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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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부는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로, 1929년 4월 1일 정의부를 중심으로 신민부 민정파와 참의부 일부 세력이 연합하여 수립되었다.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인 사회의 자치와 독립을 목표로 했으며, 한국혁명당과 한국혁명군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쇠퇴하여, 1934년 조선혁명군정부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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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부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정식 명칭 | 국민부 |
| 일반 명칭 | 국민부 |
| 시대 | 전간기 |
| 지위 | 역사적으로 미승인된 자치주 |
| 원어 명칭 | 국민부 (國民府) |
| 국가 표어 |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의 절대 독립을 달성한다. |
| 수도 | 싱경(사실상) |
| 공용어 | 한국어 |
| 정부 형태 | 자치 협동 조직 |
| 지도자 1 | 현익철 |
| 지도자 2 | 김호석 |
| 지도자 1 임기 시작 | 1929년~1931년 |
| 지도자 2 임기 시작 | 1931년~1934년 |
| 지도자 직함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
| 정부 형성 | 1929년 4월 1일 |
| 사건 종료 날짜 | 4월 |
| 사건 종료 년도 | 1934년 |
| 입법부 | 중앙 평의회 (1929년 9월~12월) 혁명 의회 (1929년 12월) |
| 현재 국가 | 중국 |
| 민족 | 한민족 |
| 면적 정보 | |
| 경제 정보 | |
| 이전 국가 | |
| 이전 국가 1 | 중화민국 |
![]() | |
| 이전 국가 2 | 만주 한인회 |
| 이전 국가 3 | 정의부 |
| 다음 국가 | |
| 다음 국가 1 | 만주국 |
| 한국어 명칭 | |
| 제목 | 국민부 |
| 한글 | 국민부 |
| 한자 | 國民府 |
| 로마자 표기 | Gukminbu |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ookminbu |
2. 배경
1927년경 만주 지역은 세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고, 한국인 사회에서는 자치와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은 참모총장부, 만주 남부의 지린(吉林)과 펑톈(奉天) 지역은 의열단, 만주 북부의 중동선(中東線) 지역은 만주 한국인협회의 관할이었다.[2] 이들은 정부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최고 목표는 ‘독립전쟁론’을 통한 국권 회복이었다.
한편, 국내 독립운동에 필요한 만주 지역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 보다 효과적인 대일 항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 만주에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던 세 자치구역을 조속히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중화민국(國民政府)의 무능과 친일 성향을 이용하여 만주 침략을 더욱 적극화하면서, 반일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세 자치구역의 통합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7월 중국 내에서 시작된 일당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세 자치구역의 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2]
2. 1. 국내외 정세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많은 한인들이 독립운동과 생계를 위해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깝고,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20년대 만주 지역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3개의 한인 자치 정부(3부)가 수립되어 각자의 관할 구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2] 이들은 행정, 사법, 군사 기능을 수행하며 한인 사회를 통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92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협력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넘어 민족의 총 역량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1928년 무렵, 만주에는 3부가 정립된 가운데, 정의부가 재만 독립운동단체를 영도하기 위해 유일당 촉성운동을 주창하였다.[2] 1928년 2월 3부 간부들의 연합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같은 해 5월 신민부와 참의부 외 민족·공산주의를 망라한 재만 18개 단체 대표가 모인 회의는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로 분열되었다.
