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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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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주의 딸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이다. 그녀는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고트프리트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1937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마르가리타는 1981년 랑엔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녀의 개인 서류는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가문 기록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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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3년 마르가리타
1923년 마르가리타
작위 정보
칭호호엔로에-랑엔부르크 여공작 배우자
생애
출생일1905년 4월 18일
출생지아테네, 그리스
사망일1981년 4월 24일
사망지바트비제, 바이에른, 독일
매장일1981년 4월 30일
매장지랑엔부르크, 독일
가문
왕가글뤽스부르크가
아버지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
어머니앨리스 오브 바텐베르크
배우자고트프리트,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자 (1931년 결혼, 1960년 사망)
자녀크라프트,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자
베아트릭스 공녀
게오르크 안드레아스 공자
루프레히트 공자
알브레히트 공자

2. 생애

1908년. 뒷줄 왼쪽: 마리야 황녀 (러시아), 뒷줄 오른쪽: 아나스타시야 황녀 (러시아), 앞줄 왼쪽: 마르가리타 공주, 앞줄 오른쪽: 테오도라 공주


마르가리타는 게오르기오스 1세의 넷째 아들 안드레아스 왕자와 그의 아내 앨리스 오브 배텐버그의 장녀로, 그리스 코르푸 섬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영국으로 귀화한 독일 귀족인 초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이스 알렉산더 마운트배튼이다.

마르가리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리스에서 보냈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고 왕정이 전복되면서 가족과 함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헬레닉 공화국 선포 이후 그리스 국적을 박탈당하고, 사촌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으로부터 덴마크 여권을 받았다.

1931년 4월 20일, 마르가리타는 호엔로에-란겐부르크의 세습 공작 고트프리트와 결혼하여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란겐부르크 마을에서 멀지 않은 바이커스하임 성에 정착했다. 마르가리타는 주변 사람들을 돌볼 때 외에는 자선 사업에 참여하여 호엔로에-란겐부르크 공국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7년 5월 1일, 마르가리타는 남편과 함께 나치당에 가입했다.[4][5] 이후 부부는 가족 관계를 이용하여 영국 내 나치 정권의 접근을 촉진했고, 국방군(Wehrmacht)에 입대한 고트프리트는 1938년 안슐루스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진영에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마르가리타의 남편과 매형은 독일군에 합류했고, 남동생 필리포스는 영국 왕립 해군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평범한 삶으로 복귀한 마르가리타는 1981년 서독 랑엔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남편 고트프리트와

2. 1. 어린 시절



마르가리타는 게오르기오스 1세의 넷째 아들 안드레아스 왕자와 그의 아내 앨리스 오브 배텐버그의 장녀로, 코르푸 섬에서 태어났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와 대립했다. 안드레아스 왕자는 콘스탄티노스 왕세자 휘하에서 복무했고, 앨리스 공주는 간호사로 활동했다.[16] 마르가리타와 여동생들은 부모를 따라갈 수 없어 아테네에서 지냈으며,[17] 1912년 12월에 테살로니키에 잠시 머물렀다.[18]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1913년 3월 게오르기오스 1세가 암살당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국왕은 유언으로 코르푸의 몬 레포스 궁전을 안드레아스에게 유증했고, 안드레아스와 가족은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갖게 되었다.

1913년 8월, 평화가 돌아오자 안드레아스, 앨리스와 딸들은 그리스를 떠나 독일을 방문한 후, 마르가리타의 외조부모와 함께 영국에 머물렀다. 이 여행은 어린 공주들에게 세인트 폴 대성당과 런던 동물원을 방문할 기회가 되었다. 1913년 11월 17일 그리스로 돌아온 가족은 앨리스의 임신과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스는 중립을 선언했고, 처음에는 마르가리타와 친척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르가리타와 여동생들은 1914년 여름을 코르푸에서 보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안드레아스는 테살로니키에 주둔하면서 1915년 10월 연합군의 도시 점령에 직면했다. 12월에는 패주한 세르비아군이 코르푸에 피난처를 찾았고, 앨리스와 딸들은 몬 레포스를 떠나 수도로 가야 했다. 왕실 구성원에 대한 위협이 증가했고, 1916년 7월 타토이 영지에 방화 공격이 발생했으며, 12월 1일에는 프랑스 해군이 아테네 왕궁을 폭격하여 마르가리타와 여동생들은 어머니와 함께 지하실로 피신해야 했다.

