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 개요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한 선거이다. 레이건은 경제 회복과 미국의 자부심을 강조하며 선거를 치렀고, 58.8%의 득표율로 49개 주에서 승리했다. 민주당은 먼데일과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인 제럴딘 페라로를 내세웠지만, 먼데일은 미네소타 주와 워싱턴 D.C.에서만 승리하며 참패했다.
| 국가 | 미국 |
|---|---|
| 선거 종류 | 대통령 선거 |
| 이전 선거 |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이전 선거 연도 | 1980년 |
| 다음 선거 |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다음 선거 연도 | 1988년 |
| 투표율 | 55.2% 증가 1.0%포인트 |
| 선거 날짜 | 1984년 11월 6일 |
| 선거인단 | 선거인단 538명 |
| 당선 필요 선거인단 수 | 27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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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 | 로널드 레이건 |
|---|---|
| 소속 정당 | 공화당 |
| 출신 주 | 캘리포니아주 |
| 러닝메이트 | 조지 H. W. 부시 |
| 획득 선거인단 수 | 525명 |
| 승리 주 | 49개 주 |
| 득표수 | 54,455,472표 |
| 득표율 | 5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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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 | 월터 먼데일 |
|---|---|
| 소속 정당 | 민주당 |
| 출신 주 | 미네소타주 |
| 러닝메이트 | 제럴딘 페라로 |
| 획득 선거인단 수 | 13명 |
| 승리 주 | 1개 주 + 워싱턴 D.C. |
| 득표수 | 37,577,352표 |
| 득표율 | 40.56% |
| 대통령 | 로널드 레이건 |
|---|---|
| 이전 대통령 소속 정당 | 공화당 |
| 이후 대통령 | 로널드 레이건 |
| 이후 대통령 소속 정당 | 공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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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
시크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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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
1984년 11월 22일 일식
1984년 11월 22일 일식은 남태평양, 인도네시아 동부, 파푸아뉴기니 남부에서 관측된 금환 일식으로, 윌리엄스 대학교 관측 팀이 파푸아뉴기니에서 코로나 촬영 등의 관측 활동을 수행했으며 오세아니아, 말레이 제도 남동쪽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관측되었고 다양한 주기와 연관되어 있다. -
1984년 미국 -
STS-51-A
STS-51-A는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의 9번째 임무로, 아닉 D2와 싱콤 IV-1 위성 발사 및 팔라파 B2, 웨스타 6 위성 회수에 성공했으며, 생명줄 없는 마지막 우주 유영과 유인 조종 장치(MMU) 사용의 마지막 임무로 기록되었다. -
1984년 미국 -
1984년 하계 패럴림픽
1984년 하계 패럴림픽은 영국 스토크 맨더빌에서 개최된 장애인 올림픽 대회로, 54개국이 참가하여 다양한 종목에서 경쟁했으며, 댄 D. 라이온이 마스코트로 사용되었고, 장애인 스포츠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지만 운영 미숙 등의 문제점도 드러냈으며, 대한민국도 참가했지만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고 1988년 하계 패럴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
미국의 역사 (1980-1991) -
로널드 레이건
미국의 배우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제40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 정책으로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소련과의 긴장 완화로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재정 적자 증가와 소득 불평등 심화, 이란-콘트라 사건 등 논란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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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 전쟁 휴전 직후 대한민국과 미국이 체결한 군사 동맹 조약으로, 주한미군 주둔을 통해 한국의 안보,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주한미군과 작전통제권 관련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2. 배경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당시 7.3%의 실업률을 기록했고, 1982년 12월에는 10.6%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1982년 미국은 마이너스 국내총생산 성장을 보였다.
1982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지미 카터 등 역대 대통령들은 첫 중간 선거에서 미국 하원 의석을 평균 12석 잃었지만, 공화당은 1982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26석을 잃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7석을 잃었다.
1983년 1월 레이건의 지지율은 35%까지 떨어졌다. 여론 조사에서 월터 먼데일, 존 글렌 등 민주당 후보들에게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84년 3월 실업률은 7.7%로 하락했고, 레이건의 지지율은 1984년 1월 54%로 상승했다.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와 그레나다 침공 이후 지지율 변화가 있었다. 1984년 1월 CBS 뉴스와 뉴욕 타임스 공동 여론조사에서 레이건은 먼데일을 16% 앞섰다.
