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N 뉴스 플러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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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NN 뉴스 플러스1은 1988년 4월 4일부터 2006년 4월 1일까지 방송된 일본의 뉴스 프로그램이다. 평일과 주말 모두 방송되었으며, 도쿠미츠 카즈오, 아이카와 히로시, 마야마 유이치 등 여러 메인 캐스터가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프로그램은 17시대 뉴스 도입, 다양한 코너 신설, 스튜디오 이전 등 여러 변화를 겪으며 시청률 경쟁을 벌였으며, 2006년 4월 'NNN News 리얼타임'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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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N 뉴스 플러스1 | |
---|---|
프로그램 정보 | |
장르 | 보도 프로그램 정보 프로그램 |
제작국 | 일본 TV (NNN) |
출연자 | "출연자" 참조 |
음성 | 2개 국어 방송 → 모노럴 방송 |
자막 | 실시간 자막 방송 (2002년 1월 7일 - 방송 종료) |
오프닝 테마 | "테마 음악" 참조 |
엔딩 테마 | 상동 |
평일판 | |
프로그램명 | 뉴스 플러스 1【평일판】 |
방송 기간 | 1988년 4월 4일 - 2006년 3월 31일 |
방송 시간 | "방송 시간" 참조 |
토요일판 | |
프로그램명 | 뉴스 플러스 1 → 뉴스 플러스 1・새터데이【토요일판】 |
방송 기간 | 1988년 4월 9일 - 2006년 4월 1일 |
방송 시간 | 방송 시간을 참조 |
방송 분량 | 20분 → 25분 → 30분 |
일요일판 | |
프로그램명 | 뉴스 플러스 1・선데이【일요일판】 |
방송 시간 | 일요일 18:00 - 18:30 |
방송 분량 | 30분 |
방송 시간대 | 일본 TV 계열 저녁 뉴스 시간대 |
방송 기간 | 1996년 4월 7일 - 2000년 9월 24일 |
이전 프로그램 | 라이브 온 네트워크 |
후속 프로그램 | 뉴스 리얼타임 |
기타 정보 | |
추가 정보 | 토요일은 1996년 4월부터 제목에 '새터데이'를 추가하여 방송 방송 시작부터 1996년 9월까지 평일에는 '얀보 마보 날씨 예보'를 포함 |
2. 역사
2. 1. 평일판
1988년 4월 4일,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세트는 이전 프로그램인 "라이브 온 -"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전년도에 요미우리를 은퇴한 에가와 스구루가 출연했다. 일본 TV 개국 35주년 프로그램이었던 '초모랑마는 거기에 있다'(1988년 5월 5일 방송)에 앞서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서 생중계도 진행되었다.[6]1988년 7월, 요미우리 TV의 2대 사옥 이전을 기념하여 요미우리 TV와의 공동 기획으로 오사카 스튜디오에 도쿠미츠가 방문하여, 동 방송국의 오카 슌타로 캐스터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간토 로컬 시간대에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요미우리 TV와 동일한 내용으로 방송되었다.
1989년 10월, 도쿠미츠는 일본 TV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메인 캐스터 자리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듬해 11월에는 도쿠미츠가 벨벳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프라하 현지 모습을 리포트하고, 체조 선수 시절 팬이었다는 베라 차슬라프스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1989년 11월 3일, 히로시마 카프의 팬으로 알려진 쿠메 히로시가 '뉴스 스테이션'(TV 아사히)의 기획 '자이언츠 에이드'89'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일본 시리즈를 제패했을 때의 공약에 따라 머리를 삭발하고 본 프로그램에 생방송으로 출연했다[6].'세련됨' 종료 이후 약 2년 반 만에 닛폰 TV에 출연한 구메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만세!'라고 외치며 '분하네요'라고 한탄했다. 또한, 프리랜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쿠미츠에게 '힘내세요'라는 응원을 보냈다[6]。자이언츠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모자를 선물하고, TV 아사히[7]로 향하는 구메를 배웅했다[6]。당초 구메는 3분 출연 예정이었지만, 4분을 초과하여 18:37까지 출연했다[6]。
호치 신문에 따르면, 10월 29일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고, 일본 TV와 TV 아사히 간의 물밑 협상 끝에 11월 1일에 ''''만세 시 취재는 NG'''', ''''구메의 만세 장면 VTR 방영은 TV 아사히 및 오피스 투 원(구메의 소속사)의 허가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구메의 출연이 결정되었다. TV 아사히로서는 '플러스 1'의 뒷 시간대 프로그램으로 NHK에서 프리랜서가 된 센다 마사호를 기용한 '600 스테이션'이 10월 2일부터 시작했지만, 시청률이 2%에서 4%로 저조했다[6]。
이 사건은 다음 날 민방 TV 각국의 아침 와이드 쇼에서도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국이 뛰어드는 18:30부터의 스포츠 코너 출연이었기 때문에, 주쿄 TV, 요미우리 TV[8] 등 일부 계열국도 로컬 시간대 시작을 늦춰 이 모습을 네트워크했다[6]。후에 도쿠미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시간대 시청률 1위였던 'FNN 슈퍼타임'을 '플러스 1'이 넘어섰다고 회고했다[9]。
1990년 4월 2일, 도쿠미츠는 금요일 방송에서 하차하고 주 4일 출연하게 되었다. 이는 도쿠미츠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반년이 지나 타 방송국 프로그램('퀴즈 더비', '도쿠미츠의 TV 콜럼버스')의 사회를 연이어 맡게 된 데 따른 것이다. 1990년 4월 6일부터 1991년 9월 27일까지 금요일은 구노 야스시 등이 담당하여 토요일·'일요일 저녁'과 같은 포맷으로 방송했다. 1990년 4월 1일에 개국한 이시카와현의 TV 가나자와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1991년 4월 1일, 전주까지 '600 스테이션'(TV 아사히)을 방송하고 있던 나가노현의 TV 신슈, 개국한 나가사키현의 나가사키 국제 TV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TV 신슈는 나가노 아사히 방송 개국에 따른 네트워크 변경이었다.
