를 장비한 선회 포탑을 설치했다. 초기 무장은 20mm 기관포 1정과 7.7mm 기관총 4정으로, 96식 육공 11형(7.7mm 3정)에 비해 화력과 사격 범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기관총좌의 동력화, 전방위 사격 능력 강화, 구경 증대 등이 이루어져 최종 생산형인 34형에서는 13mm 기관총 1정, 20mm 기관포 4정을 장비하여 강력한 방어 화력을 갖추게 되었다.
방탄 장비초기 G4M은 승무원을 보호하는 방탄 강판이나 연료 탱크의 피탄 시 화재를 막는 방탄 고무(자동 밀폐 기능)를 전혀 갖추지 않았다. 개발 당시 이미 8mm 두께 이상의 고무를 외부에 덧댄 알루미늄 연료 탱크가 7.7mm 소이탄에 대해 방화 효과가 있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지만, 96식 육공에서는 중량 증가 대비 효과가 낮다는 이유로, 1식 육공에서는 인테그럴 탱크 구조상 방탄화가 어렵고 내장식 탱크로 설계를 변경할 경우 연료 용량 감소와 구조 중량 증가 등 단점이 크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중 손실이 급증하자 뒤늦게나마 인테그럴 탱크 전후면에 스펀지 고무를 부착하고 이산화 탄소를 이용한 자동 소화 장치를 장비하는 개수가 이루어졌다. 663호기부터는 성능 저하를 감수하고 주익 하부 외판의 인테그럴 탱크 부분에 30mm 두께의 스펀지 고무를 덧붙이는 추가 대책까지 시행되었다. 특수 공격기 오카(桜花)의 모기(母機)로 개조된 24형 정(丁) 모델에서는 조종석, 동체 중앙부 연료 탱크, 연료 밸브 등이 방탄 강판으로 보호되었고, 주익 내 다른 연료 탱크는 사염화 탄소 소화액으로 방호되었다.

1942년 11월, 연합 함대로부터 "항속 거리를 줄이더라도 방탄 성능을 강화해달라"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주익 구조를 재설계하여 별도의 방탄 탱크를 탑재하는 34형 개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개발 지연과 공습, 지진 등의 영향으로 시제기 완성은 1944년 10월에야 이루어졌고 생산량은 극소수에 그쳤다.

1943년 여름 라바울에서 귀환한 기체들의 피탄 상황을 조사한 결과, 동체에 가까운 중앙 날개(1번 탱크)보다 바깥쪽 날개 탱크에 피탄이 집중되는 경향이 발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공격 시 바깥쪽 탱크 연료를 먼저 사용하고 1번 탱크 연료를 마지막에 사용하는 지침이 내려졌다. 그러나 당시 제751 해군항공대 비행대장이었던 아다치 지로는 이 지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어있는 탱크라도 기화된 연료가 가득 차 있어 피탄 시 폭발 위험이 더 크다고 보고, 특히 동체 중앙의 1번 탱크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카(Buka) 기지 진출 후, 난징마대(南京袋)라는 쌀 포대에 모래를 채워 751 항공대 소속 G4M의 1번 탱크 위(기내 바닥)에 쌓아 임시 방호벽으로 사용하는 조치를 취했다.[28][29]

3. 2. 방어



1식 육상공격기(G4M)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장거리 비행 능력과 고속 성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이 때문에 무게를 줄이고 항속 거리를 늘리기 위해 자동 밀폐 연료 탱크나 장갑판 같은 필수적인 방어 장비를 탑재하지 않았다.[4] 이러한 설계는 미쓰비시가 개발한 또 다른 주력기인 A6M 제로 전투기와 유사했으며, 결과적으로 두 기체 모두 기관총이나 기관포 사격에 매우 취약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4] 특히 날개에 위치한 연료 탱크는 피탄 시 쉽게 발화하는 경향이 있어, 연합군 조종사들로부터 "비행 라이터(flying lighter)"[4], "원샷 라이터(one-shot lighter)", "비행 지포(flying zippo)", "비행 시가(flying cigar)" 등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던 라이터의 광고 문구를 빗대어 기체의 취약성을 비꼬는 표현이었다.[36][37] 미군 방송에서는 "일식 라이터"라는 명칭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 제국 해군 조종사들은 단순히 기체의 길쭉한 모양 때문에 "하마키"( 葉巻|하마키일본어 ), 즉 "시가"라고 불렀다.[4]