3. 후보 지명 과정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 지명 과정은 크게 공화당, 민주당, 그리고 기타 정당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공화당에서는 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압도적인 지지로 재지명되었다. 레이건은 1984년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98.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경쟁자 없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198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레이건은 2,233표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조지 H. W. 부시는 2,231표를 얻어 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민주당에서는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게리 하트 상원의원, 제시 잭슨 목사 등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초기에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2년 12월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먼데일은 당내 지지 기반과 자금력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하트와 잭슨의 선전으로 쉽지 않은 경쟁을 펼쳤다. 특히 하트는 젊고 온건한 이미지를 내세워 젊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먼데일은 슈퍼대의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제럴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주요 정당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라는 기록을 세웠다.
기타 정당에서는 존 B. 앤더슨 전 하원의원이 국민통합당 후보 출마를 포기하고 월터 먼데일을 지지했다. 자유당은 데이비드 버글랜드를 대통령 후보로, 제임스 A. 루이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소니아 존슨은 시민당 등 여러 정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미국 공산당은 거스 홀과 앤젤라 데이비스를 각각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3.1. 공화당
1984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지명되었다. 레이건은 1984년 1월 29일에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하워드 베이커 상원 원내대표는 레이건이 출마하지 않을 경우에만 후보로 고려되었으나, 레이건의 출마로 인해 경쟁은 사실상 없었다. 레이건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리처드 닉슨 이후 처음으로 재지명 과정에서 뚜렷한 경쟁자를 만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었다.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6,484,987표(98.6%)를 얻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이 41,411표(0.6%), '기타' 후보가 21,643표(0.3%), '로널드 레이건 반대'가 14,047표(0.2%), 해럴드 스태슨이 12,749표(0.2%)를 얻었다.
198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레이건은 2,233표를 얻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조지 H. W. 부시가 2,231표를 얻어 지명되었다.
| 대통령 후보 | 득표수 | 부통령 후보 | 득표수 |
|---|---|---|---|
| 로널드 레이건 | 2,233 | 조지 H. W. 부시 | 2,231 |
| 기권 | 2 | 기권 | 2 |
| 잭 켐프 | 1 | ||
| 진 커크패트릭 | 1 |
3.2. 민주당
1984년 민주당 대통령 예비 선거는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게리 하트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제시 잭슨 목사 등이 주요 후보로 경쟁한 경선이었다.
당초 테드 케네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2년 12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먼데일이 당내 지지 기반과 자금력에서 우위를 점하며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잭슨과 하트가 예상 밖의 선전을 보이며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어니스트 홀링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자유주의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앨런 크랜스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은 핵무기 동결 운동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존 글렌과 루빈 애스큐는 온건, 보수 성향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자금력과 풀뿌리 지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잭슨은 전국적인 대통령 선거 운동을 벌인 두 번째 흑인이자, 유력 경쟁자로 떠오른 최초의 흑인 후보였다. 그는 예비 선거에서 350만 표를 얻어 3위를 기록했으며,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등에서 승리했다. 잭슨은 남부 민주당 내 흑인 유권자의 중요성을 확인시켰으나, 유대인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전국 예비 선거 득표율의 21%를 얻었지만, 전국 전당대회 대의원의 8%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하트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2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먼데일의 "구식"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 이미지를 비판하며 젊고 온건한 민주당원으로서 젊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다. 그는 뉴햄프셔,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등 주요 예비 선거에서 승리하며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지만, 먼데일의 재정적, 조직적 우위를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중서부와 산업 북동부의 노동 조합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하트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먼데일에게 웬디스 패스트푸드 슬로건인 "어디 베이컨 있어?"라는 질문을 받으며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 공약이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먼데일은 대의원 수에서 하트를 앞섰지만, 6월 5일 캘리포니아 예비 선거에서 하트에게 패배하며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는 슈퍼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후보 지명을 확정지었다.
몬데일은 제럴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주요 정당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여성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레이건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경선은 2020년까지 양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경선이 전당대회까지 이어진 마지막 사례였다.
3.3. 기타 정당
존 B. 앤더슨 전 미국 하원의원은 1984년 4월 26일에 국민통합당 후보 출마를 포기하고, 8월 27일에 월터 먼데일을 지지했다. 앤더슨은 1980년 대선에서 1980년 대통령 선거의 연장선상에서 국민통합당을 창당하여 "두 개의 낡은 정당"에 도전하려 했으나, 후보 부재와 스포일러 우려 등으로 결국 불출마했다. 그는 국민통합당이 1986년과 1988년에도 후보를 내기를 희망했다.
자유당은 데이비드 버글랜드를 대통령 후보로, 제임스 A. 루이스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이들은 39개 주 투표 용지에 이름을 올렸다. 초기에는 진 번스가 선두를 달렸으나, 선거 자금 조달 우려로 사퇴했다.
