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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알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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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리 알사이드는 1888년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오스만 제국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랍 민족주의를 지지하며 아랍 반란에 참여했다. 이라크 왕정 수립 후 경찰청장, 육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이라크의 총리를 지냈다. 이후 군부와의 결탁, 권력 투쟁, 섭정과의 갈등을 겪으며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해졌고, 1958년 7월 14일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면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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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알사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누리 알사이드, 1950년대
누리 알사이드 (1957년)
본명누리 파샤 알사이드
원어 이름نوري باشا السعيد
출생1888년 12월
출생지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주 바그다드
사망1958년 7월 15일 (69세)
사망지아랍 연맹 바그다드
사망 원인총상
국적이라크
정당맹약당, 입헌 연합당
정치 경력
직책이라크 총리
임기 시작1958년 3월 3일
임기 종료1958년 5월 18일
군주파이살 2세
이전압둘 와하브 미르잔
이후아흐마드 무크타르 바반
임기 시작 21954년 8월 4일
임기 종료 21957년 6월 20일
군주 2파이살 2세
이전 2아르샤드 알우마리
이후 2알리 자우다트 알아유비
임기 시작 31950년 9월 15일
임기 종료 31952년 7월 12일
군주 3파이살 2세
섭정 3압둘라 왕자
이전 3타우피크 알수와이디
이후 3무스타파 마흐무드 알우마리
임기 시작 41949년 1월 6일
임기 종료 41949년 12월 10일
군주 4파이살 2세
섭정 4압둘라 왕자
이전 4무자힘 알파차치
이후 4알리 자우다트 알아유비
임기 시작 51946년 11월 21일
임기 종료 51947년 3월 29일
군주 5파이살 2세
섭정 5압둘라 왕자
이전 5아르샤드 알우마리
이후 5살리흐 자브르
임기 시작 61941년 10월 10일
임기 종료 61944년 6월 4일
군주 6파이살 2세
섭정 6압둘라 왕자
이전 6자밀 알미드파이
이후 6함디 알파차치
임기 시작 71938년 12월 25일
임기 종료 71940년 3월 31일
군주 7가지 1세파이살 2세
섭정 7압둘라 왕자
이전 7자밀 알미드파이
이후 7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
임기 시작 81930년 3월 23일
임기 종료 81932년 11월 3일
군주 8파이살 1세
이전 8나지 알수와이디
이후 8나지 샤우카트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누리 알사이드는 1888년 바그다드에서 북캅카스 출신의 중산층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작은 정부 회계사였다. 1906년 이스탄불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그곳의 참모대학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 장교로 훈련을 받았다. 1912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견되어 이 지방의 이탈리아 점령에 저항하는 게릴라전에 참여했다.[2]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이집트에 억류된 후, 아랍 민족주의 대의에 동조하여 아랍 반란에 참여했다. 이 반란에서 그는 헤자즈의 에미르 파이살 이븐 후세인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파이살은 나중에 아랍 시리아 국왕을 거쳐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한 작전에서 누리는 T. E. 로렌스와 그의 영국 육군 운전병과 함께 롤스 로이스 장갑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3]

파이살 아래에서 복무했던 다른 이라크 장교들처럼, 누리도 새로운 정치 엘리트의 일부로 부상하게 되었다.

3. 정치 경력

누리 알사이드는 1918년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후 파이살 1세를 위해 다마스쿠스를 장악한 군대를 이끌었다. 1920년 파이살 1세가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하자, 누리는 이라크로 망명한 파이살 1세를 따라 1922년 이라크 초대 경찰청장이 되었다. 그는 경찰 조직을 자신의 부하들로 채워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기반으로 활용했다.

1924년 파이살 1세의 신임을 받아 육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역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는 데 활용했다. 1920년대에 누리는 파이살 1세가 구 오스만 제국군을 기반으로 신생 이라크 군대를 창설하려는 정책을 지원했다.

1930년 총리로 취임하여 1930년 앵글로-이라크 조약을 체결했지만, 이 조약은 이라크 독립 후에도 영국에 군사적 특권을 부여하여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1932년 국제 연맹에서 이라크의 독립을 위한 입장을 제시했다.