1927년경 만주 지역은 세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고, 한국인 사회에서는 자치와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은 정부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최고 목표는 ‘독립전쟁론’을 통한 국권 회복이었다.[2] 한편, 국내 독립운동에 필요한 만주 지역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 보다 효과적인 대일 항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 만주에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던 만주 지역의 세 자치구역을 조속히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더욱이, 세 자치구역이 설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중화민국(國民政府)의 무능과 친일 성향을 이용하여 만주 침략을 더욱 적극화하면서, 반일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세 자치구역의 통합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7월 중국 내에서 시작된 일당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세 자치구역의 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2] 국가 독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필요한 만주 거주 한국인들의 모든 역량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남북 만주 삼부의 통합을 조속히 달성해야 했다.[3]
지린(吉林)과 만주 반석(盤石)의 참모본부 지휘 아래 여러 통일 의회가 구성되었고, 이 문제는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첫 번째 회의는 1928년 5월 12일부터 같은 달 26일까지 15일간 개최되었으며, 김동삼(金東三)과 현정경(玄正景)을 비롯한 참모본부를 포함한 18개 단체의 39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베이징(北京)의 박건겸(朴建謙) 등도 참여하여 단일 국민당(黨) 조직을 논의하였다.[3]
만주 내 한국인들을 위한 단일 정당 결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지만, 건설 방식 측면에서 기존 조직 중심으로 조직할 것인지, 모든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재편성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다. 참모본부 소속 김동삼은 길장연로(吉長延路) 서쪽 7마일 신안둔(新安屯)에 모여 3개 파벌을 통합하는 단일 정당을 결성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이때 중국과 일본군의 강력한 단속으로 참모본부 대표가 중도에 귀환하였고, 신민(新民)현 대표는 회의 종료 후 도착하여 본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주 각지에서 모인 여러 단체의 대표들은 세계 정세를 바탕으로 한 대일 투쟁 방식, 단일 정당 결성 문제, 군사, 재정, 정치, 교육, 노동, 청년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구체적인 의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그룹 중심 조직론, 개인 중심 조직론 등 단일 정당 결성 방식에 대한 상반된 의견이 존재했고, 양측이 ‘의회’ 조직을 주장하는 측과 ‘의회 추진’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였기 때문이다.[3]
신민부의 민정파, 참모본부 잔류세력, 그리고 의정부 다수파는 1929년 1월에 국민통일당 조직연합을 결성했다.[2] ‘국민통일당 조직연합’은 독립적인 자치정부인 국민부를 모체로 삼아 독자적인 정당 결성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1][2] 1929년 3월에는 정의부 대표 이동림, 현익철, 고이철, 고유신, 최동욱, 이택, 참모본부 대표 심용준, 임병무, 유광열, 신민부 대표 이효원 등이 다시 길림성에서 모여 제2차 삼부 통합회의를 개최했다.[3]
2. 2. 3부 통합 운동과 민족유일당 운동
1928년 만주 지역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가 있었다. 이들의 통합 운동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움직임이었다.[3] 각 부는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합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3부 통합을 위한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으나, '촉성회파'와 '협의회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결렬되었다.[7] 촉성회파는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합 조직을 건설하려 한 반면, 협의회파는 기존 조직을 유지하면서 연합하는 방식을 추구하였다.[3]1928년 5월, 신민부와 참의부 외 민족·공산주의를 망라한 재만 18개 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를 진행했으나, 기성단체의 부정을 주장하는 '촉성회파'와 기성단체의 본위를 주장하는 '협의회파'로 분열되었다. 회의 결과, 촉성회 측은 민족유일당 '촉성회조직동맹'을 조직하였고, 협의회 측은 '재만운동단체 협의회'를 규약하였다.
1928년 9월, 정의부를 중심으로 한 협의회파는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결성하고, 국민부 수립을 추진하였다.[1][2] 그러나 3부 통합은 각 파벌 간의 의견 충돌, 신민부 대표 자격 논란, 참의부 대표 소환 문제 등 난항을 겪으며 통합 회의가 결렬되면서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통합은 더욱 어려워졌다.[3]
1929년 1월, 신민부의 민정파, 참모본부 잔류세력, 그리고 의정부 다수파는 국민통일당 조직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독립적인 자치정부인 국민부를 모체로 삼아 독자적인 정당 결성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1][2]
3. 국민부의 성립
1929년 4월 1일, 정의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일부 세력이 연합하여 국민부를 수립하였다. 국민부는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모체로 하였으며,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 정부를 표방하였다.[1]
