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테쓰 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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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이테쓰 겐소는 1537년 일본 지쿠젠 국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전후 일본과 조선 간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승려이다. 하카타 쇼후쿠지 주지, 교토 도후쿠지 주지를 거쳐 쓰시마로 건너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참모로 종군하기도 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만력제로부터 본광국사라는 호를 받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는 기유약조를 성립시키는 등 조선과의 국교 회복에 기여했다. 1611년 사망했으며, 드라마 징비록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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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테쓰 겐소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게이테쓰 겐소 |
| 한자 표기 | 景轍玄蘇 |
| 로마자 표기 | Keitetsu Genso |
| 생몰년 | 1537년 - 1615년 7월 26일 |
| 출생지 | 교토 |
| 사망지 | 교토 |
| 직업 | 임제종의 승려 |
| 주요 활동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 자문 |
| 상세 정보 | |
| 종파 | 임제종 |
| 사찰 | 난젠지 |
| 스승 | 기탄 소키 |
| 제자 | 고케쓰 쇼조 호쇼 세키테이 류쇼 |
2. 생애
1537년(덴분 6년) 지쿠젠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쇼후쿠지에 맡겨져 승려가 되었다.
에이로쿠 연간(1558년 ~ 1570년)에 하카타 쇼후쿠지(聖福寺)의 주지가 되었고, 이후 교토 도후쿠지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덴쇼 8년(1580년), 쓰시마국의 영주 소 요시시게의 초청으로 쓰시마섬으로 건너가 이테이안(以酊庵)이라는 암자를 세우고 머물렀다. 이곳에서 일본 국왕의 사신 자격으로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이후, 그의 명에 따라 임진왜란 발발 전 조선에 파견되어 '정명향도(征明嚮導)'를 요구하며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참모로 종군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1595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력제로부터 '본광국사(本光國師)'라는 호를 받았다.
임진왜란 종결 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조선과의 국교 회복 교섭을 주도하였다. 오랜 노력 끝에 1609년(게이초 14년)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는 기유약조를 성공적으로 체결하였고, 조선으로부터 '선소(禪師)'라는 칭호와 함께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圖書)을 받았다.
1611년(게이초 16년),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위한 이테이안을 개창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5세였다.
2. 1. 초기 생애와 출가
1537년(덴분 6년) 지쿠젠국 무나카타군 니시고(西郷)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인 가와즈 씨(河津氏)는 이토 스케키요의 7대손 가와즈 사다시게(河津貞重)가 가야군(賀陽郡)으로 내려온 것을 시조로 한다. 가문은 후에 몰락하여 가미니시고(上西郷)의 오모리 신사(大森神社)[1]의 사제직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 가와즈 다카나리(河津隆業)는 수호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의 가신이었으며, 숙부 다카미쓰(隆光)는 다이네이지의 변 때 주군 요시타카와 함께 자결했다.변란 후 아버지 다카나리는 출가하였고, 가와즈 다카이에(河津隆家)가 가독을 이었다. 다카이에는 처음 모리 모토나리를 따랐으나, 모리 세력이 지쿠젠에서 철수한 후에는 인척 관계이기도 했던 무나카타 우지사다에게 복속했다. 그러나 겐키 원년(1570년), 무나카타 씨가 오토모 씨의 가신 다치바나 도세쓰(戸次鑑連)에게 항복하는 과정에서 다카이에는 암살당했다. 무나카타 우지사다는 이를 후회하고 그 일족을 후하게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겐소는 어릴 때 무나카타 씨의 보리사(菩提寺)인 쇼후쿠지(承福寺)에 맡겨졌다.
에이로쿠 연간(1558년 - 1570년), 겐소는 하카타 쇼후쿠지(聖福寺)에 들어가 고신 세키테이(湖心碩鼎)를 스승으로 섬겨 득도하였고 주지가 되었다. 고신 세키테이는 과거 오우치 요시타카의 명으로 견명정사(遣明正使)로서 명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교토로 상경하여 겐닌지의 슌소 에이온(春沢永恩) 문하에서 학업을 쌓았으며, 도후쿠지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쿠바산(博白山) 게이후쿠 안코쿠지(慶福安国寺)의 주지를 거쳐, 스승 세키테이의 지시로 쇼후쿠지의 말사(末寺)인 쿄쿠에이산(玉栄山) 류쇼안(龍勝庵)의 주지가 되었다.