1991년 10월 1일, 도쿠미츠의 용퇴에 따라 전 NHK 아나운서 아이카와 히로시와 전 TV 이와테 아나운서 사쿠라다 준코가 메인 캐스터로 취임했다. 오프닝 CG도 새로 변경되었다. 기존 도쿠미츠 가즈오가 서서 진행하던 스타일과는 달리 앉아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금요일·토요일·'일요일 저녁'과 같은 텔롭을 사용했다.
2. 1. 1. 1988년 ~ 1991년: 도쿠미츠 가즈오 시대
1988년 10월 1일, NNN 오늘의 사건(NNNきょうの出来事)의 계약 앵커였던 기무라 요시타케가 지병으로 인해 방송 3주 만에 하차하게 되면서, 후임 앵커를 찾지 못하고 10월 3일부터 임시 앵커 체제로 진행되었다. 닛폰 TV 보도국은 계약 앵커를 포기하고, 당시 닛폰 TV 아나운서였던 도쿠미츠 가즈오를 평일 앵커로, 오기시마 게이코를 주말 앵커로 기용하여 프로그램을 연명하기로 결정했다.당시 도쿠미츠 가즈오는 심야 프로그램 '11PM'이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도 프로그램 앵커 경험은 전무했다. 도쿠미츠는 뉴스 원고를 읽는 것조차 서툴렀고, 프로그램 시작 당시에는 "보도 프로그램은 2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앵커직을 임시로 맡았다. 그러나 도쿠미츠는 점차 뉴스 보도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7년 반 동안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도쿠미츠 가즈오는 "시청자와 같은 시선으로 뉴스를 전달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는 뉴스를 전달할 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이는 프로그램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 서거 당시, 도쿠미츠는 특별 프로그램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도를 표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프로그램은 요미우리 TV와 공동으로 '긴급 리포트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획하여 현지에서 특별 생방송을 진행했다. 1990년에는 요미우리 TV, 주쿄 TV, 히로시마 TV와 공동으로 '걸프 전쟁' 특별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러한 지역 방송국과의 공동 기획은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현장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89년 11월에는 벨벳 혁명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현지에서 특별 리포트를 진행했다. 이는 일본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혁명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2. 1. 2. 1991년 ~ 1992년: 아이카와 히로시 시대
아무런 소스 내용이 없으므로 내용을 출력할 수 없습니다.2. 1. 3. 1992년 ~ 2002년: 마야마 유이치, 키무라 유코 시대
마야마 유이치와 키무라 유코는 차분한 진행 스타일로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특히, 마야마는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뉴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키무라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NHK 뉴스 투데이를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를 더했다.이 시기에는 와이드 쇼 형식을 도입하여 다양한 코너와 심층적인 보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했다. 1993년 4월부터는 2개 국어 방송을 폐지하고, 대신 일본어 자막 방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93년 6월 9일에는 황태자 부부의 결혼 특별 방송을 편성하여, 당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0시 55분까지 5시간 55분에 걸쳐 방송했다. 이 특집 방송은 마야마와 키무라가 직접 진행을 맡아 상세한 내용을 전달했다.
1995년 3월 20일 발생한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과 관련하여, 당일 방송 시간을 1시간 연장하여 특집으로 편성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NNN 뉴스 플러스1은 긴급 편성으로 관련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1995년에 개봉한 영화 '가메라 대괴수 공중 결전'에는 프로그램의 실제 방송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마야마와 키무라가 가메라와 관련된 뉴스를 보도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2. 1. 4. 2002년 ~ 2006년: 후지이 타카히코, 시에부키 마사코 시대
후지이 타카히코와 시오에부키 마사코는 2002년 10월부터 2006년 3월까지 4년간 콤비를 이루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후지이는 이전 'NNN 교 오노 데키고토'에서 스포츠 뉴스를 담당하다 메인 캐스터로 발탁되었고, 시오에부키는 'NNN News 리얼타임'의 전신 프로그램 중 하나인 '더 와이드'에서 보도 캐스터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2004년 닛폰 TV는 본사를 시오도메의 시오도메 닛폰 TV 타워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NNN 뉴스 플러스1'도 시오도메의 새로운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새 스튜디오는 이전보다 넓어져 다양한 세트 구성이 가능해졌고, 하이비전 제작을 지원하는 최신 장비가 도입되었다.
