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천안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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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6년 천안문 사건은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이후,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와 그에 대한 탄압을 일컫는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문화 대혁명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는 마오쩌둥 사후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었으나 덩샤오핑 집권 이후 혁명적 사건으로 재평가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 내 권력 구도 변화와 개혁 개방 정책 추진에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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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천안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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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이름 | 1976년 천안문 사건 |
다른 이름 | 사오 운동 (四五运动) |
영어 이름 | April 5 Tiananmen Incident |
중국어 이름 (간체) | 四五天安门事件 |
중국어 이름 (번체) | 四五天安門事件 |
로마자 표기 | sìwǔ Tiān'ānmén shìjiàn |
광둥어 표기 | sei3ng5 Tin1ngon1mun4 si6gin6 |
발생일 | 1976년 4월 4일 ~ 5일 (2일간) |
위치 | 천안문 광장 |
원인 | 저우언라이 사망, 문화대혁명에 대한 불만 |
교전 세력 | |
교전 1 | 중국인민해방군, 민병대 |
교전 2 | 추모객, 시위대 |
주요 인물 (교전 1) | 장칭, 화궈펑 |
주요 인물 (교전 2) | 중앙 지도부 없음 |
참가 규모 (교전 2) | 10만 명 |
결과 | |
결과 | (결과 정보 없음) |
피해 규모 | |
사망자 | 불명 |
부상자 | (부상자 정보 없음) |
체포 | 40명 |
구금 | (구금 정보 없음) |
기소 | (기소 정보 없음) |
벌금 | (벌금 정보 없음) |
관련 정보 | |
관련 사건 | 문화대혁명 |
2. 역사적 배경
1971년 린뱌오 실각 이후 중국의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문화 대혁명의 과도함을 일부 시정하고자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국정 운영을 맡겼으나, 장칭을 필두로 한 사인방과 이들 실용주의 노선 사이의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신중함과 높아지는 명성에 점차 의심을 품고 사인방을 이용해 견제하려 했다.
한편, 오랜 문화 대혁명의 혼란에 지친 중국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치던 저우언라이를 깊이 존경하고 지지했다. 사인방이 주도하여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려 했던 비림비공운동 등이 국민적 반감에 부딪힌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혼란을 수습해주기를 기대하며 사인방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1976년 1월 8일, 국민적 신망이 높았던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국 사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2] 그의 죽음은 사인방과의 권력 투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잠재되어 있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사인방은 저우언라이에 대한 대중의 추모 열기가 정치적 도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애도 분위기를 억누르려 했으나,[13] 이는 오히려 인민들의 반발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사인방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정치적 긴장은 극도로 고조되었고, 이는 결국 1976년 4월 청명절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 즉 1976년 천안문 사건으로 이어졌다.[3][4]
2. 1. 저우언라이 사망과 권력 투쟁
1971년 린뱌오 실각 이후,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의 과오를 일부 수습하고자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정 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장칭을 중심으로 한 문화대혁명 강경파, 이른바 '사인방'과 실용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저우언라이 및 덩샤오핑 사이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13]마오쩌둥은 건국 초기부터 저우언라이의 뛰어난 실무 능력을 인정하여 중용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저우의 소극적인 태도와 신중함, 그리고 마오 자신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점차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린뱌오 사후 당내 인재 부족으로 저우를 어쩔 수 없이 서열 2위에 앉혔으나,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성공 등으로 저우의 국제적 명성이 높아지자 마오의 질투와 의심은 오히려 커졌다. 1973년 마오는 저우의 노선이 장차 수정주의로 이어질 것이라 비판하며 압박을 강화했다. 저우언라이는 자기 비판 등을 통해 충성심을 보이며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마오쩌둥은 사인방을 이용해 저우를 견제하고 덩샤오핑을 대안으로 고려하는 등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한편, 오랜 문화대혁명의 혼란에 지친 중국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저우언라이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사인방이 저우를 공자에 빗대어 비판하며 실각시키려 했던 비림비공운동은 이러한 국민적 정서 때문에 지지를 얻지 못했다. 대중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혼란을 수습해주기를 기대하며 사인방에 대한 반감을 키워나갔다. 1974년 건국 25주년 기념식에서 저우언라이가 문화대혁명 시기 실각했던 인사들을 초청하자 큰 환호를 받았는데, 이는 저우의 높은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마오쩌둥조차 "저우를 반대하면 인민이 반대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국 전역은 큰 슬픔에 잠겼다. 그의 죽음은 사인방과의 치열한 권력 투쟁[2] 속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공산당은 대중의 추모 열기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여 공식적인 애도 기간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저우를 추모하고 사인방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등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였다. 장칭 등 사인방은 이러한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꼈다.
