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경룡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룡관은 1921년 개관한 일제강점기 경성부 용산구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초기에는 일본 연예물과 무성영화를 상영했으며, 이후 성남영화극장, 성남극장을 거쳐 2000년대에 폐관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 시설이었으나, 광복 이후 한국 영화 상영관으로 사용되었다. 경룡관은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극장 - 올림픽역도경기장
    올림픽역도경기장은 1184석 규모의 좌석과 서라운드 음향 시설을 갖춘 공연 시설로, 뮤지컬과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이 개최된다.
  • 대한민국의 극장 - 학전
    학전은 1991년 대학로에 개관한 소극장을 기반으로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을 제작하고,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대학로 대표 뮤지컬로 자리매김하며, 김광석 등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하며 한국 문화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극단이다.
  • 1918년 설립 -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는 17세기 후반 남슬라브인 왕국 건설을 목표로 시작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 공산주의 정권 수립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변화하였으나,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거쳐 구성 공화국들의 독립으로 붕괴되었다.
  • 1918년 설립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특별시의 공립 종합대학교인 서울시립대학교는 경성공립농업학교로 시작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도시과학 특성화 대학으로서 도시 관련 학문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의 지원으로 낮은 등록금과 높은 장학금 수혜율을 유지하고 대한민국 최초로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였다.
경룡관
극장 정보
사명성남극장
원어 사명성남극장 ()
영문 사명Seongnam Theatre
광고에 사용된 로고
광고에 사용된 로고
종류사업장
시장 정보소멸
본사 위치서울특별시 용산구 83번지 (한강대로)
설립1921년
업종서비스업
사업 내용영화의 흥행
주요 주주株式會社城南劇場
관련 인물
약력
1921년경룡관으로 개관
1940년 전후성남영화극장으로 개칭
1950년 전후성남극장으로 개칭
2000년대폐관
기타 정보
관련 문서수원 화성행궁 경룡관

2. 연혁

경룡관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용산 지역에 세워진 극장으로, 이후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되다가 2000년대에 폐관했다.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시기내용비고
1918년일본인 상전우의가 설립성남극장의 전신
1921년경룡관으로 공식 개관[1]
1940년 전후성남 영화극장으로 개칭[7][8]
1950년 전후성남극장으로 개칭
2000년대폐관


2. 1. 경룡관 시대 (1918-1940년대)

경룡관 광고 (경성일보 1922년 10월 12일자).


경룡관은 1918년 일본인 상전우의가 경성부 용산구 한강통(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에 세운 2층 목조 건물로, 초기 수용 인원은 600명 정도였다. 주로 일본 연예물 공연과 무성영화를 상영했으며, 이후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작품을 주로 상영했다. 이 극장은 훗날 성남극장의 전신이다.

경룡관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남촌 지역에 위치했다. 당시 일본인 극장은 대부분 이름 끝에 '좌(座)'나 '관(館)'을 붙였는데, '경룡관' 역시 일본인을 주 대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에는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던 북촌보다 일본인이 거주하던 남촌에 극장 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흥행 수입 면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북촌의 우미관, 단성사 등이 훨씬 높았고, 남촌의 경룡관 등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상영된 영화 작품 수도 남촌보다 북촌 극장들이 더 많았다.

공식적으로 경룡관은 1921년(다이쇼 10년)에 개관했다.[1] 위치는 경성부 연병정 83번지[1](현재의 용산구 남영동 83번지)로, 한강통에 면한 연병장 부지였다.[1] 같은 해 경성부 동부의 영락정(현재의 저동)에는 중앙관이, 이듬해에는 인사동에 조선극장이 잇달아 개업하면서 경성부 내 영화관은 총 8개가 되었다.[1] 초기 경룡관에서는 수입 영화(서양 영화)를 상영했으며, 1922년 10월 12일자 경성일보 광고에 따르면 연속 활극 《명금》(감독·주연 프랜시스 포드, 각본·주연 그레이스 퀴나드)을 4일 연속 상영하기도 했다. 해당 광고에는 '경룡좌'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함께 기재된 전화번호가 경룡관의 것과 일치한다.[3][4][5]

1925년 당시 경룡관은 동아키네마 배급의 일본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2] 1927년(쇼와 2년)에는 소유주가 성남연예회사(대표 마쓰다 마사오)로 변경되었고, 경영은 마쓰다 마사오, 지배인은 다나카 스케지로가 맡았다. 흥행 계통은 동아키네마와 마키노 프로덕션의 작품이었다.[3] 마쓰다 마사오는 같은 시기 본정의 희락관도 소유 및 경영하던 인물이다.[3]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영권은 이시하라 이소사부로에게 넘어갔고, 지배인은 다나카 스케지로가 계속 맡았다. 관객 정원은 750명으로 늘어났으며, 흥행 계통은 닛카쓰 및 마키노 프로덕션으로 변경되었다.[4][5] 경성부 내 영화관 수는 1932년(쇼와 7년) 무렵까지 8개관 체제가 유지되었다.[2][3][4][5][6]

