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마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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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야마 마사아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활약했다. 한신 타이거스, 다이마이 오리온스, 다이요 웨일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320승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양대 리그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유일한 선수이다. 1962년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으며, 다승왕 1회, 최다 선발승 4회, 최고 승률 1회를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 야구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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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마 마사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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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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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출생지 | 효고현 아카시시 |
선수 경력 | |
데뷔 연도 | 1953년 |
데뷔 팀 | 오사카 타이거스 |
마지막 연도 | 1973년 |
마지막 팀 | 다이요 웨일스 |
소속 팀 | 오사카 타이거스 / 한신 타이거스 (1953–1963) 도쿄 오리온스 / 롯데 오리온스 (1964–1972) 다이요 웨일스 (1973) |
기록 | |
승패 기록 | 320–232 |
평균 자책점 | 2.45 |
탈삼진 | 3,159 |
수상 | |
수상 내역 | 사와무라 에이지 상 (1962) |
코치 경력 | |
코치 팀 | 도쿄 오리온스 (1966 - 1968) 다이요 웨일스 (1973) 한신 타이거스 (1974 - 1975, 1982 - 1983, 1998) 세이부 라이온스 (1990 - 199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3 - 1994) |
명예의 전당 | |
종류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연도 | 2001년 |
2. 선수 경력
고야마 마사아키는 다카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일본 프로 야구(NPB)에 데뷔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었으며, 1959년에는 센트럴 리그에서 이닝 투구 부문 1위를 차지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시즌 연속 200개 이상의 탈삼진을 기록했다.[40]
1961년에는 11승 22패로 데뷔 첫 패전 시즌을 기록했지만, 평균자책점은 2.41로 뛰어났다. 1962년에는 센트럴 리그 기록인 5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시즌 13완봉, 27승 11패, 평균자책점 1.66의 기록으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또한 270개의 탈삼진으로 NPB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 도에이 플라이어스에게 패했다.
1964년, 도쿄 오리온스로 팀을 옮겨 30승 12패, 평균자책점 2.41로 NPB 전체 승리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 해 25번의 완투와 361⅓이닝을 던지며 NPB 전체 이닝 투구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었다.
200승 이상을 기록한 고야마는 1978년 메이큐카이 창립 멤버였다. 2001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2년 5월 2일, 세키 쓰토무는 소행성 1992 JE를 발견하고, 고야마를 기려 "13553 마사아키코야마"라고 명명했다.
2. 1.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53-1963)
효고현 아카시시 출신으로 다카사고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인 1952년에 오사카 타이거스의 입단 테스트를 거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40] 입단 후 후지무라 후미오, 가네다 마사야스 등 베테랑과 고토 쓰구오에게 지명되어 타격 투수를 맡았다.제구가 좋았던 와타나베 쇼조를 통해 타격 팀의 엄격한 요구에 부응하며 제구력을 향상시켰다. 1953년에 3승, 1954년에 11승을 거두며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다.[40] 1958년부터 3년 연속 20승을 달성했고(1958년 20선발승, 1960년 21선발승(최다 선발승)으로 선발 20승 이상) 1962년에는 센트럴 리그 기록인 5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952년 프랜차이즈제 도입 이후[41] 역대 최다 완봉승인 시즌 13완봉, 2006년에 후지카와 규지가 경신할 때까지 구단 기록이었던 47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무라야마 미노루와 함께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은 기자에게 투수 로테이션에 대해 질문을 받자 “고야마, 무라야마, 아니면 비”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구단 내부에서는 ‘두 영웅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 1963년 말에는 고야마의 방출 소문이 돌았다. 고야마는 후지모토가 이미 무라야마를 잔류시키고 자신을 방출하려는 의향을 알고 있었다. 이후 장타력을 갖춘 타자가 필요했던 한신과 에이스 투수가 필요했던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의도가 일치하여 야마우치 가즈히로와의 ‘세기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어 다이마이로 이적했다.[45]
2. 2.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64-1972)
1964년 다이마이(大毎)에서 구단명을 변경한 도쿄 오리온스는 한신 고시엔 구장보다 좁은 도쿄 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기에, 고야마에게 이적이 불리하게 여겨졌지만, 한신 시절에 오 사다하루를 잡아내기 위해 익힌 팜볼을 활용하는, 타자를 쳐서 아웃시키는 투구로 30승을 거두며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다.[47]1965년에는 20승을 기록했고, 그해 납세액으로 추정한 수입액이 3570만엔에 달해 현역 선수 중 1위로 여겨졌다. 이는 연봉(추정 약 1000만엔)에 더해, 트레이드를 통한 특별 보너스 지급이 약 2500만엔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에도 2년 연속 20승을 올렸다. 1966년 10월 4일 니시테쓰 라이온즈전에서는 87구로 완투했고, 니시테쓰의 이나오 카즈히사도 75구로 완투하여, 총 162구의 최소 투구수 경기 기록을 세웠다.