1933년 파이살 1세 사후, 누리는 군부 내 영향력을 유지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1938년 쿠데타를 통해 총리직에 복귀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친영국적인 정책을 유지했다.

1941년 친중립 세력이 집권하면서 잠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영국 점령 하에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1947년까지 섭정 압드 알일라와 공존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1948년 영국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은 대규모 시위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누리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8] 1950년에는 이라크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54년 바그다드 조약 체결을 주도했지만, 국내 반발에 직면하여 정치적 탄압과 검열을 강화했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이집트를 지지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8]

3. 1. 이라크 왕정 초기 활동

1918년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나고, 파이살 1세를 위해 다마스쿠스를 장악한 군을 이끌었다. 1920년 파이살 1세가 프랑스에 의해 폐위되자 누리는 망명한 군주를 따라 이라크로 갔다. 1922년 이라크 경찰청 초대 청장이 되어 자신의 측근들로 경찰을 채웠는데, 이는 그가 이후에 맡은 직책에서도 반복하는 전술이었으며, 이는 그의 후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의 기반이 되었다.

1924년 파이살 1세의 신뢰를 받는 동맹이었던 그는 파이살 1세에 의해 육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누리는 이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1920년대 동안, 그는 새로 창설된 국가의 군대를 강화하려는 국왕의 정책을 지지했는데, 이는 샤리프 군대 장교, 즉 정권의 주축을 이루는 옛 오스만 군인들의 충성에 기반을 두었다.

3. 2. 첫 총리 재임 (1930-1932)

1929년 파이살 1세가 누리 알사이드를 총리로 처음 제안했지만, 영국이 반대를 철회하면서 1930년에 총리로 취임했다. 누리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지만, 이는 국왕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켜 국왕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총리로서 누리는 1930년 앵글로-이라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이라크 독립 후에도 영국에 군사적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1932년 국제 연맹에 이라크의 독립을 위한 입장을 제시했다.

3. 3. 군부와의 결탁 및 권력 투쟁 (1933-1940)

1932년 10월, 파이살 국왕은 누리를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나지 쇼카트로 교체하여 그의 영향력을 억제했다.[1] 이듬해 파이살 국왕이 사망하고 가지가 즉위하면서 누리의 궁정 접근은 더욱 제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35년 야신 알하시미가 총리가 되면서 누리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군부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1933년, 영국은 가지 국왕을 설득하여 누리를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1936년 바크르 시드키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1] 그러나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오히려 그의 대중적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바크르 시드키 쿠데타는 누리가 이라크 주재 영국인들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는 전복된 정부에서 유일하게 영국 대사관으로 피신한 정치인이었고, 영국은 그를 이집트로 망명시켰다.[1] 1937년 8월, 바그다드로 돌아온 누리는 살라 알딘 알사바그 대령과 협력하여 권력 복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1] 이는 자밀 알미드파이 총리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영국은 누리가 이라크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므로 해외에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누리를 설득하여 런던 주재 이라크 대사로 부임하게 했다. 가지 국왕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누리는 사우드 가문과의 협력을 은밀히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8년 10월, 바그다드로 돌아온 누리는 알사바그와 다시 접촉하여 미드파이 정부를 전복시키도록 설득했다. 알사바그와 그의 동료들은 1938년 12월 24일 쿠데타를 일으켰고, 누리는 총리직에 복귀했다.[1] 그는 왕의 이복형제인 자이드 왕자를 후계자로 내세워 왕을 소외시키려 했다. 한편, 영국은 가지 국왕이 개인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민족주의적인 방송을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39년 1월, 가지 국왕은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를 왕실 디반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누리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누리는 경쟁자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고, 3월에는 가지 국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육군 장교단을 숙청하는 구실로 삼았다.

