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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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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1969년 결성된 미국의 록 밴드이다. 마크 파너, 돈 브루어, 멜 섀처로 구성되어 하드 록 파워 트리오 스타일을 기반으로 대중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1969년 데뷔 앨범 《On Time》을 시작으로, 1970년대 초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We're an American Band"와 "The Loco-Motion"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밴드 내부의 갈등으로 해체되었지만, 여러 차례 재결합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971년 대한민국 내한 공연을 통해 한국 록 음악 발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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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1년 홍보 사진. 왼쪽부터 돈 브루어, 마크 파너, 멜 새처.
1971년 홍보 사진. 왼쪽부터 돈 브루어, 마크 파너, 멜 새처.
다른 이름그랜드 펑크
결성지미국 미시간주 플린트
장르하드 록
아레나 록
블루스 록
활동 기간1969년 - 1976년
1981년 - 1983년
1996년 - 1998년
2000년 - 현재
레이블캐피틀 레코드
MCA 레코드
풀 문
웹사이트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공식 웹사이트
현재 멤버돈 브루어
멜 새처
맥스 칼
팀 캐션
마크 채트필드
이전 멤버마크 파너
크레이그 프로스트
데니스 벨링어
릭 베이커
하워드 에디 주니어
스탠리 셸던
브루스 쿨릭

2. 역사

그랜드 펑크의 고향인 미시간 주 플린트에 있는 그랜드 트렁크 웨스턴 철도 다리. 밴드 이름과 창립 멤버 마크 파너, 돈 브루어, 그리고 1980년대 초 베이시스트 데니스 벨링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밴드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출신의 돈 브루어(드럼)와 마크 파너(보컬, 기타)가 멜 섀처(베이스)를 영입하여 결성되었다. 밴드 이름은 미시간 주의 유명 철도 회사인 그랜드 트렁크 웨스턴 철도(Grand Trunk Western Railroad)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1968년 무렵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하드 록 스타일을 받아들여 1969년 데뷔 앨범 『'''온 타임'''(On Time)』을 발표했다. 레드 제플린의 미국 공연 오프닝 무대에서 뛰어난 연주력으로 주목받으며 인지도를 높였다. 초기 히트곡으로는 "하트브레이커"와 애니멀스의 곡을 커버한 "고독의 절규" 등이 있다.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었으며, 1971년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공연은 악천후 속에서 펼쳐진 열정적인 무대로 유명하다.

1972년에는 키보디스트 크레이그 프로스트를 영입하여 4인조로 재편하고 밴드명을 '''그랜드 펑크'''(Grand Funk)로 잠시 변경하며 음악적으로 팝적인 요소를 강화했다. 1973년 토드 룬드그렌이 프로듀싱한 앨범 『'''우리는 미국 밴드'''(We're an American Band)』와 동명의 싱글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4년에는 리틀 에바의 히트곡 "로코모션 (The Loco-Motion)"을 하드 록 스타일로 커버하여 다시 한번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1975년에는 "오 원더풀 (Some Kind of Wonderful)])"과 "배드 타임"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2. 1. 결성 (1969)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1969년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출신의 마크 파너(기타, 보컬)와 돈 브루어(드럼, 보컬), 그리고 퀘스천 마크 앤 더 미스테리언스 출신의 멜 섀처(베이스)로 구성된 트리오로 결성되었다.[5] 브루어의 제안으로 전 밴드 동료였던 테리 나이트가 밴드의 매니저를 맡게 되었다. 밴드 이름은 처음에 미시간주의 유명한 철도 노선인 그랜드 트렁크 웨스턴 레일로드의 이름을 따서 "그랜드 트렁크 레일로드"로 지었으나,[2] 해당 철도 회사 측의 반대로 인해 결국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로 변경해야 했다.[6]

