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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엘뤼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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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엘뤼아르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앙드레 브르통 등과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시를 발표했다.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며 저항 시를 썼으며, 특히 "자유"는 프랑스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전후에는 평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스탈린을 찬양하는 등 정치적 행보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결혼과 이별을 겪었으며, 그의 시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저항시와 민중시에 영향을 미쳤다. 엘뤼아르는 195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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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엘뤼아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엘뤼아르 {{circa|1945}}
엘뤼아르
본명외젠 에밀 폴 그랭델
출생1895년 12월 14일
출생지생드니, 프랑스
사망1952년 11월 18일 (56세)
사망지샤랑통르퐁, 프랑스
묘지페르 라셰즈 묘지
국적프랑스
직업시인, 작가
학력
학교콜베르 고등 학교
문학 활동
활동 기간20세기
장르
사조쉬르레알리슴
영향다다이슴
대표 작품자유
개인 정보
배우자갈라 달리 (1917년 결혼, 1929년 이혼)
마리아 벤츠 (누슈) (1934년 결혼, 1946년 사망)
도미니크 르모르 (1951년 결혼)
자녀1명
기타 정보
서명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필명모리스 엘뱅, 디디에 데로슈, 장 뒤 오, 블랑 (주로 지하 출판)
주목할 만한 작품자유
게르니카의 승리
『고뇌의 수도』
『무원죄의 잉태』
『자유로운 손』
『시와 진실』
『고통의 무기』
『https://fr.wikipedia.org/wiki/Cours_naturel』
『평화의 얼굴』

2. 생애

파리 북쪽 생드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폐결핵을 앓아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요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65] 이 시기(1911년~1913년) 요양소에서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같은 미국 시인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독가스 공격으로 폐를 다쳐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았다. 1917년 러시아 출신의 갈라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훗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 1924년 엘뤼아르를 떠났다. 이후 1934년에는 마리아 벤즈(누슈)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66]

전쟁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시인 에드몽 자베스와도 교류했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는 인민 전선을 지지하며 반파시즘 활동에 참여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저항시를 썼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고뇌의 수도(Capitale de la douleur|카피탈 드 라 둘뢰르프랑스어)》(1926년), 《사랑은 시(L'Amour la Poésie|라무르 라 포에지프랑스어)》(1929년), 《정치적 진실(Poésie politique|포에지 폴리티크프랑스어)》(1948년) 등이 있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와 논리를 벗어난 비유를 통해 쉬르레알리즘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점차 어휘가 투명해지고 내면의 속삭임 같은 서정적인 가락으로 변화했다. 그는 불안과 고뇌, 사랑과 전쟁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고 노래했듯 인간의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삶의 희망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1952년 11월 18일, 과로와 협심증으로 샤랑통르퐁 자택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거행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5년 12월 14일, 파리 북쪽 교외의 생드니에서 Eugène-Émile-Paul Grindel|외젠 에밀 폴 그랑델프랑스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1] 아버지는 회계사였다가 후에 부동산 회사를 설립한 클레망-외젠 그랑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인 잔느-마리 쿠쟁이었다. 아버지 클레망-외젠은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엘뤼아르'라는 성은 21세 때 모계 쪽 할머니 펠리시의 성을 따른 것이다.[12]

엘뤼아르는 생드니와 올네수부아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1908년경 가족이 파리 10구의 루이 블랑 거리로 이사했고, 엘뤼아르는 장학금을 받아 콜베르 고등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16세에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1914년 4월까지 스위스 다보스 근처 클라바델 요양소에서 지냈다.[65]

이 요양 기간 중(1911년 ~ 1913년경)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미국의 휘트먼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 자극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요양소에서 그는 동갑인 러시아 소녀 Helena Diakonova|헬레나 디아코노바프랑스어를 만났고, 그녀에게 '갈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엘뤼아르는 갈라에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과 열정을 털어놓았고, 갈라는 그의 재능을 믿고 격려하며 시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엘뤼아르의 첫 뮤즈이자 솔직한 비평가였다. 또한 요양소에서 브라질의 유명한 시인이 될 마누엘 반데이라와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갈라와의 만남

폐결핵을 앓아 1912년 7월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의 클라바델 요양소에서 1914년 2월까지 요양했다.[13][14] 이 시기 엘뤼아르는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등 미국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65] 요양소에서 그는 동갑내기 러시아 여성 엘레나 이바노브나 디아코노바를 만났고, 그녀에게 '''갈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13] 교양 있고 독립적인 성격의 갈라는 엘뤼아르에게 시인이 되라고 격려했으며, 그의 뮤즈이자 비평가 역할을 했다.

1914년 8월, 19세 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2월에 징집되어 보조 부대에 배속되었다.[15][16][17] 그러나 편두통, 기관지염, 뇌 빈혈, 만성 충수염 등 건강 문제로 1915년 대부분을 군 병원에서 보냈다. 1916년 8월부터는 솜주 아르지쿠르의 야전 병원으로 옮겨져 부상병들의 고통과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15][16][17] 이 경험은 그를 평화주의와 자유지상주의로 이끌었다. 엘뤼아르는 전쟁 중 독가스 공격으로 폐를 다쳐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65]

한편, 1914년 요양소를 나와 각자의 고향인 파리모스크바로 돌아갔던 엘뤼아르와 갈라는 전쟁으로 인해 떨어져 지내야 했다. 갈라는 엘뤼아르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그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의붓아버지로부터 소르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파리행 허락을 받아냈다. 여러 나라를 거쳐 마침내 파리에 도착한 갈라는 1916년 9월 엘뤼아르와 재회했고,[15][16][17] 두 사람은 1917년 2월 21일 정식으로 결혼했다.[15][16][17]

결혼 직후 엘뤼아르는 자원하여 최전선 참호 근무를 자처했고, 갈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선으로 떠났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어 1917년 3월 20일 초기 흉막염 진단을 받고 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후 다시 보조 부대에 배속되어 종전을 맞이했다.[15][16][17] 1918년 5월 10일, 딸 세실이 태어났다.[15][16][17]

2. 3. 초현실주의 운동 참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엘뤼아르는 갈라에게 "전쟁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삶을 위해 싸운 후에 행복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 귀가를 기다리며 『의무와 불안』(Le Devoir et l'Inquiétude프랑스어)과 『평화를 위한 작은 시』(Petits Poèmes pour la paix프랑스어)를 출판하고, 출판사의 조언에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문학계 인사들에게 이 시집들을 보냈다.

