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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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오 7세는 174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인물로, 1800년부터 1823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1801년 정교 협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혁명 이후 단절된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정부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과의 갈등으로 인해 교황령이 합병되고 사보나에 유배되기도 했다. 비오 7세는 빈 회의에서 교황령 부활을 인정받았으며, 예수회 부흥과 노예 제도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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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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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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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하느님의 종 교황 |
존칭 접미사 | O.S.B. |
이름 | 비오 7세 |
본명 |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 |
직함 | 로마 교구장 |
교회 | 가톨릭 교회 |
재임 시작 | 1800년 3월 14일 |
재임 종료 | 1823년 8월 20일 |
이전 교황 | 비오 6세 |
다음 교황 | 레오 12세 |
서품 | 1765년 9월 21일 |
주교 서임 | 1782년 12월 21일 |
주교 서임자 |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데 젤라다 |
추기경 임명 | 1785년 2월 14일 |
추기경 임명자 | 비오 6세 |
이전 직책 |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수도원장 (1775–1782) 티볼리 주교 (1782–1785) 이몰라 주교 (1785–1816) 산 칼리스토의 추기경 사제 (1785–1800) |
출생일 | 1742년 8월 14일 |
출생지 | 체세나, 교황령 |
사망일 | 1823년 8월 20일 |
사망 장소 | 로마, 교황령 |
모토 | Aquila Rapax ("탐욕스러운 독수리") |
서명 | Pius_VII_signature.svg |
문장 | C o a Pius VII.svg |
기타 정보 | |
라틴어 이름 | |
라틴어 이름 | Pius PP. VII |
이탈리아어 이름 | |
이탈리아어 이름 | Papa Pio VII |
본명 | Barnaba Niccolò Maria Luigi Chiaramonti |
2. 생애
루이지 키아라몬티는 1742년 교황령 체세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라벤나에서 공부하고 1756년에 베네딕토회에 입회했다. 그는 같은 고향 출신 친구였던 조반니 브라스키가 교황직에 오르는 데 아낌없이 지원했고, 그 공로로 비오 6세가 된 브라스키로부터 로마의 산 카리스토 수도원 원장,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4][5]
1799년 비오 6세가 사망함에 따라 콘클라베가 열렸다. 3개월에 걸쳐 난항을 겪은 선거 끝에 키아라몬티가 선출되었고, 그는 친구였던 전임자의 이름을 이어받아 비오 7세라고 칭했다.
비오 7세는 교황으로서 가톨릭 교회와 세속 국가의 관계 회복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갈리카니즘, 페브로니우스주의 등이 성행하여 반 교회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협상을 시작하여 1801년 Concordat of 1801|1801년의 콩코르다영어를 성립, 프랑스 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회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의 오른팔이었던 추기경 에르콜레 콘살비의 역할이 컸다.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에 초청되어 프랑스를 방문한 비오 7세는,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고 나폴레옹이 교황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걸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는 나폴레옹 뒤에 앉아 있는 비오 7세의 씁쓸한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 나폴레옹과 교황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접수하기에 이르자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을 파문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비오 7세를 북 이탈리아의 사보나에 감금했다. 1814년 나폴레옹 퇴위 후 로마로 돌아온 교황을 시민들은 환호하며 맞이했다.
비오 7세와 교황청의 지위는 유럽 여러 국가에서 인정받았고, 빈 회의에서는 교황령의 부활이 인정되었다. 비오 7세는 23년의 재위 기간 동안 1814년 예수회 부흥,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의 정교 협약 체결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비오 7세는 임기 초반 나폴레옹과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그의 가족을 로마에 숨겨주고, 임종을 앞둔 나폴레옹을 위해 세인트헬레나 섬에 사제를 파견하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문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는 1742년 8월 14일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백작 스키피오 키아라몬티(1698년 4월 30일 – 1750년 9월 13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조반나 코로나타(1777년 11월 22일 사망)는 후작 기니의 딸이었다. 그의 집안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부유하지는 않았고 중산층이었다.[3] 모친 계통으로는 교황 비오 6세와 친척 관계였다.2. 2. 가톨릭교회에서의 활동
루이지는 어릴 때 베네딕토회의 지도를 받아 수사가 되었다.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교수로 있다가 1766년 파르마의 성 요한 수도원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이후 다시 성 안셀모 대학교로 옮겼다. 1783년 티볼리의 주교가 되었다. 1785년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이몰라 교구로 전보되어 추기경이 되었다.[4]1782년 12월, 교황은 돔 그레고리오를 로마 인근의 티볼리 주교로 임명했다. 1785년 2월에는 산 칼리스토의 추기경-사제로 임명했고,[5] 1816년까지 직을 유지한 이몰라 주교로 임명했다.[6]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이 1797년에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침략당했을 때, 키아라몬티 추기경은 새롭게 창설된 치스알피나 공화국에 대한 절제와 복종을 권고했다. 그는 교구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 정부가 바뀌는 현재 상황에서 (...)" 승리한 프랑스 군 최고 사령관의 권위에 순응할 것을 요청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설교에서 그는 민주주의 형태의 정부와 훌륭한 가톨릭 신자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미덕은 사람들을 훌륭한 민주주의자로 만든다... 평등은 철학자의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이다... 가톨릭교가 민주주의에 반대한다고 믿지 말라."[7]