마크 파너는 밴드 결성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우리는 원래 5인조였고, 나는 보컬만 맡았다. (테리 나이트가 떠난 후) '더 패뷸러스 팩'으로 이름을 바꾼 그 밴드에서 나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앞에서 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밴드는 방향을 잃고 있었다. 1969년 2월, 우리는 케이프 코드의 겨울 별장에 고립되었다. 기록적인 폭설로 몇 주 동안 갇혀 지내며 눈을 녹여 물을 마시고, 버터나 설탕도 없는 오트밀로 연명했다. 다른 두 멤버는 결혼한 상태였다. (고향인 플린트로) 돌아왔을 때, 그 두 멤버는 아내에게 이혼당할 위기에 처했고 밴드는 해체되었다. 공연은 많이 잡혀 있었지만 밴드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그냥 3인조로 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돈은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실력 있는 베이스 연주자를 찾으면 된다'고 답했다. 우리는 베이스 연주자를 찾기 시작했고, 우리를 보스턴 지역 공연에 보내주던 베이 시티의 델타 프로모션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중, 리허설 홀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베이스 소리가 정말 대단했다. 나는 '저 베이스 연주자 좀 봐, 정말 끝내준다. 누군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휴식 시간에 보니 그들은 퀘스천 마크 앤 더 미스테리언스였고, 베이스 연주자는 멜 섀처였다. 멜과 나는 어릴 적부터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 내가 '멜, 요즘 쟤네랑 연주해?'라고 묻자, 그는 '응, 근데 별로 마음에 안 들어'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브루어랑 나랑 3인조 밴드를 만들까 하는데, 베이스 연주자로 관심 있어?'라고 물었고, 그는 '당연하지, 언제 시작할 건데?'라고 바로 물었다. 나는 '다음 주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우리는 플린트 음악가 연맹에 가입했고, 첫 앨범의 많은 곡들이 바로 그 유니언 홀에서 만들어졌다."[7]

밴드는 지역 프로모터 지프 홀랜드의 주선으로 1969년 애틀랜타 국제 팝 페스티벌에 무료로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첫날 공연 반응이 매우 뜨거워 페스티벌 3일 내내 공연 초청을 받았다.[8] 이 공연을 통해 얻은 인지도는 매우 중요했으며, 밴드는 곧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매니저였던 테리 나이트는 캐피톨 레코드의 A&R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첫 페스티벌에서의 성공적인 공연 덕분에 그랜드 펑크는 이듬해인 1970년 애틀랜타 국제 팝 페스티벌 II에도 다시 초청받았다. 크림과 같은 하드 록 파워 트리오를 모델로 삼은 이 밴드는 테리 나이트의 마케팅 전략을 통해 대중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1969년 8월, 밴드는 데뷔 앨범 ''On Time''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1970년 골드 레코드를 획득했으며,[9] 미국 앨범 차트 27위를 기록했다.[10]

1970년 2월에는 두 번째 앨범 ''Grand Funk''(일명 ''The Red Album'')를 발매했고, 이 앨범 역시 발매 두 달 만에 골드 레코드를 달성했다.[9] 비평가들의 혹평과 라디오 방송에서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초기 8개 앨범(스튜디오 앨범 7장, 라이브 앨범 1장)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 2. 1970년대 초반

1970년 6월에 발매된 앨범 ''Closer to Home''은 싱글 "I'm Your Captain (Closer to Home)"의 성공에 힘입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과거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시절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곡으로 평가받았다. 1970년 봄, 매니저 테리 나이트는 앨범 홍보를 위해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2] ''Closer to Home''은 평론가들의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수백만 장 이상 팔리며 멀티 플래티넘 인증을 받는 등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9] 밴드는 앨범 홍보를 위해 뉴욕시 타임스 스퀘어 빌보드 광고에 10만달러를 사용하기도 했다.[11]

1971년,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비틀즈가 세운 셰이 스타디움 공연 관객 동원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특히 비틀즈의 공연은 매진까지 몇 주가 걸렸지만,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공연은 단 72시간 만에 표가 모두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12] ''Closer to Home''의 성공 이후, 1970년 후반에는 2장짜리 라이브 앨범 ''Live Album''을 발매하여 또다시 골드 디스크 인증을 받았다.[9] 1971년에는 ''Survival''과 ''E Pluribus Funk'' 두 앨범을 연달아 발표했다. ''E Pluribus Funk'' 앨범 커버 뒷면에는 셰이 스타디움 공연을 기념하여 경기장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졌다. 같은 해 일본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공연은 격렬한 뇌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공연은 일본 록 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공연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1971년 말, 밴드 멤버들은 매니저 테리 나이트의 운영 방식과 재정적 책임 문제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이 커지면서 밴드는 1972년 초 나이트를 해고했다. 이에 나이트는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는 오랜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나이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직전에 밴드의 악기를 압류하기도 했다. VH1의 다큐멘터리 ''Behind the Music''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편에서 나이트는 계약 만료가 약 3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밴드가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13] 당시 밴드 멤버들은 자신들의 활동과 밴드 이름에 대한 권리를 계속해서 지켜나가기 위해 소송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나이트와의 법적 분쟁은 2년간 이어졌고, 결국 법정 밖에서 합의하며 마무리되었다. 나이트는 1969년 3월부터 1972년 3월까지 제작된 모든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음반의 저작권과 퍼블리셔 로열티, 그리고 상당한 액수의 합의금 및 유전을 받는 등 재정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 대신 파너, 브루어, 샤처는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라는 밴드 이름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14]

