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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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은 300년 이상 존재해 온 영국의 정당으로,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보수당과 함께 양대 정당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당에 밀려 제3당으로 쇠퇴했으며, 1988년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의 합당으로 창당되었다.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유럽 연합 잔류, 선거 제도 개혁, 환경 보호 등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한다. 2010년 보수당과의 연립 정부 참여 이후 지지율 하락을 겪었으며, 2015년 총선에서 의석을 대폭 잃었다. 201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브렉시트 반대 입장을 내세워 득표율을 높였으며, 현재 에드 데이비가 당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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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 (영국)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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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자유민주당 |
로고 크기 | 225 |
약칭 | 자유민주당 |
설립일 | 1988년 3월 3일 |
합병 | 자유당 사회민주당 |
본부 | 리버럴 데모크랫 본부 1 빈센트 스퀘어, 런던. SW1P 2PN |
청년 조직 | 청년 자유주의자 |
여성 조직 | 자유민주당 여성 |
해외 조직 | 해외 자유민주당 |
LGBT 조직 | LGBT+ 자유민주당 |
당원 수 (2024년 9월) | 90,000명 이상 |
이념 | 자유주의 (영국식) 사회자유주의 친유럽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 ~ 중도좌파 |
유럽 정당 | 유럽 자유민주개혁당 |
국제 조직 | 자유주의 인터내셔널 |
상징색 | 노랑색 |
슬로건 | 공정한 거래를 위하여 |
당가 | 땅 |
상징 | [[파일:Liberal Democrats ballot logo.png|130px]] |
웹사이트 | 자유민주당 |
국가 | 영국 |
지도부 | |
대표 | 에드 데이비 |
부대표 | 데이지 쿠퍼 |
의장 | 마크 팩 |
상원 원내대표 | 뉴비 남작 |
사무총장 | 마이크 딕슨 |
의회 구성 | |
상원 의석 | ||hex=#FFCC00}} |
기타 정보 | |
회의 | 자유민주당 회의 |
내부 정치 그룹 | 자유 개혁 사회 자유주의 포럼 |
자치 분권 지부 | 잉글랜드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 웨일스 자유민주당 북아일랜드 자유민주당 런던 자유민주당 |
북아일랜드 제휴 정당 | 북아일랜드 동맹당 |
2. 역사
자유민주당은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당에서 분리된 정당이다.
자유민주당은 노동당과 보수당에 이어 영국 정치에서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양대 정당에 근접하는 득표를 얻기도 하지만,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의석수 확대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창당 초기에는 중도 정당으로서 양대 정당과 거리를 유지했으나, 1997년 총선에서는 "보수당을 대체할 비사회주의 세력의 결집"을 내세워 노동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양당 지지자들이 승산 있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전략 투표"를 하기도 했다. 그 결과 노동당이 압승하면서 연립 정부 구성은 무산되었지만, 자유민주당은 득표율 16.8%에도 불구하고 46석을 얻어 이전보다 26석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다시 노동당과 거리를 두었지만, 2024년 총선에서는 노동당과 실질적인 전략 투표를 통해 역대 최다인 72석을 확보했다.[22]
2010년부터 2015년까지는 캐머런 내각에서 보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자유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다. 경제 정책은 시장 경제를 존중하면서도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사회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노동당 일부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내며 여론을 양분하는 논쟁을 이끌어냈다. 소선거구제에서 불리한 위치를 극복하기 위해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2. 1. 기원 (1977년–1987년)
