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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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콘도르 군단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이다. 이 폭격은 스페인 내전 중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군의 작전의 일환으로, 도시의 4분의 3 이상을 파괴하고 170명에서 300명 사이의 민간인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파블로 피카소의 회화 《게르니카》를 비롯한 여러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이라는 점에서 현대 인권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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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폭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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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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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위치 | 게르니카 |
날짜 | 1937년 4월 26일 |
시간 | 16:30 ~ 19:30 (CET) |
공격 주체 | 스페인 국민군 콘도르 군단 이탈리아 공군 |
상세 정보 | |
작전명 | 뤼겐 작전 |
일부 | 스페인 내전 |
유형 | 시가지 공습 |
목표 | 논쟁 중 |
사망자 | 약 150–1,654명 (추정치 다양) |
2. 역사적 배경
스페인 바스크 지방 비스케이 주의 게르니카(바스크어로 게르니카-루모)는 빌바오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곳으로, 오랫동안 바스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게르니카코 아르볼라''(바스크어로 "게르니카의 나무")는 비스케이 지방 사람, 나아가 전체 바스크 민족의 전통적인 자유를 상징하는 참나무이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민족 정체성의 핵심으로 여겨졌으며, 오랫동안 "바스크 자유의 본고장"으로 칭송받았다.[34] 1912년부터 스페인 군대와 경찰에 무기를 공급해 온 아스트라-운세타 이 시아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폭격 당시 게르니카의 인구는 7,000명이었으며,[10] 전선은 30km 떨어져 있었다.[11][12]
2. 1. 스페인 내전과 바스크 지방
1936년 7월 쿠데타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바스크 자치정부는 독자적인 군 통제권을 가졌으나 빌바오를 중심으로 국민파와 공화파 간 갈등이 심화되어 전쟁 위기감이 고조되었다.[34]독일은 국민파 지원을 위해 콘도르 군단을 파견했고, 이들은 게르니카 폭격에 참여했다. 당시 바스크 자치정부는 독일군 병력을 예상하지 못했고, 훈련된 공군도 없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국민군의 진격으로 공화 정부 영토는 줄어들었다. 바스크 정부는 바스크군을 동원해 비스케이와 기푸스코아 일부를 방어하려 했다. 게르니카는 공화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국민군의 빌바오 점령 길목이자 공화군의 퇴로였다.
콘도르 군단 습격 전, 게르니카는 직접 전투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바스크군 23개 대대가 동쪽 전선에, 2개 대대가 게르니카에 주둔했다. 그러나 고정식 대공 방어 시설과 공화군 공군 엄호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루프트바페의 내전 참여는 반공주의와 제2차 세계 대전 병력 시험 목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헤르만 괴링의 뉘른베르크 재판 발언으로 뒷받침된다.[36]
제임스 코럼은 테러 폭격설과 달리 실제 목표는 다리와 도로였으나, 정밀 폭격 불가로 카펫 폭격을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리히트호펜이 게르니카의 중요성을 인식 못했고, 도시 물류 차단만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심리적 요소설에 반박했다.[38]
1931년 알폰소 13세 퇴위 후 제2 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개혁 실패로 민중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33년 총선거에서는 우파 CEDA가 약진하고,[75] 1936년 총선거에서는 좌파 인민 전선 정부가 성립되는 등 좌우 대립으로 사회 불안이 높아졌다.[76]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의 군사 쿠데타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바스크 지방은 나바라 지방과 알라바 지방은 국민군, 비스카이아 지방과 기푸스코아 지방은 공화국 편으로 나뉘어 내전이 벌어졌다.[77]