1972년,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전 파뷸러스 팩 시절 밴드 동료였던 크레이그 프로스트를 키보디스트로 정식 영입했다.[15] 원래 밴드는 험블 파이에서 활동했던 피터 프램프턴을 영입하려 했으나, 그가 A&M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합류할 수 없었다. 프로스트의 합류는 그랜드 펑크의 음악 스타일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기존의 거칠고 투박한 개러지 밴드 기반의 록앤롤에서 벗어나 좀 더 리듬 앤 블루스(R&B)/팝 록 지향적인 스타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4인조 라인업으로 그랜드 펑크는 1972년 9월,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인 ''Phoenix''를 발매했다.[16] 이 앨범에서는 "Rock & Roll Soul"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2. 3. 1970년대 중반

1972년 발표한 앨범 ''피닉스'' (Phoenix)부터 밴드는 프로듀서 테리 나이트와 결별하고 크레이그 프로스트 (Craig Frost, 키보드)를 영입하여 4인조로 재편성했다. 이와 함께 밴드명을 '''그랜드 펑크''' (Grand Funk)로 변경하고 음악적으로 팝적인 요소를 더 받아들이는 변화를 시도했다. 이 앨범에서는 "록앤롤 소울"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1973년에는 토드 룬드그렌이 프로듀싱한 앨범 ''우리는 미국 밴드'' (We're an American Band)를 발표했다. 앨범과 동명의 싱글곡 "We're an American Band"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곡은 밴드를 상징하는 대표곡이 되었다. 이후 본 조비 등 여러 미국 록 밴드들이 라이브 공연에서 이 곡을 커버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앨범 ''샤이닌 온'' (Shinin' On)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는 리틀 에바1962년에 불러 1위를 기록했던 제리 고핀과 캐롤 킹 작곡의 "로코모션 (The Loco-Motion)"을 하드 록 스타일로 커버하여 싱글로 발매했는데, 이 곡 역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밴드 역사상 가장 큰 히트 싱글이 되었다. 앨범의 타이틀 곡 "샤이닌 온"도 싱글로 발매되었다.

같은 해 말, 그랜드 펑크는 프로듀서로 지미 이엔너를 영입하고 그룹의 정식 명칭인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로 돌아갔다. 1974년 12월 발매된 앨범 ''All the Girls in the World Beware!!!''는 밴드 멤버들의 얼굴을 유명 보디빌더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프랑코 콜럼부의 몸에 합성한 독특한 커버 아트로 주목받았다. 이 앨범에서는 밴드의 마지막 톱 10 히트곡이 된 "Some Kind of Wonderful" (원곡: 소울 브라더스 식스)과 "Bad Time"이 1974년 말부터 1975년 초에 걸쳐 히트했다.

1970년대 중반, 밴드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멤버들 간의 개인적인 문제, 활동으로 인한 소진, 음악적 방향에 대한 이견 등으로 인해 내부적인 긴장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활동을 이어갔다. 캐피톨 레코드와의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앨범 2장이 더 필요했던 그랜드 펑크는 대규모 투어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더블 라이브 앨범 ''Caught in the Act''를 녹음하여 1975년 8월에 발매했다.[14]

이 라이브 앨범은 계약 이행을 위한 것이었으나, 기존에 발매된 곡들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캐피톨 레코드는 계약 완료를 위해 정규 스튜디오 앨범 한 장을 추가로 요구했다. 멤버들 간의 갈등은 여전했지만, 과거 테리 나이트와의 법적 분쟁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캐피톨을 위해 앨범을 하나 더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밴드는 ''Born to Die''를 녹음하여 1976년 1월에 발매했지만, 빌보드 앨범 차트 47위에 그치는 등 저조한 판매량과 히트 싱글 부재로 인해 멤버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 시기부터 멤버들은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고 해체설이 돌기 시작했다.[19]