방어력 부족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설계자인 혼조 키로는 전신인 96식 육상 공격기가 중일전쟁에서 전투기 공격에 취약했던 점을 교훈 삼아 방어 무장을 강화했다. 기수, 동체 상부, 그리고 동체 양측면에 7.7mm 기관총을 설치했으며, 특히 후방 방어를 위해 꼬리 부분에는 강력한 99식 1호 20mm 기관포를 탑재했다.[4] 초기 모델은 20mm 기관포 1정과 7.7mm 기관총 4정을 장비하여, 96식 육상공격기 11형(7.7mm 기관총 3정)에 비해 화력과 사격 범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방어 화력은 더욱 강화되어, 후기 생산형인 34형에서는 기관총 좌석의 동력화 및 전주화(全周化), 구경 증대를 통해 13mm 기관총 1정과 20mm 기관포 4정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 무장 강화에도 불구하고, 승무원과 연료 탱크에 대한 직접적인 방호 대책은 초기 모델에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개발 당시 이미 8mm 두께 이상의 고무를 연료 탱크 외부에 부착하면 7.7mm 소이탄의 피격에도 발화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지만, 중량 증가 문제와 주익 전체를 연료 탱크로 사용하는 인테그럴 탱크 구조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방탄 탱크는 채택되지 않았다. 인테그럴 탱크를 포기하고 내장식 탱크로 설계를 변경하여 방탄 기능을 추가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연료 탑재량 감소와 구조 중량 증가라는 단점이 너무 커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육상공격기의 피해가 급증하자, 뒤늦게나마 방어력 보강 조치가 이루어졌다. 인테그럴 탱크의 앞뒤 부분에 스펀지 고무를 덧대고 이산화 탄소를 이용한 자동 소화 장치를 장비했다. 663호기부터는 성능 저하를 감수하고 주익 하부 외면의 인테그럴 탱크 부분에 30mm 두께의 스펀지 고무를 부착하는 개수가 이루어졌다. 특공 병기 오카의 모기로 개조된 24형 정의 경우, 조종석, 동체 중앙부의 1번 연료 탱크, 각 연료 콕(cock) 주변에 방탄 강판을 설치하고, 동체와 엔진 나셀 사이의 2번 연료 탱크는 사염화 탄소 액체를 채워 방호력을 높이려 했다.

1942년 11월, 연합 함대 사령부에서 "항속 거리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방탄 성능을 강화해달라"는 공식 요청이 제기되면서, 최종 개량형인 34형에서는 주익 구조를 전면 재설계하여 별도의 방탄 탱크를 탑재할 수 있도록 개수되었다. 그러나 개발 지연과 공습, 지진 등의 영향으로 첫 시제기 완성은 1944년 10월에야 이루어졌고, 생산 또한 극소수에 그쳐 실질적인 전력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취약한 방어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상황에서는 생존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급 기지나 항구, 비행장과 같은 고정된 육상 목표물을 중고도에서 폭격할 때는 특유의 장거리 비행 능력과 빠른 속도를 이용해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나타나 요격기가 대응하기 전에 이탈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꼬리 부분의 20mm 기관포는 후방에서 접근하는 연합군 전투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지상 대공포나 전투기의 사격으로 날개 연료 탱크에 직접적인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 한, 심각한 손상을 입고도 비행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렌넬 섬 해전 당시 USS ''Chicago''를 공격했던 751 항공대 소속 G4M 11대 중 4대는 격추되지 않고 기지로 귀환했는데, 이 중 일부는 엔진 하나만으로 비행하여 돌아왔다.

1943년 여름, 라바울 기지에서 귀환한 기체들의 피탄 상황을 조사한 결과, 동체 중앙 날개 부분의 1번 탱크보다 바깥쪽 날개 탱크에 피탄이 집중되는 경향이 발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공격 시 바깥쪽 탱크의 연료를 먼저 소모하고 1번 탱크 연료를 마지막까지 남기는 방식으로 생존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751 항공대 비행대장 아다치 지로는 오히려 빈 탱크에 기화된 연료가 차 있어 피탄 시 폭발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하여 연료 사용 순서를 반대로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28] 아다치는 빈 1번 탱크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부카(Buka) 기지로 진출한 후, 쌀 포대에 모래를 채워 작전에 투입되는 기체의 1번 탱크 상부(기내 노출 부분)에 쌓아 임시 방호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29]

전쟁 후반기에 이르러 방탄 성능이 일부 개선된 후기형 기체들이 투입되면서 G4M에 대한 평가에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타라와 전투(제1차 길버트 제도 해전) 중인 1943년 11월 20일, 항공모함 USS ''Independence''로 향하던 G4M 7대 편대가 F6F 헬캣 전투기들의 요격을 받았으나 쉽게 격추되지 않았고, 결국 인디펜던스에 어뢰를 명중시켜 대파시켰다. 이 전투 후 미 해군 앨런 로비 함장은 전투 보고서에서 G4M의 예상외의 튼튼함을 언급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미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들은 당시 주력 전투기에 탑재된 AN/M2 12.7mm 기관총으로는 G4M을 효과적으로 격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후 AN-M3 20mm 기관포를 탑재한 F6F-5N 야간 전투기 등이 투입되면서 G4M에 대한 대응 능력이 향상되었다.

3. 3. 탑승원

통상 7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구성원은 주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겸 폭격수 역할을 하는 사폭원(射爆員), 주 정찰원, 부 정찰원, 통신사 역할을 하는 전신원, 그리고 기관사 역할을 하는 탑승 정비원이었다. 기장은 주 정찰원이나 주 조종사 중 계급이 높은 선임자가 맡았으며, 필요에 따라 편대 지휘관이 동승할 경우 총 8명이 탑승하기도 했다.[30] 각 승무원은 기관총 사격이나 통신 등 다른 임무를 겸임할 수 있었다.