1919년 장 폴랑은 엘뤼아르의 편지에 감탄하며 답장을 보냈고, 그를 당시 문예지 『리테라튀르』(Littérature프랑스어)를 막 창간한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에게 소개했다. 같은 해 3월, 군복 차림의 엘뤼아르는 이들과 처음 만났다. 수줍어하는 엘뤼아르였지만, 브르통 등은 그의 시에 매료되어 다음 호 『리테라튀르』에 그의 작품을 싣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은 기존 사회 질서와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거부하며 보헤미안적인 삶을 지향했고, 스위스에서 시작된 다다이즘 운동에서 사상적 공감대를 찾았다. 엘뤼아르는 『리테라튀르』에 시를 기고하는 한편, 『프로베르브』(Proverbe프랑스어)라는 잡지를 직접 창간하여 피카비아 등의 작품을 싣는 등 다다 운동에 참여했다.[20][21] 이 시기 다다 시집 『동물들과 그들의 인간들, 인간들과 그들의 동물들』(Les Animaux et leurs hommes, les hommes et leurs animaux프랑스어), 『생활 필수품과 꿈의 결과』(Les Nécessités de la vie et les conséquences des rêves프랑스어)를 발표했다.

1921년 11월, 엘뤼아르 부부는 쾰른에서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만났고, 엘뤼아르는 그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1922년 8월, 엘뤼아르는 에른스트가 자신의 여권을 이용해 프랑스로 불법 입국하는 것을 도왔고[21], 장 폴랑은 에른스트에게 가짜 신분증을 제공하며 다시 도움을 주었다. 파리 외곽 자택에서 엘뤼아르, 갈라, 에른스트 세 사람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삼각관계를 이루었다. 에른스트는 이 시기 엘뤼아르, 브르통, 아라공, 수포, 데스노스, 페레, 조르조 데 키리코, 장 아르프, 장 폴랑, 르네 크르벨, 갈라 등 초현실주의 그룹 인물들을 그린 대작 『친구들의 모임』(Au rendez-vous des amis프랑스어)을 그려 1923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27][28] 엘뤼아르는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불사자의 불행』(Les Malheurs des immortels프랑스어, 1923)과 갈라에게 헌정된 『침묵의 결여에』(Au défaut du silence프랑스어, 1925)를 출간했다. 갈라에 대한 사랑과 에른스트에 대한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엘뤼아르는 클럽(젤리스(Zelli's), 시라노스(Cyrano's), 패럿(Parrot), 미첼스(Mitchell's) 등)에서 밤을 보내며 술로 괴로움을 달랬다.

1921년부터 트리스탕 차라와 브르통 사이에 다다이즘의 방향성을 둘러싼 대립이 심화되었다.[22] 1922년 브르통이 '현대 정신의 강령 결정과 옹호를 위한 파리 회의'를 소집했을 때 차라는 참가를 거부했고, 브르통은 일간지 『코메디아』(Comœdia프랑스어)에 "다다 이후"라는 글을 기고하며 차라를 비판했다. 차라는 이에 맞서 『수염 난 심장』(Le Cœur à barbe프랑스어)지를 창간했고, 엘뤼아르는 초기에는 차라를 지지하여 이 잡지에 페레, 수포, 마르셀 뒤샹, 조르주 리브몽-데세뉴, 에릭 사티, 비센테 우이도브로 등과 함께 글을 실었다.[23]

그러나 1923년 7월 6일 미셸 극장에서 열린 '수염 난 심장의 저녁' 행사에서 다다이스트 피에르 드 마소가 피카소를 비난하는 선언문을 낭독하자, 이에 격분한 브르통 등이 드 마소를 폭행하고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기존 질서 파괴를 외치던 다다이즘이 공권력에 의존하는 모순을 드러낸 이 사건[24][25]을 계기로 엘뤼아르는 차라와 결별했다. 이는 다다이즘의 종언을 알리는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다다이즘과 달리 무의식에서 새로운 표현을 찾으려 했던 브르통 중심의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엘뤼아르가 완전히 합류하는 전환점이 되었다.[26]

정신적 위기 속에서 『죽지 않고 죽는 것』(Mourir de ne pas mourir프랑스어)을 쓰던 엘뤼아르는 1924년 3월 24일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루이 아라공에게 고통스러운 현재를 끝내고 싶다고 고백한 뒤였다. 7개월 후, 갈라는 편지를 받고 그를 찾아 사이공에서 다시 데려왔다. 귀국 후 그는 이 시기의 고뇌를 담아 브르통에게 헌정한 시집 『죽지 않고 죽는 것』을 발표했다.