프랑코 군의 북방 작전 개시 전에도 독일 공군 공습은 훈련 목적으로 이루어졌다.[78][65][79] 콘도르 군단은 프랑코에게만 책임을 지고 북방 작전을 수행했다.[80] 1937년 1월 4일 하인켈 전투기 3대와 융커스 Ju52 폭격기 9대가 빌바오를 공습했다.[78] 반란군은 중공업 지대인 바스크에 집중 공격하기 위해 후고 슈페를레 지휘 하의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공군을 비토리아=가스테이스 부근에 집결시켰다.[82]
1937년 3월 31일 두랑고 폭격으로 몰라 장군 지휘 하의 북방 작전이 개시되었다.[83] 두랑고에는 총 4톤의 폭탄이 투하되어 즉사자 127명, 병원 사망자 150명 이상, 부상자 300명 이상이 발생했다.[84] 두랑고에는 방공 체제나 군사 시설이 없었고,[85] 역사학자는 "용서 없이 폭격당한 최초의 무방비 도시"라고 표현했다.[86] 비스카이아 지방은 연일 공습과 지상군 침공을 받았다.[87]
3. 게르니카 폭격 (뤼겐 작전)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항하여 국민파는 7월 쿠데타를 벌였고, 이후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바스크 민족주의로 인해 단독 군 통제권을 갖고 있었으나, 빌바오를 중심으로 국민파와 공화파 세력 간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이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콘도르 군단의 공격으로 게르니카는 전쟁의 상흔을 직격탄으로 맞았다. 게르니카 동쪽에 23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훈련된 공군은 없었고 자치정부는 독일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 콘도르 군단은 독일이 직접 명령권을 가졌으며,[171] 게르니카 폭격은 1970년대에 이르러 참가자들의 기록이 공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국민파 공격에 적극 가담하려 했으며, 25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엄호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국민군의 진격으로 공화 정부의 영토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스크 정부는 자체 경무장 병력인 바스크군을 동원하여 비스케이와 기푸스코아 일부 지역을 방어하려 했다. 폭격 당시 게르니카는 공화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국민군이 빌바오를 점령하기 위한 길목에 있었으며,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전쟁을 종결짓는 데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게르니카는 또한 비스케이 북동부에서 후퇴하는 공화군의 퇴로이기도 했다.
콘도르 군단의 습격 전, 게르니카는 직접적인 전투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공화군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바스크군 23개 대대가 게르니카 동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게르니카에는 또한 바스크군 2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고정식 대공 방어 시설은 없었고, 최근 공화군 공군의 손실로 인해 공중 엄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독일군은 빌바오와 인근 지방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파악하고, 공화군의 침투를 제지하고자 주변 교량과 길을 차단하려 했다. 첫 번째 목표는 다리 파괴였으며, 군세력 결집을 방해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폭격에는 도르니에사의 Dornier Do 17, 하인켈 111 2기, 융커스 3발 단엽기(Junkers Ju 52) 18기 등의 무기가 동원되었다. 이들은 250kg 고성능 폭발물, 50kg 경비행기용 폭발물, 1kg 소이탄 등을 탑재했다. 총 24대의 폭격기가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났으며, 총 폭발물은 22ton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임스 코럼은 독일 공군과 공군이 수행한 전격전 작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는 적의 사기를 꺾거나 붕괴를 돕기 위해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테러 폭격 교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1937년 게르니카 폭격, 1939년 비엘룬 폭격과 바르샤바 폭격, 1940년 로테르담 폭격 이후 테러 폭격이 독일 공군의 교리의 일부로 흔히 여겨졌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공군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테러 폭격 개념을 거부했지만,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낼 수 있는 폭격을 계속 허용했다.[14]
발터 베버 장군은 1935년 ''항공전 수행''이라는 교리를 집필했다. 독일 공군은 이 문서를 채택하여 줄리오 두에의 테러 폭격 이론을 거부했다. 테러 폭격은 적의 저항 의지를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키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15] 이러한 폭격 작전은 독일 공군의 주요 작전인 적군의 파괴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16]