1943년 5월 테니안에서 훈련 중이던 제751 해군 항공대에서는 조종, 정찰, 전신, 탑승 정비, 사격 담당의 5명으로 운용하기도 했다.[31] 같은 부대에서는 탑승 정비원에게 조종 연습을 시켜 조종사가 임무 수행 불가 상태가 될 경우에 대비하기도 했다. 또한 정찰원이었던 마루오카 토라오(丸岡虎雄)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브룩스 크릭(Brookes Creek) 폭격 임무 중 조종사 2명이 사상하자 직접 조종을 대신하여 비행기를 몰고 귀환하여 착륙까지 성공시킨 사례도 있다.[32][33]

3. 4. 명칭

황기 2601년(서기 1941년) 4월에 제식 채용되었기 때문에 '''1식 육상 공격기'''(一式陸上攻撃機)로 명명되었다.[34] 일본 해군에서는 급강하 폭격을 할 수 있는 기체를 폭격기, 수평 폭격 및 뇌격만 할 수 있는 기체를 공격기(함상 공격기 및 육상 공격기)로 분류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 특유의 기종 분류였다.

연합국 측의 코드네임은 '''Betty|베티eng'''였다. 이는 당시 일본군 항공기 식별을 위해 연합군이 붙인 코드네임 중 하나로, 전투기 등에는 남성 이름, 폭격기나 수송기 등에는 여성 이름이 부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실존 인물과 관련 없다고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명명에 관여했던 미 정보부의 한 군무원이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자신의 여자친구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체 좌우의 큰 엔진이 그 군무원에게 여자친구의 신체적 특징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35]

한편, 미군 조종사들은 1식 육공의 취약한 방어력, 특히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장갑판이 없어 피탄 시 쉽게 불이 붙는 경향을 조롱하며 여러 별명으로 불렀다.[4]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one-shot lighter|원샷 라이터eng'''[36][37], '''flying zippo|플라잉 지포eng'''[36][37], '''flying lighter|비행 라이터eng'''[4], '''flying cigar|플라잉 시가eng'''[4] 등이 있었다. 이는 당시 미국 라이터의 광고 문구에 빗댄 비하적인 표현이었다.[36][37] 미군 방송에서는 '일식 라이터'(一式ライター)라는 조롱 섞인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일본군 조종사들도 "적 전투기의 일격에 불이 붙기 쉽기 때문에 적은 '일격 라이터'(一撃ライター)라고 칭하며 얕보고 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 해군 조종사들은 1식 육공을 '''葉巻|하마키jpn'''("시가")라고 불렀는데, 이는 기체의 길쭉한 모양 때문이었다.[4]

4. 역사

1930년대 일본 제국 해군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미국에 비해 열세였던 해군력을 보강하고자 했다. 이에 육상 기지에서 발진하여 해상의 적 함선을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공격기 개발에 집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해군 항공기술창의 95식 육상 공격기와 미쓰비시의 혼조 키로가 설계한 96식 육상 공격기(G3M)가 개발되었다.[4] 96식 육공은 중일전쟁 중이던 1937년 실전에 배치되었으나, 중국 본토 폭격(이른바 '도양 폭격') 과정에서 적 전투기의 요격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에 일본 해군은 1937년 9월, 96식 육공의 후계기로서 방어 능력을 향상시킨 '12시(試) 육상 공격기' 개발을 미쓰비시에 요구했다.[4] 해군의 요구 사양은 최고 속도 398km/h, 순항 고도 3000m, 무장 없이 4722km, 800kg 어뢰 또는 폭탄 탑재 시 3700km의 항속 거리를 가진 쌍발 육상 공격기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4]

설계를 맡은 혼조 키로 팀은 해군의 까다로운 요구, 특히 장거리 항속 성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체 무게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장갑판 설치를 포기했다.[4] 이러한 설계는 A6M 제로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G4M이 기관총 사격에도 쉽게 화재가 발생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만들었다.[4] 이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G4M을 "비행 라이터(flying lighter)"[4], "원샷 라이터(one-shot lighter)", "비행 지포", "비행 시가(flying cigar)" 등으로 조롱했으며, 일본 해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시가처럼 생긴 동체 모양 때문에 "하마키(葉巻, 시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

혼조 키로는 96식 육공의 경험을 바탕으로 방어 무장 강화를 시도했다. 동체 앞, 위, 양옆에 7.7mm 기관총을, 꼬리 부분에는 당시 폭격기로서는 강력한 무장인 20mm 기관포를 장착했다.[4] 개발 과정에서 혼조는 방어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엔진을 4개로 늘려 방탄 장비를 충실히 갖추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용병(用兵)은 군이 결정한다. 미쓰비시는 군의 사양대로 만들면 된다"는 해군 측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기각되었다.

첫 시제기는 1939년 9월 미쓰비시 나고야 공장에서 완성되어 가가미가하라 비행장으로 옮겨졌고,[4] 같은 해 10월 23일 시험 비행 조종사 시마 가쓰조(島 勝蔵)에 의해 첫 비행에 성공했다.[4] 해군은 시험 비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G4M을 중(重) 호위 전투기로 개조한 G6M1 개발을 우선시하여 G4M의 양산을 잠시 보류했다. 그러나 G6M1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결국 G4M의 양산이 결정되었고,[4] 1941년 4월 1일 '''1식 육상 공격기'''(一式陸上攻撃機)로 제식 채용되었다. 양산 1호기는 1941년 4월 출고되었다.