도쿄 시대에는 독신 기숙사에 혼자 지내며, 성실하고 연습에 열심인 모습은 팀의 모범이었다(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투수 코치도 겸임). 갓 입단한 무라타 쵸지가 밤샘 마작을 치고 아침에 돌아오자, 런닝을 하러 가던 고야마와 마주쳤다. 무라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고, 이후 연습 중에 사과하러 온 무라타에게 "너처럼 재능이 있으면서 그걸 낭비하는 게 안 슬프냐"고 말했고, 당시 야구계를 대표하는 베테랑 투수였던 고야마의 충고에 감동한 무라타는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게 되었다. 또한, 키타루 마사아키가 입단 3년 만에 어깨 부상을 입어 부진한 성적으로 야수로 전향하는 것도 고려되었을 때, "저 녀석(키타루)만큼 투수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녀석은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당시 구단 수뇌부에 직소했고, 투수로서의 선수 생활을 계속하게 했다. 대투수라 할지라도, 베테랑인 고야마에게 젊은 선수의 부상은 자신의 생존 문제와 관련될 수 있지만, 그런 것보다 야구인으로서 재능을 사랑하는 인품이 잘 드러난다.
1970년에는 16승, 평균자책점 2.30(리그 3위)으로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3경기에 등판했다. 최종 5차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일본 시리즈 첫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 리그에서 일본 시리즈에 선발 등판했고,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하게 양 리그 100승을 기록했다.
1971년 7월 3일 도에이 플라이어즈전에서는 스스로 결승점이 되는 타점을 올리는 2루타를 기록하여 완투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 프로 야구 사상 4번째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경기 후에는 팀 동료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1972년 9승에 그치자, 새 감독으로 카네다 마사이치를 맞이한 롯데는 고야마를 다이요의 키토 히로시·야스다 타이이치와 트레이드하려 했다. 그러나 고야마는 전 오너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와의 시즌 종료 후 특별 표창과 공로금 약속이 있었다고 쉽게 응하지 않았고, 결국 롯데로부터 공로금을 받고 트레이드를 승낙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레오 드로처 감독이 고야마 영입에 나섰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2. 3.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73)
小山 正明|고야마 마사아키일본어는 다카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일본 프로 야구 (NPB)에 데뷔했다. 주어진 소스에 1973년 다이요 웨일스 시절에 대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3. 은퇴 후
200승 이상을 기록한 고야마는 1978년 메이큐카이 창립 멤버였다. 2001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1992년 5월 2일, 세키 쓰토무는 소행성 1992 JE를 발견하고, 고야마를 기려 "13553 마사아키코야마"라고 명명했다.[1]
4. 플레이 스타일
느긋하고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은 투구법으로, 무라야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전력 투구하는 스타일과는 대조적이었다.