2006년 4월, 프로그램은 대대적인 리뉴얼을 단행했다. 프로그램 명칭을 'NNN News 리얼타임'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캐스터와 코너를 선보였다. 이는 변화하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더욱 심층적인 보도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였다.
2. 2. 주말판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의 붕어(崩御)로 인해 보도 특집 방송을 네트워크한 NNS 옵저버국 (TV 가나가와, TV 사이타마, 지바 TV, 군마 TV)에서도 임시로 "플러스1"을 네트워크했다 (『오늘의 사건』도 마찬가지). 이날은 토요일이었지만, 도쿠미쓰 카즈오 등 평일의 캐스터가 담당했다. 또한, 본 프로그램 시작 시 일본 TV는 보도용 텔롭을 이전의 사진 식자 텔롭 카드에서 워드 프로세서 시스템으로 변경했지만, 이날은 이전의 텔롭 카드가 사용되었다.1990년 3월 31일: 아시자와 토시미・이다 유미가 하차했다. 아시자와는 주 후반의 『낮 뉴스』 담당 및 1991년에 개최될 세계 육상 도쿄 대회 실황 준비 등을 위해 하차했다. 이다는 『오늘의 사건』 (금요일·토요일·일요일)으로 이동했다.
1990년 4월 6일: 쿠노 야스시・키무라 유코 (1991년 4월부터는 미사키 유키)로 교체되었다. 동시에 토요일·『일요 석간』에 더해, 금요일도 담당하게 되었다. 『일요 석간』은 1990년 4월 1일부터 TV 가나자와 개국에 맞춰 리뉴얼되었다 (『오늘의 사건』도 마찬가지). 화면상에 나오던 뉴스 제목을 화면 하단으로 변경했다 (『일요 석간』·금요일·토요일·일요일의 『오늘의 사건』도 마찬가지).
1991년 10월 5일: 아시자와 토시미・키무라 유코 (1992년 10월부터는 타카니시 미카)로 교체되었다. 금요일은 평일과 같은 체제로 돌아갔다.
1995년 4월, 토요일 전반의 네트워크 스폰서를 폐지했다.
1996년 4월 6일: 평일과 같은 타이틀로 방송되었던 토요일을, 4월부터 『'''뉴스 플러스 1·새터데이'''』로 타이틀을 변경했다.
1996년 4월 7일: 일요일은 『일요 석간』을 리뉴얼한 『'''뉴스 플러스 1·선데이'''』가 시작되었다.
1996년 5월 26일: 1988년 4월부터 통산 6년 8개월 담당했던 아시자와 토시미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기 위해 하차했다.
1996년 6월 1일: 아시자와 토시미에서 『ZIPANG 아침 6시』 『룩 룩 안녕하세요』의 뉴스를 담당하고 있는 이시다 아키히코로 교체되었다.
2000년 9월, 『뉴스 플러스 1·선데이』·『독점 SPORTS 정보』의 통합에 의한 『The 독점 선데이』 (후의 『진상 보도 뱅키샤!』)의 시작으로 『뉴스 플러스 1·선데이』 종료. 다시 5년 만에 토요일만 방송하게 된다.
2002년 1월, 평일판과 마찬가지로, 실시간 자막 방송을 실시했다.
2006년 4월 1일자로 『뉴스 플러스 1·새터데이』라는 타이틀로 방송을 종료했다. 이날은 뉴스 스튜디오가 세트 재건축 공사에 사용될 수 없어 보도 플로어의 얼굴 내밀기 부스에서 방송되었다. 4월 8일부터 『News 리얼타임·새터데이』로 개제되었다.
2. 2. 1. 1988년 ~ 1990년: 아시자와 토시미 시대
아시자와 토시미는 차분한 음성과 냉정한 시각으로 뉴스를 전달하여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진행 스타일은 객관적인 정보 전달에 중점을 두면서도, 사회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곁들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는 어려운 정치, 경제 문제도 쉽게 풀어서 설명하여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2. 2. 2. 1990년 ~ 1991년: 쿠노 야스시 시대
2. 2. 3. 1991년 ~ 1996년: 아시자와 토시미 복귀
아무런 자료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작성할 수 없습니다.2. 2. 4. 1996년 ~ 2006년: 이시다 아키히코, 타카다 모토히로 등
아키히코는 1996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5년 반 동안 주말에 이 프로그램의 캐스터를 맡았다. 그 당시 그는 스포츠 캐스터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도 프로그램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그는 뉴스를 읽을 때 NG를 냈지만, 그 후에는 NG를 거의 내지 않았다.타카다 모토히로는 1996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이시다와 함께 주말 캐스터를 맡았다. 그 당시 그는 스포츠 캐스터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도 프로그램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그는 뉴스를 읽을 때 NG를 냈지만, 그 후에는 NG를 거의 내지 않았다.