2. 1. 1. 그리스와 해외에서의 유년기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의 장녀인 마르가리타는 1905년 4월 18일 아테네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통해 영국]의

2. 1. 2.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1912년에서 1913년 사이,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불가리아와 대립했다. 마르가리타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다시 군에 소집되어 콘스탄티노스 왕세자 휘하에서 복무했고,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하는 간호사로 활동했다.[1]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부모님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분쟁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지냈으며, 1912년 12월에 테살로니키에 잠시 머물렀다.[2]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서 영토를 확장하며 승리했지만,[3] 이 분쟁은 1913년 3월에 암살된 게오르기오스 1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4] 헬라스 국왕의 죽음은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친척들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국왕은 유언으로 코르푸의 몬 레포스 궁전을 안드레아스에게 유증했다.[5] 이로써 수년 동안 아테네와 타토이 궁전에서 국왕과 가까이 살았던 안드레아스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갖게 되었다.[6]

1913년 8월, 평화가 돌아오자 안드레아스, 앨리스와 딸들은 그리스를 떠났다. 독일 방문 후, 그들은 마르가리타의 외조부모와 함께 영국에 머물렀다. 어린 공주들에게 이 여행은 부모님과 함께 세인트 폴 대성당과 런던 동물원을 방문할 기회였다.[7] 1913년 11월 17일에 그리스로 돌아온[8] 그 가족은 앨리스의 네 번째 임신과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 나라에 머물게 되었다.[9] 그리스가 중립을 선언하면서,[10] 이 새로운 갈등은 처음에는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친척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1914년 여름을 코르푸에서 보내며 4개월 동안 햇빛과 바다를 즐겼다.[11]

전쟁이 그 나라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12] 안드레아스는 테살로니키에 주둔하면서 1915년 10월에 연합군의 연합국에 의한 도시 점령에 직면했다.[13] 그 직후 12월에는 패주한 세르비아군이 코르푸에 피난처를 찾았고,[14] 앨리스와 그녀의 딸들은 몬 레포스를 버리고 수도로 가야 했다.[15] 수개월 동안 왕실 구성원에 대한 위협은 증가했다.[16] 1916년 7월에는 국왕이 아내와 여러 자녀들과 함께 타토이 영지를 방화 공격을 받았고,[17] 12월 1일에는 프랑스 해군이 아테네 왕궁을 폭격하여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여동생들이 어머니와 함께 지하실로 피신해야 했다.[18]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연합국에 의해 폐위되어 그리스에서 쫓겨났고, 그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15일 후,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새로운 군주가 측근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추방되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머물게 된 소규모 가족은 처음에는 생모리츠의 호텔에 머물렀으며, 그 후 루체른에 정착하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 살았다.

망명은 가족에게 유일한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마르가리타의 친척 여러 명이 러시아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 직후, 마르가리타가 어머니를 통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헤센 대공가는 1918–1919년 겨울 동안 다른 모든 독일 왕조와 함께 전복되었다. 가족은 건강 문제도 겪었고, 여러 명이 1920년에 독감에 걸렸다.

1919년 초, 마르가리타는 볼셰비키로부터 덴마크의 외교적 개입 덕분에 목숨을 건진 아버지의 할머니, 올가 태후와 재회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전쟁으로 인해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을 마운트배튼으로 포기해야 했던 외가 조부모와 다시 만났다.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지내게 된 마르가리타에게, 망명은 향수와 동의어일 뿐만 아니라 긴 가족 재회와 산책의 기회이기도 했다.