자유당(Liberal Party)은 300년 이상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1]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보수당(Conservative Party)과 함께 영국의 두 주요 정당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당(Labour Party)에 밀려 3위로 떨어졌고, 20세기 후반 내내 점진적인 쇠퇴를 겪었다.[2] 1970년대에 자유당 당수 데이비드 스틸은 다른 정당과의 연합을 통해 정권 탈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3] 1977년, 그는 노동당 총리 제임스 캘러핸과 손을 잡고 불신임 투표에서 캘러핸 정부를 지지하는 약정을 맺었다. 이는 많은 자유당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선거에서 자유당에 타격을 입혔다.[4] 1979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하원에서 3석을 잃었고, 마가렛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승리했다.[5]노동당 내에서는 극좌의 영향력 증대에 불편함을 느끼는 중도파들이 많았다. 극좌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를 탈퇴하고 핵무기 국가로서 일방적으로 군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1년 1월, "포 그룹"으로 알려진 노동당의 고위 의원 4명—빌 로저스, 셜리 윌리엄스, 로이 젠킨스, 데이비드 오언—은 라임하우스 선언을 발표하며 노동당에서 분당했다. 이는 3월 사회민주당(SDP)의 공식 출범으로 이어졌다.[6] 사회민주당의 첫 결정 중 하나는 초대 사회민주당 당수인 젠킨스와 스틸 사이에서 중재된 자유당과의 선거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7]
새로운 연합은 처음에 여론 조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8] 사회민주당과 자유당은 번갈아 의회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합의했고, 1981년부터 1982년 사이에 사회민주당은 워링턴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크로스비와 글래스고 힐헤드에서 승리했다.[9] 1983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5석을 추가로 얻었지만 사회민주당은 이전에 노동당에서 승계받았던 많은 의석을 잃었다.[10] 1983년 총선 이후 오웬이 젠킨스를 대신하여 사회민주당 대표가 되었다.[11] 이후 보궐선거에서 몇몇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민주당은 포츠머스 사우스와 그리니치에서, 자유당은 브레컨 앤드 래드너와 라이데일에서 승리했다.[12]
2. 2. 창당과 초기 (1988년–1992년)
1987년 총선에서 자유당과 사회민주당(SDP) 연합은 의석을 잃었다.[1] 이후, 데이비드 스틸 자유당 당수는 두 당의 합당을 제안했다.[2] 이미 여러 지역 조직은 사실상 통합된 상태였다.[3] SDP 내에서는 로이 젠킨스, 윌리엄 로저스, 셜리 윌리엄스, 찰스 케네디 의원이 합당을 지지했으나, 데이비드 오웬과 로지 바네스, 존 카트라이트 의원은 반대했다.[4] SDP 회원 투표 결과 57.4%가 합당에 찬성했고, 오웬은 당수직에서 사임했으며 밥 맥레넌이 그 뒤를 이었다.[5] 1987년 9월 자유당 회의에서 대의원들은 합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다.[6] 같은 달 공식 협상이 시작되었고, 12월에는 새 정당을 위한 헌법 초안이 마련되었다.[7] 1988년 1월, 자유당과 SDP는 각각 당 회의를 열어 합당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했고, 양당 모두 다수결로 합당을 승인했다.[8] 최종적으로 양당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통합이 확정되었다.[9] 통합에 반대한 이들은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별도의 정당을 결성했다.[10]1988년 3월 3일, 사회자유민주당이 공식 창당되었다.[11] 스틸과 맥레넌은 공동 임시 당수가 되었다.[12] 창당 당시 사회자유민주당은 19명의 국회의원, 3,500명의 지방 의원, 10만 명의 당원을 보유했다.[13] 초대 당수 선거에서 패디 애슈다운이 앨런 베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4] 애슈다운은 당을 급진적 개혁 세력으로 이끌고자 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자치권 부여, 비례대표제 도입, 상원의 선출직 전환, 환경 보호 강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15]

1988년 9월 회의에서 당의 약칭을 "민주당(the Democrats)"으로 정했고, 1989년 10월에는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으로 당명을 변경했다.[20] 또한, 자유의 새를 당의 로고로 채택했다.[16]
1989년 지방 선거에서 190석을 잃었고,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6.4%의 득표율로 녹색당에 밀려 3위에 그치는 등 초기 선거 결과는 좋지 않았다.[17] 이는 1950년대 이후 기존 제3당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18] 그러나 1990년 이스트본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후, 리블 밸리, 킨카딘 앤 디사이드 보궐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전망을 밝혔다.[19] 1991년 지방 선거에서는 520석을 순증했다.[22] 1992년 총선에서는 17.8%의 득표율로 20석의 의석을 확보했다.[23]
2. 3. 성장과 발전 (1992년–1999년)