1998년 4월부터 2005년 3월까지는 프로그램의 리뉴얼에 따라, 타이틀 로고, 오프닝, 엔딩, BGM 등이 대폭적으로 변경되었다. 2002년 봄 개편으로 이시다는 평일판으로 이동하고, 타카다는 스포츠 캐스터로 복귀했다.
2002년 4월부터 2005년 3월까지는 프로그램의 리뉴얼에 따라, 타이틀 로고, 오프닝, 엔딩, BGM 등이 대폭적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 3월 28일부터 평일판은 다시 한번 리뉴얼을 실시하여, 새로운 타이틀 로고, 오프닝, 엔딩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 4월 2일, 쿠보 쥰코가 토요일 캐스터로 취임했다.
2006년 3월 26일, "ニュースプラス1サンデー일본어"가 종료되었다.
2006년 4월 1일, 토요일 방송 시간이 17:30 - 18:00으로 변경되었다.
2006년 4월 3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방송 시간이 17:00 - 18:16으로 변경되었다.
2006년 10월 2일, 평일판 방송 시간이 16:53 - 18:16으로 변경되었다.
2006년 10월 7일, 토요일 방송 시간이 17:30 - 17:55로 축소되었다.
3. 출연자
3. 1. 메인 캐스터
1988년 4월 4일부터 2006년 4월 1일까지 'NNN 뉴스 플러스1'의 메인 캐스터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초기에는 도쿠미츠 카즈오[12]가 평일(월-목, 금) 메인 캐스터를 맡았으며, 1989년 10월부터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1990년 4월부터 1991년 3월까지 쿠노 야스시가 주말(금, 토) 캐스터를 맡았고, 1990년 9월에 프리 저널리스트로 전향하여 닛폰 TV 전속 계약 캐스터가 되었다.아이카와 히로시는 1991년 10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메인 캐스터를 담당했다. 마야마 유이치는 1992년 10월부터 1996년 3월까지 메인 캐스터를 맡았다.[12] 1996년 5월 27일부터는 이시다 아키히코가, 1999년 4월 5일부터는 타카다 모토히로가 메인 캐스터를 담당했다. 2000년 10월 2일부터는 콘노 히로아키가, 2002년 9월 30일부터는 후지이 타카히코[13]가 메인 캐스터로 활동했다. 후지이 타카히코는 이 방송을 하차한 지 5년 후인 2010년 3월 말, 'news every.'의 메인 캐스터로 취임하여 해당 시간대에 복귀했다.
여성 캐스터로는 이다 유미, 키무라 유코, 나가이 미나코, 미사키 유키, 사쿠라다 준코, 타카니시 미카, 시에부키 마사코[14][15] 등이 활동했다. 특히 키무라 유코는 여러 기간 동안 메인 및 보조 캐스터로 활약했다.
최종회 시점의 출연자는 모두 후속 프로그램인 'News 리얼타임'에도 출연했다.
3. 2. 서브 캐스터, 코너 담당 캐스터
1988년 4월 4일부터 2006년 4월 1일까지 'NNN 뉴스 플러스1'의 역대 서브 캐스터 및 코너 담당 캐스터는 다음과 같다.기간 | 서브 | 스포츠 | 날씨 | 연예 (엔터메5) | ||
---|---|---|---|---|---|---|
남성 | 여성 | 평일 | 토요일 | |||
1988년 4월 4일 - 10월 1일 | 히다카 나오토 후카보리 에미코 | (부재) | 다나카 요코 | 키하라 미노루1·5 | (시프트 근무)3 | (코너 없음) |
1988년 10월 3일 - 1989년 4월 1일 | 히다카 나오토2 | 마츠다 나리코 | ||||
1989년 4월 4일 - 1990년 3월 31일 | 나가이 미나코4 세키야 아야코4 | |||||
1990년 4월 2일 - 1991년 3월 30일 | 다쇼 히로시 | (부재) | ||||
1991년 4월 1일 - 1993년 4월 3일 | (부재) | 스즈키 켄 | ||||
1993년 4월 5일 - 1995년 9월 30일 | 히라카와 켄타로 | |||||
1995년 10월 2일 - 1996년 9월 28일 | 후지이 타카히코 | |||||
1996년 9월 30일 - 1998년 3월 29일 | 후지이 타카히코 | 하토리 신이치 | 코스게 마리 | |||
1998년 3월 30일 - 4월 12일 | 카네코 시게루 | |||||
1998년 4월 13일 - 9월 27일 | 에비하라 테츠 | |||||
1998년 9월 28일 - 2000년 9월 30일 | (부재) | |||||
2000년 10월 2일 - 2001년 3월 31일 | 후지이 타카히코 야마시타 미호코 | 테라시마 준지 | ||||
2001년 4월 2일 - 9월 29일 | 후지이 타카히코 산노마루 카즈에 | |||||
2001년 10월 1일 - 2002년 3월 30일 | (서브가 담당) | |||||
2002년 4월 1일 - 9월 28일 | 하세가와 켄지 | 산노마루 카즈에 | 우오즈미 리에4 후루이치 사치코4 | |||
2002년 9월 30일 - 2003년 9월 27일 | (부재) | 키요하라 쿠미코 | ||||
2003년 9월 29일 - 2004년 3월 27일 | 야마모토 마스미 | 다나카 타케시 | ||||
2004년 3월 29일 - 2005년 3월 26일 | 진나이 키미코5 | 노부토모 요코 | ||||
2005년 3월 28일 - 2006년 4월 1일 | 야마모토 마스미 코니시 미호5 | 야마시타 미호코 |
- 날씨 캐스터 이외는 모두 평일 담당이었다. 주말 스포츠 코너는 메인이 담당했다.
