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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바라 미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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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 중장까지 진급했다. 요코하마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어 연수를 다녀온 후 참모본부, 칭다오 전투, 육군대학교 등을 거쳤다. 이후 소련 주재 무관, 제57 보병연대장, 하얼빈 특무기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6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관동군 제23사단 사령관을 지냈다. 1939년 할힌골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으며, 1940년 사망했다. 2011년에는 소련 스파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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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바라 미치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6년의 고마쓰바라
본명고마쓰바라 미치타로 (小松原 道太郎)
출생1885년 7월 20일
출생지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사망1940년 10월 6일
사망지도쿄도
묘소고고쿠사
군사 경력
소속대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5년 – 1940년
최종 계급중장
주요 지휘제23사단
참전제1차 세계 대전
할힌골 전투
노몬한 사건

2. 생애

1934년 8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여러 참모와 일선 지휘관을 거쳐 1937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938년 7월 관동군 휘하 제23사단장에 임명되어 하얼빈에 주둔하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이후, 1940년 1월 31일 육군에서 퇴역했다.[2] 퇴역 후 '국가 정책 연구 협회'에 가입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러시아인과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했다.[2]

고마쓰바라는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지만, 어딘가 우울한 면이 있었다.[2] 도쿄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위암 진단을 받고 육군 의과 대학으로 전원되었으나, 퇴역한 지 8개월도 안 된 1940년 10월 6일,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

2. 1. 초기 경력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해군 기술자였던 고마쓰바라 고로(小松原五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육군 지방 유년학교, 중앙 유년학교를 거쳐 1905년 육군사관학교 (제18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보병 제34연대에 배속되었고, 1909년 러시아어 연수를 위해 러시아에 파견되었다. 귀국 후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칭다오 전투에 참가하였다.[1] 1915년 육군대학교 (제27기)를 졸업하였다.

이후 보병 제34연대 중대장, 참모본부 근무, 일본 육군대학 교관, 러시아 주재 무관, 보병 제57연대장, 관동군 산하 하얼빈 특무부대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2. 2. 소련 관련 활동

1909년 러시아어 연수를 위해 러시아로 파견되었다.[1] 귀국 후 일본 육군 참모 본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부터는 육군 참모 본부 제2국 제4과 (유럽 및 미국 군사 정보)의 소련 지부에 배속되었다.[1]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육군 대학 교관으로 근무한 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주재 무관으로 복귀했다.[1]

소련 대사관 부속 무관, 관동군사령부 부속 (하얼빈 특무기관장) 등을 역임했다.[4]

2011년 시사통신에 의해 고마쓰바라가 소련의 끄나풀(첩보원)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6] 소련 정보 당국은 미인계를 써서 고마쓰바라의 약점을 잡고 일본군의 군사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혹은 비밀이 해제된 소련 정보기관의 문서에 근거한다.[6] 구로미야 히로아키 인디애나 대학교 교수는 일본과 러시아의 공문서 등을 토대로 고마쓰바라가 소련의 허니 트랩에 빠져 소련의 대일 정보 공작에 협력하는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하얼빈 특무기관장 시대에는 많은 기밀 정보가 소련 측에 누설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5]

2. 3. 만주와 할힌골 전투

1939년 5월, 만주와 내몽고 접경 지역에서 몽골 인민공화국군과 만주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분쟁은 몽골의 후견국인 소련과 일본군의 대결로 확대되었고, 이는 할힌골 전투로 이어졌다. 당시 관동군 휘하 제23사단장으로 하이랄에 주둔하고 있던 고마쓰바라는 이 전투에 참전했다.[4]

고마쓰바라는 "외몽골 병사 700명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왔으므로 사단의 일부와 만주군으로 격멸하겠다"라는 전보를 쳐서 노몬한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4] 그러나 소련군의 공세에 제23사단은 궤멸적인 참패를 당했다. 사단의 소모율은 50%에 가까웠고, 이는 일본 육군이 최초로 경험한 대참패였다.

이 전투로 고마쓰바라는 일본으로 송환되었고, 1940년 1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예편 처분되었다. 상급부대의 책임을 물어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사령관도 경질되어 예편 처분되었다.[4]

2011년 일본의 시사통신은 고마쓰바라가 소련의 첩보원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6] 소련 정보 당국이 미인계를 써서 고마쓰바라의 약점을 잡았고, 이를 이용해 일본군의 군사 정보를 취득하여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은 비밀 해제된 소련 정보기관의 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6]

2. 4. 죽음과 사후 논란

할힌골 전투에서 패배한 후, 고마쓰바라는 1940년 1월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예편 처분되었다.[2]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사령관도 함께 경질되어 예편되었다.[6] 그 후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병원에서 사망하였다.[6]

일부 인터넷 글에서는 고마쓰바라가 할복 자살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당시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정황만 있을 뿐, 실제로 자살했다고 볼 만한 사실은 없다.[6]

2011년 일본의 시사통신은 고마쓰바라가 소련의 첩보원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6] 소련 정보 당국이 미인계를 사용하여 고마쓰바라의 약점을 잡았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군사 정보를 얻어 할힌골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는 것이다.[6] 이러한 의혹은 최근 비밀 해제된 소련 정보기관의 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6]

3. 평가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할힌골 전투에서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비판과 소련 스파이 의혹으로 인해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그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1. 소련 스파이 의혹

2011년 일본 시사통신은 고마쓰바라가 소련의 첩보원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6]

고마쓰바라는 소련 정보 당국의 미인계에 넘어가 약점이 잡혔다. 소련 정보당국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군사정보를 빼냈고, 이는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혹은 최근 비밀 해제된 소련 정보기관 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4. 가족


  • 동생은 고마쓰바라 소로(육군 대좌)이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간행물 日露年鑑 昭和8年版 日露通信社
[4] 서적 ノモンハン〈4〉教訓は生きなかった 朝日新聞
[5] 뉴스 小松原師団長はソ連のスパイ?=ノモンハン事件で新説 http://www.asahi.com[...] 2011-12-08
[6] 뉴스 인용 小松原師団長はソ連のスパイ?=ノモンハン事件で新説 http://www.asahi.com[...] 201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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