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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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지 1세는 이라크의 초대 국왕 파이살 1세의 외아들로, 1912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로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33년 부친의 사망으로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가지 1세는 범아랍주의를 지향하며 친영적인 아버지와 달리 영국의 영향력에 반대했다. 그의 치세는 군부와 민간 정부 간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쿠데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쿠웨이트를 이라크에 병합하려는 주장을 펼치다 1939년 스포츠카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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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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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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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라크 국왕 |
재위 기간 | 1933년 9월 8일 ~ 1939년 4월 4일 |
이전 | 파이살 1세 |
계승 | 파이살 2세 |
본명 | 가지 이븐 파이살 |
배우자 | 알리야 빈트 알리 |
자녀 | 파이살 2세 |
왕가 | 하심가 |
아버지 | 파이살 1세 |
어머니 | 후자이마 빈트 나세르 |
출생일 | 1912년 3월 21일 |
출생지 | 오스만 제국, 헤자즈 주, 메카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 헤자즈, 메카) |
사망일 | 1939년 4월 4일 |
사망지 | 이라크 왕국, 바그다드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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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랍어) | |
로마자 표기 | Ġāzī al-Awwal bin Fayṣal |
2. 어린 시절과 교육
가지 1세는 1912년 메카에서 당시 에미르였던 파이살(후에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가 됨)과 후자이마 빈트 나세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가 아시르에서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이드리시에 대항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태어났기 때문에, '전사'라는 의미의 '가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3]
어린 시절 가지는 아버지와 떨어져 할아버지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맡겨졌다. 후세인은 가지를 증조부 아운 빈 무신의 이름을 따서 "아운"이라고 불렀다.[3]
가지는 해로 스쿨에서 수학했다.[3] 1924년 사우디군에 의해 그의 할아버지 군대가 패배한 후, 가지는 다른 하심 가문 사람들과 함께 히자즈를 떠나 트란스요르단으로 이주했다.[3] 같은 해, 가지는 바그다드에서 아버지와 합류하여 왕세자이자 이라크 왕국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3]
16세의 학생이었던 가지는 리처드 할리버튼과 그의 조종사 모예 스티븐스를 만났는데, 그들은 찰스 린드버그의 유명한 대서양 횡단 비행 직후 세계 일주 비행을 하고 있었다. 가지 1세는 할리버튼과 스티븐스가 탑승한 복엽기 '플라잉 카펫'으로 처음 비행을 했다. 그들은 고대 바빌론의 유적지와 다른 역사적인 장소를 보기 위해 날아갔고, 왕세자의 학교 위를 낮게 비행하여 그의 급우들이 복엽기 안의 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2. 1. 출생과 가계
가지 1세는 1912년 메카에서 당시 에미르였던 파이살(후에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가 됨)과 후자이마 빈트 나세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가 아시르에서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이드리시에 대항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태어났기 때문에, '전사'라는 의미의 '가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3]어린 시절 가지는 아버지와 떨어져 할아버지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맡겨졌다. 후세인은 가지를 증조부 아운 빈 무신의 이름을 따서 "아운"이라고 불렀다.[3]
1924년, 이븐 사우드에 의해 메카가 함락되자 가지는 다른 하심 가문 왕족들과 함께 히자즈를 떠나 바그다드로 이주하여 이라크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2. 2. 하심 가문과 성장 배경
가지 1세는 파이살 1세와 후자이마 빈트 나세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시르에서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이드리시에 대항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아버지 파이살 1세 대신, 가지는 하심 가문의 수장인 할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 밑에서 자랐다. 후세인 빈 알리는 가지를 그의 증조부 아운 빈 무신의 이름을 따서 "아운"이라고 불렀다.[3] 하심 가문은 오스만 제국 내 히자즈를 통치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가지는 해로 스쿨에 다녔다.[3]2. 3. 영국 유학과 귀국
가지는 해로 스쿨에서 수학했다.[3] 1924년 사우디군에 의해 그의 할아버지 군대가 패배한 후, 가지는 다른 하심 가문 사람들과 함께 히자즈를 떠나 트란스요르단으로 이주했다.[3] 같은 해, 가지는 바그다드에서 아버지와 합류하여 왕세자이자 이라크 왕국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3]2. 4. 플라잉 카펫 일화
16세의 학생이었던 가지는 리처드 할리버튼과 그의 조종사 모예 스티븐스를 만났는데, 그들은 찰스 린드버그의 유명한 대서양 횡단 비행 직후 세계 일주 비행을 하고 있었다. 가지 1세는 할리버튼과 스티븐스가 탑승한 복엽기 ''플라잉 카펫''으로 처음 비행을 했다. 그들은 고대 바빌론의 유적지와 다른 역사적인 장소를 보기 위해 날아갔고, 왕세자의 학교 위를 낮게 비행하여 그의 급우들이 복엽기 안의 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젊은 왕세자 가지가 그의 나라 위를 비행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리처드 할리버튼의 ''플라잉 카펫''에서 찾아볼 수 있다.3. 이라크 국왕 즉위
1933년 파이살 1세가 사망하자 가지가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가지는 영국의 보호 아래 즉위한 아버지와 달리 범아랍주의자였지만, 정치 수완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직후 시아파 지역에 건설 예정이던 댐 예산이 군대 확장에 사용되고 징병제가 도입되자, 시아파 부족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징병 반대 반란은 시아파 지역뿐만 아니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강경책을 펼쳤고, 총리의 독재 체제가 성립되면서 가지의 실권은 줄어들었다.