- 위의 표에 있는 키요하라를 제외한 모든 캐스터는 『News 리얼타임』에도 계속 출연했다.
- 1 키하라 미노루는 『라이브 온 네트워크』에서 계속 출연했다.
- 2 히다카는 1990년도 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강판하고, 니혼 TV를 퇴사했다. 공석이 된 서브 캐스터에는 주말판을 담당했던 키무라 유코 등이 시프트로 들어갔다.
- 3 일요일판도 마찬가지였다.
- 4 교대로 담당했다.
- 5 코니시는 당시 요미우리 TV에서 출향했다. 진나이 키미코는 『news every.』도 계속 출연했다.
- 다나카 요코, 키하라, 마츠다, 코스게, 키요하라, 진나이 이외에는 출연 당시 니혼 TV 소속이었다.
- 키하라는 평일의 '플러스1'을 방송 개시부터 방송 종료까지 출연했기 때문에, 역대 출연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개근했다. (하계 휴가 기간 제외). 말기에는 뉴스나 특집의 나레이터도 맡았다.
3. 3. 코멘테이터
타미야 에이이치는 전 경시청 수사1과장이자 전 신주쿠 경찰서장으로, 2006년 3월부터 부정기적으로 출연했다. 주로 중대한 범죄 발생이나 거물급 인사 체포 등의 경우에 출연했다. 타미야는 『News リアルタイム』→『news every』(『every.』는 부정기)에도 출연했다.3. 4. 나레이션
이토 히데토시, 고우리 다이스케, 차후린, 키하라 미노루가 나레이션을 담당한다.4. 방송 내용
4. 1. 평일 18시대
초기에는 전국 네트워크의 제공 스폰서가 전 프로그램의 흐름을 이어받아 네트워크 스폰서와 로컬 스폰서가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배경음악(BGM)을 포함하여 각 방송국별로 개별 크레딧을 표시했다.[16] 1995년 4월부터는 전국枠도 로컬 스폰서만으로 변경되었고, 일부 지방 방송국에서는 제공 존이 무음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1996년 10월 리뉴얼 때 제공 멘트 자체가 폐지된 이후 제공 존의 BGM도 일본 TV에서 송출하게 되었지만[17], 1999년 4월에 전국枠이 네트워크 스폰서만으로 변경되었다.2004년 11월부터 2005년 4월 1일까지 평일 방송에서는 특별 편성 시를 제외하고 전국 뉴스 오프닝과 전국 대상 인사가 폐지되었고, 뉴스 영상(또는 뉴스 낭독)에 오른쪽 상단 로고가 표시되었다. 그러나 4월 4일 방송부터 다시 오프닝이 방송되었다.[18]
방송 초기에는 18:00 - 19:30까지 방송할 계획이었지만, 크로스넷 방송국 등에서 항의가 들어와 19:00부터 30분 동안 정보 프로그램인 『추적』이 방송되었다.
18시대 전반은 일반적인 뉴스와 미니 특집으로 구성되었다. 뉴스 영상은 각 방송국이 제작했기 때문에, 뉴스에 따라 자막의 굵기[19] 나 글자 등의 색이 달라서 자막이 전체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다.[20] 1992년 10월, 마야마・사쿠라다 체제로 바뀌면서, 후지 TV 『슈퍼 타임』과 마찬가지로 서서 전달하고, 뉴스 중간에 어택 음을 넣었다.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현재: 보도 스테이션)과 마찬가지로, VTR 주도의 프로그램 제작의 발판이 되었다. 프로그램 초창기(18:00 시작 시대)에는 18:20경에 키하라에 의한 전국 날씨 코너도 있었다.[21] 1996년 9월까지 지방 방송국이 방송을 중단하는 18:29에 캐스터가 "시각은 곧 6시 30분입니다"라고 방송 중단을 하는 지방 방송국에 대한 인사 대용 멘트를 했다.