1929년 9월 20일, 중앙위원회는 당 강령을 개정하여 혁명 관련 임무를 삭제하고 선언과 규약을 채택했다.[6] 삼부통일회의에서 제정된 '조선 독립을 위하여', '군사부' 등의 문구는 '만주 한국인의 문화 향상, 산업 발전, 치안 및 자위'로 수정되었고, '이것이 유일한 임무이다'라고만 언급되었다. 중앙 조직 중 군사부 폐지 대신 각 요충지에 치안부와 특무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길림에서 열린 삼당통일회의는 의회와 도의회 간 갈등으로 결렬되었고, 양측은 각자 일당 체제 추진과 군정 수립의 길을 걸었다. 1929년 12월 말, 수성회는 길림에서 '혁신위원회'를 조직했다. 신민부 군정위원회, 참모본부 김희산 계열, 삼당통일회의 결렬 후 의정부에서 이탈한 김동삼, 김상덕, 김원직, 이청천 계열이 추진한 혁신위원회는 신민정부와 참모본부 해산을 선포했다. 이들은 한국인 자치 외에도 대동단결 추진 적극 지원, 군사 선거 및 적 침입 방지, 법률에 의거한 중국 현지 자치기관 조직, 잔여 업무 처리 등 네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3]
3. 1. 국민부 성립 과정
1929년 3월, '협의회' 측은 정의부 주도로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고 새로운 군정부 조직을 위해 각 부 대표들이 회의를 가졌다.[12] 1929년 4월 1일,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를 해체하고 국민부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여 총무, 군무, 교육, 재무, 지방의 각 부서를 두었다.[13] 또한,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였다.[13]비록 촉성회 측의 불참으로 만주 전역을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민족유일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이 당시 재만 동포사회의 숙원이었던 만큼 국민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13]
1928년 5월, 지린(吉林)과 만주 반석(盤石)의 참모본부 지휘 아래 여러 통일 의회가 구성되었고, 김동삼과 현정경을 비롯한 18개 단체의 39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단일 국민당(黨) 조직을 논의하였다.[3] 그러나 단일 정당 결성 방식을 두고 기존 조직 중심으로 조직할 것인지, 모든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재편성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다. 참모본부 소속 김동삼은 3개 파벌을 통합하는 단일 정당을 결성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이때 중국과 일본군의 강력한 단속으로 회의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고, 단일 정당 결성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회의는 분열되었다. '의회' 조직을 주장하는 측과 '의회 추진'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일부는 '설립 협회'를 결성하려 시도했다.[3]
1928년 9월, 총참모부 주관 하에 3차례 통합회의가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같은 해 11월 혁신회(Innovation Council)가 결성되었다.[1][2] 혁신회는 1년 동안 군정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김동삼을 위원장으로 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고 부서와 간부를 두었다. 또한, 한국 자치구역을 지정하여 만주 전역을 관할하고, 친일파 색출에 주력하여 일본 제국주의 기관을 파괴하였다.[3]
혁신회는 '국민단일당 재제조합회'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동삼, 공동위원에 김좌진과 김성교를 임명하고 단일당 추진에 집중하였다.[3]
1929년 1월, 신민부 민정파, 참모본부 잔류세력, 의정부 다수파는 국민통일당 조직연합을 결성했다.[2] 이들은 독립적인 자치정부인 국민부를 모체로 삼아 독자적인 정당 결성을 목표로 하였다.[1][2] 1929년 3월, 정의부, 참모본부, 신민부 대표 등이 다시 모여 제2차 삼부 통합회의를 개최했다.[3]
1929년 4월 1일, 여러 논의 끝에 국민부(國民府)가 설립되었다. 국민부는 만주 지역의 임시정부이자 만주 거주 한국인의 자치를 위한 독립 기구로, 본부를 랴오닝성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으로 이전하였다. 같은 해 9월, 국민부는 중앙회의를 개최하여 민정과 군정을 분리하고 한국인의 자치와 산업을 책임지는 중앙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민단체 조직 연합도 한국혁명당으로 재편되어 한국혁명군을 결성하였다.[1]
이에 따라 국민부, 한국혁명당, 한국혁명군의 세 기구가 설립되었고, 한국혁명당이 이 세 기구의 조직과 운영을 주도하며 중국과 유사한 양당 체제가 수립되었다. 새롭게 조직된 한국혁명당과 한국혁명군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다.[2][4]
3. 2. 국민부의 이념과 목표
1929년 4월 1일에 설립된 국민부는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와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였다.[1] 국민부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재만 조선민족의 문화 향상, 산업 발전, 공안 유지
- 재만 조선민족의 단일 자치 기관 실현
- 한·중 양 민족의 혁명적 협동 작업
국민부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삼권분립 원칙을 적용하여 행정, 사법, 입법 기능을 분리하여 현대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5] 1930년대 전반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명목상의 정부로 남아있던 반면, 국민부는 국가 기능을 수행하는 반(半)자치 정부였다.[5]
4. 조직
정의부를 주축으로 결성된 국민부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행정, 군사,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었다. 1929년 9월 20일, 중앙위원회는 당 강령을 개정하여 혁명 임무를 삭제하고 선언과 규약을 채택했다.[6] 같은 해 3월 삼부통일회의에서 제정된 강령과 규약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와 '군사부'와 같은 문구를 삭제하고 '만주 한국인의 문화 향상, 산업 발전, 치안 및 자위'로 수정되었다.