그러던 중 프랭크 자파가 밴드의 프로듀싱에 관심을 보이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는 듯했다. 밴드는 MCA 레코드와 새로 계약을 맺고 자파의 프로듀싱 아래 앨범 ''Good Singin', Good Playin'''을 제작하여 1976년 8월에 발매했다. 이 앨범은 평론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2] 결국 실망한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1976년 말에 공식적으로 해체했다.[20] 마크 파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드러머 돈 브루어가 먼저 밴드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회상했다. "밴드 내에서 모든 것이 권리를 잃어갔다... 어느 날 그(브루어)가 스튜디오에 들어와서 '이제 더 이상 못 하겠어. 내 삶에서 더 안정적인 무언가를 찾아야 해'라고 말했다. 그는 끝난 거였다.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건 그였지, 내가 아니었다. 모두가 내가 밴드를 해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였다."[21]

2. 4. 1980년대 이후



1981년,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밴드의 전 매니저였던 앤디 카빌리어의 제안으로 다시 뭉치게 되었다. 이 재결합에는 크레이그 프로스트가 밥 시거와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고, 베이시스트는 멜 셰이커 대신 데니스 벨링어가 맡았다. 셰이커는 비행 공포증 때문에 불참한다고 밝혔지만, 나중에는 매니저 카빌리어와 더 이상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인정했다.[14]

새로운 라인업은 어빙 아조프가 이끄는 풀 문 레코드 레이블을 통해 두 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배급은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가 맡았다. 이 앨범들은 ''Grand Funk Lives''(1981년 7월)와 ''What's Funk?''(1983년 1월)이다.[2] 두 앨범 모두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싱글 "Queen Bee"는 영화 ''헤비 메탈''의 사운드트랙 앨범에 수록되기도 했다.[14]

밴드는 1981년과 1982년에 걸쳐 투어를 진행했으며, 이 시기 투어에는 키보디스트 릭 베이커가 함께했다. 하지만 ''Grand Funk Lives'' 앨범의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았고, 1982년에는 매니저 앤디 카빌리어가 사망하는 일까지 겹치면서 밴드는 ''What's Funk?'' 앨범이 발매된 직후인 1983년 초에 두 번째 해체를 맞이하게 되었다.[14]

이후 1997년, 보스니아 구제 콘서트 참여를 계기로 마크 파너, 돈 브루어, 멜 셰이커의 오리지널 멤버 3인이 다시 모여 재결성했다. 이들은 이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보스니아''(Bosnia)를 발매했다.

하지만 1999년, 마크 파너가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고, 그의 빈자리는 유명 록 밴드 키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브루스 큐릭이 채웠다.

시간이 흘러 2024년 1월에는 브루스 큐릭의 탈퇴 소식이 전해졌고,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마크 채트필드가 합류하여 현재 라인업을 이루고 있다.[39][40]

3. 구성원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1969년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출신의 마크 파너(기타, 보컬)와 돈 브루어(드럼, 보컬), 그리고 퀘스천 마크 앤 더 미스테리언스 출신의 멜 샤처(베이스)가 모여 3인조로 시작했다.[5] 초기에는 하드 록 파워 트리오 형태로 활동했으나, 1972년 키보디스트 크레이그 프로스트가 합류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밴드는 여러 차례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했다. 1976년 첫 해체 이후 멤버들은 잠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마크 파너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브루어, 샤처, 프로스트는 '플린트'라는 이름으로 잠시 활동했다. 1981년, 파너와 브루어를 중심으로 베이시스트 데니스 벨링어와 키보디스트 릭 베이커가 합류하여 재결성했으나[14], 1983년 다시 해체되었다.[14]

1996년에는 원년 멤버인 파너, 브루어, 샤처가 다시 모여 투어를 진행했으며, 키보디스트 하워드 에디 주니어가 투어 멤버로 참여했다.[14] 그러나 1998년 말, 파너는 브루어와의 불화 및 수익 배분 문제 등으로 다시 밴드를 떠났다.[23]

2000년부터는 돈 브루어와 멜 샤처를 중심으로 새로운 라인업이 구성되었다. 리드 보컬리스트 맥스 칼, 전 키스의 기타리스트 브루스 쿨릭, 키보디스트 팀 캐션이 합류하여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왔다.[23] 2023년 말 브루스 쿨릭이 밴드를 떠났고[29], 2024년 초 마크 챗필드가 새로운 리드 기타리스트로 합류하여 현재의 라인업을 이루고 있다.