18시대 후반은 「플러스1 특집」, 「플러스1 스포츠」, 「키하라 씨의 날씨」의 3가지로 구성되었고 마지막에 뉴스를 몇 개 방송했다. 스포츠 뉴스는 "자이언츠 아버지"인 도쿠미츠가 출연했기 때문에 전국 뉴스 직후인 18:30부터 방송했다. 1996년 17시대 진출 후, 『FNN 슈퍼 타임』(후지 텔레비전)에 대항하기 위해, 스포츠 전에 특집을 편성했다. 시청률에서 『FNN 슈퍼 타임』→『FNN 뉴스555 더 휴먼』을 제치고, 2001년까지 민방 톱의 상태가 이어졌다.[23] 그러나 2002년 6월, 『슈퍼 뉴스』(후지 TV)가 저녁 시간대 시청률 경쟁에서 『플러스1』을 앞지르게 되었다. 2005년 4월부터 스포츠 코너에 연예 정보를 더한 "엔타메 SPORTS"를 방송했다.
프로그램 시작 이후 변하지 않은 것은 극단 하나구미 시바구이의 키하라에 의한 일기 예보로, 『얀보 마보 일기 예보』로 방송했지만 1996년 9월을 기점으로 스폰서 계약을 해지했다.[24] 마이 스튜디오를 이용하여 마이 스튜디오 앞[25] 에서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어린이 동반이나 초등학생 등 일반인이 매일 견학을 오고 있었다.
4. 2. 평일 17시대
1996년 10월, TV 도쿄[26]를 제외한 도쿄의 주요 4개 방송국 중 가장 먼저 17시대 뉴스를 시작하여 18시대 시청률 상승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계열국에서 드라마 재방송이나 TV 도쿄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경우가 많았고, 홋카이도, 도호쿠, 히로시마, 후쿠오카 등에서는 자체 제작 저녁 와이드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절반 정도의 계열국이 17시대를 방송했다. 『플러스1』의 17시대 진출 성공으로 계열국들이 자체 제작 정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네트워크 방송국은 감소했다. 2000년 10월, 후지이 타카히코 외에 야마시타 미호코가 진행에 참여하면서 정식으로 니시닛폰 방송이 17시대 네트워크를 시작했다.초기에는 5분 정도의 짧은 코너들을 방송했으며, 오프닝 뉴스 외에는 후지이 타카히코가 캐스터를 맡았다. 18시대와의 차별화를 위해 뉴스 스튜디오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주요 코너로는 '17 정보', '키하라 미노루의 날씨 랩', '오후 5시 닛폰', '돌격! 야스이' 등이 있었다.
'17시 정보'는 17시대 진출과 함께 설치된 코너로, 17:45경부터 17:50경까지 방송되었으며, 생활 정보를 중심으로 다루어 인기를 얻었다. '키하라 미노루의 날씨 랩'은 17:51경부터 방송되었으며, 기상 예보관 키하라 미노루가 날씨 예보와 계절 정보를 전달하는 코너였다.
2000년 10월부터 2001년 8월까지 방송된 '오후 5시 닛폰'은 네트워크국을 연결하여 그 시간의 기온, 날씨, 화제 등을 전하는 코너였다. 같은 기간 동안 '돌격! 야스이' 코너에서는 야스이 마미코가 도내 상가에서 생중계하며 상품을 흥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1년 9월, 내용이 리뉴얼되면서 17시대 대부분에 마야마・키무라 콤비가 등장하게 되었고, 뉴스 부분이 확대되었다. 연예 정보 코너인 '엔터테인먼트5'가 신설되었고, '특촬' 코너에서는 북한 관련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2002년 9월 30일, 메인 캐스터가 笛吹・藤井 콤비로 교체되었다. 2004년 3월 29일, 일본 TV 방송망 본사 건물이 시오도메로 이전하면서 타이틀 로고, 오프닝 테마, 오프닝 CG가 전면적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 4월 8일부터 금요일에는 17:00부터 방송을 시작하여 금요일 한정 코너인 '폭론! 말하게 해줘!!'가 신설되었다. 이 코너는 고니시 미호가 사회를 맡는 토론 코너였다.
4. 3. 주말판
토요일 30분 프로그램으로 정착된 이후, 전반 20분 동안 전국 뉴스와 스포츠를 전달하고, 후반 10분은 로컬 파트로 각 지역의 뉴스와 일기 예보를 전달했다. 이러한 프로그램 구성은 이후 프로그램인 《News 리얼타임·토요일》, 현재의 《news every. 토요일》에도 이어지고 있다.[29] 평일판과는 달리, 스포츠 뉴스 코너는 설치되지 않았으며, 일요판의 스포츠 뉴스는 바로 다음의 《독점!!스포츠 정보》에서 다루었다. 토요일에는 프로 야구 나이트 경기가 있는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 한정)의 미니 중계를 실시했으며, 프로 야구 나이트 경기의 중간 경과나 데이 게임의 결과를 전했다.[29] 《라이브 온 네트워크》의 토요일에 방송되었던 '건강과 의학' 코너는 이 프로그램부터 방송되지 않았다.토요일(쿠노 야스시 담당 시에는 금요일도 포함)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일요 저녁 신문》과 텔롭 등이 같았다. 머리글 제목 부분의 '일요 저녁 신문'(1990년 3월까지) '일요 저녁 신문'(1990년 4월부터) 부분만 '뉴스 플러스 1'(1990년 3월까지) '플러스 1'(1990년 4월부터)이 되었다. 오프닝 음악은 평일과 같지만, 토요일은 '''플라스·원!!'''의 음성이 없었다(쿠노 야스시 등의 시대는 금요일에 '''플라스·원!!'''의 음성이 있었다).