길림에서 열린 삼당통일회의는 의회와 도의회의 갈등으로 결렬되었고, 양측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 일당 체제를 추진하고 군정을 수립했다.
4. 1. 중앙집행위원회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파와 참의부 심용준파 등 일부 세력이 통합하여 결성된 국민부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부의 최고 의결 기관이자 집행 기관이었다.[6]
1929년 9월 20일, 중앙위원회는 당 강령을 개정하여 혁명 임무를 삭제하고 선언과 규약을 채택했다.[6]
4. 2.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1929년 4월 1일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국민부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1] 조선혁명당은 국민부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조직이었으며, 조선혁명군은 항일 무장 투쟁을 담당하는 군사 조직이었다.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어 있었지만,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조선혁명당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는 등 인맥이 상통하였다.[6]
조선혁명군은 이웅이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사령관을 맡고, 각 중대장을 임명하여 조직된 독립군이었다. 조선혁명당 결성과 동시에 구성된 조선혁명군은 국민부로부터 독립된 무장 군대로서 혁명 활동을 전개하였다.[6] 이들은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고, 각 부대는 군사위원회 위원을 대표로 임명하여 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는 혁명군의 지도 기관이었다. 1만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한 조선혁명군은 10개 부대를 7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여러 지역에 주둔시켰다. 이진선을 총사령관으로, 양벽해를 부사령관으로, 이웅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만주국 건국 무렵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여 뛰어난 전과를 남겼다.[6]
조선혁명군은 건립 이후 일본군이나 경찰과 싸우거나 중국 항일군과 연합하였다.[6]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부의 결의는 눈부셨으며, 한국과 중국은 조선혁명군을 통해 공동 항일 투쟁을 벌였다. 심지어 선민부(鮮民府)를 공격하여 친일파를 소탕하기도 하였다.[5] 본부를 습격하고 친일파를 사살하며 본부 조직을 해체하였으며, 중국 국민당과의 협력을 망설이지 않았고 한국 사회주의자들과도 대립하였다.[6]
4. 3. 행정 구역과 지방 조직
국민부는 흥경, 환인, 유하, 동화, 건, 관전, 봉예, 해룡, 부순 등 만주 남부 지역을 관할하였다.[2] 무순, 봉성 등지에는 지역 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표자들을 선출했다.[2] 지역 행정위원회 아래에는 위원장, 백호장(百戶長), 십호장(十戶長)을 두어 가구 조사와 각종 세금 징수를 담당하게 하였다.[2] 이 자금은 경찰감찰관과 조선혁명군 중대장과 협의하여 조선혁명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2]5. 활동
1925년 9월 2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구성하였고, 12월 20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개편,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소속당군을 조선혁명군이라 하였다. 국민부는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재만 동포사회의 자치기관만을 담당하고, 군사에 관한 사항은 조선혁명군이 담당하였다. 1938년 9월까지 민족유일당 조선혁명당의 명령에 따라 독립투쟁에 임하면서 만주 유일의 민족운동단체로 활동하였다.[1]
5. 1. 자치 행정
국민부는 한인 사회의 질서 유지, 민원 처리, 세금 징수 등 자치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다.[1] 흥경(興京), 환인(歡仁), 유하(柳河) 등지에 지역 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표를 선출하였다. 지역 행정위원회 아래에는 위원장, 백호장(百戶長), 십호장(十戶長)을 두어 가구 조사와 부세 징수를 담당하게 하였고, 이렇게 거두어들인 자금은 조선혁명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2]5. 2. 교육 및 계몽 활동
국민부는 교육부를 통해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각 지역에 서당, 초등학교, 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우수한 교사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를 운영하였다.[1]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는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와 동명중학교가 있었다.[1]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汪淸門)에는 화흥중학교를 설립하고, 중학교 내에 남만학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인재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다.[6]5. 3. 경제 활동
국민부는 재무부를 통해 한인 사회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였다. 농민 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을 편찬하고 월례 통신 교육과 순회 도서관을 운영하여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6] 봉화현에서는 북서하농장을 설립하여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농장은 만주 지린성에 위치하며, 침략 이후 망명한 활동가들의 은신처이자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6]상업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신빈현 홍묘자에 점포를 설치하고 경비를 조달하여 연락 거점으로 삼는등 한인 상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6]
재정 확보를 위해 만주 거주 조선인들에게서 회비를 징수했다.[6] 그러나 침략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국민부가 강제로 회비를 징수하는 등 정부와 같은 행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6]
5. 4. 항일 무장 투쟁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 전체를 점령하자, 국민부는 산하 무장 조직인 조선혁명군을 통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 조선혁명군은 일본군이나 경찰과 싸우고, 중국 항일군과 연합하였다.[6] 또한, 친일파를 소탕하기 위해 선민부(鮮民府)를 공격하여 본부를 습격하고 친일파를 사살하는 등 본부 조직을 해체하였다.[5][6]1932년에는 한국혁명군과의 합동 회의를 통해 한중 연합 작전이 수립되었고, 중국 의용군 및 중국의 반만주·반일 군대와 연합하여 흥경성 전투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1]
6. 조선혁명당과의 관계
현익철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당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이 상통하였다.[14][15] 이들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따라 유일 정당과 행정부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6. 1. 이당치국 원칙
