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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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필성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관료로, 함경남도 덕원군 출신이다. 원산 원흥중학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서 법률과와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후, 대한제국 관리로 시작하여 한일 병합 후 함경남도 서기를 거쳐 풍산군수, 정평군수, 안변군수를 역임했다. 이후 전라남도 참여관, 황해도 지사를 지냈으며,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했으며, 중일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군에 기부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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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필성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신천 강씨 |
| 호 | 하정(夏庭) |
| 자 | 명원(明遠) |
| 생애 | |
| 출생 | 1875년 12월 8일 (음력) |
| 사망 | 1950년 9월 28일 |
| 묘소 | 한국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정부인 안동 김씨 |
| 자녀 | 5남 3녀 |
| 학력 | |
| 수학 | 한성사범학교 졸업 |
| 주요 경력 | |
| 관료 | 탁지부 주사 제국농상은행 평양지점장 조선식산은행 해주지점장 조선은행 전주지점장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역 |
| 사회 활동 | 신천 강씨 대종회장 민정참여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이사 흥사단 평의원 대동일보 사장 조선일보 사장 매일신보 사장 국민협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
| 기타 | 정미칠적 중 한 명 |
2. 생애
1885년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태어나 원산의 원흥중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했으며[1], 이후 독학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법률과와 정치경제과를 교외생으로 졸업했다.
대한제국 말기 원산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탁지부 직원, 재무감독국 주사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로 활동하며 함경남도 도서기, 풍산군·정평군·안변군 군수를 역임했다. 1924년 퇴관 후 잠시 금융조합장, 학교장 등으로 활동하다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며 관직에 복귀했다. 이후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거쳐 1937년 황해도 지사로 승진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총독부 정책에 적극 협력한 행적으로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이름이 올랐으며[2][3],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일본군에 군자금 10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1]
1939년 12월 21일 황해도 지사 재직 중 사망했다.[1] 사후 그의 행적은 친일 논란으로 이어져,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등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5년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태어났다. 1903년 원산의 원흥중학교 보통과를 졸업했다.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하며 정보 수집 등에 종사했다[1]. 이후 강의록을 통해 독학으로 공부하여 일본의 와세다 대학 교외생으로 1909년 법률과를 졸업하고, 1921년에는 정치경제과를 교외생으로 졸업하였다.
학업 중 또는 졸업 후 초기에는 원산 지역에서 활동했다. 1907년 종성은행 원산출장소에 근무하다 같은 해 4월 함흥농공은행 원산지점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는 대한제국 탁지부를 거쳐 재무감독국 주사로 임명되어 원산세무감독국에서 근무했다.
2. 2.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관료 생활
함경남도 덕원군 출신으로, 원산의 원흥중학교 보통과를 1903년 졸업했다. 이후 독학으로 공부해 일본 와세다 대학 교외생으로 1909년 법률과, 1921년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하며 정보 수집 등에 종사했다.[1] 대한제국 말기에는 원산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907년 함경북도 경성군의 경성농공은행 원산지점 임시 직원 및 함흥농공은행 원산지점 직원을 지냈고, 1908년에는 탁지부 원산지부 직원을 거쳐 재무감독국 주사로 원산세무감독국에서 근무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 하에서 함경남도 세무과 서기(도서기)로 임명되었다. 1914년에는 군수로 승진하여 신설된 함경남도 풍산군 군수를 시작으로 1917년 정평군 군수, 1922년 안변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1924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에서 1925년 덕원금융조합장과 사립 덕성학교 교장을 맡았고, 함경남도 도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며 다시 관직에 나섰다. 1932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발탁되었고, 1933년부터는 도 사무관과 산업부장을 겸임했다. 1937년 2월에는 고등관 2등인 황해도 지사로 승진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랐다.[2][3] 이 명감에는 강필성이 전남 산업부장 시절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추진한 자력갱생과 농촌진흥운동 등 식민지 산업 정책에 적극 협력하여 다각 영농 장려(박하 재배), 협동조합운동, 면화재배운동 등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황해도에서는 삼림 조림과 소 사육 등에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한 중일 전쟁 시기인 황해도 지사 재직 중에는 일본군에 군자금으로 1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1]
1939년 12월 21일 황해도 지사 재직 중에 사망했다.[1] 사후 그의 행적은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중추원, 관료 부문),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3. 친일 행적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하며 정보 수집 등에 협력했다.[1]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 하에서 관료로 활동했다. 1914년 함경남도 풍산군 군수를 시작으로 1917년 정평군수, 1922년 안변군수를 역임했으며, 1924년 퇴관 후 잠시 향리에서 활동하다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1932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관직에 복귀하였고, 1937년 2월에는 고등관 2등인 황해도 지사로 승진, 임명되었다.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랐다.[2][3] 이 명감에 따르면 강필성은 전남 산업부장 시절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주창한 자력갱생과 농촌진흥운동 등 식민지 병참기지화 정책에 영합하여 다각 영농 장려(박하 재배), 농촌 협동조합운동, 방적회사 유치를 위한 면화재배운동 등에서 성과를 거둔 공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황해도 지사 재직 시에는 삼림 조림과 계를 활용한 소의 조직적인 사육에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서훈 받았다.
황해도 지사 재직 중이던 1939년에는 중일 전쟁에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에 10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1]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해방 이후 친일 인사로 평가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중추원,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2004년 제정된 일제강점 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규정되었다.[1]
3. 사후 평가
2004년 대한민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1]
4. 수상
wikitext
참조
[1]
간행물
강필성(姜弼成)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2]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20-08-07
[3]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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