3. 1. 폭격의 진행 과정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은 독일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공군이 협력하여 수행한 여러 차례의 공습으로 이루어졌다.- 1차 공습 (16:30경): 도르니에 Do 17 폭격기가 남쪽에서 접근하여 50kg 폭탄 12개를 투하했다.[39]
- 2차 공습 (15:30경): 이탈리아 SM.79 폭격기 3대가 소리아에서 출격하여 게르니카 동쪽의 도로와 다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도시 자체를 폭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으며,[39] 60초 동안 비행하며 50kg 경량 폭발성 폭탄 36개를 투하했다. 이때 피해는 이즈키에르다 레푸블리카나 정당 본부 등 일부 건물에 한정되었다.[39]
- 3차 공습 (18:00경):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 피아트 CR.32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하인켈 He 111 폭격기가 공격을 수행했다.[39]
- 4, 5차 공습: 독일 쌍발 엔진 항공기가 수행했다.[39]
- 주력 공습: 정오쯤 융커스 Ju 52 수송기들이 게르리카라이스 주변에서 임무를 수행한 후 재무장하고, 게르니카 폭격을 위해 이륙했다. 이들은 비스케이 만에서 우르다이바이 강 어귀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했다. 콘도르 군단의 제1, 제2 비행대는 16시 30분경에 이륙했고, 제3 비행대는 몇 분 뒤 부르고스에서 이륙했다. 이들은 비토리아-가스테이즈에서 피아트 전투기 편대와 귄터 뤼초프의 2. ''슈타펠''(제2 비행대) 소속 야크트그루페 88 (J/88)의 메서슈미트 Bf 109B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받았다.[85]
폭격에는 250kg 중형 고성능 폭탄, 50kg 경량 폭탄, 1kg 소이탄 등 다양한 종류의 폭탄이 사용되었으며, 총 22톤의 탄약이 투하되었다. 다음 날에는 메서슈미트 Bf 109 전투기들이 해당 지역을 공습하는 후속 조치가 계획되었다.
3. 2. 폭격의 결과
폭격으로 게르니카 시가지의 4분의 3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주요 무기고였던 운세타 사와 타예레스 데 게르니카, 공화당의 주청사였던 카사 데 훈타스 등도 파괴되었다.[38] 하지만 공격군이 목표했던 다리 파괴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그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건물 파괴로 수많은 파편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공화국 관련 군의 움직임은 크게 제한되었다.[38]3. 3. 폭격의 목표와 논란
콘도르 군단은 게르니카 인근의 다리를 파괴하고 공화국 군대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30] 그러나 폭격의 실제 목표가 민간인 학살과 도시 파괴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39]독일군은 빌바오와 인근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파악하고, 공화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주변의 다리와 길을 모두 차단하려 했다. 첫 번째 목표는 다리 파괴였으며, 이는 공화국 군대의 결집을 방해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폭격 중에는 다리의 복원이 제한되었고, 파편을 모아 수리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18]
이를 위해 도르니에사의 Dornier Do 17, 하인켈 111 2기, 융커스 3발 단엽기(Junkers Ju 52) 18기 등의 무기가 동원되었다. 이들은 250kg 고성능 폭발물, 50kg 경비행기용 폭발물, 1kg 소이탄 등을 탑재했다. 총 24대의 폭격기가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났으며, 총 폭발물은 22ton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8]
폭격으로 게르니카 대부분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전체 건물의 4분의 3 정도가 파괴되었다. 주요 무기고였던 운세타 사와 타예레스 데 게르니카, 공화당의 주청사였던 카사 데 준타스 등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공격군이 목표했던 다리 파괴는 거의 이뤄지지 않아, 목표 달성 여부는 불분명하다. 건물 파괴로 수많은 파편이 생겨났지만, 공화당 관련 군의 움직임은 어려움을 겪었다.[18]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국민군의 진격으로 공화 정부의 영토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스크 민족주의에 의해 형성된 바스크 정부는 자체 경무장 병력인 바스크군을 동원하여 비스케이와 기푸스코아 일부 지역을 방어하려 했다. 폭격 당시 게르니카는 공화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국민군이 빌바오를 점령하기 위한 길목에 있었으며,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전쟁을 종결짓는 데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게르니카는 또한 비스케이 북동부에서 후퇴하는 공화군의 퇴로이기도 했다.