'''정밀 기계'''라고 칭해진 제구력뿐만 아니라 직구의 위력도 본인은 "느긋한 폼에서 휙 하고 솟아오르는 공이 오니까 타자도 당황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뒤에서 수비하던 요시다 요시오는 "고야마의 컨디션이 좋을 때는 내야수는 한가했다"(뜬 공이 많아서), "바늘 구멍을 통과시키는" 교묘한 제구력[23]이라고 증언했다. 구단 선배 선수로부터 "곧은 공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고, 고야마 자신도 직구와 커브만으로는 힘이 쇠퇴했을 때 대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너클, 포크 등도 시도해봤지만, 미국의 잡지를 참고한 팜볼이 가장 손바닥에 착 감겨 이것을 습득[24]했다. 고야마는 팜볼을 한신 시대부터 던졌지만, 넓은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좁은 도쿄 구장으로 홈 구장이 바뀐 도쿄 오리온즈 이적 후 팜볼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되어 테스트생에서 300승 투수가 되었다[25]。본인에 따르면 3종류의 팜볼을 던졌다고 한다[26]。
다른 거물 투수와 마찬가지로 달리기 훈련을 통한 하반신 강화의 중요성을 설파[27], "팽이는 심봉이 튼튼해야 안정된다. 투수도 마찬가지로 하반신의 안정이 있어야 비로소 공을 컨트롤할 수 있다. 하반신을 단련하는 것, 이것이 나의 생명이다"라고 자주 언급했다. 후배 키타루 마사아키에 따르면, 고야마의 마운드에서의 스파이크 자국은 똑같은 곳에 밟혀져 있어서, 흙이 전혀 파이지 않았다고 한다[28]。
1954년 3월 21일 주니치와의 오픈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적이 있다[29]。공식전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적은 없지만, 1안타 완봉승이 5번 있었고, 그중 1956년 6월 6일 다이요전에서는 1회 무사에서 선두 타자 오키야마 미츠토시에게 안타를 맞은 후 남은 27명을 노히트로 막아 완봉승을 거두었다. 오리온즈로 이적한 1965년 7월 15일 한큐전에서는 무안타 상태로 맞이한 9회 2사에서 윈디에게 안타를 맞아 노히트 노런을 놓쳤다.
한신 시대에는 오 사다하루를 어려워했고, 오가 신인 시절 "삼진왕"이라고 조롱받던 시절의 천황 폐하 관람 경기에서도 홈런을 맞았으며, 1962년에는 자신은 27승 11패, 방어율 1.66이라는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원 다리 타법으로 바꾼 오에게서 1경기 3피홈런을 포함한 7피홈런을 기록했다. 오 사다하루에게 13피홈런[30]。이 때문에 오 대책으로 팜볼을 철저히 활용. 1963년에는 14승 14패, 방어율도 3점대로 시즌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오로부터의 피홈런을 0으로 막았다.
에모토 몬키는 고야마의 폼을 참고하여, 어깨를 그다지 움직이지 않고, 손목을 "휙" 하고 사용하여 공을 자르는, 불필요함과 무리가 없는 투구를 시도했다. 하지만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듯한 제구)"은 끝내 따라 할 수 없었다고 한다[31]。
투구 템포가 좋고, 포수로부터 송구를 받으면 바로 투구를 시작하여 다음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복잡한 사인을 주고받는 것은 자신 없는 녀석이 하는 것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고 한다[34]。
5. 에피소드
- '정밀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제구력을 자랑했으며, 요시다 요시오는 "바늘 구멍을 통과한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46]
- 직구의 위력도 뛰어나 본인은 "느긋한 폼에서 뷰웁하고 훕하고 공이 오기 때문에 타자도 당황하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며, 요시다 요시오도 "고야마의 기세가 좋을 때는 내야수들은 한가했다"라고 증언했다.