1924년파리 7구의 그르넬 가에 초현실주의 연구소가 설립되고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는 등 초현실주의 운동이 본격화된 해였다. 엘뤼아르는 아나톨 프랑스 사후 초현실주의자들이 공동으로 발표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비판 소책자 『시체』(Un Cadavre|엉 카다브르프랑스어)에 「흔해 빠진 노인」(Vieillard infect프랑스어)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의 상징적인 행위에 동참했다.[29][30] 같은 해 12월 1일 창간된 문예지 『초현실주의 혁명』(La Révolution surréaliste|라 레볼뤼시옹 쉬르레알리스트프랑스어)에도 창간호부터 아라공, 페레, 데스노스 등과 함께 시를 게재하는 등[31],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32]

엘뤼아르는 1925년 초부터 리프 전쟁을 지지했으며, 1927년 1월에는 아라공, 브르통, 벤자민 페레, 피에르 유니크 등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공동 성명서 "밝은 날에"(Au grand jour|오 그랑 주르프랑스어)를 발표하며 정치적인 입장도 명확히 했다. 이 시기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집 『고통의 수도』(Capitale de la douleur|카피탈 드 라 둘뢰르프랑스어, 1926)와 『사랑은 시』(L'Amour la Poésie|라무르 라 포에지프랑스어, 1929)를 출판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집 『시적 자각, 시의 습관』은 아랍어로 번역되어 1940년 이집트 잡지 『알 타타우르』(Al Tatawwurar)에 게재되기도 했다.[9]

1928년 엘뤼아르는 폐결핵이 재발하여 갈라와 함께 스위스 클라바델 요양소로 갔으나,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동행이었다. 갈라는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났고, 이후 엘뤼아르를 떠나 달리와 남은 생을 함께했다.

2. 4. 스페인 내전과 반파시즘 활동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인민 전선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일으킨 쿠데타를 접하고 이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듬해인 1937년 나치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폭격 만행에 분노하여 이를 규탄하는 시 〈게르니카의 승리〉(La Victoire de Guernica프랑스어)를 발표했다.[4]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적 시기에 엘뤼아르는 동료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예술을 통한 저항 정신을 공유했다. 그는 피카소에게 "당신은 손가락 사이에 불꽃을 쥐고 불처럼 그림을 그립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 활동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동원되었고, 1940년 6월 휴전 이후 아내 누슈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1942년 1월, 그는 누슈를 마키가 활동하던 베즐레 근처의 친구 크리스티앙 제르보와 이본 제르보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같은 해 엘뤼아르는 독일 점령 하에서 불법화된 프랑스 공산당에 재가입을 신청했다.[56]

그의 대표적인 저항시 「자유」(Liberté프랑스어)는 21개 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처음에는 'Choix revue프랑스어'에 실렸다가 이후 수천 부가 인쇄되어 영국 공군 비행기에 의해 점령된 프랑스 상공에 뿌려졌다. 이 시는 억압받는 프랑스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전쟁 중 그는 ''Sept poèmes d'amour en guerre|전쟁 중의 일곱 편의 사랑의 시프랑스어''(1944)와 ''En avril 1944: Paris respirait encore!|1944년 4월: 파리는 아직 숨쉬고 있었다!프랑스어''(1945, 장 위고 삽화)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42년 엘뤼아르는 남부 자유 지역에서 활동하던 피에르 세겔스를 통해 ''Poésie involontaire et poésie intentionnelle|무의식의 시와 의도한 시프랑스어''를 인쇄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불법화된 공산당 주도의 전국 작가 위원회(Comité national des écrivains)를 북부 점령 지역에서 조직하기 위해 대독 협력을 거부하는 작가 및 시인들과 접촉하며 규합에 힘썼다. 남부 자유 지역에서는 이미 루이 아라공, 엘자 트리올레, 장 폴랑 등이 전국 작가 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43년 초, 아라공은 남북 지역 위원회 활동을 통합하고 강화하기 위해 위조 통행증을 가지고 파리로 와 엘뤼아르와 10년 만에 재회했다.[56]

1943년, 엘뤼아르는 피에르 세제르, 프랑수아 라슈날, 장 레스퀴르와 함께 저항 시인 22명의 작품을 모아 선집 ''L'Honneur des poètes|시인들의 명예프랑스어''를 편찬했다.[5] 이 책은 베르코르와 피에르 드 레스퀴르가 창설한 지하 출판사 심야 총서(Les Éditions de Minuit)에서 간행되었다. 엘뤼아르는 이 선집에 여러 가명(장 뒤 오, 모리스 에르방 등)으로 「나치의 노래」, 「적의 훌륭한 정의」, 「용기」 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서문을 통해 시인들이 행동에 나서야 함을 역설했다.

: 미국 인민에게 고무된 휘트먼, 무기를 들라고 외친 위고, 파리 코뮌에서 영감을 받은 랭보, 스스로도 분연히 일어섰고, 다른 이들도 분연히 일어서게 한 마야코프스키... 광대한 견지에 선 시인들은 행동으로 이끌어졌다... 투쟁이야말로 시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57]

''L'Honneur des poètes|시인들의 명예프랑스어''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여러 판을 거듭했고, 엘뤼아르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44년 5월 제2호 '유럽 편'을 간행했다. 그는 ''Les Armes de la douleur|고통의 무기프랑스어'', ''Au rendez-vous allemand|독일군의 집합지에서프랑스어'' 등의 시집도 지하에서 출판했다. 1943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남프랑스 로제르주 생-알반-쉬르-리마뇰에 있는 정신병원에 몸을 숨겼는데, 이곳은 의사 뤼시앙 보나페가 운영하며 많은 레지스탕스 대원과 유대인들을 보호하던 곳이었다. 같은 해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는 엘뤼아르의 시를 바탕으로 칸타타 「인간의 얼굴」(Figure humaine프랑스어)을 작곡하여 저항 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해방 이후 엘뤼아르는 루이 아라공과 함께 레지스탕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받았다.[6]

2. 6. 전후 활동과 사망

전후 2년은 엘뤼아르가 가장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한 시기로, 『긴 사랑의 반사』, 『끊이지 않는 시』, 『지속하는 것에 대한 엄격한 희망』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46년 1월에는 로맹 롤랑 등이 1923년에 창간한 잡지 ''유로프''(Europe)의 편집위원을 맡았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밀라노, 로마),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에서 강연 활동을 펼쳤다.