콘도르 군단의 습격 전, 게르니카는 직접적인 전투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공화군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바스크군 23개 대대가 게르니카 동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게르니카에는 또한 바스크군 2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고정식 대공 방어 시설은 없었고, 최근 공화군 공군의 손실로 인해 공중 엄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제임스 코럼은 독일 공군과 공군이 수행한 전격전 작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는 적의 사기를 꺾거나 붕괴를 돕기 위해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테러 폭격 교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1937년 게르니카 폭격, 1939년 비엘룬 폭격과 바르샤바 폭격, 1940년 로테르담 폭격 이후 테러 폭격이 독일 공군의 교리의 일부로 흔히 여겨졌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공군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테러 폭격 개념을 거부했지만,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낼 수 있는 폭격을 계속 허용했다.[14]
발터 베버 장군은 1935년 ''항공전 수행''이라는 교리를 집필했다. 독일 공군은 이 문서를 채택하여 줄리오 두에의 테러 폭격 이론을 거부했다. 테러 폭격은 적의 저항 의지를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키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15] 이러한 폭격 작전은 독일 공군의 주요 작전인 적군의 파괴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16]
일부 역사학자들은 폭격이 전술적 목표를 넘어선 테러 폭격이었다고 주장한다.
4. 사상자 규모와 진실 공방
폭격으로 게르니카 시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전체 건물의 4분의 3 정도가 파괴되었다. 주요 무기고였던 운세타 사와 타예레스 데 게르니카, 공화당의 주청사였던 카사 데 준타스 등도 파괴되었다.[172]
시민 사상자 수는 자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사망자 1,654명, 부상자 889명으로 발표했다.[172] 이는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학살을 다룬 문학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수치이다.
하지만 파시스트 측은 공화주의자들이 게르니카를 떠나면서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실제 피해 상황 수습에는 소극적이었다. 프랑코의 어용지였던 아리바 신문은 1970년 1월 30일 게르니카 폭격 희생자가 12명에 불과하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1937년 4월 26일 폭격 당시 게르니카는 바스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며, 바스크 민족 정체성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당시 게르니카의 인구는 7,000명이었고, 전선은 30km 떨어져 있었다.[10][11][12] 그날은 장날이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 주민들까지 1만 명 이상이 몰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현대 역사학자들은 사망자 수를 170명에서 300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는 사망자 수가 1,700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5] 게르니카자라 히스토리아 탈데아의 초기 연구에서는 희생자 수를 126명으로 추정했으며, 이후 153명으로 수정했다.[2][3] 라울 아리아스 라모스는 250명, 호안 빌라로야와 조셉 M. 솔레 이 사바테는 3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26]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이끄는 국민주의 세력이 마을을 점령한 후, 정확한 사상자 수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바스크 정부는 혼란 속에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규모 폭격 작전에 대한 평가 이후, 게르니카의 수치를 다른 도시들의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수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발견되었다. 제임스 코럼은 게르니카에 투하된 폭탄의 양을 40톤으로 계산하고, 1,654명의 사망자 수가 정확하다면 폭탄 1톤당 4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드레스덴 폭격의 폭탄 1톤당 사망자 수 7.2~10.2명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코럼은 이러한 차이를 선전 효과를 노린 과장으로 보았다.
다음은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수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정리한 표이다.
4. 1. 언론 보도와 국제 사회의 반응
조지 스티어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던 ''더 타임스''의 기자였으며, 게르니카 폭격 사건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기사를 작성했다. 스티어의 보도는 "게르니카는 군사적 목표가 아니었다... 폭격의 목적은 민간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바스크 민족의 요람을 파괴하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 제국 독수리가 찍힌 폭탄 케이스를 증거로 제시하며 독일의 개입을 지적했다.[30] 그의 보고서는 ''뉴욕 타임스''에 배포된 후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과 분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더 타임스''는 공격 후 일주일 넘게 매일 이 사건을 보도했다.
- ''뉴욕 포스트''는 "게르니카의 성스러운 도시"에 흩어져 있는 민간인 시체 더미 위로 "공습"이라고 적힌 피 묻은 칼을 휘두르는 아돌프 히틀러를 묘사한 만평을 실었다.
- 미국 의회 기록은 게르니카에 독가스가 투하되었다고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노엘 몽크스는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스페인 주재 호주 특파원으로, 폭격 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베를린이 폭격을 부인하고, 프랑코는 안개 때문에 비행기를 띄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케이포 데 야노는 적군이 후퇴하는 동안 게르니카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전보를 받았다.[29]
이 사건은 1930년대에 걸쳐 커져가던 대중의 공습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켰으며, 다음 전쟁에서 도시 전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예측을 낳았다.
