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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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제포로수용소는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이 설치한 최대 규모의 포로 수용소로, 1950년 11월부터 거제도 일대에 17만 명 이상의 북한군,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의 갈등으로 인한 유혈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1952년에는 수용소장이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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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포로수용소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거제포로수용소 |
| 한자 표기 | 巨濟捕虜收容所 |
| 영문 표기 | Geoje-POW Camp |
| 중국어 표기 | 巨济岛战俘营 |
| 위치 |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동 362 |
| 상세 정보 | |
| 종류 | 포로수용소 |
| 시대 | 1951년 |
| 면적 | 9,306m2 |
| 지정일 | 1983년 12월 20일 |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
| 문화재청 코드 | 31,00990000,38 |
2. 역사적 배경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방어전 성공으로 많은 조선인민군 포로를 확보했다. 1950년 8월 1,000명 미만이던 포로 수는 11월에 13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3] 그러나 포로 수용 시설과 인력 부족, 경비병 훈련 미흡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3]
부산 인근에 수용된 포로들 사이에서는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다시 유엔군에 포획된 전 대한민국 육군 출신들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주도권을 잡았다.[3] 1951년 1월, 유엔은 포로들을 거제도로 이송하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 포로를 분리하여 수용소 내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3]
1951년 1월부터 거제도에 수용소 건설이 시작되었고, 5만 명 이상의 포로가 이송되었다.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수용되면서, 좁은 공간에 많은 포로들이 밀집되어 관리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3] 수용소 내에서는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951년 6월에는 최초의 집단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3명의 포로가 사망했다.[5] 이후에도 소요 사태와 살인 사건이 이어졌다.[3]
1952년 5월에는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거제도 봉기로 이어졌다. 유엔군은 포로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조건으로 도드 준장을 석방시켰다.[3]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로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고, 포로들은 송환되거나 제3국을 선택하여 정착했다.[2]
2. 1. 설치 배경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방어전에서의 돌파 이후,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에 밀려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유엔 반격전 당시 빠른 기동으로 많은 수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 수는 1950년 8월 1,000명 미만에서 11월에는 13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3]그러나 이렇게 많은 포로를 수용할 시설과 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일 시설은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로를 감시할 충분한 인력도 부족했고, 경비병들 또한 훈련이 부족했다. 이러한 보안 인력의 양과 질 문제는 이후 유엔 포로 수용소 사령관들을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다.[3]
초기 포로들은 부산 근처에 수용되었는데,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유엔군에게 다시 포획된 전 대한민국 육군 군인들이 수용소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반공산주의라고 칭했고, 대한민국 육군 경비병들의 호의를 얻어 권력을 잡고 통제할 수 있었다.[3]
2. 2. 운영 과정
1950년 11월부터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고현, 상동, 용산, 양정, 수월, 해명, 저산지구 등 360만 평에 걸쳐 설치된 수용소에는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포로 2만 명,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이 수용되었다.[8]1951년 1월, 포로 수가 137,000명에 이르자 유엔은 한국 남해안의 섬인 거제도에 포로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달 말까지 50,000명 이상의 포로들이 본토에서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곧 북쪽 해안의 두 개의 바위가 많은 계곡에 각각 8개의 수용소로 세분된 4개의 울타리가 건설되었다. 각 수용소는 원래 700~1,200명을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곧 수용 능력을 5배나 초과했다. 섬의 제한된 토지 때문에 각 수용소 사이의 공간도 포로들을 수용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3]
부산 근처에 수용되었던 포로들은,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유엔군에게 재포획된 전 대한민국 육군 군인들이 수용소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반공산주의라고 칭했고, ROK 경비병들의 호의를 얻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통제할 수 있었다.[3] 그러나 거제도로 이전하기 전에 남한 출신 포로들을 북한 출신 포로들과 분리하면서, 많은 수용소에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3]