3. 교황 재위
비오 7세는 교황으로서 당면한 과제는 가톨릭 교회와 세속 국가의 관계 회복이었다. 당시 갈리카니즘, 페브로니우스주의 등이 성행하여 반 교회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비오 7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협상을 시작하여 1801년 Concordat of 1801|1801년의 콩코르다영어를 성립, 프랑스 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추기경 에르콜레 콘살비가 큰 역할을 했다.[9]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에 초청받아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비오 7세는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는 시스템과 나폴레옹이 교황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후 나폴레옹과 교황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접수하자 비오 7세는 파문으로 대응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비오 7세를 사보나에 감금했고, 1814년 나폴레옹 퇴위 후에야 교황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오 7세와 교황청의 지위는 유럽 국가들에게 인정받았고, 빈 회의에서 교황령 부활이 승인되었다. 23년 재위 동안 비오 7세는 1814년 예수회 부흥,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정교 협약 체결 등 성과를 거두었다. 비오 7세는 나폴레옹 몰락 후 그의 가족을 로마에 숨겨주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중인 나폴레옹에게 사제를 파견하기도 했다.
3. 1. 교황 선출
1799년 교황 비오 6세가 발랑스에서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1799년 11월 30일 베네치아의 베네딕토회 산 조르조 수도원에서 열렸다.[31] 3개월 이상 지속된 논의 끝에, 1800년 3월 14일 루이지 키아라몬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7세로 명명되었다.[7]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교황 삼중관이 없는 상황에서, 파피에마셰로 만든 임시 교황관을 쓰고 3월 21일 인근 수도원 교회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프랑스는 로마를 점령하고 비오 6세를 망명시키면서 성좌가 소유한 삼중관을 압수했었다. 새 교황은 그 후 로마로 떠났고, 갤리조차 없는, 겨우 항해 가능한 오스트리아 선박 "벨로나"를 타고 항해했다. 12일간의 항해는 페사로에서 끝났고, 그는 로마로 향했다.
3. 2. 나폴레옹과의 관계
비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시점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프랑스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15]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으며, 프랑스 군사 지도자의 요구에 양보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였다.1799년 비오 6세가 사망한 후 콘클라베에서 3개월간의 난항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마자 프랑스 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801년에는 나폴레옹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내 가톨릭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협약을 통해 교회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비오 7세는 프랑스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교황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과 교황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점령하고 비오 7세를 파문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비오 7세를 사보나에 감금했고, 비오 7세는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야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오 7세는 나폴레옹 몰락 후 그의 가족을 로마에 숨겨주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중인 나폴레옹에게 사제를 파견하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2. 1. 정교협약
비오 7세는 재위 초기 프랑스의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정교협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프랑스 내 가톨릭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 감정을 일치시키기 위해 교황의 힘이 필요했다. 1801년 7월 15일, 비오 7세는 나폴레옹과 정교협약을 맺고 인준했다. 그해 8월 15일에는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 Christi'')〉 라는 칙령을 통해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다.[9]이 협약은 교회 재산 몰수 승인, 교황 임명 주교 파직 등 교황청에 불리한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10] 비오 7세는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정교 협정 이후 77개의 부속 법령을 만들어 교회의 권리를 유린하였고, 교황청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고 했다.
프랑스와 교황 간의 정교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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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는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종교"임을 선포했지만, 종교의 자유, 특히 개신교와 관련된 종교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식 종교는 아니었다. |
교황은 주교를 해임할 권한을 가졌다. |
국가는 성직자 봉급을 지급하고 성직자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
교회는 1790년 이후 몰수된 교회 토지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했다. |
일요일은 1802년 4월 18일 부활절 일요일부터 유효하게 "축제일"로 재설정되었다. |
3. 2. 2.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2] 나폴레옹이 교황으로부터 축성받기를 원하자 비오 7세는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33] 파리를 방문했다. 왕관을 씌워주면 교황으로서 자신의 권위 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34]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초청되어 프랑스를 방문한 비오 7세는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음에 경악했고, 나폴레옹이 교황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때 비오 7세의 심정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걸작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 뒤에 앉아 있는 비오 7세의 씁쓸한 표정으로 잘 나타나 있다.