스탠리 페인은 스티어의 존재가 게르니카 폭격을 주요 언론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며칠 전 두랑고 마을이 폭격을 받아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스티어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폭격의 영향을 극적으로 묘사하려 했으며, 사상자 수를 1,000% 부풀렸다.[30]
폭격 이후, 호세 안토니오 아기레는 독일 공군이 바스크인들이 숭배하는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불태웠다고 비난하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31] 그는 신과 역사 앞에서 독일 비행기가 3시간 동안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고, 기관총 사격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공화주의자 측은 사망자 1645명, 부상자 889명으로 발표했다.
4월 27일,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은 유니온 라디오 세비야를 통해 주민들과 "적군"이 게르니카를 불태우고 폭파했다고 비난하며 국제 기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32] 그는 "독일 공군의 전무함"과 악천후를 증거로 제시했다.
4월 29일, 프랑코의 선전 부서는 야노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33] 이 이론은 ''타임스''를 포함한 보수적인 영국 언론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스티어의 보도는 다른 기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야노의 주장은 객관적인 증거와 모순되었다.
독일도 개입을 부인했다. 폰 리히트호펜은 독일군이 도시 외곽의 다리를 목표로 삼았다고 주장했지만, 독일군의 폭탄은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다.[37]
일부 국민당 기자들은 공화군 비행기가 도시를 폭격했다고 주장하거나, 바스크족 방화범에 의해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34] 프랑코 정권은 수십 년 동안 폭격을 축소했다. 1970년, ''아리바''는 폭격으로 단 1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35]
이러한 은폐 시도는 히틀러를 짜증나게 했고, 그는 프랑코 정부가 콘도르 군단의 책임을 면제하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은 루프트바페의 파괴력에 대한 우려를 높여 독일의 유화 정책을 장려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코는 군대나 군수 산업이 없는 도시는 장군이나 공군 사령관의 직접 명령 없이는 폭격될 수 없다는 이전 명령을 재확인했다.[30]
5. 전후 상황
게르니카는 폭격 이후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바스크 자치 정부는 망명 정부가 되었다. 조지 스티어 기자의 보도는 뉴욕 타임스 등에 실리며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29]
노엘 몽크스는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 특파원으로, 폭격 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자였다. 그는 베를린과 프랑코 측이 폭격을 부인하는 전보를 받았다.[29]
프랑코 정권은 초기에는 폭격 책임을 부인하고,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을 통해 게르니카 주민과 "적군"에게 책임을 돌리려 했다.[32] 또한 국제 기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으며, 4월 29일 프랑코의 선전 부서는 야노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33] 그러나 스티어를 비롯한 여러 기자들의 증언과 객관적인 증거들은 프랑코 측의 주장이 허위임을 입증했다.
독일 역시 연루를 부인했다. 폰 리히트호펜은 독일군이 도시 외곽의 다리를 목표로 삼았다고 주장했지만, 독일군의 폭탄은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다.[37]
일부 국민당 기자들은 공화군 비행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거나, 바스크 지방에서 만들어진 폭탄과 다이너마이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코 정권은 수십 년 동안 폭격을 축소하려 했으며, 1970년에는 사망자가 단 12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35] 이러한 은폐 시도는 오히려 국제적인 비난을 더욱 키웠고, 히틀러조차 프랑코 정부에 콘도르 군단의 책임을 면제하도록 요구할 정도였다.[30]
1931년 알폰소 13세 퇴위 후 제2 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스페인 내전 발발과 함께 바스크 지방은 분단되었다. 비스카이아 지방과 기푸스코아 지방은 공화국 정부 측에 섰다.[77] 프랑코 군과 독일 공군은 바스크 지방을 집중 공격했고, 1937년 1월 4일 빌바오 공습,[78] 3월 31일 두랑고 폭격이 이어졌다.[83] 휴 토마스는 두랑고를 "용서 없이 폭격당한 최초의 무방비 도시"라고 표현했다.[86]