1992년 영국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17.8%의 득표율로 하원에서 20석을 획득했다.[22]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자유민주당은 특히 지방 의회에서 지지 기반을 강화했다. 1994년 영국 지방선거에서는 보수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으며, 199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유럽 의원 2명을 배출했다.[22]1997년 영국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639명의 후보를 내세워 46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들은 잉글랜드 남서부, 런던 남서부, 스코틀랜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22]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총선에서 압승하여 연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지만, 블레어는 자유민주당과의 협력에 관심을 보였다. 1997년 7월, 블레어는 패디 애슈다운과 다른 자유민주당 간부들을 헌법 문제에 관한 위원회에 초청했다. 위원회는 12월에 투표 제도에 관한 독립 위원회를 설립했다. 1998년 10월에 발표된 보고서는 소선거구제에서 대안 투표 보충 제도로의 변경을 제안했다. 이는 자유민주당이 만족할 만한 선택지가 아니었고, 그들은 완전한 비례대표제를 원했지만, 애슈다운은 이를 "역사적인 진전"이라고 칭찬했다.[22] 많은 자유민주당 당원들은 애슈다운이 노동당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우려했고, 그는 이를 인식하고 1999년에 당수직에서 물러났다.[22]
2. 4. 찰스 케네디와 멘지스 캠벨 (1999년–2007년)
사이먼 휴즈 의원은 당수 선거에서 찰스 케네디에게 패했다.[22] 케네디는 당 대회에서 좌파 성향 당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당의 연방 집행부와 연방 정책 위원회 선출 투표에 모든 당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2] 2001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6석을 순증하여 총 52석을 확보했다.[23]
9·11 테러 이후,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했지만,[22] 2003년 이라크 침공에는 반대했다. 케네디는 런던에서 열린 대규모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22] 2003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약 3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22]
2004년, ''오렌지 북''이 출판되어 당내 사회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2] 2005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62석을 확보했다.[24] 그러나 케네디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인정한 후 사퇴 압력을 받았고, 2006년 1월에 사퇴했다.[25]
2006년 3월, 멘지스 캠벨이 케네디의 후임으로 당수가 되었다.[22] 2007년 5월 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거의 250석을 순감했다.[22] 같은 해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고 자유민주당/노동당 연정은 종식되었다.[22] 캠벨은 2007년 10월 사임했으며, 빈스 케이블이 임시 당수가 되었다.[26]
2. 5. 닉 클레그와 보수당과의 연정 (2007년–2015년)
2010년 5월 6일 총선 결과, 자유민주당은 57석을 얻어 보수당과 노동당에 이어 원내 제3당에 머물렀다. 총선 결과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없어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되었다. 306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된 보수당은 자유민주당과 연정 수립을 논의했고, 자유민주당이 보수당 정부에 참여하면서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는 총리에, 닉 클레그 자유민주당 당수는 부총리에 임명되었다.2. 6. 브렉시트 반대와 쇠퇴 (2015년–2019년)
주어진 원본 소스에 "브렉시트 반대와 쇠퇴 (2015년-2019년)"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어, 이전 출력은 정확합니다. 변경할 내용이 없습니다.2. 7. 에드 데이비 체제와 부활 (2020년–현재)
2019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조 스윈슨 대표 체제 하에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의석수는 오히려 감소했다.[114] 스윈슨 대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에드 데이비가 대표 권한 대행을 맡게 되었다.[116] 2020년, 데이비는 정식 당 대표로 선출되어 당을 이끌게 되었다.[117]에드 데이비 체제 하에서 자유민주당은 사회자유주의적 가치를 강조하며, 혼합경제를 지지하고 때로는 민영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101] 또한, 핵무기 문제와 같은 국방 정책에 있어서도 내부적인 논의를 거쳐 당의 입장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105]
데이비 대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의 EU 재가입을 주장하며, 유럽 연합군 창설에는 반대하는 등 유럽 문제에 대한 당의 전통적인 친유럽적 입장을 이어가고 있다.[103][115]
3. 이념 및 정책