수용소 내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1951년 6월 18일/19일, 일부 북한 장교들이 변소와 쓰레기 구덩이를 파야 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최초의 집단적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ROK 경비대가 76번 수용소에 들어가자 포로들은 돌을 던졌고, 군인들은 발포하여 3명의 포로를 살해했다.[5] 1951년 7월과 8월에 경비병들은 8명의 포로를 더 살해했다.[5] 9월에는 15명의 포로가 자칭 인민 재판소에 의해 살해되었고, 78번 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3명이 더 사망했다.[3]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8] 이는 거제도 봉기로 이어졌으며, 공산주의 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석방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유엔군은 포로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조건으로 도드 준장을 석방시켰다.[3]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보내졌다.[8] 빅 스위치 작전과 리틀 스위치 작전을 통해 약 83,000명의 포로가 북한으로, 22,000명이 남한으로 송환되었다.[2] 그러나 76명의 북한 및 12명의 중국 전쟁 포로는 송환을 거부하고 인도,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정착하는 것을 선호했다.[2]
3. 주요 시설 및 구조

1950년 11월 27일부터 유엔군에 의해 설치되어 1951년 2월부터 포로 수용 업무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km2 규모였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구역이 설치되었다. 수용소 운영을 위해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 등 자체 지원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부지는 현재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3. 1. 시설 배치 및 규모
1950년 11월 27일부터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km2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개시되었다.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3. 2. 주요 시설물
거제포로수용소는 자체 지원을 위한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주요 시설은 다음과 같았다.이 시설들은 포로수용소 운영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포로수용소 부지는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시설은 다음과 같다.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주요 시설물:
- 탱크 전시관

탱크 전시관 - 대형 디오라마관 --
- 6.25 역사관
- 포로대립관
- 포로폭동관
- 64야전병원
- 흥남철수 작전 기념비 --
- 잔존 유적
- 체험 및 놀이터
- 막사
- 취사장
- 포로귀환열차
4. 수용 및 관리
1951년 1월, 유엔은 한국 남해안의 섬 거제도에 포로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남한 출신 포로들을 북한 출신 포로들과 분리하면서, 지도자를 잃은 많은 수용소에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거제도는 보안 문제는 덜했지만, 자연적인 수자원이 거의 없어 초대 수용소장인 하트리 F. 데임 대령은 11만 8천 명의 현지인, 10만 명의 피난민, 15만 명의 포로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댐을 건설하고 빗물을 저장해야 했다.[3] 1월에 유엔 제1 포로 수용소의 첫 번째 울타리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달 말까지 5만 명 이상의 포로들이 본토에서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곧 북쪽 해안의 두 개의 바위가 많은 계곡에 각각 8개의 수용소로 세분된 4개의 울타리가 건설되었다. 원래 각 수용소는 700~1,200명을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곧 수용 능력을 5배나 초과했다. 섬의 제한된 토지 때문에 각 수용소 사이의 공간도 포로들을 수용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이는 시설 건설과 울타리 감시에 필요한 경비병 수를 절약했지만, 혼잡한 수용소 관리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수천 명의 사람들을 좁은 지역에 밀집시키고 각 수용소를 철조망으로만 분리함으로써 자유로운 의사 교환과 대규모 시위 및 폭동을 계획하고 실행할 기회가 생겼다.[3]
거제도 포로 수용소 초기에는 소요 사태와 간헐적인 저항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이는 ROK 경비병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ROK 군인과 KPA 군인 간의 반감은 말다툼, 위협, 폭력 사태로 쉽게 번졌다. 처음에는 포로들이 경비병보다 더 나은 식량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긴장도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는 조정되었다. 내부 분쟁에서 미국 육군(US) 보안 부대는 한국어를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했고, 개입을 꺼렸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경비병과 포로 간의 악감정은 문제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미국은 1949년 제네바 협약의 포로에 관한 조항을 비준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그 조항을 준수하기로 했다.[3]
개성에서의 협상이 시작될 때까지 불화와 공개적인 저항은 산발적이었다. 그 후 포로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강한 반공주의적 정서를 표명했고, 귀환을 두려워했으며, 다른 이들은 송환을 예상하여 수용소 내 공산주의 그룹으로 기울었다. 북한은 요원들을 전선으로 보내 스스로 포로가 되게 하여 포로 수용소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난민, 민간인, 지역 게릴라를 통해 본부와 연락을 유지하고, 마음대로 사건을 계획, 조직, 연출할 수 있었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신호, 돌을 던져 메시지 전달, 구두 전달 등의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병원 수용소는 정보 교환소이자 공산주의 저항의 중심지였다. 요원들은 수용소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했지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명목상의 지휘관 뒤에 숨어 활동했다. 요원들 뒤에는 휴전 회담의 KPA 대표인 남일 중장과 이상조 소장이 있었다. 휴전 협상과 포로 수용소 간의 밀접한 연관성은 휴전 회담 진행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한의 노력을 보여주었다.[3]