1식 육상 공격기는 도입 당시 장거리 항속 능력과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고정된 육상 목표물에 대한 중고도 폭격 임무에서는 긴 항속 거리와 속도를 이용해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나타나 적 전투기가 요격하기 전에 임무를 마치고 사라질 수 있었다. 특히 꼬리에 장착된 20mm 기관포는 후방에서의 공격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다. 방어력 부족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피탄되더라도 엔진 하나만으로 기지로 귀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렌넬 섬 해전 당시 USS 시카고를 공격했던 751 항공대 소속 G4M 중 4대는 엔진 하나로 비행하여 귀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개선된 후속 폭격기 개발이 지연되자, 미쓰비시는 기존 G4M의 약점을 보완하고 다양한 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엔진과 무장을 개량한 여러 파생형을 개발했다. 하지만 G4M2와 같은 후기형에서도 화재에 취약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4] 1식 육상 공격기는 독일의 하인켈 He 111이나 미국의 노스아메리칸 B-25 미첼과 유사한 성능과 임무를 가진 쌍발 엔진 폭격기였으며, 주로 대함 공격 임무에 투입되었다.

4. 1. 실전 투입

1식 육상공격기(G4M)는 중일전쟁 중이던 1940년 9월 13일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다.[4] 이날 1항공대 소속 G4M 27대가 타이베이, 오무라시, 제주시 등에서 발진하여 한커우를 폭격했으며, 신도 사부로가 이끄는 12항공대 소속 A6M 제로 전투기 13대의 호위를 받았다. 1941년 5월에도 유사한 폭격 임무가 수행되었다. G4M은 전신인 미쓰비시 G3M보다 속도와 상승력이 뛰어나 제로센과 함께 비행하며 7000m 이상의 고도를 확보할 수 있어, 당시 중국군의 대공포나 전투기로는 요격하기 어려웠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G4M은 일본 해군 항공대의 주력 폭격기로서 초기 공세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직후 대만에 주둔 중이던 1항공대와 가노야 항공대 소속 G4M 107대가 루손 해협을 건너 필리핀의 클라크 미 육군 비행장을 폭격하여 B-17 플라잉 포트리스를 포함한 미군 항공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는 일본의 남서 태평양 전역 침공의 시작이었다.

1942년 8월 8일 과달카날 해협에서 미국 함대를 향해 어뢰 공격을 감행하는 G4M. 왼쪽의 극도로 낮은 고도(약 )에서 비행한 항공기는 다카하시 준이 조종했다.


호주 다윈에 대한 공습 중의 G4M 베티 폭격기.


G4M이 뇌격기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1941년 12월 10일 말레이 해전이었다. 미쓰비시 G3M과 협동하여 영국 해군 Z 기동부대의 최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격침시킨 것이다. 이는 작전 중인 주력함 2척이 오직 공중 공격만으로 격침된 역사상 첫 사례였다. 이 작전에 참여한 가노야, 겐잔, 미호로 항공대 소속 G4M 승무원들은 해수면 위 10m 미만의 초저고도 어뢰 공격과 장거리 해상 항법에 특화된 훈련을 받았다.[4] 전쟁 초기, 특히 연합군의 전투기 저항이 약했던 시기에는 G4M의 장거리 항속 능력이 빛을 발했다. 1942년 3월 22일에는 노던 준주캐서린까지 장거리 폭격을 감행하기도 했다.[4]

어뢰 공격을 하는 1식 육공


그러나 G4M은 설계 당시 경량화와 항속 거리 연장을 최우선으로 하여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충분한 장갑 방호를 갖추지 않아[4] 피탄 시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G4M에 "플라잉 라이터(flying lighter)"[4], "원샷 라이터(one-shot lighter)"[36][37], "플라잉 지포(flying zippo)" 등 조롱 섞인 별명을 붙였다. 일본 해군 조종사들은 기체의 시가 같은 모양 때문에 "하마키(葉巻)"라고 불렀다.[4]

이러한 취약성은 과달카날 전투를 기점으로 점차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42년 8월부터 10개월간 G4M은 과달카날 일대에서 연합군 함선과 지상 목표물에 대한 수많은 공격 임무를 수행했지만, 강화된 연합군의 방공망과 F4F 와일드캣 등 신형 전투기 앞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2년 8월 8일, 미 해병대의 과달카날 상륙 이틀째에 룽가 포인트의 미 함대를 공격한 G4M 23대 중 18대가 격추되어 약 120명의 승무원이 전사했다.[5] 1943년 1월 렌넬 섬 해전에서는 야간 뇌격으로 미 중순양함 USS 시카고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틀간 43대 중 10대가 미 해군 함정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과달카날 전역에서 손실된 G4M은 100대가 넘었으며, 이는 숙련된 조종사와 승무원의 손실로 이어져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력 약화를 가속화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했던 G4M1 잔해의 꼬리 부분, 1943년경


1943년 4월 18일에는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대장이 탑승한 G4M1(기체 번호 T1-323)이 미 육군 항공대 소속 P-38 라이트닝 전투기 편대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해군 갑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작전(복수 작전)으로 야마모토는 전사했으며, 동승했던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이 탑승한 다른 G4M1도 격추되었으나 우가키는 목숨을 건졌다.[6]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쓰비시는 G4M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엔진과 무장을 개량한 G4M2, G4M3 등의 후기형을 개발했다. G4M2는 엔진 출력을 높이고 방어 무장을 강화했으며(등 쪽 포탑에 20mm 기관포 탑재), G4M3에서는 방탄 연료 탱크와 장갑 방호력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에도 불구하고 G4M의 근본적인 취약성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으며, 특히 전쟁 후반기에 등장한 연합군의 우수한 전투기 앞에서는 여전히 생존성이 낮았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들은 12.7mm 기관총으로는 G4M을 격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20mm 기관포를 탑재한 F6F 헬캣이 투입되면서 G4M 격추가 용이해졌다.