1946년 11월 28일, 스위스에 머물던 엘뤼아르는 아내 누슈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누슈의 나이는 40세였다. 깊은 슬픔과 우울증에 빠진 엘뤼아르에게 친구 알랭과 자클린 트뤼타가 삶의 의지를 되돌려주었다. 엘뤼아르는 누슈를 추모하며 1947년 시집 『시간은 넘쳐흐른다』(필명 디디에 드로슈)와 『기억해야 할 육체』(필명 블랑)를 발표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고통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그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후 엘뤼아르는 평화, 자치, 자유를 위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1948년 8월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지식인 세계 회의에 파블로 피카소, 페르낭 레제, 이렌 졸리오퀴리와 함께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세계 평화 평의회가 결성되었고,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58] 이듬해인 1949년 4월에는 파리의 플레옐 홀에서 열린 평화 옹호 세계 대회에 세계 평화 평의회 대표로 참가했다.

1949년 6월, 엘뤼아르는 평화 평의회 의장이자 샤를 드 골 내각에서 식량 장관을 지낸 이브 파르주(Yves Farge)와 함께 그리스를 방문하여, 마케도니아 산악 지대인 그라모스산에서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 내전파르티잔 부대와 며칠을 보냈다.[60]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하여 시인 샨도르 페퇴피 사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만났다. 같은 해 9월, 세계 평화 평의회 대표로 멕시코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가 도미니크 르모르를 만났다.

엘뤼아르는 도미니크 르모르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1951년 결혼했다. 그는 되찾은 행복을 기념하며 도미니크에게 헌정하는 시집 Le Phénix|불사조프랑스어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인간은 태어났다, 서로 공명하도록, 서로 이해하도록, 사랑하도록... 네가 와서 고독은 패배했다"라고 노래했다.[61]

1950년에는 『바르샤바 게토의 순교자와 투사에게 바치는 시』를 발표했다. 도미니크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소련을 방문했으며, 소련에서는 불소 협회 대표로 메이데이 축전에 참가했다. 1951년 10월에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작업한 시화집 Le Visage de la paix|평화의 얼굴프랑스어을 출간했다. 이 책은 피카소의 석판화 29점과 그에 맞춰 엘뤼아르가 쓴 시로 구성되어 있다.[62]

한편, 엘뤼아르는 정치적인 글에서 요제프 스탈린을 찬양했으며, 그를 위한 시 Ode à Staline|스탈린 송가프랑스어를 쓰기도 했다. 1950년 프라하에서 친구이자 작가였던 자비시 칼란드라가 처형되었을 때, 엘뤼아르가 공개적으로 이를 지지한 사실은 후일 밀란 쿤데라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952년 2월, 제네바에서 "상황의 시"에 대해 강연했으며, 같은 달 말부터 3월 초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빅토르 위고 탄생 150주년 및 니콜라이 고골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협심증 발작을 겪었고, 결국 1952년 11월 18일 샤랑통르퐁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6세였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엘뤼아르의 무덤


그의 장례식은 프랑스 공산당 주최로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장(national funeral)을 거부했지만, 수천 명의 군중이 자발적으로 모여 파리 거리에서 그의 관을 따라 묘지까지 행진했다. 시인 로베르 사바티에는 그날을 "온 세상이 슬퍼했다"라고 기록했다. 엘뤼아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

대표 시집으로는 《고통의 수도》(1926년), 《사랑, 시》(1929년), 《정치 시편》(1948년) 등이 있다.