1952년 2월부터 앨릭시스 존슨(동아시아 담당 국무부 차관)의 제안에 따라 포로들이 "자유로운 남한"에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약속을 하지 않고, 귀국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기로 계획했다. 이 심사는 1952년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4월 19일까지 10만 6천 명 이상의 포로가 수용소 22개 구역에서 무장 심문팀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심문" 중에 수갑이 채워지고 구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후 남한 편에서 싸워야 했다. 요운트 장군은 귀국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을 이송하라고 명령했다.[3]
이후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4. 1. 포로 수용
1951년 6월까지 거제포로수용소에는 북한 조선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 있었다.[8] 그러나 강제 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 포로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유혈 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8] 이는 냉전 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 했다. 그들은 유엔군이 포로들에게 비인도적인 대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송환 및 심사 과정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결국 유엔군은 포로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도드 준장은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유엔군의 포로 관리 정책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포로 수용소 내에서는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의 갈등 외에도, 유엔군 경비병과 포로 간의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51년 6월에는 북한 장교들이 변소와 쓰레기 구덩이를 파는 것에 항의하며 경비병에게 돌을 던졌고, 경비병들이 발포하여 포로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이후에도 시위, 작업 거부, 살인 사건 등이 계속 발생하여 1951년 7월과 8월에는 경비병들이 8명의 포로를 추가로 살해했다.[5]
1951년 9월에는 15명의 포로가 인민 재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78번 수용소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3명이 사망했다.[3] 이러한 소요 사태는 수용소 내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고, 유엔군은 더 많은 보안 인력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처럼 거제포로수용소는 한국 전쟁의 참상과 냉전 시대의 이념 갈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4. 2. 포로 관리 문제
유엔군은 한국 전쟁 초기 포로 관리에 대한 경험과 인력이 부족했다. 1950년 8월 1,000명 미만이던 포로 수는 11월에 13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지만, 이들을 수용할 시설과 의식주를 제공할 시설, 그리고 이들을 감시할 인력이 모두 부족했다.[3]1949년 제네바 협약은 주로 포로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1951~52년 거제도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조직화된 포로 집단의 저항에 대처하는 억류 국가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협약 작성자들은 포로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억류 국가에 적극적인 위협을 제시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3]
북한은 포로 수용소에 요원들을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직화하고 통제했다. 이들은 난민, 민간인, 지역 게릴라를 통해 본부와 연락을 유지하며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신호, 돌을 던져 메시지 전달, 구두 전달 등의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병원 수용소는 정보 교환소이자 공산주의 저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요원들은 수용소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했지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명목상의 지휘관 뒤에 숨어 활동했다.[3]
1951년 9월, 15명의 포로가 자칭 인민 재판소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 이처럼 비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반격 운동이 시작되자, 전 중국 국민당 군인들과 북한 반공주의자들은 주먹과 수제 무기를 사용하여 상대방과 피비린내 나는 충돌을 벌였다.[4] 캥거루 법정은 완강한 포로들을 재판했고, 판결은 신속하고 종종 치명적이었다. 유엔 인력은 밤에는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았고, 포로들은 대개 두려워하거나 말을 꺼리기를 꺼렸기 때문에 구타와 살인은 처벌받지 않았다.[4]
이러한 폭력 사태의 증가는 포로 수용소에서 심사(screening) 과정의 시작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1951년 11월과 12월에 37,000명 이상의 포로가 심사를 거쳐 민간 억류자로 재분류되었다. 더 많은 포로가 송환을 원하지 않거나 반공주의적 동조를 나타내면서, 공산주의 포로들의 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더욱 심화되었다.[3]
1951년에 시작된 정보 및 교육 프로그램(indoctrination)은 포로들이 석방 후 도움이 될 직업 및 기술을 개발하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금속 가공 교육을 통해 무기를 생산하여 수용소 내부를 장악하려 했다.[3] 1952년 1월부터 포로들은 반공산주의 선전에 노출되었고, "민주주의의 장점"과 "공산주의의 오류"를 대조하는 강연에 공산주의자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3]
4. 3. 포로 송환 문제
한국 전쟁 중 1951년 6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포로 송환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북한은 포로 전원 송환을 요구한 반면, 유엔 측은 자유 송환 원칙을 내세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9]1953년 2월, 유엔 측의 제안을 북한이 수용하면서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최초의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는데, 유엔군 684명과 북한 측 6,670명이 송환되었다.[9]