721 해군 항공대의 G4M2e 폭격기가 ''오카''를 운반하고 있다 (플라스틱 모델 이미지)


자살 병기 오카 "바카"를 발사하는 G4M2e 24형 ''테이'' (풍동 모델 실험)


전쟁 말기, G4M은 인간 유도 자살 폭탄인 오카의 모기(母機)로 사용되는 비극적인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G4M2e형이 오카 탑재용으로 개조되었는데, 중량 2270kg에 달하는 오카를 동체 하부에 매달고 비행해야 했기 때문에 G4M의 비행 성능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항속 거리는 30% 감소했고, 순항 속도 역시 약 10% 느려졌으며, 기동성은 현저히 둔해졌다. 1945년 3월 21일, 노나카 고로 소령이 지휘하는 오카 탑재 G4M 편대가 첫 출격했지만, 부족한 호위 전투기들이 미군 전투기에 의해 격퇴당하자 오카를 탑재한 느리고 둔한 G4M들은 손쉬운 표적이 되어 대부분 격추당하며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노획한 오카를 분석한 후, 오카 자체보다 이를 운반하는 모기를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39] 일본군 역시 첫 공격의 실패 이후 전술을 변경하여, 주간 대규모 공격 대신 박명이나 여명 시간을 이용해 소수의 G4M이 분산 침투하는 방식으로 오카 공격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일부 G4M이 미 함대에 접근하여 오카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고, 구축함 1척 격침, 다른 함선 다수 손상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40] 하지만 미군의 철저한 방어와 모기의 근본적인 취약성 때문에 오카 작전은 전체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많은 희생만 낳았다.

이에지마 비행장에 주기된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G4M (1945년 8월 19일)


일본의 항복 이후, 1945년 8월 19일에는 항복 사절단을 수송하는 임무를 위해 2대의 G4M이 동원되었다. 이 G4M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기체 전체를 흰색으로 칠한 뒤 녹색 십자 표시를 그려 넣었으며, '바탄 1호', '바탄 2호'라는 호출 부호를 부여받고 미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호위 하에 이에지마에서 마닐라까지 비행했다.[7]

4. 2. 한국과의 관계

(내용 없음)

4. 3. 파생형

1식 육상 공격기(G4M)의 첫 번째 시제기는 1939년 9월 미쓰비시의 나고야 공장에서 분해되어 북쪽으로 48km 떨어진 가가미가하라 비행장으로 옮겨졌다.[4] 1939년 10월 23일, 시험 비행 조종사 시마 가쓰조가 G4M 시제기를 처음 조종했다.[4]

이 G4M1 폭격기가 양산에 들어가기 전에, 중(重) 호위 전투기형인 G6M1을 제작하는 것이 시도되었다. G6M1이 다른 폭격기의 호위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으나, 이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G4M1의 생산이 명령되었다.[4]

;12식 육상 공격기 개(G6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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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중인 12식 육상 공격기 개 6호기. 동체 아래의 곤돌라 형태를 알 수 있다.


: 육공형(G4M) 양산에 앞서 생산된 이른바 '''익단 원호기'''. G4M의 방어 화기에 더하여 동체 하부 곤돌라의 전후에 20mm 99식 선회 기관총을 추가하고, 주 날개 구조와 탱크 측면에 방탄 고무를 장비했으며, 외익의 인테그럴 탱크를 폐지하고 폭탄 격납고에 방탄 고무 연료 탱크를 증설했다. 육공 편대의 외곽에서 강력한 방어 화력으로 편대를 보호할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나, 개조로 인한 중량 증가 등으로 속력과 운동성이 저하되어 육공 편대와 함께 행동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0식 함상 전투기가 원호 전투기로 활약하게 되면서 결국 훈련기나 수송기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총 30대가 제작되었다.

:

:; 1식 대형 육상 연습기 11형(G6M1-L)

:: 12식 육상 공격기 개(G6M1)를 연습기로 전용한 기체. 1식 육상 공격기의 기종 전환 훈련에 사용되었다.

::

:; 1식 육상 수송기 11형(G6M1-L2)

::
하네다 비행장에 주기 중인 1식 육상 수송기 11형. 연합 함대 사령부 부속 수송기대 소속. 꼬리 부분 방풍이 폐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1식 대형 육상 연습기(G6M1-L)를 수송기로 전용한 기체. 동체 하부 곤돌라를 철거하고 방어 화기를 7.7mm 92식 기관총 1정으로 줄였다. 각 전선에서 인원(최대 20명 탑승 가능)이나 물자 수송에 사용되었다.

; 1식 육상 공격기(G4M1)

: 1식 육상 공격기의 시제기. 2기 제작. 1호기는 1940년 1월, 2호기는 3월에 납입되었다. 1호기의 시험 결과를 반영하여 2호기는 수직 꼬리 날개 확대, 보조 날개 밸런스 탭 설치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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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중인 일일형. 제4항공대 소속으로 정찰용 폭탄 격납고 커버를 장착하고 있다.