''Répétitions'', 1922년 표지, 막스 에른스트의 삽화


제목원제연도비고
『첫 시집』Premiers poèmes1913자비 출판
『의무』Le Devoir1916징집 중 17편의 소시집. 처음으로 필명 "폴 엘뤼아르" 사용. 자비 출판
『의무와 불안』'Le Devoir et lInquiétude''1917혐전 서정시집, 앙드레 데리니에르의 목판화 삽입.
친구 고농의 출판사에서 간행
『평화를 위한 시편』Poèmes pour la paix1918반전 시집 (소책자)
『동물들과 그들의 인간들, 인간들과 그들의 동물들』Les animaux et leurs hommes, les hommes et leurs animaux1920다다이즘 시집
『생활 필수품과 꿈의 결과』Les Nécessités de la vie et les conséquences des rêves1921다다이즘 시집
『불멸자의 불행』Les Malheurs des immortels1922시집, 막스 에른스트 (화가) 와의 공저
『반복』Répétitions1922시집, 막스 에른스트 (화가) 와의 공저
『죽지 않고 죽는 것』Mourir de ne pas mourir1924시집, 앙드레 브르통에게 헌정
『침묵의 결핍에』Au défaut du silence1925시집, 막스 에른스트의 익명 삽화
『당대 유행의 격언 152』152 proverbes mis au goût du jour1925뱅자맹 페레와의 공저
『고통의 수도』Capitale de la Douleur1926초현실주의 시집
『어떤 인생의 뒷면 또는 인간의 피라미드』'Les Dessous dune vie ou la Pyramide humaine''1926산문 시집
『지식의 옹호』Défense de savoir1928초현실주의 시집
『사랑, 시』'LAmour la Poésie''1929시집, 갈라에게 헌정
『공사 중 서행』Ralentir travaux1930시집, 브르통, 르네 샤르와 공저
『처녀 잉태』 (『무원죄 잉태』)'LImmaculée conception''1930산문 시집, 브르통과 공저. 살바도르 달리 표지화. 호화판도 있음.
『모든 시련을 견디며』À toute épreuve1930초현실주의 시집, 후에 호안 미로의 삽화가 들어간 판도 간행
『잠들어라』Dors1931시집 (소책자)
『직접적인 삶』La Vie immédiate1932시집
『두 방울의 물처럼』'Comme deux gouttes deau''1933초현실주의 시집
『민중의 장미』La rose publique1934시집, 새 프랑스 평론 출판사에서 간행
『쉬운 일』Facile1935시집, 만 레이의 사진
『두 사람의 밤』Nuits partagées1935시집
『난간』'La Barre dappui''1936시집, 피카소의 에칭
『풍요로운 눈』Les Yeux fertiles1936시집, 기 레비 마노에 의한 장정・출판
『시에 관한 노트』Notes sur la poésie1936평론, 브르통과 공저. 기 레비 마노에 의한 장정・출판
『자유로운 손』Les Mains libres1937시화집, 만 레이와 공저. 누슈에게 헌정
『전심』Appliquée1937시화집, 발렌틴 위고와 공저
『시의 명증』'Lévidence poétique''1937시집, 기 레비 마노에 의한 장정・출판[9]
『자연의 흐름』Cours naturel1938시집, "게르니카의 승리" 수록
『초현실주의 간략 사전』Dictionnaire abrégé du surréalisme1938사전, 브르통과 공저
『메두사』Médieuses1939시화집, 발렌틴 위고와 공저
『완전한 노래』Chanson1939시집, 에른스트의 석판화가 들어간 판도.
『보여주기』Donner à voir1939갈리마르 출판사 간행의 시 작품집
『열린 책 I ― 1938-1940』Le Livre ouvert I 1938-19401941시집
『내리막길』Sur les pentes inférieures1941시집, 장 폴랑 서문.
『열린 책 II ― 1939-1941』Le Livre ouvert II 1939-19411942시집
『시와 진실』Poésie et vérité 19421942레지스탕스 시집, "자유" 수록. 알제 퐁텐지 출판사에서 간행
『무의식의 시와 의도한 시』Poésie involontaire et poésie intentionnelle1942레지스탕스 시집, 피에르 세겔이 인쇄・배포
『전시 중의 사랑의 시 일곱 편』'Les sept poèmes damour en guerre''1943레지스탕스 시집, 장 뒤 오의 가명으로 알제 퐁텐지 출판사에서 간행. 남부 자유지대 생플뢰르에서 인쇄
『시인들의 명예』'LHonneur des poètes''1943레지스탕스 시인 22인의 앤솔로지
『살 가치가 있는 사람들』Dignes de vivre1944레지스탕스 시집, 장 포트리에의 삽화
『침대・식탁』Le Lit la table1944레지스탕스 시집, 제네바에서 출판
『고통의 무기』Les armes de la douleur1944레지스탕스 시집, 남프랑스 (툴루즈)의 전국 작가 위원회・지식인 센터 출판
『독일군의 집결지에서』Au rendez-vous allemand[63]1944레지스탕스 시집
『파블로 피카소에게』À Pablo Picasso1944피카소론, 피카소의 그림
『변덕스러운 재봉사들』Lingères légères1945시집, 피에르 세겔스가 인쇄・배포
『그림자의 분신들』'Doubles dombres''1945시집, 앙드레 보댕의 삽화
『긴 사랑의 반사』Une longue réflexion amoureuse1945시집
『끊이지 않는 시』Poésie ininterrompue1946시집
『견뎌내는 것에 대한 완고한 소망』Le Dur désir de durer1946시집
『시간은 넘쳐흐른다』Le Temps déborde1947누슈 추도 시집, 디디에 데로슈의 필명으로.
『기억할 만한 육체』Corps mémorable1947누슈 추도 시집, 브랑의 필명으로.
『눈의 안쪽에서』'À lintérieur de la vue''1947시화집, 에른스트와 공저
『보기』Voir1948시집
『동물지』Le bestiaire1948시화집, 로제 샤스텔의 그림
『정치 시편』Poémes politiques1948시집, 루이 아라공 서문
『만인을 위한 시』Poèmes pour tous1948시집
『레다』Léda1949시화집, 테오도르 제리코의 삽화
『그리스, 나의 이성의 장미』Gréce ma rose de raison1949시집
『도덕의 가르침』Une leçon de morale1949시집
바르샤바 게토의 순교자와 투사들에게 바치는 시』Hommage aux martyrs et aux combattants du ghetto de Varsovie1950시집
스탈린에게 바치는 송가Ode à Staline1950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음』Pouvoir tout dire1951시집
『평화의 얼굴』Le Visage de la paix1951시화집, 피카소의 석판화
『민들레』'Grain-daile''1951동화
『불사조』Le Phénix1952시화집, 발렌틴 위고의 그림. 도미니크 르모르에게 헌정
『예술론집 I』'Anthologie des écrits sur lart I''1952평론 (번역본 『예술론집』 참조)
『시의 대로와 샛길』Les sentiers et les routes de la poésie1952방송 원고
사후 출판
『예술론집 II』'Anthologie des écrits sur lart II''1953평론 (번역본 『예술론집』 참조)
『끊이지 않는 시 II』Poésie ininterrompue II1953시집
『연기의 눈』Œil de fumée1953시집
『예술론집 III』'Anthologie des écrits sur lart III''1954평론 (번역본 『예술론집』 참조)
『젊은 시절의 편지, 미발표 시』Lettres de jeunesse avec poèmes inédits1962서간, 시
『마지막 사랑의 시』'Derniers poèmes damour''1963시집
『시인과 그의 그림자』Le poète et son ombre1964소책자로 발표된 작품, 한정판 등을 편집
『긴 사랑의 반사』Une longue réfléxion amoureuse1966시집
『전집』 전 2권Œuvres complètes1968플레야드 총서 (갈리마르 출판사)
『조 부스케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à Joë Bousquet1973서간, 프랑스 합동 출판 (아라공이 창설한 공산당의 출판국)
『갈라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à Gala (1924-1948)1984서간
『폴 엘뤼아르=장 폴랑 왕복 서간』Paul Éluard & Jean Paulhan, Correspondance 1919-19442003서간, 클레르 폴랑 출판사 (장 폴랑의 손녀가 창설한 출판사)


3. 1. 시 세계의 특징

엘뤼아르의 시는 불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뜻밖의 이미지논리를 벗어난 교묘한 비유를 사용하여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의 강한 특징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시어는 점차 투명해지고, 마치 내면의 속삭임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가락으로 변화해 갔다.

그의 시는 불안과 고뇌, 그리고 연애전쟁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엘뤼아르 자신은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라고 노래했듯이, 시 속에서 미와 사랑, 그리고 인생의 밝은 면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은 그를 매우 보기 드문 시인으로 평가받게 한다.