- 다른 대투수들과 마찬가지로 하체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팽이는 굴대가 장악하고 있어 더욱 안정된다. 투수도 마찬가지로 하체의 안정이 있어야 비로소 공을 컨트롤할 수 있다. 하체를 단련하는 것, 이것이 독수리의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 한신 시절 오 사다하루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1962년에는 1경기 3피홈런을 포함해 7개의 피홈런을 허용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팜볼을 습득, 1963년에는 오 사다하루에게 홈런을 허용하지 않았고, 도쿄 이적 후에는 결정구로 사용했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세 종류의 팜볼을 던졌다.[47]
- 아내는 한큐군의 초기 명선수였던 미야타케 사부로의 딸이다.
- 아쿠타가와 히로시와 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쿠타가와 히로시도 자신의 수필에서 '자신이 던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기술했다.
- 2012년 효고 현립 다카사고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으로부터 소행성에 자신의 이름(Masaaki Koyama)이 명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워하며 "큰 땅에는 약해요"라고 말했다.[48]
- 한여름에도 뜨거운 차만 마시는 등 철저한 건강 관리에 힘썼으며, 라이벌이었던 무라야마 미노루조차 "고야마 씨의 프로로서의 자세는 공부가 되었다"라고 칭찬했다.[34]
- 담배를 피우지 않아 천람시합에서 받은 은사담배도 아버지에게 드렸다.[35][36]
- 아오타 노보루에 따르면 1962년 한신 우승 당시 선수에게 지급된 순금 플레이트에 새겨진 글자에 대해 "깎인 금은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37]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고야마 마사아키는 선수 시절 사와무라 에이지상(196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2001년)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1973년 다이요 웨일스를 시작으로 한신 타이거스,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으며, 아사히 방송, 선 TV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6. 1. 타이틀
연도 | 소속팀 | 내용 |
---|---|---|
1973년 | 다이요 웨일스 | 투수 코치 |
1974년 ~ 1975년 | 한신 타이거스 | 투수 코치 |
1976년 ~ 1981년 | 아사히 방송 | 야구 해설자 |
1982년 ~ 1983년 | 한신 타이거스 | 투수 코치 |
1984년 ~ 1989년 | 아사히 방송 | 야구 해설자 |
1990년 ~ 1991년 | 세이부 라이온스 | 투수 코치 |
1992년 | 선 TV | 야구 해설자 |
1993년 ~ 1994년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투수 코치 |
1995년 ~ 1997년 | 선 TV | 야구 해설자 |
1998년 | 한신 타이거스 | 투수 코치 |
1964년 | 최다승 | |
1962년 | 최다 탈삼진[1] | |
1962년 | 최고 승률 |
[1]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해당 상을 시상했다.
6. 2. 수상
수상 |
---|
7. 개인 기록
-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1962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1년)
- 시즌 30승 이상 : 1회(1964년)
- 시즌 20승 이상 : 7회(1958년 ~ 1960년, 1962년, 1964년 ~ 1966년)
- 시즌 13차례 완봉승(1962년)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10차례 무4사구 경기(1958년, 1962년) ※센트럴 리그 기록
- 5경기 연속 완봉승(1962년 7월 7일 ~ 7월 22일) ※센트럴 리그 기록
- 47이닝 연속 무실점(1962년 7월 7일 ~ 7월 29일)
- 올스타전 출장 : 11회(1957년 ~ 1960년, 1962년 ~ 1967년, 1970년)
- 양대 리그 100승 이상(센트럴 리그 180승, 퍼시픽 리그 140승)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유일
- 통산 평균자책점: 2.454 ※2000 투구 이닝 이상, 최우수 평균 자책점 미획득으로는 역대 최고
1962년 완봉 승리 경기 | |||||
---|---|---|---|---|---|
