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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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한 당국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렸으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했다. 회담 결과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으며, 남북 관계 개선, 이산가족 문제 해결, 경제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이 담겼다. 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등 민간 교류 사업이 진행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 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회담 개최 발표 전에 현대그룹의 대북송금 의혹이 제기되어 대북송금 특검이 진행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약 5억 달러를 지불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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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에 발생한 태풍 프라피룬은 한반도를 거쳐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면서 서해를 따라 북상하여 대한민국에 강풍 피해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일으켰고 주변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 햇볕정책 - 정주영
정주영은 현대그룹을 창업하여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후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을 세워 현대그룹을 한국 최대 재벌 기업으로 키웠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울 올림픽 유치, 대북 사업 추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햇볕정책 - 개성공업지구
개성공업지구는 남북 경제협력 사업의 상징으로 시작되어 북한 경제에 기여했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운영 중단과 폐쇄를 반복하다 2016년 최종 폐쇄된, 성공과 리스크, 논쟁을 동시에 가진 복잡한 사업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 |
---|---|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정보 | |
![]() | |
장소 | 평양시 |
국가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참석자 |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 |
날짜 | 2000년 6월 13일 ~ 6월 15일 |
다음 정상회담 | 2007년 남북정상회담 |
한반도 평화 과정 | |
한국전쟁 휴전협정 | 1953년 7월 27일 |
7·4 남북 공동 성명 | 1972년 7월 4일 |
남북 유엔 동시가입 | 1991년 8월 8일 |
남북 기본합의서 | 1991년 12월 13일 |
2000년 남북정상회담 | 2000년 6월 13일-15일 |
6·15 남북 공동선언 | 2000년 6월 15일 |
2007년 남북정상회담 | 2007년 10월 2일-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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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김대중 |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햇볕정책 |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기타 | |
해상 경계선 | 서해 북방한계선 관련 논의가 있었다. |
교황 방문 | 북한은 교황 방문에 동의했다. |
2. 역사적 배경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5][6] 김대중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와 생애 전반에 대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00년 6월 13일 화요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군사분계선을 피해 항로를 변경해야 했기에 비행 시간은 160km 거리에 불과했지만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6]
1994년 7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회담 17일 전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사망으로 취소되었다.[5][6] 일본 관리들은 회담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도 미사일과 같은 민감한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는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미래 회담의 기회를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7]
김정일은 정권 유지에 대한 압박감에 미국을 의식했고, 미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미국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의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고 말했다.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전해준 서한을 받고 빌 클린턴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고 하며, 올브라이트가 방북할 때 아리랑 공연 등의 잔치를 벌였다.[16]
3. 회담 진행 과정 (2000년 6월 13일 ~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초 예상을 깨고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했다.[8] 군악대가 연주되고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환영하는 등 이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다.[9] 두 정상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했고,[10] 같은 리무진을 타고 평양 시내로 이동했다. 약 60만 명의 평양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분홍색 종이 꽃다발을 흔들며 환영했다.[9]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여 학생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학생들은 가야금 등 전통 악기로 대한민국 손님들을 위한 애국적인 곡을 연주했다.[11]
50명의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동행했으나,[9] 외국 언론인들은 참석이 제한되었다. 중국과 러시아 통신사만이 참석했으며,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CNN도 입국이 거부되었다.[11] 일부 대한민국 언론인들은 평양 시민과의 개인적인 접촉이 금지되기도 했다.[11]
3. 1. 의장대 사열 논란
남북은 사전 협의를 통해 1994년 정상회담 실무접촉 합의사항대로 이행하기로 하고, 21발의 예포 발사, 국가 연주, 의장대 사열 등의 환영 행사를 생략하기로 합의했다.[17]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인민군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를 준비하여,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의장대 사열식과 분열식 등 의장 행사를 진행했다. 이는 한국의 통일부와 외교통상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18]
의장대는 양국의 국기를 들고 있는 군대로서, 국가 간에 국가 원수나 장관 등에게 최고의 예우를 제공할 때 의장대 사열식을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묵시적 국가승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북한 의장대 사열식에 양국 국기가 없었다고 보도되었다.