밴드의 현재 및 과거 구성원의 상세 정보와 활동 시기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현재 구성원

멤버명담당 악기참여 시기
돈 브루어(Don Brewer)드럼, 리드 및 백 보컬1969년–1976년, 1981년–1983년, 1996년–1998년, 2000년–현재
멜 샤처(Mel Schacher)베이스 기타1969년–1976년, 1996년–1998년, 2000년–현재
맥스 칼(Max Carl)리드 및 백 보컬, 리듬 기타2000년–현재
팀 캐시온(Tim Cashion)키보드, 백 보컬2000년–현재
마크 채트필드(Mark Chatfield)리드 기타, 백 보컬2024년–현재


3. 2. 과거 구성원

과거 구성원 목록
이름원어 표기주요 악기활동 기간
마크 파너Mark Farner기타, 보컬, 키보드, 하모니카1969–1976, 1981–1983, 1996–1998
크레이그 프로스트Craig Frost키보드, 백 보컬1973–1976 (2005–2012년 게스트 참여)
로레인 페더Lorraine Feather백 보컬1974–1975
자나 지글리오Jana Giglio백 보컬1974–1975
데니스 벨링어Dennis Bellinger베이스 기타, 백 보컬1981–1983
릭 베이커Rick Baker키보드, 신시사이저1981–1983
하워드 에디 주니어Howard Eddy, Jr.키보드, 기타, 백 보컬1996–1998
브루스 쿨릭Bruce Kulick기타, 백 보컬2000–2023
스탠리 셸던Stanley Sheldon베이스 기타2018 (멜 샤처 대타)


3. 3. 타임라인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1969년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출신의 마크 파너(기타, 보컬)와 돈 브루어(드럼, 보컬), 그리고 퀘스천 마크 앤 더 미스테리언스 출신의 멜 샤처(베이스) 3인조로 결성되었다.[5] 초기 매니저는 테리 나이트였으며, 밴드 이름은 미시간주의 철도 노선인 그랜드 트렁크 웨스턴 레일로드에서 따왔으나, 철도 회사의 반대로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로 변경했다.[2][6] 1972년 키보디스트 크레이그 프로스트가 합류하여 4인조가 되었다.

1976년 밴드는 해체되었고, 마크 파너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브루어, 샤처, 프로스트는 '플린트'라는 이름으로 잠시 활동했다.

1981년, 파너와 브루어는 베이시스트 데니스 벨링어와 함께 밴드를 재결성했다. 멜 샤처는 비행 공포증과 전 매니저 앤디 카빌리어와의 불화를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다.[14] 키보디스트 릭 베이커가 투어에 합류했다. 이 시기 밴드는 ''Grand Funk Lives''(1981)와 ''What's Funk?''(1983) 두 앨범을 발표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983년 다시 해체했다.[2][14]

1996년, 원년 멤버인 파너, 브루어, 샤처가 다시 모여 재결성 투어를 진행했다. 키보디스트 하워드 에디 주니어가 투어 멤버로 참여했다.[14] 이들은 1997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자선 공연을 열고 라이브 앨범 ''보스니아''를 발매하기도 했다.

1998년 말, 파너는 브루어와의 불화 및 그룹 수입의 50% 지분을 요구하는 등의 수익 배분 문제로 다시 밴드를 떠났다.[23] 2000년, 브루어와 샤처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밴드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리드 보컬리스트 맥스 칼(38 스페셜 출신), 리드 기타리스트 브루스 쿨릭(키스 출신), 키보디스트 팀 캐션이 합류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인 라인업의 기반을 마련했다.[23]

2018년에는 멜 샤처의 아내 데나가 암 투병 중일 때 스탠리 셸던(피터 프램턴 밴드 출신)이 잠시 베이스를 맡기도 했다.[26] 2023년 말, 브루스 쿨릭이 23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밴드를 떠났으며[29], 2024년 1월 마크 챗필드(The Godz, 밥 시거 밴드 출신)가 새로운 리드 기타리스트로 합류했다.