자유민주당의 이념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모두 바탕으로 한다.[100] 이 당은 주로 사회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재분배를 지지하지만 국가 권력 강화에는 회의적이며, 평등과 자유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투자와 누진세를 지지하지만, 시민적 자유와 덜 중앙집중화된 경제도 촉진한다.[101] 이는 유럽 다른 지역의 많은 자유주의 정당들이 고전적 자유주의에 지배되는 것과 구별된다.[102][103] 반면 자유민주당은 혼합경제를 지지하며 때때로 민영화에 반대하기도 했다.[101]
이 당은 중도와 중도좌파를 아우르며, 시대에 따라 각 측면을 강조해왔다.[103] 대중은 전통적으로 이 당을 중도좌파로 여겨왔지만,[107] 캐머런-클레그 연정 기간에는 중도로 인식되었다.[108]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 위치하며, 노동당에 더 가까운 경향을 보였다.[109] 자유민주당 당원들 사이에는 상당한 이념적 다양성이 있으며,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100]
자유민주당에 대한 중요한 이념적 영향은 레오나르드 홉하우스이며, 이 당의 강령과 앤서니 크로슬랜드가 ''사회주의의 미래''에서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형태 사이에는 상당한 중복이 있다.[101][110] 이 당의 평등주의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기반한다. 이 당은 정치 후보자 선출 과정을 포함하여 차별적 우대조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여성 전용 후보 명단 도입에 대해 자주 논의했지만, 시행하지는 않았다.[110]
자유민주당은 잉글랜드의 지역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헌법 개혁을 지지한다.[111] 토니 블레어 정부 하의 노동당이 시행한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 대한 권한 이양을 지지했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꾸준히 LGBT 권리와 마약 개혁을 지지해왔다.[113] 이 당은 국제주의적이고 친유럽적 성향이다. 오랫동안 영국의 유로화 채택을 지지해왔지만,[114] 유럽 연합군 창설에는 반대했다.[103][115] 2016년 영국 유럽 연합 탈퇴 국민투표 전후로 영국의 유럽 연합 잔류를 옹호해왔다.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지지하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했으나, 유엔의 지지가 없다는 이유로 2003년 이라크 침공에는 반대했다.[109] 핵무기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 분열을 겪기도 했다.[105]
이 당에는 사회자유주의 포럼(SLF), 자유주의 개혁(LR), "오렌지 북 지지자들", 베버리지 그룹등 다양한 자유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여러 파벌이 존재한다.[113][116]
3. 1. 주요 정책
자유민주당은 영국의 제도 개혁을 지지하며, 여기에는 국가 권력의 분권화, 의회 개혁 및 선거 제도 개혁이 포함된다.[119] 1993년 전당대회에서 고정 임기 의회 도입 계획을 제시했으며,[119] 이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의 연립 정부에서 실현되었다. 또한 1993년에는 정당에 대한 국가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119]자유민주당은 오랫동안 당 강령에 비례대표제를 포함시켜 왔다.[119] ''뉴 스테이츠맨''에 따르면, 이는 "대중의 마음속에 자유민주당과 연결되는 유일한 정책"이다.[119] 자유민주당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대한 분권 또는 자치 요구는 1990년대 후반 블레어 노동당 정부에 의해 제정되었다. 1993년 전당대회에서는 영국 헌법에 권리장전을 도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119] 2001년 당 강령에는 투표 연령을 18세에서 16세로 낮추겠다는 공약이 포함되었다.[119]
1999년 조사에 따르면 당원의 3분의 2가 군주제 유지를 지지했다. 1993년 전당대회에서는 왕실 특권을 없애는 것을 지지했으며,[119] 2000년 전당대회에서는 군주를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통치자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2000년 전당대회에서는 왕위 계승자가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1701년 왕위 계승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119] 당의 2001년 강령에는 잉글랜드 교회의 국교 지위 철폐를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당의 세속주의 지지는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완전한 정교분리를 지지하는 당론을 가지고 있다.[121]