4. 정치 활동

폴 엘뤼아르의 정치적 행보는 초현실주의 운동 참여에서 시작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관여와 결별, 스페인 내전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적극적인 반파시즘 투쟁, 그리고 전후 평화 운동 참여로 이어지는 복잡한 여정을 보여준다.

1930년대 초반, 엘뤼아르는 브르통, 아라공 등 동료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이 조직하는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Exposition coloniale internationale|식민지 박람회프랑스어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으며[43], 1932년에는 국제 혁명 작가 동맹(UIER)의 프랑스 지부인 혁명 작가 예술가 협회(AEAR) 창립에 참여하고[44]제국주의 국제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이듬해에는 나치즘의 위협 앞에서 단순한 평화주의를 비판하며 투쟁과 혁명을 통한 평화 획득을 주장하는 Mouvement Amsterdam-Pleyel|암스테르담-플레옐 운동프랑스어에도 참여했다[14][45].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전향한 아라공과의 이념적 갈등이 깊어졌다. 엘뤼아르는 아라공의 시 Front rouge|적색 전선프랑스어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한때 동지였던 아라공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38][49]. 훗날 엘뤼아르는 당시 아라공이 옳았다고 회고하며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50]. 엘뤼아르는 1933년 공산당을 탈당했고, 이후 브르통이 AEAR에서 제명되자 그 역시 협회를 떠났다. 1935년 파리에서 열린 Premier congrès international des écrivains pour la défense de la culture|제1회 문화 옹호 국제 작가 회의프랑스어에서의 사건은 코민테른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의 결별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14][52].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엘뤼아르의 반파시즘 신념은 확고했다. 스페인 내전 발발 시 인민 전선을 지지하며 프랑코 정권에 저항했고,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는 문학을 통한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2년에는 불법화된 공산당에 다시 가입했으며[55], 그의 시 "자유"는 절망에 빠진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 시기 그는 한때 결별했던 아라공과 재회하여 함께 저항 운동을 펼쳤고[56], 지하 출판 활동을 통해 저항 정신을 고취했다[5].

해방 이후 엘뤼아르는 아라공과 함께 레지스탕스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칭송받았다[6]. 전후에는 국제적인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한편으로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체코 작가 자비시 칼란드라의 처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논란이 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4. 1. 초기 정치 활동

1914년 8월, 19세 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해 12월에 동원되어 보조 부대에 배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22 위생 소대로 옮겼고, 1916년 8월부터는 북부 솜 주 아르지쿠르(Hargicourt)의 야전 병원으로 전속되었다.[15][16][17] 이곳에서 부상자들의 고통과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엘뤼아르는 전쟁 혐오감을 느끼며 평화주의자유지상주의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미겔 알메레이다(Miguel Almereyda)가 편집장으로 있던 무정부주의 성향의 풍자 신문 『보네 루즈』(Le Bonnet rouge프랑스어)나 1915년 창간된 『카나르 앙셰네』 등을 읽었다.[14]

1916년 12월에는 보병대로의 전속을 희망하여 제95 보병 부대에 배속되었으나, 병 때문에 입원해야 했다. 퇴원 후 다시 보조 부대에 배속되어 종전을 맞이했다. 전쟁 중이던 1917년 2월 21일, 스위스 요양 시절 만났던 가라와 정식으로 결혼했고, 1918년 5월 10일에는 딸 세실이 태어났다.[15][16][17]

전쟁 경험은 그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자비로 시집을 출판했던 엘뤼아르는 1917년 친구 아리스티드-줄 고농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앙드레 데리니에르(André Deslignères)의 목판화가 담긴 시집 『의무와 불안』을 간행했다.[19] 이듬해인 1918년에는 반전 메시지를 담은 소책자 『평화를 위한 시편』을 인쇄하여 여러 작가들에게 보내기도 했다.[14]

4. 2. 공산주의 활동과 결별

엘뤼아르는 1930년대 초반 프랑스 공산당이 조직하는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1년 파리 12구 뱅센 숲 근처의 Palais de la Porte-Dorée|포르트 도레 궁프랑스어에서 개최된 Exposition coloniale internationale|식민지 박람회프랑스어에 항의하여, 브르통, 아라공, 페레 등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식민지 박물관에 가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의 전단을 배포했다[43]. 1932년 3월에는 하르키우에서 열린 국제 혁명 작가 동맹 (UIER) 대회를 계기로 프랑스 지부인 혁명 작가 예술가 협회 (AEAR)가 설립되자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 협회에는 엘뤼아르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 외에도 앙드레 지드, 로맹 롤랑, Eugène Dabit|위젠 다비프랑스어, 앙드레 말로 등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44]. 같은 해 8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반제국주의 전쟁 국제 회의에도 참석했다[14][45].

이듬해인 1933년, 엘뤼아르는 브르통, 샤르, 탕기, André Thirion|앙드레 티리옹프랑스어 등과 함께 파시즘에 반대하는 Mouvement Amsterdam-Pleyel|암스테르담-플레옐 운동프랑스어 결성에 참여했다. 이들은 "반전은 평화가 아니다"라는 팸플릿을 통해, 나치즘의 위협 앞에서도 단순히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를 비판하고, 투쟁과 혁명을 통한 평화 획득을 주장했다[14][45].

한편, 하르키우 회의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전향한 아라공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라공이 소련 체류 중 쓴 시 Front rouge|적색 전선프랑스어이 프랑스에서 문제를 일으키자(아라공 사건), 초현실주의자들은 아라공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47], 브르통은 아라공의 시를 "상황의 시", "시의 후퇴"라고 비판했다[48][47]. 혁명 작가 예술가 협회가 아라공을 지지하자[38], 엘뤼아르는 『엉뚱한 광대다(Paillasse!)』라는 글에서 아라공에 대해 "그(아라공)가 삶의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위해 얼마나 쓸데없는 모순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알았다", "아라공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그의 일을 기억할 수도 없다"며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며 결별을 선언했다[38][49]. 그러나 훗날 공산당 대독 레지스탕스 그룹 국민전선 간사장이었던 공산당원 Pierre Villon|피에르 비옹프랑스어은 엘뤼아르가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어느 날, 우리(비옹과 폴 엘뤼아르)는 옛날 일, 초현실주의 선언 무렵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폴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분열이나, 그가 아라공과 의견을 달리했던 것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의 빛을 띠고 말했다.──「그때 옳았던 것은 루이(·아라공)다」"[50] 두 사람은 10년 후에 재회하여 문필 활동을 통한 대독 저항 운동을 함께 전개하게 된다.