1934년, 이라크로 망명했던 사촌(히자즈 왕의 딸)과 결혼했다. 이로 인해 훗날 매제 압둘 일라가 이라크 하심 가문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가지는 1936년 바크르 시드키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를 지지했다. 가지는 이라크의 수니파 세력과 유사하게 이라크 내 영국의 영향력, 팔레스타인 및 걸프 지역에서의 영국의 정책을 불쾌하게 여겼다. 또한 이라크의 주권이 쿠웨이트에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1937년 왕궁 내 라디오 방송국을 설치하여 이러한 주장을 직접 설파했다. 1938년에는 쿠웨이트에 밀무역 저지와 유프라테스강 하구 2개 섬의 할양을 요구하기도 했다.
3. 1. 파이살 1세의 죽음과 왕위 계승
1933년 9월 8일, 파이살 1세가 사망하고 가지가 가지 1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같은 날 가지는 로열 이라크 해군의 해군 원수, 로열 이라크 육군의 야전 원수, 그리고 로열 이라크 공군의 원수로 임명되었다.[6] 그는 범아랍주의 민족주의자로, 자국 내 영국의 이익에 반대했다.[6]3. 2. 국내 통치
가지의 치세는 정부 통제를 추구하는 군부와 민간인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어졌다. 즉위 직후 시아파 지역에 건설 예정이었던 댐에 할당될 예산이 군대 확장에 사용되거나 징병제 도입 등에 반대하는 시아파 부족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7] 징병 반대 반란은 시아파 지역뿐만 아니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7] 1933년 8월, 가지는 시멜 학살에 참여한 군인과 부족 지도자들에게 "승리의" 깃발을 수여했다.[5]3. 3. 범아랍주의와 대외 정책
가지 1세는 범아랍주의 민족주의자로, 자국 내 영국의 이익에 반대했다.[6] 그는 쿠웨이트를 이라크에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알-주후르 왕궁에 자체 라디오 방송국을 두고 이 주장을 비롯한 급진적인 견해를 홍보했다.[7]4. 의문의 죽음
가지 1세는 1939년 4월, 27세의 나이로 자신이 운전하던 스포츠카 사고로 사망했다.[7] 마루프 알루사피와 사파 훌루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많은 이라크인들은 가지 1세가 누리 알사이드의 지시로 살해되었다고 믿었는데, 그 이유는 가지 1세가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통일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8]
5. 가족 관계
غازي ابن فيصل|가지 이븐 파이살ar은 1934년 1월 25일에 외사촌 여동생인 알리야 빈트 알리 공주와 바그다드에서 결혼했다.[2] 이 둘 사이에서는 1935년 5월 2일에 아들 파이살 2세가 태어났다.[2]
6. 유산과 영향
가지 1세는 스포츠카 운전 중 의문의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이라크 총리였고 친영파였던 누리 알 사이드의 음모설이 제기되었다.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반(反)영국 정책은 이후 이라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통치 기간은 이라크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참조
[1]
뉴스
IRAQ – Resurgence in the Shiite World – Part 8 – Jordan & The Hashemite Factors
https://www.thefreel[...]
2005
[2]
웹사이트
The Hashemite Royal Family
http://www.kinghusse[...]
Jordanian Government
2008-11-29
[3]
서적
King Ghazi and his Companions (الملك غازي ومرافقوه)
1989
[4]
웹사이트
Richard Halliburton and Moye Stephens: Traveling Around the World in the 'Flying Carpet'
http://www.historyne[...]
2006-06-12
[5]
간행물
2006
[6]
서적
A History of Iraq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7]
문서
Tripp, p.98.
[8]
간행물
Ma'ruf Al-Rusafi (1875–1945). The Muslim World, Hartford Seminary Foundation, LXVII No.1
1977
[9]
웹사이트
Directory of the Iraqi Kingdom 1935
http://www.imarawati[...]
[10]
서적
The Modern History of Jordan
https://books.google[...]
I.B.Tauris
1998-12-15
[11]
웹사이트
Family tree
http://www.alhussein[...]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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