1940년(쇼와 15년) 전후, 경룡관은 성남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경영자도 우에다 도모요시의 개인 경영으로 변경되었다.[7][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전시 통제가 강화되면서, 1942년 일본 내 모든 영화는 영화 배급사를 통해 배급되었고 영화관들은 홍계·백계의 2계통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성남영화극장(구 경룡관)이 어느 계통에 속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7]

2. 2. 성남극장 시대 (1940년대-2000년대)

1940년 전후에 '''성남 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7][8]

1954년경의 '''성남극장'''. 글렌 밀러 스토리(1954년)를 상영 중이며, 황야의 질주(1953년)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같은 해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재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성남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한국 민간 자본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954년경에는 앤서니 만 감독의 글렌 밀러 스토리(미국 1954년 개봉[10][11])와 존 패로우 감독의 황야의 질주(미국 1953년 개봉[12][13])를 상영했으며,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남아있다(오른쪽 사진). 1956년경에는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디미트리우스와 검투사(미국 1954년 개봉[14][15])를 상영(재상영)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도 상영했는데, 1960년 1월 1일에는 이승만의 젊은 시절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독립협회의 청년 이승만'(1959년 개봉[16])을 "신춘 특별 프로그램"으로 상영한 광고가 남아 있다. 1960년대에는 장철 감독의 홍콩 영화 대여협(한국어 제목: 심야의 결투, 홍콩 1968년 개봉[17])과 고영남 감독의 한국 영화 '사화산'(1969년 개봉[18]) 등을 상영했다.[19]

2층 객석을 갖춘 용산구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었으며, 2001년 이후에도 영업을 지속했으나 2009년 이전에 폐관했다.[9] 건물은 현재 남아 있으며, 1층에는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가 입점해 있다.[9]

3. 구조 및 특징

일제강점기인 1918년 일본인 상전우의가 경성부 용산구 한강통(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 83번지, 한강대로[9])에 세운 극장이다.[4][7] 처음에는 일본 연예물 공연과 무성영화를 상영했으며, 이후 주로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를 상영했다. 현재의 성남극장 전신이기도 하다.

건물은 목조 2층 구조였으며,[9] 초기 수용 인원은 600명 정도였다.[4] 1930년대에는 750명까지 수용 가능했다.[5][7][8]

경룡관은 당시 경성의 남촌 지역에 위치했다. 극장 이름 끝에 '관(館)' 자를 사용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극장의 특징 중 하나로, 이를 통해 경룡관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에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북촌 지역 극장보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남촌 지역 극장이 더 많았다. 그러나 흥행 수입 면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주로 상대했던 우미관이나 단성사가 경룡관을 포함한 남촌 극장들보다 훨씬 높았고, 상영된 영화 작품 수도 북촌 극장들이 더 많았다.

4. 의의 및 평가

'경룡관'은 1918년 일본인 상전우의가 경성부 용산구 한강통(현 한강로)에 세운 극장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 시설로서의 성격을 지닌다.[1] 2층 목조 건물로 약 600명을 수용했으며, 초기에는 일본 연예물 공연과 무성영화를 상영하다가 이후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1] 이 극장은 후에 성남극장으로 이어진다.[1]

극장 이름 끝에 '관(館)'자를 사용한 점과 당시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촌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경룡관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2] 당시 서울에는 북촌의 조선인 대상 극장보다 남촌의 일본인 대상 극장이 수적으로 더 많았지만, 흥행 수입이나 상영된 영화 작품 수 면에서는 조선 관객을 대상으로 했던 우미관이나 단성사 같은 북촌 극장들이 경룡관을 포함한 남촌의 극장들보다 훨씬 앞섰다.[2] 이는 당시 문화 향유의 중심이 수적으로는 일본인 극장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대중적인 인기와 영향력 면에서는 조선인 대상 극장이 더 컸음을 시사한다.

참조

[1] 간행물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2] 연감 年鑑
[3] 총람 総覧
[4] 총람 総覧
[5] 총람 総覧
[6] 웹사이트 昭和7年の映画館 朝鮮 41館 http://homepage1.nif[...] キネマ旬報 2013-11-08
[7] 연감 年鑑
[8] 연감 年鑑
[9] 웹사이트 성남극장 http://cinecine.co.k[...] 아미컴 2013-11-08
[10] IMDb The Glenn Miller Story 2013-11-08
[11] Kinejun グレン・ミラー物語 2013-11-08
[12] IMDb Ride, Vaquero! 2013-11-08
[13] Allcinema 荒原の疾走 2013-11-08
[14] IMDb Demetrius and the Gladiators 2013-11-08
[15] Allcinema ディミトリアスと闘士 2013-11-08
[16] IMDb Dokribhyeobhwiwa cheongnyeon Lee Seung-man 2013-11-08
[17] IMDb Jin yan zi 2013-11-08
[18] IMDb Sahwasan 2013-11-08
[19] 웹사이트 성남극장 1968 http://image.munhwa.[...] 2013-11-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