결국 1933년 7월, 엘뤼아르는 공산당을 탈당했다. 이후 브르통이 혁명 작가 예술가 협회에서 제명되자 엘뤼아르 역시 협회를 탈퇴했다. 비록 공산당을 떠났지만, 1934년 2월 6일의 위기 당시 파시즘에 반대하는 좌파의 호소에 동참하는 등 반파시즘 활동은 이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 공산당이 주도하는 다른 단체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1935년 6월 파리에서 열린 Premier congrès international des écrivains pour la défense de la culture|제1회 문화 옹호 국제 작가 회의프랑스어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결별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이 회의에서 브르통이 추방되었고[52], 브르통의 연설문을 대신 읽었던 엘뤼아르는 불소 상호 원조 조약의 체결 및 불소 문화 협력에 반대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 사건은 엘뤼아르를 포함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코민테른 및 스탈린주의 노선과 완전히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14].

4. 3. 반파시즘 투쟁

1933년, 엘뤼아르는 나치즘의 위협 앞에서 평화주의를 비판하고 투쟁과 혁명을 통한 평화 획득을 주장하며 반전·반파시즘의 Mouvement Amsterdam-Pleyel|암스테르담-플레옐 운동프랑스어에 참여했다.[14][45]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코의 쿠데타에 격렬히 항의했고, 이듬해 게르니카 폭격은 그에게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시를 쓰게 했다.[4] 이 시기 엘뤼아르는 피카소와 긴밀히 교류하며 반파시즘 연대를 다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점령되자, 엘뤼아르는 문필 활동을 통해 나치의 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42년에는 불법화된 프랑스 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여 본격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55] 그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자유"는 1942년 알제에서 발간되던 잡지 『Fontaine|퐁텐프랑스어』에 실렸고, 이후 영국 공군 비행기로 수천 부가 인쇄되어 점령된 프랑스 상공에 뿌려졌다. 이 시는 절망에 빠져 있던 프랑스 국민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55]

엘뤼아르는 지하 출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가명으로 『시와 진실』, 『전쟁 중의 연애시 7편』, 『고통의 무기』, 『독일군의 집합지에서』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했다. 1943년에는 한때 이념적 차이로 결별했던 아라공과 10년 만에 재회해[56]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그는 피에르 세게르스, 장 레스퀴르 등과 협력하여 저항 시인 22명의 작품을 모은 선집 『L'Honneur des poètes|시인들의 명예프랑스어』를 편찬해 지하 출판사 심야 총서에서 간행했다.[5] 엘뤼아르는 이 책의 서문에서 휘트먼, 위고, 랭보, 마야코프스키 등을 언급하며 "광대한 견지에 선 시인들은 행동으로 이끌어졌다... 투쟁이야말로 시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역설하며 문학을 통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7]

1943년 11월부터 이듬해 1944년 2월까지는 나치의 추적을 피해 남프랑스 로제르주 생탈방쉬르리마뇰의 정신병원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는 1943년 엘뤼아르의 시에 곡을 붙인 칸타타 「인간의 얼굴」을 작곡해 저항 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해방 이후 엘뤼아르는 아라공과 함께 레지스탕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프랑스 국민의 칭송을 받았다.[6]

4. 4. 전후 정치 활동과 논란

1946년 아내 누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깊은 슬픔에 빠졌으나,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평화, 자치, 자유의 원칙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48년 4월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지식인 세계 회의에 참석했으며, 파블로 피카소에게도 참여를 설득했다. 이듬해인 1949년 4월에는 파리의 플레옐 홀에서 개최된 세계 평화 회의에 대표로 참여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그리스 내전 중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 파르티잔들을 방문하여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이후 시인 샨도르 페퇴피의 사망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갔고, 그곳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만났다. 9월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곳에서 만난 도미니크 르모르와 1951년 결혼했다. 같은 해 자신의 되살아난 행복에 헌정된 시집 《피닉스》를 출판했다.

그러나 엘뤼아르의 전후 활동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저술에서 소련의 지도자 요제프 스탈린을 찬양했으며, 그를 위한 시 《스탈린 송가》(Ode à Staline프랑스어)를 쓰기도 했다. 또한 1950년에는 자신의 친구였던 체코의 작가 자비시 칼란드라가 프라하에서 처형된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하여 비판을 받았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엘뤼아르의 이러한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5. 엘뤼아르와 여성들

폴 엘뤼아르에게 여성들은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자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었다. 그의 곁을 스쳐 간 여러 여성과의 관계는 그의 작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첫 번째 부인 갈라(갈라 엘뤼아르 달리)는 스위스 요양소 시절 만난 러시아인 여성으로, 1917년 결혼했다. 그러나 갈라는 1924년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 사랑에 빠져 엘뤼아르를 떠났다.[66] 갈라와의 만남과 이별은 엘뤼아르의 초기 초현실주의 시, 특히 《고통의 수도》(1926년)와 《사랑, 그것은 시(詩)》(1929년)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4년 엘뤼아르는 마리아 벤즈, 애칭 누슈(Nusch Éluard)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누슈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66] 1946년 누슈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엘뤼아르는 깊은 절망에 빠졌으며, 이는 추모 시집 《넘쳐흐르는 시간》(1947년) 등으로 표현되었다.