마오쩌둥은 인민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존경이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저우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하고 다른 정치국원들의 참석도 막았다. 또한 문화대혁명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화궈펑에게 사인방과의 연계를 지시하고, 덩샤오핑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인방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14]
1976년 2월, 사인방의 일원인 야오원위안은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 3월에는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원회보』가 저우언라이 추도 기사를 삭제하고, 대신 "당내의 주자파(走資派)는 타도당했음에도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 자본주의 노선을 돕는다"며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사인방의 공세는 오히려 인민들의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고조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긴장감은 결국 1976년 천안문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2. 문화대혁명에 대한 불만
1976년 1월 8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이자 많은 중국인에게 존경받던 지도자 저우언라이의 사망은 1976년 천안문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2] 저우언라이는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내 다른 고위 지도자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의 가장 강력한 정적은 마오쩌둥 주석의 부인 장칭이 이끄는 소위 4인방이었다.[2]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은 대중의 추모 열기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여 공식적인 애도 기간을 제한했고, 정치권에서는 다시 '주자파(走資派)'[13] 비판 운동이 일어나며 저우언라이 추모 분위기를 억누르려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 사상 추종 세력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고인을 추모하려는 인민들의 열망은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분출되었다. 1976년 4월 4일, 전통적으로 조상을 기리는 청명절을 하루 앞두고 수천 명의 베이징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모여들었다.[3] 이들은 저우언라이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기념비 아래에 화환, 현수막, 시, 플래카드, 꽃 등을 놓으며 그를 추모했다.[3] 기념비에는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어 추모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이날 하루 동안 최대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광장을 다녀갔을 수도 있다.[5] 시위에는 빈곤한 농민부터 고위 인민해방군 장교, 고위 간부의 자녀들까지 사회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며, 이는 특정 지도부의 지시 없이 광범위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한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추모 행렬은 단순히 저우언라이를 기리는 것을 넘어,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장이 되었다. 많은 플래카드와 구호는 저우언라이를 공격했던 4인방, 특히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4] 나아가 일부 구호와 시는 마오쩌둥 자신과 그가 주도한 문화대혁명의 폐해까지 비판하며,[5] 오랜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참여자들은 저우언라이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고, 마오쩌둥과 그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으며, 중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추모 행위를 탄압하려는 세력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과 공안은 이러한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았다. 4월 4일 밤에서 5일 새벽 사이, 당국은 인민영웅기념비에 바쳐진 화환들을 모두 철거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4월 5일, 건물과 자동차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며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공안 당국과 군대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진압되었다. 사건의 책임은 덩샤오핑에게 전가되어, 4월 7일 그는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어 실각했다.[14] 반면, 이 사건을 계기로 화궈펑은 공식적으로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사건 당시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광장에 가지 말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5]
2. 3. 린뱌오 사건과 마오쩌둥의 의심
1971년 린뱌오 실각 이후,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추방되었던 덩샤오핑을 당 중앙으로 복귀시켜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정 운영을 맡겼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 등 강경파 그룹인 "사인방"과 실용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마오쩌둥은 건국 초기부터 저우언라이의 뛰어난 실무 능력을 인정하여 중용했지만, 저우의 신중한 성격과 문화 대혁명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 점차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는 마오쩌둥 자신의 회의적인 성격과 맞물려 더욱 깊어졌다.
린뱌오가 실각한 후 당을 이끌 만한 인물이 부족해지자, 마오쩌둥은 어쩔 수 없이 저우언라이를 당내 서열 2위로 올렸다. 저우언라이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린뱌오 사건 이후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했으며, 특히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제 사회에서 "저우언라이 외교"라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히려 마오쩌둥의 질투와 의심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1973년 7월, 마오쩌둥은 왕훙원과의 대화에서 "(저우) 총리의 발언은 참을 수 없다. 이런 기조가 계속된다면 장래에 반드시 수정주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며 저우언라이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갔다. 성실한 성품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충성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때로는 자기 비판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마오쩌둥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인방을 이용하거나, 또 다른 실무형 관료인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저우언라이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갈등은 심화되었다.