현재 멤버
이름악기활동 기간
돈 브루어(Don Brewer)드럼, 보컬1969–1976, 1981–1983, 1996–1998, 2000–현재
멜 샤처(Mel Schacher)베이스1969–1976, 1996–1998, 2000–현재
맥스 칼(Max Carl)보컬, 리듬 기타2000–현재
팀 캐션(Tim Cashion)키보드, 백 보컬2000–현재
마크 챗필드(Mark Chatfield)리드 기타, 백 보컬2024–현재



이전 멤버
이름악기활동 기간
마크 파너(Mark Farner)보컬, 기타, 키보드, 하모니카1969–1976, 1981–1983, 1996–1998
크레이그 프로스트(Craig Frost)키보드, 백 보컬1972–1976 (게스트: 2005–2012)
로레인 페더(Lorraine Feather)백 보컬1974–1975
자나 지글리오(Jana Giglio)백 보컬1974–1975
데니스 벨링어(Dennis Bellinger)베이스, 백 보컬1981–1983
릭 베이커(Rick Baker)키보드, 신시사이저1981–1983 (투어 멤버)
하워드 에디 주니어(Howard Eddy, Jr.)키보드, 리듬 기타, 백 보컬1996–1998 (투어 멤버)
브루스 쿨릭(Bruce Kulick)리드 기타, 백 보컬2000–2023
스탠리 셸던(Stanley Sheldon)베이스2018 (멜 샤처 대타)



멜 섀처, 2002년 1월 12일


브루스 쿨릭, 2002년 1월 12일


멜 섀처(왼쪽)와 브루스 쿨릭, 2002년 1월 12일

4. 음악 스타일

1970년 히트 싱글 "I'm Your Captain (Closer to Home)"은 테리 나이트 앤 더 팩 시절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곡으로 평가받았다.[2]

1972년, 밴드는 전 파뷸러스 팩(Fabulous Pack)의 동료였던 크레이그 프로스트를 키보디스트로 정식 영입했다.[15] 프로스트의 합류는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음악 스타일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차고 밴드(garage band) 기반의 로큰롤 사운드에서 벗어나, 더욱 리듬 앤 블루스(R&B) 및 팝 록 지향적인 스타일로 나아갔다. 이러한 변화는 1972년 9월 발매된 앨범 ''Phoenix''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16]

''Cashbox'' 광고, 1974년 3월 2일


밴드는 사운드를 더욱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베테랑 뮤지션 토드 런드그렌을 프로듀서로 기용했다. 이 시기 밴드는 이름을 '그랜드 펑크'로 잠시 줄였으며,[17] "We're an American Band" (1973)와 리틀 에바의 곡을 커버한 "The Loco-Motion" (1974) 두 곡의 넘버원 히트 싱글을 포함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2] 이는 변화된 팝 록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1974년에는 지미 이엔너를 새로운 프로듀서로 맞이하고 다시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라는 전체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도 "Some Kind of Wonderful"과 "Bad Time" 같은 히트곡을 내며 성공을 이어갔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멤버들 사이에서는 음악적 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와 갈등이 생겨났다.[1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밴드는 프랭크 자파의 프로듀싱 아래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기도 했다. MCA 레코드와 계약하고 1976년 발매한 앨범 ''Good Singin', Good Playin'''은 비평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 이러한 음악적 방향의 모색과 내부 갈등은 이후 밴드의 해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20][21]

5. 대한민국과의 관계

6. 음반 목록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는 활동 기간 동안 여러 장의 정규 음반과 라이브 음반,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정규 음반으로는 ''온 타임''(1969), ''그랜드 펑크''(1969), ''Closer to Home''(1970), ''우리는 아메리카 밴드''(1973) 등이 있다.