; 일일형(G4M1 / 모델 11)

: 화성 11형 엔진을 장비한 최초의 양산형. 1940년 12월부터 인도가 시작되어 1944년 1월 생산 종료까지 시제기 포함 1,172대가 생산되었다. 꼬리 부분에 20mm 99식 1호 기총을 장비하는 등 96식 육상공격기에 비해 방어 화기를 강화했지만, 탑승원이나 연료 탱크의 방호는 여전히 부족했다. 특히 인테그럴 탱크 구조로 인해 방탄 설비 적용이 어려웠고, 이는 초기 모델의 높은 손실률로 이어졌다.

: 1942년 8월 생산된 406호기부터는 고고도 성능을 향상시킨 화성 15형 엔진을 탑재했다. 이 개량형은 비공식적으로 '13형'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해군에서는 구분 없이 '일일형'으로 취급했다.[41] 엔진 교체 외에도 공기 흡입구 설계 변경, 추력식 단 배기관(954호기 이후) 적용 등이 이루어졌다. 손실 증가에 따라 자동 소화 장치 탑재, 주 날개 하부 인테그럴 탱크 부분에 30mm 방탄 고무판 부착(663호기 이후)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성능 저하(최대 속도 5노트 감소, 항속 거리 300km 감소)를 감수해야 했다.

; 이이형(G4M2 / 모델 22 계열)

:
지상에 주기 중인 이이형. 기관총이 장비되어 있지 않다.


: 엔진을 화성 21형으로 교체하고 기체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한 개량형. 주요 변경점은 다음과 같다.

:* 엔진 변경(화성 11형 → 화성 21형), 추력식 배기관 채용, 프로펠러 4엽화.

:* 연료 탱크 증량(4,900리터 → 6,490리터).

:* 주 날개 익형을 층류익으로 변경, 수평 꼬리 날개 면적 증가, 각 날개 끝을 둥글게 처리.

:* 무장 강화: 상부 7.7mm 기관총을 20mm 1호 기관총 동력 포탑으로 교체, 전방 7.7mm 기관총 동력 포탑화, 측방 7.7mm 기관총좌 개폐창화, 꼬리 부분 20mm 1호 기관총 사계 개선.

:* 주 착륙 장치 강화, 꼬리 바퀴 인입식으로 변경.

:* 폭탄 격납고 문 설치(2065호기부터), 기수 하부 폭격 조준창 설치(2105호기부터).

: 시제기는 1943년 2월 해군에 인도되었고, 양산기는 1943년 7월부터 인도가 시작되었다. 총 429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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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갑형 (모델 22 코)

:: 이이형에 3식 공6호 무선 전신기(기상 수색 레이더)를 장비하고, 측방 7.7mm 기관총을 20mm 1호 기관총으로 변경한 형식.

::

:; 이이을형 (모델 22 오츠)

:: 이이갑형의 상부 동력 포탑 기관총을 20mm 1호 기관총에서 2호 기관총으로 변경한 형식.

; 이사형(G4M2a / 모델 24 계열)

: 엔진을 화성 25형으로 교체한 형식. 프로펠러 감속비를 변경하고 카울링 형태와 측방 포좌를 개량했다. 1944년 5월부터 인도가 시작되었으며, 모델 24, 24 코, 24 오츠, 24 헤이, 24 테이를 합쳐 총 713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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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갑형 (모델 24 코)

:: 이사형에 3식 공6호 무선 전신기를 장비하고, 측방 7.7mm 기관총을 20mm 1호 기관총으로 변경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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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을형 (모델 24 오츠)

:: 이사갑형의 상부 동력 포탑 기관총을 20mm 1호 기관총에서 2호 기관총으로 변경한 형식.

::

:; 이사병형 (모델 24 헤이)

:: 이사을형의 전방 7.7mm 기관총을 13mm 기관총으로 강화한 형식.

::

:; 이사정형(G4M2e / 모델 24 테이)

::

:: 폭탄 창고를 인간 유도 로켓 오카 11형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연료 탱크와 조종석의 방탄 장비를 강화한 특공 병기 모기(母機). 일부 기체는 이륙 보조용 로켓 엔진 장착이 가능했다.

; 이오형(G4M2b)

: 고고도 성능을 향상시킨 화성 27형 엔진으로 교체한 형식. 시험 비행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였으나, 공장 공습으로 엔진 조달이 불가능해져 생산되지 못했다.

; 이륙형(G4M2c)

: 87 옥탄 연료 사용을 고려하여 연료 분사 장치가 장착된 화성 25을형 엔진으로 변경한 형식. 2기만 시제 제작되었다.

; 이칠형(G4M2d)

: 이이형을 기반으로 화성 25형 엔진과 배기 터빈 과급기를 장착한 형식. 공창에서 1기만 시제 제작되었으나, 기체 소실 문제로 시험 없이 중단되었다.

; 삼사형(G4M3 / 모델 34 계열)

:
삼사형 시제 3호기. 측방 포좌와 꼬리 부분 포좌가 생산기와 달라서 수평 꼬리 날개의 상반각도 없다.