2. 2. 쓰시마 도항과 외교 활동
덴쇼 8년(1580년), 쓰시마국의 다이묘 소 요시토시의 초청을 받아 쓰시마섬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세이잔지에 머물렀으며, 이후 암자인 이테이안(以酊庵)을 창건하여 거처로 삼았다. 그는 일본 국왕의 사신 자격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다.임진왜란 발발 이전인 덴쇼 17년(1589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여러 차례 야나가와 시게노부, 소 요시토시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이들은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인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 혹은 '가도입명(假途入明, 길을 빌려 명나라로 들어간다)'을 전달하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전쟁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전쟁 중에는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분로쿠 4년(1595년)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명나라 만력제로부터 '''혼코쿠시'''(本光國師)라는 호를 받았다. 게이초 3년(1598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환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쓰시마 번에 맡겼다. 겐소는 게이초 4년(1599년)부터 조선과의 교섭을 시작했으나 난항을 겪었다. 마침내 게이초 9년(1604년), 조선에서 유정(송운대사)과 손문욱이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겐소는 조선 수문직으로서 외교 재개에 힘썼고, 게이초 12년(1607년) 재개된 첫 조선 통신사를 맞이했다. 이어 게이초 14년(1609년)에는 조선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규정한 '''기유약조'''를 성공적으로 체결하였고, 조선으로부터 '선소'(禪師)라는 호칭과 함께 도서(圖書,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를 받았다.
게이초 16년(1611년), 조선 수문직의 거점으로서 이테이안(以酊庵)을 개창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였다. 그의 묘는 처음 이테이안에 있었으나, 후에 암자가 폐사되면서 세이잔지로 옮겨졌다. 현재 세이잔지에는 겐소의 목상이 안치되어 있다.
2. 3. 임진왜란 전후의 역할
덴쇼 8년(1580년) 쓰시마국의 소 요시시게 초청으로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이테이안(以酊庵)이라는 암자를 세우고 머물며, 일본 국왕 사절로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덴쇼 17년(1589년)부터 여러 차례 야나가와 시게노부나 소 요시토시와 함께 조선에 건너가, 조선 침략의 명분인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을 안내하라)'나 '가도입명(假道入明,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리다)'을 내세워 교섭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개전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1592년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이 발발하자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참모로 종군하였다. 전쟁 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1595년(분로쿠 4년), 다시 히데요시의 명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으며, 이때 명나라 만력제로부터 본광국사(本光國師)라는 호를 받았다. 1598년(게이초 3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쓰시마 번에 맡겼다. 겐소는 1599년(게이초 4년)부터 조선과의 교섭을 다시 시작했으나 난항을 겪었다. 1604년(게이초 9년) 조선에서 손문욱과 사명대사 유정 등이 사신으로 일본에 방문하자, 겐소는 조선 수문직(受文職)으로서 교섭에 힘썼다. 그 결과 1607년(게이초 12년) 전란 이후 첫 조선 통신사가 파견되었고, 1609년(게이초 14년) 마침내 기유약조를 성립시켜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이때 조선으로부터 '선소(禪師)'의 도서(圖書, 인장)를 받았다.
1611년(게이초 16년), 조선 수문직의 역원(役院)으로서 이정암(以酊庵)을 개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쓰러져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2. 4. 조선과의 국교 회복 노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쓰시마에 일임하였다. 이에 따라 게이초 4년(1599년)부터 조선과의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의 상처가 깊었던 조선과의 관계 개선은 쉽지 않아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그러던 중 게이초 9년(1604년), 조선에서 사신으로 손문욱과 유정 (사명대사)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관계 회복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겐소는 조선 수문직(朝鮮修文職)으로서 이러한 외교 교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겐소의 노력에 힘입어 게이초 12년(1607년)에는 전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게이초 14년(1609년), 겐소는 조선과의 사이에 기유약조를 성립시켜 국교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겐소는 조선으로부터 '선소(禪溸)'라는 이름의 도서(圖書, 인장)를 받았다.
2. 5. 사망
게이초 16년(1611년), 조선 수문직 역원으로서 이정암을 개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5세. 묘는 이정암에 있었으나, 이후 암자와 함께 세이잔지로 이장되었다. 현재 세이잔지에는 그의 목상이 안치되어 있다.3. 관련 작품
(내용 없음)
3. 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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