# | 날짜 | 대진 팀 | 회차 | 구장 | 비고 |
1 | 5월 17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7 | 고라쿠엔 구장 | |
2 | 6월 24일 | 다이요 | 11 | 가와사키 구장 | |
3 | 7월 7일 | 주니치 | 11 | 주니치 구장 | |
4 | 7월 11일 | 고쿠테쓰 | 14 | 고라쿠엔 구장 | 2경기 연속 |
5 | 7월 15일 | 다이요 | 12 | 고시엔 구장 | 3경기 연속 |
6 | 7월 19일 | 히로시마 | 17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4경기 연속 |
7 | 7월 22일 | 주니치 | 17 | 고시엔 구장 | 5경기 연속 |
8 | 8월 2일 | 고쿠테쓰 | 17 | 고시엔 구장 | |
9 | 8월 21일 | 히로시마 | 22 | 고시엔 구장 | |
10 | 9월 6일 | 다이요 | 23 | 가와사키 구장 | |
11 | 9월 16일 | 고쿠테쓰 | 23 | 고라쿠엔 구장 | |
12 | 9월 19일 | 히로시마 | 25 | 고시엔 구장 | |
13 | 10월 3일 | 히로시마 | 26 | 고시엔 구장 | 우승 결정 |
;기록
- 1000 탈삼진: 1959년8월 16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22회전 (고라쿠엔 구장), 이와시타 모리미치로부터[46] ※역대 17번째
- 100승: 1960년4월 3일, 대 히로시마 카프 2회전 (히로시마 시민), 9회 3실점 완투 승리 ※역대 27번째
- 150승: 1962년7월 19일, 대 히로시마 카프 17회전 (고라쿠엔 구장), 9회 무실점 완봉 승리
- 500경기 등판: 1964년 5월 3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9회전 (도쿄 스타디움), 선발 등판
- 2000 탈삼진: 1964년5월 2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12회전 (도쿄 스타디움), 이시카와 스스무로부터[47] 역대 4번째
- 200승: 1964년 8월 13일, 대 난카이 호크스 27회전 (오사카 구장),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10번째
- 600경기 등판: 1966년5월 17일, 대 난카이 호크스 7회전 (도쿄 스타디움), 선발 등판 ※역대 6번째
- 250승: 1967년5월 19일, 대 난카이 호크스 5회전 (도쿄 스타디움),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6번째
- 700경기 등판: 1968년 7월 19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15회전 (도쿄 스타디움), 7회 1사부터 구원 등판 ※역대 4번째
- 300승: 1971년7월 3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9회전 (고라쿠엔 구장),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4번째
- 800경기 등판: 1971년 8월 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15회전 (도쿄 스타디움), 6회 1사부터 구원 등판 ※역대 3번째
참조
[1]
서적
Gene Bacque
https://books.googl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2005
[2]
뉴스
Koyama named to Hall of Fame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01-01-13
[3]
서적
タイガースの生いたち
恒文社
1973
[4]
서적
日本プロ野球トレード大鑑
[5]
뉴스
【7月3日】1971年(昭46) 丈夫で長持ち テスト生投手、パームボールで300勝達成
https://web.archive.[...]
スポニチ
[6]
서적
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7]
서적
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8]
웹사이트
野球殿堂記者投票への考察=第44回(2001年度)根本陸夫が競技者、長谷川良平が特別表彰。これは逆でしょ
http://weblog.hochi.[...]
[9]
웹사이트
『プロ野球20世紀の男たち 山内一弘&小山正明「“世紀の大トレード”の覚悟」/プロ野球20世紀の男たち』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19年10月1日
https://column.sp.ba[...]
[10]
서적
炎のエース ザトペック投法の栄光
[11]
Youtube
【甲子園同窓会】 バッキー×江夏×小山 ~猛虎と呼ばれた男たち~
https://www.youtube.[...]
2023-12-11
[12]
서적
プロ野球トレード光と陰
[13]
뉴스
【12月26日】1963年(昭38) 小山正明と山内一弘“世紀のトレード”異例の同席発表
https://www.sponichi[...]
[14]
웹사이트
金田正一、巨人入団前夜/週べ1965年1月4日号 - 野球: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http://column.sp.bas[...]