1939년 4월 4일, 가지 국왕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누리가 그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13] 왕실 장례식에서 군중들은 "가지의 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누리"라고 외쳤다. 그는 가지의 후계자인 미성년자 파이살 2세를 위해 섭정으로 압드 알일라의 즉위를 지지했다. 새로운 섭정은 초기에는 누리의 영향력에 쉽게 따랐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영-이라크 조약 제4조에 따라 이라크는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그러나 누리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이라크군이 이라크 밖에서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독일 관리들은 추방되었지만, 이라크는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13]

1940년 6월, 프랑스 공방전은 일부 아랍 민족주의 세력들이 미국과 터키처럼 영국을 돕기보다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중립을 선택하도록 부추겼다. 누리는 대체로 친영국적인 입장이었지만, 알사바그는 독일 쪽으로 더 기울었다. 주요 군사 동맹이었던 알사바그를 잃으면서 누리는 "사건에 영향을 미칠 능력을 빠르게 잃었다."[14]

3. 4. 섭정과의 공존 및 갈등 (1941-1947)

1941년 4월, 친중립 세력이 권력을 잡고 라시드 알리 알카일라니를 총리로 임명했다. 누리는 영국이 통제하는 트란스요르단으로 피신했고, 이후 카이로로 이동했다. 영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귀국하여 영국 점령 하에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2년 반 이상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1943년부터 섭정 압드 알일라는 각료 선택에 더 큰 발언권을 얻었고 더 큰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1947년 말까지 영국의 군사 점령 하에 있었다. 그는 1945년 7월부터 1946년 11월까지, 그리고 1948년부터 1949년 1월까지 이라크 상원 의장을 역임했다.[15]

1947년 섭정의 보다 자유주의적인 정책 시도는 기존 질서가 직면한 문제들을 막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군주제 수립 이후 이라크의 사회와 경제 구조는 도시 인구 증가, 중산층 급증, 그리고 이라크 공산당의 역할 증대로 인한 농민과 노동 계급의 정치적 의식 증가와 함께 상당히 변화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와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정치 엘리트는 군주제를 보존했을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군주제 마지막 1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려는 엘리트의 시도에서 누리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기술 덕분에 섭정보다 점점 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15]

3. 5. 정치적 불안과 저항 (1948-1958)

1948년 1월, 누리 알사이드는 영국과의 새로운 앵글로-이라크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이라크 국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영국에게 이라크 문제에 더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이 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즉각적으로 발생했다. 학생들과 이라크 공산당이 주도한 이 시위는 며칠 동안 격화되었고,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8] 섭정 '압드 알-일라흐는 조약을 부인했지만, 누리는 시위대에 대한 가혹한 억압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누리는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8]

1950년, 누리는 이라크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유대인 이주를 담당하는 회사의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하고, 유대인 공동체 대표를 소환하여 이스라엘을 비난하며 유대인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1954년, 누리는 바그다드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이 조약은 이라크를 서방 국가 및 터키와 같은 지역 동맹국과 정치적, 군사적으로 연결하는 조약이었다. 누리는 이 조약을 통해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지만, 국내에서는 많은 반발을 샀다. 누리는 정치적 탄압과 검열을 강화하여 반대 여론을 억눌렀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이 이집트를 침공하자 이라크 내 여론은 이집트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누리는 공개적으로 침공을 비난하고, 영국 대표들과의 회의 참석을 거부했으며,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8]

이후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 등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와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8] 누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8] 야당 세력들은 연합하여 1957년 국민연합전선을 결성했고, 군 내부에서도 자유장교최고위원회가 결성되었다.

4. 7월 14일 혁명과 죽음

1958년 레바논 위기가 심화되자, 요르단은 이라크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군은 7월 14일에 요르단으로 가는 척했지만, 대신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그날 준장 압드 알카림 카심과 대령 압둘 살람 아리프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왕실에 바그다드의 리하브 궁전을 비우도록 명령했다.[9] 이 쿠데타로 파이살 2세 국왕, 압드 알-일라 왕세자 부부, 압둘 일라의 어머니, 국왕의 고모 등 왕족과 하인들이 총살당하면서 40여 년 만에 이라크 왕정이 무너졌다.[9]