한편, 중국 국민들은 끊임없는 문화 대혁명의 혼란에 지쳐 있었고, 문화 대혁명과 거리를 두었던 저우언라이를 존경하게 되었다. 사인방이 저우언라이를 공자에 빗대어 비판하며 실각시키려 했던 비림비공운동이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해 줄 인물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지지하며 사인방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1974년 9월 30일 열린 건국 25주년 기념식에서 저우언라이는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실각했던 인사들을 특별히 초청했고, 이는 참석자들로부터 큰 환호를 받았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저우언라이를 공격할 빌미를 줄 수도 있는 행동이었으나, 신중한 저우언라이는 건배사에서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내용을 포함시켜 비난을 피했다. 이에 마오쩌둥도 "저우의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 자각이 부족한 국민은 저우의 일을 모른다. 지금 (저우를 공격)하면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며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저우를 반대하면 백성이 반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우언라이에 대한 국민적 인기는 매우 높았다.
3. 사건의 전개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장칭, 야오원위안 등 4인방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세력을 얻으며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억압했다. 이는 문화 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누적된 인민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6년 청명절인 4월 4일, 베이징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의 전횡을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기념비는 시민들이 가져온 추모 화환으로 뒤덮였고, 광장에는 4인방을 비판하는 시와 글들이 게시되었다.
베이징시 당국은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다음 날인 5일 새벽, 기념비에 놓인 화환들을 강제로 철거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며 소요 사태로 번졌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사건을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하고, 민병과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수의 참가자를 체포했다.
사건의 책임은 당시 부총리였던 덩샤오핑[14]에게 전가되어 그는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화궈펑이 총리로 공식 임명되었다. 비록 천안문 광장의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4인방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는 베이징을 넘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4인방이 몰락하는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3. 1. 청명절 추모 시위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소위 '주자파(走資派)'[13] 비판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는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려는 인민들의 움직임을 위축시키고,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 사상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당국은 저우언라이에 대한 공식적인 애도 기간마저 제한하며 대중의 추모 열기를 억누르려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문화 대혁명의 실패를 우려하고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경계했던 마오쩌둥의 의중과도 관련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장례식 참석을 거부하고, 덩샤오핑과 거리를 두며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4인방에게 힘을 실어주었다.1976년 2월, 야오원위안은 저우언라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고, 3월에는 상하이의 『원회보』에서 저우언라이 추도 기사가 삭제되고 그를 자본주의 노선파로 몰아가는 기사가 실리는 등, 4인방의 공세는 노골화되었다. 칭화 대학 학생들까지 저우언라이를 비판하고 나서자 인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1976년 3월, 난징에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자발적인 집회가 열렸다. 4인방은 이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시위 소식은 베이징행 열차에 쓰인 구호 등을 통해 베이징 시민들에게 전해졌고, 이는 3월 말부터 천안문 광장에서 자연 발생적인 추모 집회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참가자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은 추모 화환과 깃발, 그리고 4인방을 비판하는 시와 글들로 가득 찼다.
추모 열기는 청명절인 4월 4일에 절정에 달했다. 중국 전통적으로 조상을 기리는 이날, 베이징 시민들은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진 인민영웅기념비로 모여들었다. 손에는 화환과 현수막, 플래카드를 들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절 불렸던 '인터내셔널' 등을 부르며 행진했다.[3] 기념비 앞은 인민들이 가져온 화환으로 뒤덮여 마치 제단처럼 변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이날 하루 최대 200만 명의 인파가 광장을 찾았을 것으로 추정된다.[5] 참여자들은 농민부터 인민해방군 고위 장교, 간부 자녀까지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했으며, 저우언라이 추모뿐 아니라 4인방의 전횡에 대한 분노,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비판[5], 그리고 중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했다.[4] 이는 특정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광범위한 민중의 정서가 자발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이 시위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자녀들에게도 광장에 나가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5]
며칠 전부터 4인방의 지시를 받은 공안 당국은 가두 선전 차량을 동원해 경고 방송을 하고 추모객들을 설득하거나 구금했으며, 기념비에 놓인 화환을 철거하는 등 단속을 시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군중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심지어 단속에 나섰던 일부 경찰과 군인들마저 시위 군중의 열기에 감화되어 임무를 포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4인방은 이 사건을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하고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4월 5일, 베이징시 당국이 기념비의 화환을 모두 철거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같은 날 밤 9시 35분경, 광장을 포위하고 있던 민병과 경찰대가 시위 군중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당국은 이 과정에서 388명을 체포했으며 사망자는 없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진압 책임자였던 우더 베이징시 당위원회 제1서기는 훗날 회고록에서 사망자는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에서는 광장이 피로 흥건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사건의 책임은 덩샤오핑에게 전가되어, 그는 4월 7일 모든 직무를 박탈당하고 다시 실각했다.[14] 반면, 화궈펑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내 입지를 굳혀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3. 2. 4월 5일의 충돌