누슈 사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엘뤼아르는 1949년 멕시코에서 열린 평화 대회에서 도미니크 르모르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51년 결혼했으며, 엘뤼아르는 도미니크에게 마지막 시집 《피닉스》를 헌정하며 새로운 사랑을 통해 얻은 희망과 삶의 의미를 노래했다.[61] 이처럼 엘뤼아르의 시는 그가 만난 여성들과의 사랑, 이별, 상실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 1. 갈라와의 관계

폴 엘뤼아르는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스위스 다보스의 요양소에서 지냈다.[65] 이곳에서 그는 1917년에 결혼하게 될 러시아인 안내 갈라(갈라 엘뤼아르 달리)를 처음 만났다. 요양을 마치고 1914년 4월, 엘뤼아르는 파리로, 갈라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뤼아르는 징집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보조 병력으로 복무했다. 그는 군 병원에서 지내며 어머니에게 갈라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았고, 점차 어머니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던 갈라는 엘뤼아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재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엘뤼아르의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다졌고, 마침내 의붓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소르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파리로 향했다. 여러 어려움 끝에 그녀는 파리에 도착했다.

1916년 6월, 엘뤼아르는 최전선 근처 군 병원에서 근무하며 전사자나 부상자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고통스러운 임무를 맡았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갈라는 편지를 통해 "우리의 삶은 영광스럽고 웅장할 것을 약속해요"라며 그를 격려했다. 1917년 2월 20일, 엘뤼아르는 갈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직후 그는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 참호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갈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선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엘뤼아르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1917년 3월 흉막염 진단을 받고 다시 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1918년 5월 11일, 갈라는 딸 세실(세실 엘뤼아르)을 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엘뤼아르는 갈라에게 "이제 삶을 위해 싸운 후에 행복을 위해 싸울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 갈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시집 『의무와 불안』, 『평화를 위한 작은 시』를 장 폴랑,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등 문학계 인사들에게 보냈다. 이 만남은 엘뤼아르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11월, 엘뤼아르 부부는 쾰른에서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만났고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엘뤼아르는 에른스트의 프랑스 불법 입국을 돕고 파리 외곽의 자택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21] 1922년부터 엘뤼아르, 갈라, 에른스트는 삼각관계를 형성했다. 갈라를 향한 사랑과 에른스트에 대한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엘뤼아르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고, 이는 그의 시 『죽지 않고 죽는 것』(Mourir de ne pas mourir프랑스어)에 반영되었다. 1924년 3월, 엘뤼아르는 돌연 사라져 7개월간 오세아니아 등지를 여행했다. 갈라는 그를 찾아 사이공에서 재회했다.

그러나 1928년, 엘뤼아르가 다시 결핵으로 클라바델 요양소에 머물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지막을 맞이했다. 갈라는 그곳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났고, 이후 엘뤼아르를 떠나 달리와 남은 생을 함께했다.[66] 엘뤼아르와 갈라의 관계는 그의 삶과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초현실주의 시기 작품인 『고통의 수도』(Capitale de la douleur프랑스어, 1926)와 『사랑, 그것은 시(詩)』(L'Amour la Poésie프랑스어, 1929) 등은 갈라와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중요한 결과물이다.

5. 2. 누슈와의 관계

엘뤼아르는 1934년 두 번째 부인 마리아 벤즈(Maria Benz), 애칭 누슈(Nusch Éluard)와 결혼했다. 하지만 누슈는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66]

1946년 11월 28일, 스위스에 머물던 엘뤼아르는 누슈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누슈의 나이는 40세였다. 아내의 죽음으로 엘뤼아르는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65] 친구인 알랭 트뤼타(Alain Trutat)와 자클린 트뤼타(Jacqueline Trutat) 부부가 엘뤼아르가 삶의 의지를 되찾도록 도왔다.[65]

누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엘뤼아르의 작품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내를 추모하며 1947년 시집 《넘쳐흐르는 시간》(Le temps déborde프랑스어)과 《기억해야 할 육체》(Corps mémorable프랑스어)를 발표했다. 이 시집들은 각각 디디에 드로슈(Didier Desroches)와 블랑(Brun)이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넘쳐흐르는 시간》에는 누슈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엘뤼아르의 내면적 여정을 그린 "모두의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De l'horizon d'un homme à l'horizon de tous프랑스어)와 같은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5. 3. 도미니크 르모르와의 관계

1946년 아내 누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깊은 슬픔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엘뤼아르는[65], 평화, 자치, 자유를 위한 활동에 새로운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48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지식인 세계 회의에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참석했고,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도 대표로 참가했다.[58] 이후 그리스의 파르티잔 부대를 방문하고[60],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만나는 등 평화 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949년 9월, 엘뤼아르는 세계 평화 평의회 대표로 멕시코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마지막 사랑이 될 도미니크 르모르(Dominique Lemort)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고, 1951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 엘뤼아르는 도미니크와의 만남으로 되찾은 행복을 담아 그녀에게 헌정하는 시집 《피닉스》(Le Phénix)를 출판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인간은 태어났다, 서로 공명하도록, 서로 이해하도록, 사랑하도록... 네가 와서 고독은 패배했다"라고 노래하며 새로운 사랑의 기쁨을 표현했다.[61]

6. 엘뤼아르와 한국

7. 평가 및 영향

폴 엘뤼아르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병치, 논리를 벗어난 비유 등 초현실주의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휘는 점차 투명해지고 내면의 속삭임을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가락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엘뤼아르의 시는 불안과 고뇌, 사랑과 전쟁 등 인간 실존의 다양한 측면을 주제로 삼았다. 특히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파시즘에 저항하는 등, 그의 삶과 문학은 시대의 아픔과 긴밀히 연결되었다.[65] 이러한 경험은 그의 후기 시집 《정치적 진실》(1948년) 등에 반영되었다.

그는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고 노래하며, 개인적인 고통과 시대적 비극 속에서도 인간 보편의 가치, 즉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잃지 않은 시인으로 기억된다. 그의 시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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