토요일의 1989년 9월 30일까지는, 이다 유미가 "6시 반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시작했다(토요일의 《라이브 온 네트워크》까지와 같음).[29]
토요일의 첫 번째 CM 전, 1988년 4월부터 6월까지는 《라이브 온 네트워크》와 같은 형태였지만, 1988년 7월 2일부터 아시자와 토시미(쿠노 야스시 시대에는 키무라 유코·미사키 유키, 이시다 아키히코 이후에는 타카니시 미카)가 CM 후의 뉴스 내용과 "커머셜(알림) 후에 전해 드립니다" 등의 한 마디가 있은 후, 평일과 같은 CM 전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다.[29]
1988년 7월 이후, 토요일·《일요 저녁 신문》 《뉴스 플러스 1·선데이》 엔딩은 방송 시간 종료가 전국 각지에서 달랐다. 토요일의 전국 뉴스 제공 부분(18:48쯤, 1989년 10월 7일 이후는 18:18쯤)에 관해서는, 1988년 7월 이후부터의 《일요 저녁 신문》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뉴스를 전해 드립니다'의 텔롭이나 음악을 사용하고 있던 계열국(테레비 가나자와, 요미우리 테레비 등)이 있었던 한편, '계속해서 뉴스를 전해 드립니다'와 월요일 - 금요일의 테마 음악을 사용하고 있던 지역(후쿠오카 방송 등), 18:48(18:18)에 종료하는 지역(기타니혼 방송, 후쿠이 방송, 주쿄 TV 등, 《NNN 뉴스 플러스 1 END》의 타이틀 있음, 테마 음악은 월요일 - 금요일과 같은 것이나 《NNN 일요 저녁 신문》 전국 뉴스 엔딩 중 하나를 사용) 등 달랐다.[29] 1992년 10월 이후에도 야마가타 방송은 초기의 월요일 - 금요일의 테마 음악을 사용했다. 1996년 4월의 《뉴스 플러스 1·선데이(새터데이)》 시작 후, 일본 TV에서는 '계속해서 뉴스를 전해 드립니다'의 텔롭은 사용하지 않고, CM 후의 로컬 枠에서 전하는 뉴스의 예고 텔롭이 표시되었다.
1988년 6월까지는, 전국 뉴스의 마지막에 아시자와 토시미·이다 유미가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또 내일"이라고 인사를 했지만, 1988년 7월, 일본 TV 등이 로컬 뉴스를 흡수한 후에는 이러한 인사는 사라졌고, 일본 TV에서는 엔딩에서 마지막 뉴스 항목의 VTR과 원고 읽기 그대로 갑작스럽게 프로그램이 끝났다(이것은 《리얼타임》→《every.》도 마찬가지).[29]
1996년 4월 7일 시작의 《뉴스 플러스 1·선데이》는 《일요 저녁 신문》(15초 오프닝 후 30초 CM 있음)과는 달리 《뉴스 플러스 1·새터데이》와 마찬가지로, CM에 들어가기 전에 "커머셜 후에 전해 드립니다"라고 테마 음악을 방송했다. 제공 코멘트는 평일판에서는 1996년 10월부터 폐지되었지만, 주말판에서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29]
1주일간의 나가타초(정계)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코너인 '비밀 워치 나가타초'는 토요일 CM 후(18:09쯤)에 방송되었다. 원래는 닛테레 NEWS24의 기획으로, 현재도 방송 중이며 인터넷 배신도 되고 있다. 해당 코너는 《News 리얼타임·토요일》에서도 지속되었다.[29]
5. 테마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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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오프닝 | 엔딩 | 비고 | |
---|---|---|---|---|
1988년 4월 4일 ~ 1992년 3월 | 작곡: 오시마 미치루 | (오프닝과 동일) | 평일, 도쿠미츠가 사회를 맡았을 때에는 자신이 녹음한 "'''플러스 원 | '''" 사운드 로고가 있었다. 프로그램 시작 당시에는 이 사운드 로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프닝 곡은 월요일~금요일과 같았지만 사운드 로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캐스터가 등장한 후, 인사가 있고 BGM이 흘렀다 (토요일은 1991년 10월부터). 지역 뉴스 오프닝/엔딩 테마 곡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텔레비전 카나자와는 일본 텔레비전과 같은 테마 곡을 사용했다(『텔레비전 카나자와 일요일 저녁 뉴스』도 마찬가지). |