4월 4일 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천안문 광장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화궈펑과 당시 베이징시 당위원회 제1서기였던 우더 등 당 원로들은 시위 자체와 시위대가 외친 일부 구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한편, 장칭, 야오원위안 등이 포함된 4인방은 이 사건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으로 번지자, 덩샤오핑이 시위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며[6] 병든 마오쩌둥과 상의하여 시위대를 자본주의 노선주의자로 규정했다.정부의 조치는 4월 5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천안문 광장에 놓인 저우언라이 추모 화환과 조문 물품들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이 되어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다시 모인 군중들은 밤사이에 기념비 주변의 화환 등이 완전히 철거된 것을 발견하고 격분했다. 당국의 조문객 진압 시도는 곧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차에 불을 지르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장 주변의 여러 정부 건물로 진입하는 등[5]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플래카드에는 4인방을 비판하는 시가 실리기도 하여, 오랜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7] 4인방의 통제를 받는 도시 민병대와 중국 인민해방군 베이징 파견대 소속 치안 병력이 광장에 투입되어 강제 해산 작전을 펼쳤다.[7] 민병대는 나무 곤봉과 가죽 벨트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대를 공격했다.[7] 진압 과정에서 약 40명이 체포되었다고도 하고,[7] 다른 기록에서는 388명이 체포되었다고도 한다. 당국은 사상자는 없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진압 책임자였던 우더는 훗날 회고록에서 폭력 발생은 불가피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고 주장한 반면, 광장이 피바다가 되었다는 목격담도 전해진다.
오후 6시까지 대부분의 군중은 해산되었으나, 일부는 오후 10시까지 광장에 남아 저항했다. 결국 치안 병력이 다시 투입되어 남아있던 시위대를 모두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열린 소위 "인민 재판"에 넘겨지거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4월 6일 아침까지 광장의 모든 조문 물품은 완전히 철거되었다.[7]
이 사건은 공안 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덩샤오핑에게 사건의 책임이 전가되어 4월 7일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다시 실각했다.[14] 반면, 이 사건을 계기로 화궈펑은 총리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게 되었다.
3. 3. 덩샤오핑 실각과 사인방의 몰락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탄압되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덩샤오핑[14]에게 사건의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고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을 계기로 화궈펑은 정식으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사인방은 병든 마오쩌둥에게 시위대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반격하는 자본주의 노선주의자'라고 주장하며, 덩샤오핑이 배후에서 시위대를 조종했다고 비난했다.[6]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패와 저우언라이에 대한 인민들의 존경이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덩샤오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는 사인방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사인방 중 한 명인 야오원위안은 『인민일보』를 통해 사건을 "반혁명 정치 사건"으로 왜곡 보도했으며, 장칭은 덩샤오핑의 실각 소식을 듣고 땅콩과 돼지고기 구이로 축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사인방이 사실을 왜곡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실제로 반혁명이 일어났다고 믿게 되었고 이는 덩샤오핑의 실각과 이후 탄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인방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1976년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베이징을 넘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사인방은 정치적 보호자를 잃게 되었고, 결국 권력에서 축출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4. 사건에 대한 평가와 재평가
1976년 천안문 사건은 발생 직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화궈펑과 사인방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 사인방이 체포되는 '베이징 정변' 등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거치면서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마오쩌둥 사후 권력 투쟁 끝에 1978년 덩샤오핑이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사건 평가는 전환점을 맞았다. 덩샤오핑은 1978년 11월 이 사건을 '합법적인 시위'였다고 평가를 뒤집었고, 같은 해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 회의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혁명적 사건"으로 재평가하여 기존 입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사인방에 반대하고 당을 지지하며 문화 대혁명의 과오를 부정한 전국적인 군중 항의 시위였다고 선전하였다. 사건 당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정치적 비판을 담아 창작된 시들이 이후 덩샤오핑과 가까운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학생들에 의해 출판된 것은 이러한 재평가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4. 1. 중국 공산당의 초기 평가
사건 발생 직후, 당시 화궈펑과 사인방은 이 사건을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했다. 사인방의 일원인 야오원위안은 관영 매체인 『인민일보』를 통해 사건을 민중의 "반혁명 정치 사건"으로 왜곡하여 보도하였다. 이러한 왜곡 보도는 오히려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4월 12일에는 인민일보 본사에 "어떤 현장 노동자 민병" 명의로 편집장을 나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에 비유하며 "경악할 일이다! 당의 기관지가 타락했다! 파시즘의 확성기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항의문이 전달되기도 했다.한편, 또 다른 사인방 멤버인 장칭은 사건 보고를 받고 땅콩과 돼지고기 구이로 축배를 들며 "나는 언제든지 곤봉으로 반대하는 놈들을 때려눕혀 주겠어"라고 말해 주변의 비난을 샀다.