누리 알사이드는 변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으나, 다음 날 바그다드 시내에서 체포되어 즉시 총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분노한 폭도들에 의해 훼손되었는데, 시신을 파내어 바그다드 거리를 끌고 다니며 매달고, 불태우는 등 심하게 훼손하여 결국 시내 버스에 반복적으로 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9][16]

4. 1. 혁명의 발발

1958년 레바논 위기가 심화되자, 요르단은 이라크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군은 7월 14일에 요르단으로 가는 척했지만, 대신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그날 준장 압드 알카림 카심과 대령 압둘 살람 아리프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왕실에 바그다드의 리하브 궁전을 비우도록 명령했다.[9] 파이살 2세 국왕, 압드 알-일라 왕자와 그의 아내 히얌 공주, 압둘 일라의 어머니 나피사 공주, 국왕의 고모 아바디야 공주, 그리고 여러 하인들이 안뜰에 모였다. 이들은 벽을 향해 서라는 명령을 받았고, 쿠데타의 일원인 압두스 사타르 아스 사브 대위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로써 40여 년 만에 이라크 왕정은 무너졌다.[9]

4. 2. 누리 알사이드의 최후

1958년 레바논 위기가 심화되자, 요르단은 이라크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군은 7월 14일에 요르단으로 가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그날 준장 압드 알-카림 카심과 대령 압둘 살람 아리프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왕실에 바그다드의 리하브 궁전을 비우도록 명령했다. 파이살 2세 국왕, 압드 알-일라 왕자와 그의 아내 히얌 공주, 압둘 일라의 어머니 나피사 공주, 국왕의 고모 아바디야 공주, 그리고 여러 하인들이 안뜰에 모였다. 이들은 벽을 향해 서라는 명령을 받았고, 쿠데타의 일원인 압두스 사타르 아스 사브 대위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로써 40여 년 만에 이라크의 군주제가 무너졌다.

누리 알사이드는 변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으나, 다음 날 바그다드 시내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시 총살되었고, 그날 매장되었다. 그러나 분노한 폭도들이 그의 시신을 파내어 바그다드 거리를 끌고 다니며 매달고, 불태우고, 훼손했다. 결국 시신은 시내 버스에 반복적으로 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9][16]

5. 개인사 및 가족 관계

누리 알사이드는 1936년 이집트 상속녀 에스마트 알리 파샤 파흐미와 결혼한 아들 사바 아스-사이드를 두었다. 이들은 팔라(1937년생)와 이삼(1938년생) 두 아들을 두었다.[10]

사바 아스-사이드는 바그다드 인구의 25~40%를 차지하던 유대인 여성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았다. 그는 이라크에서 쫓겨난 후,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이는 이스라엘로 도망갔다.[10]

요르단 국왕 후세인의 개인 비행사였던 팔라는 처음에는 나흘라 엘-아스카리와 결혼하여 아들 사바를 두었다. 그는 1974년 요르단 육군 장군 파와즈 파샤 마헤르의 딸 디나 파와즈 마헤르와 결혼하여 시마와 자이나 두 딸을 두었다.

팔라는 1983년 요르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삼은 런던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건축가였으며 198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1]

참조

[1] 서적 Reaching for Power: The Shi'a in the Modern Arab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서적 Steel Chariots in the Desert Jonathan Cape 1940
[3] 서적 Steel Chariots in the Desert
[4] 문서
[5] 문서
[6] 웹사이트 "'File 11/44 Leading Personalities in Iraq, Iran & Saudi Arabia' [32v] (64/96)" https://www.qdl.qa/e[...] 2018-09-10
[7] 문서
[8] 문서
[9] 문서 Iraq: From Sumer to Saddam
[10] 간행물 Foreign News: The Grandson of Nuri https://content.time[...] 1958-08-11
[11] 서적 We Are Iraqis: Aesthetics and Politics in a Time of War Syracuse University Press 2013
[12] 문서 وجوه عراقية,توفيق السويدي
[13] 서적 Iraq: The Search for National Identity Routledge Publishing 1995
[14] 서적 The Old Social Classes and New Revolutionary Movements of Iraq al-Saqi Books 2000
[15] 문서
[16] 문서 Iraq: From Sumer to Sad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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