노동당과 보수당에 이어 제3당으로서 양대 정당에 근접하는 득표를 얻기도 하지만,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의석은 신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창기에는 중도 정당으로서 양대 정당과 동등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1997년 총선거에서는 "보수당을 대체할 비사회주의 세력의 결집"을 공약으로 노동당에 우호적인 대응을 취했고, 일부 선거구에서는 양당 지지자들이 승산이 있는 당의 후보에게 표를 집중시키는 "전략 투표"를 실시했다.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 경제를 존중하지만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등 정치적 입장은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사회자유주의를 취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일찍이 반대를 표명하여 노동당 일부를 끌어들여 여론을 양분하는 논쟁으로 발전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항상 제3당으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례대표제 도입을 당의 강령으로 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지지가 많으며,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취한다. 동성결혼에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며, 실제로 동성애자 의원도 있다. 이민 유입 문제에도 매우 관대하다. 복지 정책에도 적극적이지만, 한때 연립 정부를 구성했던 보수당이 재정 압축을 목표로 예산 삭감에 나서면서 기존 지지층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유럽의 자유주의 정당 대부분이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유 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것과 달리 비교적 혼합경제를 지지하며 민영화에 반대하기도 한다.[247] 정책적으로는 노동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친유럽주의 정당이기도 하며, 2019년 영국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노동당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EU 잔류를 주장했다. 오랫동안 주장해 온 선거 제도 개혁에서는 비례 대표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4. 조직
1999년 회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가 자유 시장과 개인 책임을 지지했지만, 경제 문제 해결에 있어 민간 기업이 최선의 방법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217] 대부분은 추가적인 민영화 또는 국유화에 반대했지만, 세금 인상과 정부 지출 증가에는 압도적으로 찬성했다.[217] 또한 회원들은 노동 조합에 대한 추가적인 규제에도 크게 반대했다.[217]
자유민주당의 정책은 일반적으로 사회 복지 지출에 호의적이었다.[217] 2000년대에 이 당은 보건, 교육 및 공공 서비스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217] 1995년, 이 당은 5세 미만 아동을 위한 유치원 자리 포함, 교육에 20억파운드를 투입하는 계획을 발표했으며,[217] 2005년 공약에는 학교 학급 규모를 줄이기 위해 15억파운드를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다.[217] 2000년대에 이 당은 또한 대학생들의 수업료를 폐지할 것을 약속했고,[217] 2010년 총선을 앞두고 클레그는 자유민주당 정부 하에서 이것이 6년에 걸쳐 달성될 것이라고 약속했다.[217] 2004년에는 7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주당 25GBP의 국민연금을 추가하겠다고 약속했다.[217] 2003년에는 학교에 대한 통제권을 지방 의회로 이양하는 계획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217]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반에 이 당은 교육 지출 증가는 세금 인상을 통해 충당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연봉 10만파운드가 넘는 사람들에게 50%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217] 그리고 기본 소득세율을 1펜스 인상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17] 2003년 이 당의 당대회에서는 지방세를 대체할 1파운드당 3.5펜스의 지방 소득세 계획을 승인했는데, 이 당은 이것이 인구의 70%가 세금을 덜 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217] 2006년, 이 당은 최고 소득자에 대한 50% 세금 계획을 포기했고,[217] 소득세를 삭감하지만 항공 여행세를 인상하고 탄소세를 도입하여 재정 균형을 맞추는 계획을 제시했다.[217]
클레그 하에서 이 당은 세금 인상보다는 세금 감면을 강조했다. 이 당은 기본 소득세율을 4펜스 인하하는 것은 정부 부처에서 200억파운드의 예산 절감을 통해 허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조치는 당의 좌파에 의해 반대되었다.[217] 2008년 경제 불황 속에서 클레그는 세금 공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수 감소 및 도로 건설 계획 폐지와 같은 조치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국가 지출을 200억파운드 삭감할 것을 촉구했다.[217] 2010년 공약에서 이 당은 연 소득 1만파운드 미만인 사람들에 대한 소득세를 폐지할 것을 약속했는데,[217] 이것은 캐머런 연립 정부를 통해 도입되었다.[217] 또한 2010년에 이 당은 4년 동안 국가 재정 적자를 절반으로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217] 또한 부가가치세 인상에 반대한다고 명시했지만, 연립 정부에 참여했을 때 부가가치세를 20%로 인상했다.[217]