1953년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 대통령은 거제도를 제외한 여덟 곳의 포로수용소에서 약 35,00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후 거제도에 있던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8]
5. 폭동 사건 (1952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국제연합군 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 측이 주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프랜시스 도드 준장을 납치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의 주도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 심사 중지, 포로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요구했다. 미군이 발포하여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3]
공산포로들은 평양의 지시에 따라 1952년 6월 20일을 기해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마크 클라크 대장은 포로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헤이든 L. 보트너 준장을 새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다.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는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3]
5. 1. 폭동의 배경
한국 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 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 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곳의 포로들은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뉘어 대립했는데, 이는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 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3]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프랜시스 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석방 조건으로 포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 심사 중지, 포로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3]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3]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 간 충돌로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3]
공산포로들은 고문, 폭행, 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의 지시에 따라 1952년 6월 20일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3]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러한 사건을 막기 위해 포로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헤이든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3] 6월 7∼10일에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고,[3]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는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게 살해된 사실을 발견했다.[3]
1950년 9월 유엔 반격전 당시 많은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3] 포로 수는 1950년 8월 1,000명 미만에서 11월에는 13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으나, 이들을 수용할 시설, 의복, 식량은 충분하지 않았다.[3] 포로 감시 인력과 경비병 훈련도 부족했다.[3]
1951년 1월, 포로 수가 137,000명에 이르자 유엔은 거제도에 포로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3] 남한 출신 포로와 북한 출신 포로를 분리했으나, 거제도는 자연적인 수자원이 부족하여 118,000명의 현지인, 100,000명의 피난민, 150,000명의 포로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댐 건설과 빗물 저장이 필요했다.[3] 1월 말까지 50,000명 이상의 포로들이 거제도로 이송되었고, 8개의 수용소로 세분된 4개의 울타리가 건설되었다.[3] 각 수용소는 700~1,200명을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곧 수용 능력을 5배 초과했으며, 제한된 토지로 인해 각 수용소 사이 공간도 포로 수용에 사용되었다.[3]
휴전 성립과 포로 문제 해결에 대한 희망으로 시정 조치가 지연되었다.[3] 미국은 1949년 제네바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준수하기로 했다.[3] 그러나 제네바 협약은 주로 포로 권리 보호를 위해 설계되었다.[3]
개성 협상 시작 전까지 불화와 저항은 산발적이었다.[3] 이후 포로들은 미래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고, 일부는 반공주의, 일부는 공산주의 성향을 보였다.[3] 북한 요원들이 포로수용소에 침투하여 난민, 민간인, 지역 게릴라를 통해 본부와 연락하며 사건을 계획, 조직, 연출했다.[3] 수용소 내에서는 시각적 신호, 돌, 구두로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병원 수용소는 정보 교환소 및 공산주의 저항 중심지 역할을 했다.[3] 요원들은 남일 중장과 이상조 소장의 지휘 하에 휴전 회담 진행에 압력을 가했다.[3]
공산주의자들의 수용소 장악 노력에 맞서 비공산주의 세력의 반격 운동이 시작되었다.[4] 전 중국 국민당 군인들과 북한 반공주의자들은 주먹과 수제 무기로 충돌했고, 캥거루 법정은 완강한 포로들을 재판했다.[4]
최초의 집단적 폭력 사태는 1951년 6월 18일/19일에 발생했는데, 일부 북한 장교들이 변소와 쓰레기 구덩이 작업을 거부하며 항의했다.[5] ROK 경비대가 76번 수용소에 들어가자 포로들이 돌을 던졌고, 군인들은 발포하여 3명의 포로를 살해했다.[5] 이후 시위, 작업 거부, 위협, 살인 사건 등이 발생했고, 1951년 7월과 8월에 경비병들은 8명의 포로를 더 살해했다.[5]
1951년 9월, 15명의 포로가 인민 재판소에 의해 살해되었고,[3] 78번 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3명이 사망했다.[3] 불안이 고조되자, 미국 제2 병참 사령부는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게 보안 인력 증원을 요청했다.[3]