: 방어력 강화를 위해 인테그럴 탱크를 폐지하고 방탄 탱크를 장비한 형식. 주익 내부 구조를 변경하여 고무 피막 방탄 탱크를 내장하고, 꼬리 부분 포좌를 개량했으며, 주익 뿌리에 필렛을 추가했다. 중심 위치 변경으로 수평 꼬리 날개에 상반각을 주었다. 자중은 약 300kg 증가했다. 1942년 11월 연합 함대의 방탄 강화 요구에 따라 개발되었으나, 개발 지연과 공습, 쇼와 도난카이 지진 등의 영향으로 생산이 부진하여 1944년 10월에야 초도기가 완성되었고, 총 생산량은 갑형 포함 91대에 그쳤다. 무장은 기수와 양측면에 7.7mm 92식 기관총 각 2정, 상부 포탑과 꼬리 부분에 20mm 99식 1호 20mm 기관포 각 1정을 장착했다.

:

:; 삼사갑형 (모델 34 코)

:: 양측면의 7.7mm 기관총을 20mm 99식 기관포로 교체한 형식. 1944년 10월부터 생산되었다. 일부는 수송 및 대잠 초계용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

:; 삼사을형 (모델 34 오츠)

:: 해당 24형(G4M2a)의 변형과 유사하게 개조된 형식.

::

:; 삼사병형 (모델 34 헤이)

:: 해당 24형(G4M2a)의 변형과 유사하게 개조된 형식.

; 삼육형(G4M3c / 모델 36)

: 삼사형을 기반으로 배기 터빈 과급기(미쓰비시 MK4-T 가세이 25b 루, 1360kW)를 탑재한 형식. 시제품 2기가 제작되어 1945년 7월부터 종전까지 시험이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불명확하다.

'''총 생산 대수'''

형식모델생산 대수
시제기G4M12
양산형G4M1 모델 111,170
양산형G4M2 모델 22, 22 코, 22 오츠429
양산형G4M2a 모델 24, 24 코, 24 오츠, 24 헤이, 24 테이(G4M2e)713
양산형G4M3 모델 34 코, 34 오츠, 34 헤이91
익단 원호기G6M130
총합2,435


5. 제원 (G4M1 Model 11)

자료:[19] [20]


  • '''승무원:''' 7명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폭격수/전방 사수, 기장/상부 포탑 사수, 통신사/측면 사수, 엔진 정비사/측면 사수, 후방 사수)
  • '''전장:''' 19.97m
  • '''전폭:''' 24.89m
  • '''전고:''' 4.9m (정비 위치)
  • '''익면적:''' 78.125m2
  • '''자체 중량:''' 6741kg
  • '''총 중량 (Gross weight):''' 9500kg
  • '''최대 이륙 중량:''' 12860kg
  • '''엔진:''' 2 × 미쓰비시 MK4A 카세이 11 14기통 공랭식 레이디얼 피스톤 엔진
  • 이륙 시: 1530 hp
  • 고도 2000m에서: 1410 hp
  • 고도 4000m에서: 1340 hp
  • '''프로펠러:''' 3엽 해밀턴 스탠다드 라이선스 스미토모 정속 가변 피치
  • '''최고 속도:''' 428 km/h (고도 4200m에서)
  • '''순항 속도:''' 315 km/h (고도 3000m에서)
  • '''실속 속도:''' 120 km/h
  • '''항속 거리:''' 2852km
  • '''정찰 항속 거리:''' 5040km
  • '''실용 상승 한도:''' 9660m[42]
  • '''상승률:''' 9.17 m/s
  • '''무장:'''
  • 1 × 20 mm 99식 20mm 기관포 (후방 포탑)
  • 4 × 7.7 mm 92식 기관총 (전방 포탑 ×1, 측면 위치 ×2, 상부 포탑 ×1)
  • '''폭장:'''
  • 1 × 858kg 91식 Kai-3 (개량형 모델 3) 항공 어뢰 '''또는'''
  • 1 × 800kg 폭탄 '''또는'''
  • 4 × 250kg 폭탄 '''또는'''
  • 1 × 1200kg 요코스카 MXY-7 오카 자폭 폭탄

6. 평가



1식 육상공격기(G4M)는 개발 당시 장거리 비행 능력과 고속 성능을 최우선 목표로 설계되었다. 미쓰비시 G3M의 후속기로 개발되면서, 일본 해군은 폭탄이나 어뢰를 탑재하고도 3700k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전례 없는 성능을 요구했다.[4]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계팀은 기체 무게를 극한까지 줄이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자동 밀폐 연료 탱크와 조종사 및 중요 부위를 보호할 장갑판을 생략하는 결과를 낳았다.[4]

이러한 설계는 장거리 침투 및 공격 능력 극대화라는 목표 달성에 집중한 나머지, 조종사의 생존에 필수적인 방어 장비를 희생시킨 결과였다. 이로 인해 G4M은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기관총탄이나 포탄 파편에도 매우 취약했으며, 특히 날개에 내장된 연료 탱크가 피격 시 쉽게 화재로 이어졌다.[4] 이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G4M을 '비행 라이터'[4], '원샷 라이터', '비행 지포', '비행 시가' 등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총격을 받아 날개 연료 탱크가 손상되면 불이 붙는 경향 때문이었다. 일본 제국 해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길쭉한 동체 모양 때문에 '하마키'(葉巻, 시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4]