조선혁명당은 국민부의 이념을 실현하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의 지도 아래 행정, 사법, 입법 등 자치 기능을 수행하였다. 양측은 조직상 분리되어 있었지만, 인적 교류를 통해 긴밀하게 협력하였다.[14][15]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한 유일당과 행정부의 관계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사회의 자치행정기관으로서 그 조직과 운영이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에 놓였다.[3] 한국혁명당은 전국적인 역량을 결집하여 동일한 이론과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당 운영을 실시하였다. 이후 국민부를 지지하고 육성한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6]
6. 2. 상호 협력과 갈등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였다. 현익철이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당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두 단체는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이 상통하였다.[14][15]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 사회의 자치 행정 기관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지도를 받았다.그러나 운영 방식과 노선 차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갈등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1929년 10월, 한국혁명군은 한국청년총동맹을 공격하여 국민 전선에 반대하는 간부 6명을 살해하는 남만 사건을 일으켰다.[5] 좌익 단체들이 반제 동맹을 결성하면서 국민 전선은 좌우 대립으로 분열되기도 했다.[5]
7. 해체
1934년 말 김호석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군정부라는 군사정부로 바꾸면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정부에 흡수, 해체되었다.[2][6]
7. 1. 만주사변과 일제의 탄압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여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고,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1]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 전체를 점령하면서, 국민부의 주요 인사들이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으로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곧 진압하고 조직을 재정비했다.[1] 1932년 1월 20일, 일본 경찰은 한국혁명당 중앙위원회를 급습하여 간부 19명을 체포했다.[6]
1932년, 국민부는 한국혁명군과 함께 한중 연합 작전을 수립하고, 중국 의용군 등과 연합하여 흥경성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1] 그러나 1932년 만주국이 건립된 후, 일본 제국은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만주 지역의 한국인 공동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국민부는 사실상 제 기능을 상실했다.[2][6]
조선혁명군은 국민부로부터 독립된 무장 군대로서,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6] 조선혁명군은 중국 항일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및 경찰과 싸웠으며,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다.[5][6]
그러나 1934년 9월, 양세봉 총사령관이 일본에 의해 암살되면서 조선혁명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2][6]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부와 한국혁명군은 조직을 통합하여 한국혁명군정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2][6]
7. 2. 내부 분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내부에서는 이념 갈등, 노선 투쟁, 권력 다툼 등이 발생하였다.[1]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갈등은 국민부의 통합을 저해하고, 활동 역량을 약화시켰다.[1] 지도부의 분열과 잦은 교체는 조직의 안정성을 해치고, 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1]7. 3. 조선혁명군정부로의 흡수
1934년 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호석이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군정부라는 군사정부로 바꾸면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정부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2][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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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부 (國民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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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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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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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인 자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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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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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국민부
https://adipo.tistor[...]
adipo.tistory.com
2023-09-26
[5]
뉴스
[아! 만주⑥] 국민부 본부터: 남만지역의 통합 임시정부로서 한인들의 자치를 실현하다
https://www.worldkor[...]
World Korean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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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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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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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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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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