[15]
서적
日本プロ野球トレード大鑑
[16]
웹사이트
野球殿堂記者投票への考察=第44回(2001年度)根本陸夫が競技者、長谷川良平が特別表彰。これは逆でしょ: 蛭間豊章記者の「Baseball inside」
https://weblog.hochi[...]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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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苦しいところから日のあたるところまで経験できた」元西武・石井丈裕 黄金期に上げた”でっかい花火”と今後の夢
https://media.spport[...]
[18]
웹사이트
今の投手も350勝できるはずや、同じ人間やからと米田哲也は言った|プロ野球|集英社のスポーツ総合雑誌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https://sportiva.shu[...]
[19]
서적
スポーツ人名事典 新訂第3版
2002-01-01
[20]
간행물
週刊プロ野球データファイ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10-12
[21]
서적
プロ野球〈猛虎(タイガース)復活〉読本―「知将」野村克也は"ダメ虎"阪神を再生する!? (別冊宝島 (437)
宝島社
1999-05-01
[22]
뉴스
通算320勝投手の小山正明氏、鳥谷の名球会入り見届けサンテレビの解説“勇退”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online
[23]
서적
感涙!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聞出版
2011
[24]
서적
プロ野球を創った名選手・異色選手400人
[25]
웹사이트
【7月3日】1971年(昭46) 丈夫で長持ち テスト生投手、パームボールで300勝達成
https://web.archive.[...]
Sponichi Annex
[26]
비디오
魔球伝説
文春Numberビデ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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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球界勝利数トップ3「投げすぎで投手の肩は壊れぬ」で意見一致
https://www.news-pos[...]
[28]
웹사이트
「怪奇現象ピッチング」の320勝投手にロッテのエース・木樽正明が驚愕
https://www.msn.com/[...]
202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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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朝日新聞東京本社版、1988年3月24日付朝刊18面
朝日新聞
1988-03-24
[30]
웹사이트
クラシックSTATS鑑賞 : 王貞治、投手別本塁打数|本塁打大全
http://classicstats.[...]
[31]
서적
野球バカは死なず
文藝春秋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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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ベ60周年記念企画92】『連載小説 黒眼鏡の打者…五味康祐』【1960年1月13日新年特別号】
https://column.sp.ba[...]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8-01-27
[33]
서적
決められた以外のせりふ
新潮社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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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猛虎大鑑1936-2002
[35]
웹사이트
月刊タイガース小山正明氏特別インタビュー
http://www.m-ti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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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制球王小山正明1」特別な土産(後編)
https://news.go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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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
ぱる出版
199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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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小山正明氏“虎の星”に!小惑星に命名
http://www.daily.co.[...]
데일리 스포츠
201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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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npb.jp/bi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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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7月3日】1971年(昭46) 丈夫で長持ち テスト生投手、パームボールで300勝達成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41]
뉴스
日대지진, 巨人 역사도 바꿨다…개막 연기 확정
https://sports.news.[...]
이데일리
20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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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初の海外キャンプに藤本勝巳ら期待感いっぱい/復刻
https://www.nikkansp[...]
닛칸스포츠
2021-06-20
[43]
뉴스
米テンピキャンプ、ブレイザー監督ら現地入り/復刻
https://www.nikkansp[...]
닛칸스포츠
2021-06-20
[44]
뉴스
【緊急事態の虎】1985年 ヨッさん突然キャンプ地変更 「若手にチャンスを」日本一の土台作り
https://www.sanspo.c[...]
산케이 스포츠
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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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12月26日】1963年(昭38) 小山正明と山内一弘“世紀のトレード”異例の同席発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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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닛폰
[46]
서적
감격의 눈물! 나니와 야구 전설
아사히 신문 출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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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마구 전설
분슌 Number 비디오
[48]
뉴스
“虎の星”に!小惑星に小山正明氏の名前
https://web.archive.[...]
데일리 스포츠
201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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