5. 2. 폭동의 전개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 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 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석방 조건으로 포로 처우 개선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3] 미군이 포로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포하여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했다.1952년 6월 20일, 공산포로들은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해 포로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1952년 6월 10일, 포로 분산 수용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살해되었다.[3]
5. 3. 폭동의 결과 및 영향

한국전쟁 당시 국제연합군 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였던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1952년 5월 7일,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 미국 육군 프랜시스 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석방 조건으로 포로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3]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포로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헤이든 L. 보트너 준장을 새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1952년 6월 10일, 도드 준장을 구출하고 포로를 분산 수용하는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3]
도드 준장 납치 사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콜슨 준장이 포로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앞으로 포로들은 인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문구를 사용한 것은, 유엔군이 과거에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논란이 되었다.[3] 북한 및 중국 대표는 판문점에서 이 사건을 선전에 적극 활용하여 유엔 대표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3]
미국은 도드와 콜슨을 강등시키고, 포로 수용소 상황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휴전 회담에서 북한 측에 유리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유엔군의 포로 관리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6. 거제 포로수용소의 유산과 현재
거제 포로수용소는 한국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으로,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10] 1999년 유적관을 1차 개관하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건립하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10] 현재는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전쟁의 역사와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10]
6. 1. 역사적 의미와 교훈
거제포로수용소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8]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고통받았으며, 이 곳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했다.[8] 심지어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8]1953년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 이후,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되거나 남한에 남았다.[8] 일부 포로들은 송환을 거부하고 인도,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제3국을 선택하기도 했다.[2]
이러한 역사를 가진 거제포로수용소는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전쟁의 비극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사 교육의 장이다. 현재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과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전쟁의 역사를 배우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10]
더불어민주당은 거제포로수용소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미래 세대에게 평화로운 한반도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 2. 문화재 지정 및 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10]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10]포로수용소가 있었던 부지는 현재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 시설 종류 | 내용 |
|---|---|
| 탱크 전시관 | |
| 대형 디오라마관 | |
| 6.25 역사관 | |
| 포로대립관 | |
| 포로폭동관 | |
| 64야전병원 | |
| 흥남철수 작전 기념비 | |
| 잔존 유적 | |
| 체험 및 놀이터 | |
| 막사 | |
| 취사장 | |
| 포로귀환열차 |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10]
6. 3. 대중문화 속 거제 포로수용소
거제 포로수용소는 영화 스윙키즈(2018)와 하진의 소설 전폐의 배경으로 등장한다.[1] 영화 스윙키즈는 포로수용소에 주둔한 미국 장교의 지휘 아래 탭댄스단을 결성하는 포로들의 가상 이야기를 다룬다.[1]참조
[1]
웹사이트
A Guide to the Geoje POW Camp Park
http://www.geojeimc.[...]
[2]
웹사이트
North Korean POWs seeking last chance to return home after decades in exile
http://theconversati[...]
2020-09-02
[3]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4]
뉴스
South Korea's POW island revisited
https://www.bbc.com/[...]
2020-09-02
[5]
웹사이트
War Behind The Wire: Koje-do Prison Camp
http://www.historyne[...]
2014-08-25
[6]
간행물
Education of Prisoners of War on Koje Island, Korea
Educational Record
1955-04
[7]
서적
Bunk unscreened
[8]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9]
웹인용
상병포로교환
http://www.geojeimc.[...]
2010-06-18
[10]
문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시시설관리공단
200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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