역대 당 의장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폴 파딩 | 1994–1999 |
돈 데이비슨 | 2000–2003 |
스탠 콜린스 | 2004–2006 |
브라이언 오렐 | 2007–2009 |
조나단 데이비스 | 2010–2011 |
피터 엘리스 | 2012–2014 |
스티브 자비스 | 2015–2016 |
리즈 레프먼 | 2017–2018 |
타히르 마헤르 | 2019 |
제럴드 버논-잭슨 | 2020 |
앨리슨 라우스 | 2021–2024 |
루카스 노스 | 2024–현재 |
5. 지지 기반
자유민주당은 자유당으로부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 강력한 기반을 물려받았다.[122] 2010년, 쿡은 당의 안전 의석들이 "매우 동질적인 패턴에 맞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농촌, 중산층 교외 지역 및 도심 지역에 산재해 있다고 지적했다.[123] 당의 선거 전략의 핵심 특징은 지역 사회 정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124] 조사 결과를 검토한 Whiteley 등은 특정 지역의 풀뿌리 당 활동의 강도가 그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이 획득한 득표율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125]
1997년 영국 선거 연구 조사에 따르면 평균 자유민주당 유권자의 연령은 47세였으며, 18세에서 45세 사이의 유권자가 52%를 차지했다.[126] 당시 자유민주당 유권자 중 16%가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127] 노동 계급 또는 블루칼라 노동자는 자유민주당 유권자의 23%를 차지했는데, 이는 당원들 사이에서 발견된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128] 이 조사에 따르면 자유민주당 유권자들은 당원들과 많은 태도를 공유했는데, 이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비례대표제를 원했고 63%가 유럽 연합 회원국 지지 의사를 밝혔다.[129] 유권자들과 당원들이 의견이 달랐던 부분은 해외 원조 문제였다. 당원의 절반 이상이 영국의 해외 원조 예산을 증액하기를 원했지만, 자유민주당 유권자 중 3분의 1만 동의했다.[130]
1990년대 투표 패턴을 분석한 Whiteley 등은 고학력자일수록 자유민주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평균보다 높고, 고령자일수록 자유민주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평균보다 낮으며, 계급, 성별 또는 민족성은 해당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131]
입소스(Ipsos)는 2010년과 2015년 선거에 대한 유권자 패턴을 연구했다. 2010년 그들의 지지는 연령대가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었는데, 조사된 모든 연령대에서 5%에서 10%의 지지를 받았고, 35세에서 44세 사이에서 정점을 찍었다. 2015년 선거에서 모든 연령대에 걸친 그들의 득표율은 감소했지만,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132]
기본적인 방향성은 두 대당인 노동당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며, 지지층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노동당이 노동조합 등 조직화된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자민당은 부유층과 무당파층 등 풀뿌리 지지층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두 대당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득표를 늘려왔다.
"대학 수업료 무료화"를 내세웠던 탓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었지만, 보수당과의 연립 정부 하에서 수업료 인상에 합의했기 때문에 강하게 비판받고 지지율 하락을 초래하고 있다.
6. 역대 선거 결과
2010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57석을 얻어 보수당, 노동당에 이어 원내 제3당을 유지했다. 보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에 참여했으나, 2015년 총선에서는 8석으로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
2017년 총선에서는 12석으로 의석을 일부 회복했으나, 2019년 총선에서는 다시 11석으로 감소했다.
6. 1. 총선
총선 이전, 자유민주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집권여당인 노동당과 지지율 2위 자리를 경쟁하고, 한때는 자유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될 수 있다는 조사도 있었으나 5월 6일 총선 결과, 57석에 그치며 보수당과 노동당에 밀려 원내 제3당에 머물렀다.[235]총선 결과,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되었다. 총선에서 306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1당이 된 보수당은 자유민주당과 연정 수립 논의를 한 끝에 자유민주당이 보수당 정부에 참여하게 되어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보수당 당수인 데이비드 캐머런은 총리에 임명되었고, 자유민주당 당수인 닉 클레그는 부총리에 내정되었다.[235]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캐머런 내각에서 보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2015년 총선에서는 지지율 하락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의석 대부분을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빼앗겨 8석에 그쳤다. 전 당수인 찰스 케네디와 여러 각료들도 의석을 잃었다. 의석 수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을 크게 밑돌며, 북아일랜드 지역 정당인 민주연합당과 동률로 제4당이 되었다. 보수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함에 따라 자유민주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선거 후, 닉 클레그는 당수직을 사임했다.[235]