상대국 국가 원수의 국빈 방문도 묵시적 국가 승인으로 인정된다. 해외 정상 방문은 국빈 방문(State Visit), 공식 방문(Official Visit), 공식 실무 방문(Official Working Visit), 실무 방문(Working Visit), 사적 방문(Private Visit) 등으로 구분된다. 국빈 방문과 공식 방문은 의장대 사열을 하는 것이 국제 관행이며, 보통 의장대 사열식을 하면 국빈 방문 대접을 받았다고 인정된다.[19]
국가 승인은 국가 원수가 단독으로 결정하고 시행하며, 한 번 국가 승인이 되면 철회나 취소가 불가능하고 후임 국가 원수도 이를 번복할 수 없다. 남북한은 해방 이후 상대방을 괴뢰정부, 반국가단체라고 표현하며, 자신만이 유일한 정식 국가의 합법 정부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의장대 사열식을 단 한 번이라도 하면, 괴뢰 정부라는 표현을 일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의장대 사열식을 하면, 국가 대 반국가 단체의 관계가 아니라, 미수교 국가 대 미수교 국가가 된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의장대 사열식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판례는 북한을 계속 반국가단체로 보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반국가 단체를 폐기하고 정식 국가를 인정하는 공식적인 외교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1993년 7월 29일 92헌바48 판결에서 "북한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대남 적화 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 자유 민주 체제의 전복을 획책하고 있는 반국가 단체라는 성격도 함께 갖고 있다"고 판시하여 정식 국가라는 점을 부인했는데, 2018년 현재에도 그 판례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대법원도 같은 입장이다.
국회도 국가보안법이 주적인 정식 국가가 아니라 반국가 단체와 관련한 처벌만을 규정하고 있는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정식 국가를 인정한 점을 전혀 반영하여 개정하지 않고 있다. 각종 형사 판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피고인은 북한이 반국가 단체가 아니어서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2018년 현재에도 그러한 주장은 일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4. 회담 결과 및 6.15 남북 공동선언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되었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16]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었다. 김대중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와 생애 전반에 대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었으며, 회담 결과 마지막 날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남북 간 회담은 계속되었고, 북한은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협상했다. 김정일의 서울 방문이 예상되었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제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7월부터 12월까지 평양, 서울, 제주도에서 남북 장관급 및 군사 실무급 회담이 네 차례 열렸다. 여기에는 남북 적십자 회담(세 차례)과 남북 경제협력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실무 접촉도 포함되어 2007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남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상호 존중과 신뢰 구축
- 군사적 긴장 완화 및 평양에서 국방장관 회담 개최
- 현재의 휴전협정을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 수립
- 해주 특별 평화 지대 조성[1]
- 역사, 언어, 교육, 기술, 문화, 스포츠, 사회 분야 협력 발전
- 인도적 협력과 이산가족 상봉 확대
- 국제 무대에서 국가 이익과 해외 거주 한국인의 이익을 위한 협력 강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북한에 약 5억달러를 지불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2] 이 지불은 당시 비밀에 부쳐졌고 3년 후에야 밝혀져 햇볕정책 특검이라는 큰 정치 스캔들을 일으켰다. 나중에 대한민국이 북한 정부에 참석 대가로 2억달러를 비밀리에 지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6명의 한국 기업인과 관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12]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 전에 현대그룹에서 북한에 4.5억달러를 송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2003년 대북송금특검이 도입돼 수사를 했다.[15]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에 의한 특검팀 수사결과 "현대그룹이 북한에 송금한 돈의 액수는 총 5억달러이며 이 중 5000만달러는 현물로 보내졌다"고 발표하고 "5억달러 중에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건네기로 약속한 정책 자금 1억달러가 포함돼 있다"라고 밝혔다.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달러는 2000년 6월 9일 북한의 대성은행의 계좌 (중국 마카오 지점)으로 송금되었으며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달한 2.5억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의 김정일 비밀계좌로 송금되었다고 진술된 기록이 공개되었다.
5. 대북송금 사건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에 의한 특검팀 수사 결과, 현대그룹이 북한에 총 5억달러를 송금했으며, 이 중 5000만달러는 현물로 보내졌다고 발표되었다. 특검팀은 또한 5억 달러 중에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건네기로 약속한 정책 자금 1억달러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15]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달러는 2000년 6월 9일 북한 대성은행 계좌 (중국 마카오 지점)로 송금되었으며,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달한 2.5억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의 김정일 비밀계좌로 송금되었다는 진술 기록이 공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북한에 약 5억달러를 지불했다는 사실이 3년 후 밝혀져 햇볕정책 특검이라는 큰 정치 스캔들을 일으켰다.[12] 이와 관련하여 6명의 한국 기업인과 관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12]
6. 회담 이후 경과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15]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되었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15]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이 예견됐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15]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의장대 사열식을 열어 주었다.[19]
제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7월부터 12월까지 평양, 서울, 제주도에서 남북 장관급 및 군사 실무급 회담이 네 차례 열렸다. 여기에는 남북 적십자 회담(세 차례)과 남북 경제협력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실무 접촉도 포함되어 2007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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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ritime boundary between North & South Korea in the Yellow (West)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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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and South Korean leaders m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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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reclaims the streets of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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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convicts six over sum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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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과업의 출발점으로서 2000년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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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세계 10대뉴스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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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특검 및 정몽헌회장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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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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