프랑코 독재 정권은 오랫동안 "게르니카 파괴는 바스크인 스스로의 손에 의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프랑코파 역사학자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가 콘도르 군단의 소행임을 인정했지만,[157] 프랑코 군의 개입은 부인했다.[157][159][158] 1977년, 허버트 사우스워스는 폭격 지시가 프랑코 군 최고 사령부에서 나왔다고 결론지었다.[162] 같은 해 게르니카 폭격 학술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정부의 자료 공개 거부로 프랑코의 법적 책임은 밝혀지지 않았다.[161]
5. 1. 게르니카의 재건과 평화의 상징화

게르니카는 프랑코 정부 주도하에 1940년부터 재건되기 시작했다. 황폐 지역 부흥 위원회가 설치되어 건축가 곤살로 데 카르데나스와 루이스 데 가나가 재건 계획을 입안했다.[150] 도로와 공공 시설 위치는 변경되지 않았지만, 폭격 이전에는 부족했던 공원과 생활 편의 시설이 추가되었다. 마을 중심부 건물에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중심 광장은 정원으로 바뀌었다.[150] 게르니카 역 근처에는 광장이, 바스크 의사당 옆에는 원형 극장이 건설되었다.[150] 새 건물들은 이 지역의 역사적 건축 양식을 따라 붉은 기와 지붕으로 지어져, 마을의 예전 풍경을 되살렸다.[150] 1944년 재건 계획이 한창일 때는 프랑코 정부에 포로로 잡혀 있던 구 공화국 군 병사들이 동원되기도 했다.[151]
1980년대 초,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그림)이 스페인에 반환될 때, 게르니카는 그림 소장 장소로 프라도 미술관, 바르셀로나에 이어 3위(10%)의 지지를 얻었다.[152] 1981년 『게르니카』가 프라도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게르니카는 Urdaibai estuary|우르다이바이 하구영어의 상업 중심지 지위를 되찾았다.[153]
1988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독일 포르츠하임과 자매 도시 결연을 맺었다.[155][125] 1997년, 폭격 60주년 기념식에서는 주 스페인 독일 대사가 로만 헤어초크 연방 대통령의 사죄문을 대독했다.[155][156]
게르니카에서는 매년 4월 26일에 폭격을 추모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125] 1987년 50주년 기념식에는 히로시마시의 아라키 타케시 시장이 참석했다.[125] 1998년에는 독일 국회가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사죄를 만장일치로 결의했고, 같은 해 평화 박물관이 개관했다.[155][69]
6. 예술 작품에 미친 영향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에 영감을 받아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 공화국 정부관에 전시할 게르니카를 제작했다.[49] 피카소는 1937년 5월 11일에 그림을 시작하여, 흑백 페인트를 사용하여 두 달 넘게 ''게르니카''를 제작했다.[50]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렸으며, 스페인 민주화 과도기 동안 바스크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50] 현재 마드리드의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뉴욕 유엔 본부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입구 벽에는 복제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다.[50]
프랑스 조각가 르네 이셰는 게르니카 폭격 직후 조각 작품 게르니카를 제작했다.[51] 그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충격으로 딸을 모델로 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으나, 생애 동안 단 한 번만 전시되었다.[51]
폴 엘뤼아르는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시를, 독일 판화가 하인츠 키비츠는 판화 게르니카를 제작했다.[148] 프랑스 영화감독 알랭 레네는 1950년에 단편 영화 게르니카를 제작했다. 2016년 영화 《게르니카》는 게르니카 폭격을 배경으로 한다.[54]
7. 현대의 평가와 역사적 교훈
게르니카 폭격은 전쟁의 어휘에 공포 폭격의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생존한 주민들과 바스크인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분쟁으로 인한 지속적인 분열 때문에, 이 사건은 여전히 감정과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게르니카 폭격은 공중 폭격기에 의한 민간인 고의적 공격 혐의로 인해 즉각적인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41] 이는 "일탈"로 널리 인식된 전략으로, "국제적 공포"를 야기했다.[42]
게르니카의 참상에 대한 스티어의 보도는 바스크 사람들에게 큰 감사를 받았다. 스티어는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렸고, 바스크 당국은 후에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두 개의 거리를 명명하고[43][44] 그의 청동 흉상을 의뢰했다.[45]
프랑코 정권의 보도 축소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도는 확산되었고 당시 광범위한 국제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반응과 비난은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현대 인권 개념의 형성에 있어 전환점으로 여겨진다.[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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