2. 1. 3. 스위스로의 망명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연합국에 의해 폐위되어 그리스에서 쫓겨났고, 그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1] 15일 후,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새로운 군주가 측근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추방되었다.[1]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로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생모리츠의 호텔에 머물렀으며,[1] 그 후 루체른에 정착하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 살았다.[1]

망명은 가족에게 유일한 걱정거리가 아니었다.[1]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마르가리타의 친척 여러 명이 러시아에서 살해되었다.[1] 이 사건 직후, 마르가리타가 어머니를 통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헤센 대공가는 1918–1919년 겨울 동안 다른 모든 독일 왕조와 함께 전복되었다.[1] 또한, 가족은 건강 문제를 겪었고, 여러 명이 1920년에 독감에 걸렸다.[1]

1919년 초, 마르가리타는 볼셰비키로부터 덴마크의 외교적 개입 덕분에 목숨을 건진 아버지의 할머니, 올가 태후와 재회했다.[1] 몇 달 후, 그녀는 전쟁으로 인해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을 마운트배튼으로 바꿔야 했던 외가 조부모와 다시 만났다.[1]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지내게 된 마르가리타에게,[1] 망명은 향수와 같았지만,[1] 긴 가족 상봉과 산책의 기회이기도 했다.[1]

2. 2. 청년기

필립 드 라슬로가 1928년에 그린 초상화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리스에서 보냈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고 왕정이 전복되면서 가족과 함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마르가리타 공주와 가족들은 제2차 헬레닉 공화국 선포 이후 그리스 국적을 박탈당하고, 사촌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으로부터 덴마크 여권을 받았다. 이후 영국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버킹엄 궁전에서의 무도회, 댄스, 생일, 정원 파티, 경마 등 다양한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족한 재산과 망명 생활은 마르가리타 공주에게 구혼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어머니 앨리스 공주의 걱정거리였다.

1926년 여름, 마르가리타 공주는 타라스프에서 이젬부르크-비르슈타인 공자 프랑수아-페르디난트와 만났다.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프랑수아-페르디난트가 가톨릭 신자였고, 마르가리타 공주가 정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들의 연애는 곧 끝이 났다.

1928년 여름, 마르가리타 공주와 여동생 테오도라, 남동생 필립은 루마니아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헬레네 공주의 초청으로 시나이아에서 몇 주를 보냈다. 당시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왕자는 미혼이었고, 헬레네 공주는 그가 자신의 친척 중 한 명과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앨리스 공주는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1930년, 앨리스는 스위스 크로이츠링겐에 있는 정신 병원에 보내졌다. 가족이 붕괴되는 동안, 안드레아스 왕자는 정부와 함께 프랑스 리비에라에 정착했다.

2. 2. 1. 그리스로의 짧은 귀환

1920년 10월 2일, 마르가리타 공주의 사촌인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타토이 궁전에서 산책 중 애완 원숭이에게 물렸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알렉산드로스는 패혈증에 걸려 10월 25일에 사망했다. 국왕의 죽음은 그리스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는데, 이미 터키와의 전쟁 중이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가 1920년 그리스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1920년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해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에 복귀했다.[1]

안드레아스 왕자는 1920년 11월 23일 아테네에서 환영받았고, 며칠 후 마르가리타 공주를 포함한 그의 아내와 네 딸이 합류했다.[2]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족과 함께 코르푸 섬의 몽 레포에서 살기 위해 돌아왔다. 1921년 6월 10일, 가족은 미래의 에든버러 공작이 되는 필립을 맞이했다.[3] 스미르나 점령 동안 안드레아스 왕자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군대에 합류하면서, 마르가리타 공주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1922년 봄에 외할머니와 이모 루이즈의 방문을 받은 몽 레포에서 삶을 즐겼다.[4] 고대 묘지에 세워진 궁전 근처 공원에서 공주들은 고고학에 전념하여 일부 도자기, 청동 조각 및 뼈를 발견했다.[5]

이 기간 동안 마르가리타 공주와 그녀의 자매들은 여러 주요 사회 행사에 참여했다. 1921년 3월, 아테네에서 사촌 헬레네와 루마니아의 카롤 2세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했고,[6] 1922년 7월에는 영국에서 삼촌 루이스 마운트배튼과 에드위나 애슐리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섰다.[7]

그러나 터키와의 군사적 패배와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은 마르가리타 공주와 그녀의 가족의 삶을 혼란에 빠뜨렸다. 1922년 9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장남인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양위했다.[8] 한 달 후, 안드레아스 왕자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체포되었고, 사카리아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받았다. 외국 공관의 개입으로 처형을 면한 왕자는 추방과 강등을 선고받았다. 코르푸에서 잠시 머무른 후,[9] 왕자와 그의 친척들은 1922년 12월 초 HMS 칼립소를 타고 급히 그리스를 떠났다.[10]