2017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은 유럽 단일 시장 잔류와 EU 탈퇴 협정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선거 결과, 득표율은 0.5% 하락하여 7.4%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의석은 4석 증가하여 12석이 되었다.[237] 보수당은 다시 과반수를 넘지 못했지만, 자유민주당은 연정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고 즉시 발표했다.[238][239]
2019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호조를 보였으며, 어떤 여론 조사에서는 10월 28일 기준 지지율 20%(노동당과 4% 차이)를 보였다. 탈퇴 중단을 호소하며 11석을 얻었지만, 조 스윈슨 당수는 낙선하여 당수직에서 사퇴했다.[243]
2024년 총선에서는 득표율 12.2% (전회 대비 +0.7%)에도 불구하고, 노동당과의 실질적인 분담(전략 투표), 보수당 현직 의원 지역구에 대한 집중적인 선거 운동 등이 효과를 거두어 61석 증가(해산 시 대비 57석 증가)한 72석을 획득했다. 자유민주당으로서는 최다 기록을 경신했으며, 하원 제3당으로 복귀했고, 현직 장관 지역구에서도 여러 의석을 빼앗았다.[246]
6. 2. 지방 선거
연도 | 결과 |
---|---|
2011년 | 큰 타격을 입음 |
2012년 | 300명 이상의 의원 감소, 지방 의원 수 3,000명 아래로 감소 |
2013년 | 100석 이상 감소 |
2014년 | 307석 감소 |
2015년 | 400석 이상 감소 |
6. 3. 유럽 의회 선거
자유민주당은 친유럽(pro-European) 정당으로서 유럽 의회 선거에서 부진한 경향을 보였다.[191] 2004년 지방 선거에서는 2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191] 동시에 치러진 2004년 영국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14.9%의 득표율에 그쳐 고전했다.[192] 2009년 유럽 의회 선거 결과도 비슷했다. 당시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28%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같은 날 치러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13.7%에 그쳤다. 하지만 2009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이스트 미들랜즈 지역에서 영국독립당으로부터 한 석을 획득하여 의회 대표 수를 11명으로 늘렸다.[193] 2014년에는 10석을 잃어 의원 수가 1명으로 줄었다.[194] "브렉시트는 헛소리다(Bollocks to Brexit)"라는 슬로건으로 잔류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펼친 결과, 2019년 선거에서 19.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16석을 획득하는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195]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 의회에서 자유민주당은 유럽 통합(European integration) 강화를 지지하는 유럽 자유민주동맹(ALDE)(정당 그룹)에 속해 있었다.[196] 7년 반 동안 이 그룹의 대표는 영국 남서부(South West England) 지역 유럽 의회 의원인 그레이엄 왓슨이었는데, 그는 1994년 옛 서머싯과 노스 데번(Somerset and North Devon) 선거구에서 승리하여 유럽 의회에 처음으로 선출된 자유민주당 의원이기도 했다.[197] 2019년 유럽 의회 선거 이후, 자유민주당은 ALDE 그룹의 후신인 르네 그룹(Renew Europe)에 합류했다.
자유민주당은 1994년 이전에는 유럽 의회에 대표를 두지 않았다.
6. 4.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
1999년에 실시된 제1회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은 총 17석을 획득했다.[199] 이후 스코틀랜드 노동당과 연정을 구성했다.[200]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 당수인 짐 월러스(Jim Wallace)는 새로운 스코틀랜드 행정부의 부수반이 되었으며, 2005년 당수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월러스는 2000년 도널드 디워(Donald Dewar)의 사망과 2001년 헨리 맥클리시(Henry McLeish)의 사임 이후 잠시 동안 권한 대행 수반직을 역임했다.[201]2003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은 다시 17석을 획득했고, 스코틀랜드 노동당과 연정을 구성했다.[202][203] 2005년 니콜 스티븐(Nicol Stephen)이 당수로 선출되었다.[204] 스티븐은 2년 동안 부수반을 역임했다. 2007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단 한 석만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정부에서 탈퇴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선거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등장하여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니콜 스티븐(Nicol Stephen)은 이듬해 당수직에서 사임했다.[205]