소니아 존슨은 시민당, 펜실베이니아 소비자당, 캘리포니아 평화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72,161표(0.1%)를 얻어 5위를 기록했다. 시민당 러닝메이트는 리처드 월턴이었고, 평화자유당 러닝메이트는 엠마 웡 마르였다.
미국 공산당은 거스 홀을 대통령 후보로, 앤젤라 데이비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4. 본선
로널드 레이건은 높은 실업률 속에서 대통령직을 시작했지만,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며 1984년에는 레이건의 지지율도 상승했다.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와 그레나다 침공은 레이건의 지지율에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은 세금 인상 공약을 내세웠으나, 이는 유권자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먼데일은 제럴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주요 정당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를 배출했지만, 페라로와 남편을 둘러싼 의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레이건은 뉴저지주 해먼턴 유세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를 언급하며 젊은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스프링스틴은 민주당 지지자였고 그의 노래 사용 중단을 요구했다. 레이건 캠페인의 대표적인 광고로는 "아침의 미국"과 "숲 속의 곰"이 있다.
1984년 대선 기간 동안 두 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과 한 번의 부통령 후보 토론이 열렸다. 첫 번째 토론에서 레이건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번째 토론에서 나이 관련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하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먼데일은 레이건의 이 답변이 자신의 선거 운동을 끝냈다고 회고했다.
| 번호 | 날짜 | 주최 | 장소 | 패널 | 사회자 | 참가자 | 시청률 (백만) |
|---|---|---|---|---|---|---|---|
| P1 | 1984년 10월 7일 일요일 | 켄터키 센터 | 루이빌, 켄터키 | 제임스 위거트, 다이앤 소여, 프레드 반스 | 바바라 월터스 | 로널드 레이건, 월터 먼데일 | 65.1 |
| VP | 1984년 10월 11일 목요일 | 필라델피아 시빅 센터 | 필라델피아 | 존 바셰크, 잭 화이트, 로버트 보이드 | 샌더 바노커 | 조지 H. W. 부시, 제럴딘 페라로 | 56.7 |
| P2 | 1984년 10월 21일 일요일 | 시립 강당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 조지 앤 게이어, 마빈 칼브, 모턴 콘드라케 | 에드윈 뉴먼 | 로널드 레이건, 월터 먼데일 | 67.3 |
5. 선거 결과
1984년 11월 6일에 치러진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은 전체 538표의 선거인단 투표 중 525표를 획득하여, 58.8%의 일반 투표 득표율을 기록했다. 반면,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는 자신의 고향인 미네소타주와 워싱턴 D.C.에서만 승리하여 13표의 선거인단을 얻는데 그쳤다. 레이건은 선거 후 "미네소타가 좋았을 텐데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은 이번 선거에서 미국 북동부, 미국 남부, 태평양 지역의 모든 주에서 승리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레이건이 획득한 525표의 선거인단 득표수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주별 투표 결과를 보면, 레이건은 대부분의 주에서 큰 격차로 승리했다. 특히, 미네소타주에서는 몬데일이 49.72%를 얻어 레이건(49.54%)을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다음은 주요 주별 투표 결과이다.
접전 지역은 다음과 같았다.
* 승리 격차 1% 미만 (선거인단 10명):
# 미네소타, 0.18% (3,761표)
* 승리 격차 1% 초과, 5% 미만 (선거인단 17명):
# 매사추세츠, 2.79% (71,330표)
# 로드아일랜드, 3.65% (14,974표)
인구 통계별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레이건 민주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원들의 지지가 레이건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경제 회복과 국가 안보 문제에서 레이건의 강점을 높이 평가했다.
주요 정치적 문제에 따른 투표 성향은 다음과 같았다.
| 중요 | 몬데일 | 레이건 | % 확인됨 |
|---|---|---|---|
| 경제 | |||
| 예 | 25 | 75 | 40 |
| 아니요 | 53 | 47 | 60 |
| 군비 통제 | |||
| 예 | 65 | 35 | 29 |
| 아니요 | 33 | 67 | 71 |
| 국방 | |||
| 예 | 8 | 92 | 25 |
| 아니요 | 53 | 47 | 75 |
2024년 기준으로, 이는 공화당 후보가 하와이, 매사추세츠, 뉴욕, 오리건, 로드아일랜드, 워싱턴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 또한, 승리한 후보가 일반 투표에서 두 자릿수(10% 이상)의 격차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