3. 2. 3. 갈등과 감금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유럽에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급속히 나빠졌다. 비오 7세는 중립을 지키면서 대륙봉쇄령을 지지하지 않았고, 이에 나폴레옹은 1808년 2월에 로마를 점령하고 1809년 5월에는 교황령을 합병했다. 비오 7세는 1809년 6월 10일에 파문을 선포하여 이에 반발했고, 즉시 프랑스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제노바 인근 사보나에 구금되었다.[35] 1812년 5월, 퐁텐블로로 강제 이송된 후 1813년 1월 교황령에 대한 권리 포기 등 광범위한 양보 조항이 포함된 '퐁텐블로 정교조약'에 서명을 강요받았다.[35] 약하고 병든 교황은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814년 비오 7세는 로마에 다시 들어와 예수회를 복구하였다. 교황령은 1815년 빈 회의에서 콘살비 추기경에 의해 회복되었다.

3. 3. 교황령 회복과 예수회 복구
나폴레옹에게 파문당하고 사보나에 감금되었던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14년 로마로 돌아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9] 그해, 교황은 예수회를 복구하였다. 1815년 빈 회의에서 교황청 대표 에르콜레 콘살비 추기경의 노력으로 교황령이 회복되었다.3. 4. 노예 제도 반대
비오 7세는 1815년 빈 회의에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억제를 촉구하는 선언에 동참했다. 그는 프랑스와 포르투갈 국왕에게 노예 제도의 종식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3. 5. 유대인 게토 정책
나폴레옹 통치 아래에서 폐지되었던 로마 게토를 다시 설치하고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는 당시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조치로,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판받을 수 있다.3. 6. 기타 활동
비오 7세는 복음서의 가치로의 회귀를 옹호하기 위해 회칙 ''Diu satis''를 발표하고, 9월 15일 슬픔의 성모 축일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19] 1821년 회칙 ''Ecclesiam a Jesu Christo''에서 프리메이슨과 카르보나리 운동을 비난했다. 비오 7세는 프리메이슨이 파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을 이탈리아의 반성직자 혁명 단체인 카르보나리와 연결했다. 카르보나리의 모든 구성원도 파문되었다.[19]비가톨릭 성서 공회의 활동에 대한 그의 우려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44년 회칙 ''Inter Praecipuas''에서 인정했다.[19]
비오 7세는 다중 언어 구사자였으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4. 죽음과 유산
1822년, 비오 7세는 80세 생일을 맞아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1823년 7월 6일, 교황 궁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을 입었고, 그 후로 병상에 누워 지냈다.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종종 의식을 잃었고, 프랑스군에 의해 이송되었던 도시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24] 에르콜레 콘살비 추기경이 그의 곁을 지킨 가운데, 비오 7세는 1823년 8월 20일 오전 5시에 81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비오 7세는 잠시 바티칸 묘지에 안치되었으나, 8월 25일 장례식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념비에 다시 묻혔다.[25][26]
이후 비오 7세는 사보나 교구의 수호성인이자 수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출되었다.[28]
4. 1. 시복 절차
2006년 7월 10일, 시복 절차 개시 신청서가 성좌에 접수되었고, 카밀로 루이니 추기경(로마 부교구장)의 승인을 받아 성인성성성으로 이송되었다. 성인성성성은 2007년 2월 24일, 리구리아 주교들의 요청에 응하여 이 사건 개시를 승인했다.[27]2007년 8월 15일, 성좌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오 7세의 시복 절차에 대해 "반대 없음"을 선언하여 교구 절차를 개시한다는 소식을 사보나-놀리 교구에 전달했다. 이로써 비오 7세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27] 이 사건 개시를 선언하는 공식 문구는 다음과 같다. "''최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성좌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종 비오 7세 바르나바 그레고리오 키아라몬티의 시복 및 시성 사건에 아무런 반대가 없음을 선언한다''". 그 후, 비오 7세에 대한 문서 수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오 7세는 사보나 교구의 수호성인이자 수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출되었다.[28]
2018년 말, 사보나의 주교는 초기 준비 및 조사가 완료됨에 따라 비오 7세에 대한 사건이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주교는 새로운 대리인과 교구 법정을 임명하여 사건에 대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9] 2021년 10월 31일, 사보나 교구에서 거행된 미사에서 비오 7세의 삶에 대한 교구 조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30]
이 사건의 첫 번째 대리인은 조반니 파리스 신부(2007-2018)였으며, 2018년부터 현재 대리인은 조반니 마르가라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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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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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35]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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