타비시 스콧(Tavish Scott)이 2008년 당수로 선출되었다.[206] 스콧은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이 5석으로 감소한 2011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참담한" 결과를 거둔 후 사임했다. 스콧은 2010년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로 한 결정으로 스코틀랜드에서 당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207] 또한 연정의 긴축 프로그램을 비난했다.[207] 2011년 당수가 된 윌리 레니(Willie Rennie)도 보수당-자유민주당 연정의 인기 부족을 비난했다.[208]
스코틀랜드 자유민주당은 윌리 레니 당수 체제하에서 두 번의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이 당은 2016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다시 총 5석을 획득했다.[209] 2021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사상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며 4석이라는 사상 최저 의석 수를 기록했다.[210] 윌리 레니는 당수직에서 사임했고 2021년 알렉스 콜-해밀턴(Alex Cole-Hamilton)이 그 뒤를 이었다.[211]
선거 | 지역구 | 비례대표 | 총 의석 수 | 의석 점유율 (%) | ||
---|---|---|---|---|---|---|
득표율 (%) | 의석 수 | 득표율 (%) | 의석 수 | |||
1999년 | 14.2 | 12 | 12.4 | 5 | 17 | 13.2 |
2003년 | 15.4 | 13 | 11.8 | 4 | 17 | 13.2 |
2007년 | 16.2 | 11 | 11.3 | 5 | 16 | 12.6 |
2011년 | 7.9 | 2 | 5.2 | 3 | 5 | 3.9 |
2016년 | 7.8 | 4 | 5.2 | 1 | 5 | 3.9 |
2021년 | 6.9 | 4 | 5.1 | 0 | 4 | 3.1 |
6. 5. 웨일스 의회(세네드) 선거

웨일스 의회(현재 세네드(Senedd))가 처음으로 구성된 1999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6석을 차지했다.[212] 웨일스 노동당(Welsh Labour)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2000년 10월, 일련의 접전 끝에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은 연정을 구성했으며, 의회 자유민주당 대표인 마이클 저먼이 부총리가 되었다.[212] 이 협정은 2003년 선거까지 지속되었고, 노동당은 단독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의석을 확보했다.[213]
자유민주당은 웨일스 의회 선거 초반 4번의 선거에서 꾸준히 지지를 받아, 처음 세 번의 선거에서 6명의 의원을 배출하고 2011년 선거에서는 5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노동당, 보수당, 플라이드 컴리(Plaid Cymru)에 이어 웨일스 제4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2016년에는 단 1석만을 얻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웨일스 자유민주당(Welsh Liberal Democrats) 대표는 키스티 윌리엄스(Kirsty Williams)였는데, 그녀는 브레컨 앤 래드너셔 지역구 의원(현재 세네드 의원(Member of the Senedd) (MS))이었으며, 웨일스 의회 최초의 여성 당 대표였다.[214]
선거 | 지역구 | 비례대표 | 총합 | |||
---|---|---|---|---|---|---|
득표율 | 의석 수 | 득표율 | 의석 수 | 의석 수 | 득표율 | |
1999년 | 14% | 3 | 13% | 3 | 6 | 10% |
2003년 | 14% | 3 | 13% | 3 | 6 | 10% |
2007년 | 15% | 3 | 12% | 3 | 6 | 10% |
2011년 | 11% | 1 | 8% | 4 | 5 | 8% |
2016년 | 8% | 1 | 6% | 0 | 1 | 2% |
2021년 | 5% | 0 | 4% | 1 | 1 | 2% |
7. 역대 지도부
자유민주당의 지도부는 당수, 부대표, 상원 원내대표, 그리고 당 대표로 구성된다.
당수는 당의 최고 지도자이다. 1988년 초대 당수 패디 애슈다운을 시작으로, 1999년 찰스 케네디, 2006년 멘지스 캠벨, 2007년 닉 클레그, 2015년 팀 패런, 2017년 빈스 케이블, 2019년 조 스윈슨, 2020년 에드 데이비가 선출되었다.[1]
부대표는 당수를 보좌하는 역할이다. 러셀 존스턴, 앨런 베이스, 멘지스 캠벨, 빈스 케이블, 사이먼 휴스, 멀컴 브루스, 조 스윈슨, 에드 데이비, 데이지 쿠퍼가 역임했다.[1]
상원 원내대표는 1988년에 시어 (자유당)와 다이아몬드 (사민당)가 선출되었다. 이후, 젠킨스, 로저스, 윌리엄스, 맥널리, 월리스, 뉴비가 역임했다.[1]
당 대표는 위글즈워스, 케네디, 맥레넌, 매독, 돌라키아, 휴스, 스콧, 패런, 브린턴, 팩이 역임했다.[1]
7. 1. 당수
(1941–2018)(1959–2015)
(1941–)

(1967–)

(1970–)

(1943–)

(1980–)

(19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