방어력의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G4M은 특정 상황에서는 위협적인 공격기로 평가받았다. 특히 보급 기지나 비행장 같은 고정된 육상 목표물을 공격하는 중고도 폭격 임무에서는 뛰어난 항속 거리와 속도를 이용해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접근하여 연합군 전투기의 요격을 피하기 용이했다. 또한 기체 후방에 장착된 20mm 99식 기관포는 당시 폭격기의 방어 무장으로는 상당히 강력하여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 전투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4] G4M이 지상에서 발사된 대공포나 적 전투기의 기관총탄에 맞아 날개에 불이 붙지 않으면 심각한 손상을 입고도 공중에 머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렌넬 섬 해전 당시 USS ''Chicago''를 공격했던 751 항공대 소속 G4M 11대 중 4대가 살아남아 1개의 엔진만으로 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량된 연합군 전투기들이 등장하고 제공권이 넘어가면서 G4M의 취약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미쓰비시는 G4M2와 같은 개량형을 통해 엔진 출력을 높이고 일부 방어력을 보강하려 했으나, 화재에 취약한 근본적인 설계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4] 결국 G4M은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공세에는 기여했지만,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그 한계를 드러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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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Military Aircraft, 1919-1945: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ir Impact Putnam & Company Limited
[3] 간행물 Tagaya 2001 https://archive.org/[...]
[4] 웹사이트 Mitsubishi G4M3 Model 34 BETTY https://www.si.edu/o[...] Smithsonian Institution 2019-10-01
[5] 간행물 Harvnb|Fumio|1958
[6] 서적 Fading Victory: The Diary of Ugaki Matome, 1941–1945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7] 서적 Meatballs and Dead Birds: A Photo Gallery of Destroyed Japanese Aircraft in World War II Stackpole Books
[8] 웹사이트 TAIC-SWPA No Number Mitsubishi G4M2 Betty (Captured USAAF Mitsubishi G4M "Betty"). http://www.j-aircraf[...] 2010-10-17
[9] 웹사이트 Mitsubishi Type 1 Attack Bomber / G4M (Betty) https://www.pacificw[...] 2019-02-18
[10] 웹사이트 Robert Greinert interview with Pacific Wrecks https://www.pacificw[...] Pacific Wrecks
[11] 웹사이트 G4M1 Model 11 Betty Manufacture Number 1280 Tail 370, −321. http://www.pacificwr[...] 2011-07-23
[12] 웹사이트 G4M1 Betty Wreckage at Babo Airfield. http://www.pacificwr[...] 2011-01-05
[13] 웹사이트 G4M1 Model 11 Betty Manufacture Number 1800 Tail U2-??? https://www.pacificw[...] Pacific Wrecks
[14] 웹사이트 Pacific Wrecks - G4M1 Model 11 Betty Manufacture Number 2806 Tail U-321 https://www.pacificw[...] Pacific Wrecks
[15] 웹사이트 G4M2 Model 12 Betty Manufacture Number 12017 Tail 62-22 http://www.pacificwr[...] 2016-08-19
[16] 웹사이트 Mitsubishi G4M3 Model 34 Betty https://airandspace.[...]
[17] 웹사이트 Pacific Wrecks - G4M1 Model 11 Betty Manufacture Number 2656 Tail 323 https://pacificwreck[...] 2022-11-23
[18] 웹사이트 Historic WWII crash site opened to tourists in Bougainville for first time in more than five years https://www.abc.net.[...] 2015-05-13
[19] 간행물 Harvnb|Aoki|1972
[20] 웹사이트 The Incomplete Guide to Airfoil Usage https://m-selig.ae.i[...] 2019-04-16
[21] 문서 高度6000mで2kt、8000mで4kt(一一型より10kt/19kt)
[22] 문서 8000m到達に約1分短縮(一一型より約3分短縮)
[23] 문서 10000mに対し10540m(一一型9900m)
[24] 서적 海軍陸上攻撃機隊 今日の話題社 1985-10
[25] 문서 少量の火薬で爆弾懸吊帯を切断して投下する、九六陸攻時代にはまだ無かった。
[26] 서적 海軍陸上攻撃機隊 今日の話題社 1985-10
[27] 서적 海軍陸上攻撃機隊 今日の話題社 1985-10
[28] 문서 そもそも1番タンクに被弾した機は帰還できず「生還機だけの統計」を疑った
[29] 서적 海軍陸上攻撃機隊 今日の話題社 1985-10
[30] 문서 七期雄飛会『予科練のつばさ』光人社 2003年5月 P198
[31] 문서 七三二空で陸攻を操縦していた高橋淳も乗員は5人だったと証言している
[32] 서적 予科練のつばさ 光人社 2003-05
[33] 문서 七期雄飛会『予科練のつばさ』光人社 2003年5月 P201
[34] 문서 "…十二試陸上攻撃機ヲ兵器ニ採用シ一式陸上攻撃機一一型ト呼称ス…"
[35] 문서 日本の極秘軍用機([[2007年]][[ヒストリーチャンネル]]製作・放映、原題:SECRET JAPANESE AIRCRAFT OF WORLD WAR II)
[36] 서적 Weapons and Warfare: From Ancient and Medieval Times to the 21st Century
[37] 인용
[38] 서적 海軍陸上攻撃機隊 今日の話題社 1985-10
[39] 웹사이트 Anti-Suicide Action Summary http://www.history.n[...] UNITED STATES FLEET HEADQUARTERS OF THE COMMANDER IN CHIEF NAVY DEPARTMENT WASHINGTON 25, D. C. 1945-08-31
[40] 간행물 機関紙 特攻 公益財団法人 特攻隊戦没者慰霊顕彰会 2012-05
[41] 문서
[42] 정보
[43]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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