1992년 4월 ~ 9월 | GAO 「안녕」(일본 텔레비전만) | 이 시기의 엔딩 곡 「안녕」은 1992년 4월기에 일본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연속 드라마 『수요일 드라마「멋지게 속여줘!」』의 주제가로도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1992년 4월~6월 수요일은 「안녕」이 본 프로그램과 『멋지게 속여줘!』에서 총 2번 흘렀다. | ||
1992년 10월 ~ 1996년 9월 29일 | 「IT'S COOL」 (고후 히로코)의 프로그램 어레인지 버전 | 「SMOOTH STRUTTIN'」 (고후 히로코) | 「ITS COOL」은 뉴스 플래시 (주말은 "플래시 뉴스"라고 칭함)에서도 사용되었다. 오프닝과 엔딩의 원곡은 고후 히로코의 앨범 「퓨어 하트」에 수록되어 있으며, 같은 앨범에서는 이 외에도 「BAREFOOT STEPPIN」(전국 네트워크 파트 종료 시 BGM) 「VITAMINA」 「MRS. ROBINSON」이 프로그램 BGM으로 채용되었다. | |
1996년 9월 30일 ~ 2000년 9월 30일 | 작곡: 오시마 미치루 | 작곡: 오시마 미치루 (동시기의 오프닝 어레인지 버전) | 오프닝만 스테레오 음성이었다. 토요일 버전은 2002년 9월 28일까지 사용. 전국 네트워크 오프닝에서는 주말에만 사용했다. 오후 5시대의 오프닝 영상·음악에 관해서 요미우리 텔레비전에서는 프로그램 시작 직전의 17:55 전후부터, 텔레비전 카나자와에서는 1997년 3월 31일 이후 『2시간 와이드 가위바위보 폰』내의 뉴스 코너에서 사용했다. 17:27부터 로컬 프레임을 방송하고, 시작 부분의 뉴스 부분을 네트워크하고 있었던 니시니혼 방송에서는 이 오프닝이 흘러나오지 않고, 그 후의 인사부터 뛰어들었다. | |
2000년 10월 2일 ~ 2001년 9월 | 작곡: 불명 | |||
2001년 9월 ~ 2002년 3월 30일 | (앞서 언급한 이유로 특정 테마 곡 없음) | |||
2002년 4월 1일 ~ 9월 28일 | 작곡: 불명 | |||
2002년 9월 30일 ~ 2004년 3월 27일 | 작곡: 오쓰보 나오키 | |||
2004년 3월 29일 ~ 2006년 4월 1일 | 작곡: R・O・N |
6. 연말판
2001년까지 12월 마지막 수요일에는 '''초특대 생방송 플러스1'''이라는 제목으로 17시 30분부터 3시간 반 동안 연말 스페셜판을 방송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12월 마지막 일요일에 《반키샤!》와 합체하여 '''초합체! 특대 생방송!! 반키샤! 플러스1'''을 방송했다.[13][14] 니혼 TV 본사(당시 고지마치) G 스튜디오에 양 프로그램의 스튜디오 세트를 본뜬 세트를 건설하여 생방송되었으며, 사회는 후부에키・후지이와 당시 《반키샤!》의 메인 캐스터 후쿠자와 아키라・키쿠카와 레이가 맡았다. 오프닝 곡은 양 프로그램의 것을 믹스한 것을 사용했다.
2004년 12월 30일에는 '''뉴스 플러스1 초강력 스페셜 ~2004 그 뉴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라~'''[14]가 방송되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방송되지 않았다. 각 신문에는 '''NNN 뉴스'''라고 표기되었지만, 로고도 방송되지 않아, 후부에키가 등장하여 뉴스를 방송하고, 키하라에 의한 날씨로 끝났다. 이 뉴스 & 날씨는 전국 파트만의 6분간의 방송이었다. 요미우리 TV는 비 네트(방송)로 했지만, 사건 보도를 위해 급히 방송했다.
2005년은 12월 28일 15:50 - 18:30에 '''뉴스 플러스1 초강력 스페셜 ~2005 그 뉴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라~'''[14]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일부 지역에서는 로컬 정보 프로그램 등을 방송하기 위해 네트되지 않았다. 전국 뉴스는 18:15부터 'NNN 뉴스'로 방송되었지만, 캐스터가 갑자기 나와 뉴스 낭독부터 시작했다. 타 방송국 배려 때문인지 머리 부분에, 화면 오른쪽에 'NNN 뉴스'라는 텔롭은 표시되었다. 'NNN 뉴스'가 되었지만, 통상의 'NNN 뉴스'의 타이틀 로고나 텔롭은 사용되지 않고, 텔롭은 통상의 '플러스1'에서의 텔롭을 사용했다. 요미우리 TV만 'NNN 뉴스'는 5분간이었다.
7. 네트워크 상황
7. 1. 계열국 프로그램 제목
1991년 10월 - 방송 중: STV NEWS[30](부정기)
1990년 4월 - 1994년 9월: 뉴스 플러스 1 아키타
1991년 4월 - 1994년 9월: 뉴스 웨이브 플러스 1
1990년 4월 - 2009년 3월: 뉴스 스크램블
1992년 4월 - 1993년 3월: RNC 와이드 90 플러스 1
1993년 4월 - 2006년 3월: RNC 와이드 뉴스 플러스 1
1989년 4월 - 2006년 9월: 고치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