사인방은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했고,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실제로 반혁명 시도가 있었다고 오인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덩샤오핑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고 실각했으며,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초기 평가는 1978년 11월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면서 뒤집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을 사인방에 반대하고 문화 대혁명을 부정한 전국적인 군중 항의 시위였다고 공식적으로 재평가했다.
4. 2. 덩샤오핑 집권 이후의 재평가
1976년 당시 화궈펑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었던 이 사건은 마오쩌둥 사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재평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마오쩌둥 사망 후 사인방 체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궈펑과 왕둥싱은 천안문 사건이 반혁명 활동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비치며 덩샤오핑의 복권을 지지했다.그러나 덩샤오핑과 그의 개혁 지향 동맹 세력은 복권 이후 전통적인 마오주의 노선을 고수하던 화궈펑, 왕둥싱과 권력 경쟁을 벌였고, 결국 1978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78년 11월, 천안문 사건은 '합법적인 시위'였다는 새로운 공식 평가를 받으며 이전의 규정이 뒤집혔다.
사건 당시 시위 참가자들이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담아 쓴 시들은, 덩샤오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학생들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다. 이는 사건 재평가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 단면이었다.
마침내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 회의에서는 천안문 사건을 공식적으로 "혁명적 사건"으로 재평가하여, 당의 기존 입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을 사인방에 반대하고 당을 지지하며 문화 대혁명의 오류를 부정한 전국적인 군중 항의 시위였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5. 톈안문 사건의 영향
1976년 톈안문 사건은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정치 및 사회 지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사인방의 몰락과 덩샤오핑의 정치적 복권 및 최고 지도자로의 부상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이후 중국 개혁개방 노선의 길을 여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은 1978년 공식적으로 톈안문 사건을 이전의 '반혁명적 활동'이라는 규정에서 '혁명적 사건'으로 재평가하여,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사회적으로는 당시 억압된 정치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변화의 열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1. 중국 정치에 미친 영향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과 왕둥싱은 1976년 10월 사인방을 체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이들은 천안문 사건이 반혁명적 활동이 아니라는 의견을 표명했으며, 다른 당 원로들과 함께 덩샤오핑을 복권시키고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과 그의 개혁파 동맹들은 이후 전통적인 마오주의 노선을 따르던 화궈펑과 왕둥싱에 맞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국 이 투쟁에서 덩샤오핑이 승리하여 1978년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1976년 시위 당시 많은 참가자들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은 시를 창작하고 공유했다. 이 시들은 나중에 덩샤오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학생들에 의해 네 차례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 회의에서는 1976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재평가했다. 이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함으로써, 이전의 부정적 평가를 완전히 뒤집고 사건의 성격을 새롭게 정의했다.
5. 2.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
1976년 천안문 사건 당시 많은 참가자들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시를 썼다. 이때 쓰인 시들은 나중에 덩샤오핑과 가까운 관계였던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학생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기도 했다.마오쩌둥 사후, 화궈펑과 왕둥싱은 1976년 10월 사인방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천안문 사건이 반혁명적 활동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고, 다른 당 원로들과 함께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베이징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이후 덩샤오핑과 그의 개혁파 세력은 전통적인 마오주의 노선을 따르던 화궈펑, 왕둥싱과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1978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후,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 회의에서는 1976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재평가했다. 이 회의에서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이전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평가는 천안문 사건이 중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계기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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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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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鄧小平傳》
東西文化事業公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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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Red China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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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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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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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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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中国改革开放40再出发
http://interactive.z[...]
2024-03-18
[9]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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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Brushes with Power: Modern Politics and the Chinese Art of Calligraphy
http://www.tsquare.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9-11-12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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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19-11-12
[12]
간행물
2004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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