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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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10 만세 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를 기해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다. 순종의 장례 행렬에 맞춰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했다. 이 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사회주의 세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6·10 만세 운동은 이후 민족 협력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0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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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 운동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6·10 만세 운동 |
한글 표기 | 6·10 만세운동 |
한자 표기 | 六十萬歲運動 |
로마자 표기 | Yuk-Sip Manse Undong |
일본어 표기 | 6・10万歳運動 |
운동 배경 | |
발생 시기 | 1926년 6월 10일 |
주요 장소 |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
원인 | 순종의 사망 3·1 운동의 영향 일제의 식민 지배 |
목표 | 한국의 독립 국제적인 지지 확보 |
운동 방식 | |
방법 | 비폭력 저항 |
주요 활동 | 동맹휴학 시위 파업 |
참여 세력 | |
학생 | 중앙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중동학교 경성제국대학교 |
주요 단체 | 조선공산당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종교계 | 천도교 |
주요 인물 | |
학생 | 이병립 이현상 |
독립운동가 | 권동진 권오설 김단야 |
결과 및 영향 | |
결과 | 시위 실패 및 진압 |
영향 | 좌우합작운동에 영향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줌 제2차 조선공산당 해체 |
관련 정보 | |
주최 측 | 한국 독립운동가 |
진압 측 | 조선총독부 |
체포 인원 | 약 200명 |
시위 참가자 | 수백 명 |
진압 병력 | 최소 7,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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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된 이후, 조선에서는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1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정책을 통해 조선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 했으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어려움을 겪었고, 좌우 정치 세력 간의 분열이 심화되었다.[1][3][4]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면서, 3·1 운동과 유사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 1. 일제의 경계 강화
일본 제국은 3·1 운동의 경험을 통해 대규모 시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10 만세 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경성부(서울)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과 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켜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인들을 위협했다.[1]2. 2. 독립운동 세력의 준비
3·1 운동 이후 일본 제국의 감시가 강화되었지만,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1926년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한번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일본은 경성부에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키는 등 경계를 강화했다.[1]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은 순종의 국장이 시작되는 6월 10일에 시위를 계획했다. 학생들의 활동은 기존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감지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하고 시위를 준비할 수 있었다.[1]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전신 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다양한 학생 단체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했다.[5] 이들은 6월 8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깃발을 준비하고, 신문 '시대일보|한국 한자음=時代日報한국어' 인쇄기를 이용하여 1만 부의 선언문을 인쇄했다.[1]
조선공산당 (2차),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했다. 주요 인물로는 2차 조선공산당의 강달영,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영식, 이민재, 연희전문학교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현상,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이 있었다.
3. 전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행렬이 창덕궁에서 홍릉으로 향했다. 오전 8시 30분경 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3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조선독립만세|한국어)를 외치며 전단을 배포했다. 같은 날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1]
일본 경찰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여, 서울에서 약 210명, 한반도 전역에서 총 1,00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고, 약 53명이 투옥되었다.[1]
이 시위는 서울에 국한되었지만,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청주, 울산, 군산, 평양, 공주, 전주 등지의 학생들이 서울 시위대와 연대하여 등교를 거부했다.[1]
3. 1. 시위의 확산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 2만 4000여 명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배포했고, 많은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가 확대되었다.[1] 격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1]이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장례 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약 300명의 고등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조선독립만세|한국어)를 외치며 전단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여러 지점에서 더 많은 학생들이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1]
군중들이 시위에 동참했지만, 일본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서울에서 약 21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고, 한반도 전역에서 총 1,000명이 체포되었다. 약 53명이 투옥되었다.[1]
이 시위는 주로 서울에 국한되었지만, 소식은 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청주, 울산, 군산, 평양, 공주, 전주 등 한반도 전역의 학생들은 서울에서의 시위대와 연대하여 등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3. 2. 일제의 탄압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행렬이 서울 창덕궁에서 홍릉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오전 8시 30분경 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300여 명의 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전단을 배포했고, 같은 날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1]일본 경찰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에서 약 210명, 한반도 전역에서 총 1,00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고, 약 53명이 투옥되었다.[1]
이 시위는 주로 서울에서 일어났지만,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청주, 울산, 군산, 평양, 공주, 전주 등지의 학생들은 서울 시위대와 연대하여 등교를 거부했다.[1]
4. 결과 및 영향
체포는 6월에서 7월까지 계속되었다.[6]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KPG)가 시위 진행 상황을 주시했으며, 시위 참가자 김단야를 초청하여 약 150명의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도록 했다.[6]
4. 1. 조선공산당의 와해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6] 체포는 6월을 거쳐 7월까지 계속되었다.[6]4. 2. 민족 협력의 가능성 제시
6·10 만세 운동으로 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8] 또한, 1927년 신간회, 근우회, 신정회, 연정회 등의 조선인 사회단체 조직과 1929년 11월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비록 실패했지만, 학생, 사회주의, 천도교 등 다양한 세력이 민족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1927년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져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 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4. 3.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영향
6·10 만세 운동은 1927년 신간회, 근우회, 신정회, 연정회 등 조선인 사회단체 조직과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8] 이 운동 이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5]4. 4. 송진우, 정인보 등의 활동
송진우는 정인보와 함께 순종의 유언을 위조하여 만세 운동을 확산시키려 했으나, 이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8]
5. 기념
2020년 12월 8일, 6.10 만세 운동 기념일이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5][1] 2023년에는 순종의 장례식장이 있던 자리이자 현재 훈련원공원이 있는 곳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5]
참조
[1]
논문
6·10만세운동 (六十萬歲運動)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22
[2]
웹사이트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and Interconnected East Asia: The Incremental Unfolding of a Revolution
https://apjjf.org/20[...]
2024-06-16
[3]
논문
3·1운동 (三一運動)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4-29
[4]
웹사이트
당시 정세
http://www.610manse.[...]
2024-06-22
[5]
웹사이트
"대한민국 만세 소리 다시 일어나니"…6·10만세운동 기념식
https://www.korea.kr[...]
2024-06-22
[6]
웹사이트
‘6·10만세’ 학생이 했다? 일제의 취조 편의주의 결과
https://h21.hani.co.[...]
2024-06-22
[7]
웹인용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
http://www.doopedia.[...]
2018-06-17
[8]
웹인용
고하 송진우 연보 제5장
http://www.goha.or.k[...]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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