자세한 음반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정규 음반

}

| 1972

| 17

| 골드

|-

| 그랜드 펑크 히트곡

| Grand Funk Hits|eng

| 1976

| 126

|

|-

| 히트곡

| Hits|eng

| 1977

|

|

|-

| 그랜드 펑크의 베스트

| The Best of Grand Funk|eng

| 1990

|

|

|-

| 캐피톨 콜렉터스 시리즈

| Capitol Collectors Series|eng

| 1991

|

| 골드

|-

| 헤비 히터

| Heavy Hitters!|eng

| 1992

|

|

|-

| 30년의 펑크: 1969-1999

| Thirty Years of Funk: 1969-1999|eng

| 1999

|

|

|-

| DVD 포함 그레이티스트 히트곡

| Greatest Hitseng

| 2006

|

|

|}

참조

[1]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https://www.allmusic[...] AllMusic 2019-07-03
[2] 서적 The Virgin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 Virgin Books 1997
[3]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https://open.spotify[...] 2022-11-10
[4]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interviews, articles and reviews from Rock's Backpages http://www.rocksback[...] Rocksbackpages.com 2011-07-22
[5] 웹사이트 Mark Farner: Timeline http://www.markfarne[...] 2021-10-04
[6] 문서 GT Mills
[7] 웹사이트 Mark Farner on Grand Funk Railroad's Highs & Lows https://bestclassicb[...] 2022-09-29
[8] 웹사이트 Don Brewer - An Interview with the drummer/vocalist of Grand Funk Railroad and The Silver Bullet Band. "It was amazing. It was a rock and roll moment... a rock and roll fantasy... wow! look at this thing." - Musicguy247 https://musicguy247.[...]
[9] 서적 The Book of Golden Discs https://archive.org/[...] Barrie and Jenkins Ltd
[10]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Biography https://www.metallia[...] 2022-08-01
[11] 서적 NME Rock 'N' Roll Years Reed International Books Ltd
[12] 서적
[13] 서적
[14] 간행물 Discoveries Magazine 1998-10
[15] 웹사이트 TERRY KNIGHT AND THE PACK - Michigan Rock and Roll Legends https://michiganrock[...]
[16] 서적
[17]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https://www.allmusic[...] 2024-01-07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웹사이트 Music Aficionado https://web.musicafi[...] 2020-10-05
[22] 서적
[23] 서적 From Grand Funk to Grace: The Authorized Biography of Mark Farner Collector's Guide Publishing, Incorporated
[24] 웹사이트 Michigan Rock and Roll Legends – GRAND FUNK RAILROAD https://www.michigan[...] 2019-10-11
[25] 뉴스 Grand Funk Railroad sues former front man over use of its name https://www.mlive.co[...] 2018-03-12
[26]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Tour Reports https://www.grandfun[...] 2020-04-12
[27] 뉴스 Mark Farner handed legal victory with ‘American Band’ https://www.tctimes.[...] 2019-03-20
[28]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Official Web Site https://www.grandfun[...] 2019-10-11
[29] 웹사이트 MSN https://www.msn.com/[...]
[30] 웹사이트 GRAND FUNK bio http://www.grandfunk[...] Grand Funk Railroad 2015-07-16
[31] 잡지 Grand Funk http://backissues.co[...] 2015-07-15
[32] 서적 Live Music in America: A History from Jenny Lind to Beyonce Oxford University Press
[33]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Biography, Songs, & Albums 2023-04-05
[34] 문서 그랜드 펑크
[35] 웹사이트 http://www.grandfunk[...]
[36] 문서
[37] 문서
[38] 서적 Zappa Grove Press
[39] 웹사이트 Bruce Kulick Announces His Departure From Grand Funk Railroad https://ultimateclas[...] 2024-01-02
[40]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band members https://www.grandfun[...]
[41] 뉴스 はいれぬファン投石・放火 ロック・カーニバル騒然 中國新聞 1971-07-18
[42] 웹사이트 【Grand Funk Railroad】 http://www13.plala.o[...]
[43] 웹사이트 グランド・ファンク・レイルロードのマーク・ファーナーが来日公演! https://www.barks.jp[...] 2003-12-27
[44] 웹사이트 グランド・ファンク・レイルロードの奇蹟〈シンコー・ミュージック・ムック〉 https://www.shink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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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원제년도US 200인증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장On Time1969# 27골드
그랜드 펑크Grand Funk1969# 11플래티넘
클로저 투 홈Closer to Home1970# 62x 멀티 플래티넘
서바이벌Survival1971# 6플래티넘
전쟁을 멈춰라E Pluribus Funk1971# 5플래티넘
피닉스Phoenix1972# 7골드
우리는 미국 밴드'Were an American Band''1973# 22x 멀티 플래티넘
샤이닝 온'Shinin On''1974# 5골드
하드 록 야로 (세계의 여자는 조심해)All the Girls in the World Beware!!!1974# 10골드
경이의 폭주 열차Born to Die1976# 47
뜨거운 격돌'Good Singin, Good Playin]1976# 52
그랜드 펑크 부활Grand Funk Lives1981# 149
''

6. 2. 라이브 음반

제목원제년도US 200인증
라이브 앨범Live Album1970# 52x 멀티 플래티넘
''그랜드 펑크 투어 75'''Caught in the Act1975# 21
보스니아Bosnia1997
1971 라이브Live: The 1971 Tour2002


6. 3. 컴필레이션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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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Don and Mel: 1969-71{{lang|eng|Mark, Don and Mel: 196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