2. 2. 2. 결혼 적령기

1920년 10월 2일, 마르가리타 공주의 사촌인 알렉산더 국왕이 타토이에서 산책을 하던 중 애완 원숭이에게 물렸다. 그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패혈증에 걸려 10월 25일에 사망했다.[1] 국왕의 죽음은 그리스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1919년부터 터키와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1920년 그리스 총선에서 패배했고, 1920년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해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에 복귀했다.[3]

1920년 11월 23일, 안드레아스 왕자는 아테네에서 환영받았고, 며칠 후 그의 아내와 네 딸이 합류했다.[4] 마르가리타는 가족과 함께 코르푸로 돌아왔다. 앨리스 공주는 다시 임신했고, 1921년 6월 10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1921–2021)이 태어났다.[6] 스미르나 점령 기간 동안 안드레아스 왕자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군대에 합류하면서, 이 출생의 기쁨은 가려졌다.[7] 1922년 봄, 마르가리타와 형제자매들은 외할머니와 이모 루이스가 방문한 몽 레포에서 삶을 즐겼다.[8] 그들은 고대 묘지에 세워진 궁전 근처 공원에서 고고학에 전념하여 도자기, 청동 조각, 뼈 등을 발견했다.[9]

이 시기 마르가리타와 자매들은 여러 주요 사회 행사에 참여했다. 1921년 3월, 아테네에서 사촌 헬레네와 루마니아 왕세자 카롤 2세의 결혼식에 참석했고,[10] 1922년 7월에는 영국에서 삼촌 루이스 마운트배튼과 에드위나 애슐리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했다.[11][12]

그러나 터키와의 군사적 패배와 정치적 불안은 마르가리타 가족의 삶을 혼란에 빠뜨렸다. 1922년 9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양위했다.[13][14] 안드레아스 왕자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기 전 체포되어 사카리아 전투 패배 책임을 인정받았다. 외국 공관 개입으로 처형은 면했지만, 추방과 강등을 선고받았다. 코르푸에서 잠시 머무른 후,[15] 1922년 12월 초 HMS 칼립소를 타고 그리스를 떠났다.[16][17][18]

1928년 여름,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필립은 루마니아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헬레네 공주의 초청으로 시나이아에서 몇 주를 보냈다. 헬레네는 미혼인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왕자와 친척 간의 결혼을 바라기도 했다.

이후 앨리스는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치유 능력이 있고 딸들의 잠재적 남편에 대한 신성한 메시지를 받는다고 믿었다. 스스로를 성녀로 여기며 예수의 신부라고 선언했다. 앤드루 왕자는 장모인 밀포드 헤이븐의 과부 후작 부인과 합의하여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1930년 4월, 가족이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을 때 앨리스를 스위스 크로이츠링겐의 정신 병원으로 보냈다.

가족이 붕괴되는 동안, 아버지는 정부와 함께 프랑스 리비에라에 정착했다. 마르가리타의 두 여동생은 독일 왕자들과 결혼했다. 소피는 1930년 12월에 헤세의 크리스토프 공자와 결혼했고, 1931년 2월에는 체칠리에가 헤세의 게오르크 도나투스 세습 대공과 결혼했다. 수년간 독신 생활을 한 마르가리타와 테오도라도 곧 결혼했다.

2. 2. 3. 앨리스의 감금

1920년대 후반, 앨리스는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정신 건강 위기에 직면한 앨리스는 자신이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딸들의 잠재적인 남편에 대한 신성한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1] 그 후 앨리스는 스스로를 성녀로 여기며 곧 예수의 신부라고 선언했다.[1] 앤드루 왕자는 결국 앨리스의 어머니인 밀포드 헤이븐의 과부 후작 부인과 합의하여 앨리스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2] 1930년 4월, 가족이 독일 다름슈타트에 머무는 동안 앨리스는 스위스 크로이츠링겐에 있는 정신 병원으로 보내졌다.[3]

2. 3. 독일 정착과 해외 체류



1931년 4월 20일, 마르가리타는 호엔로에-란겐부르크의 세습 공작 고트프리트와 결혼하여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란겐부르크 마을에서 멀지 않은 바이커스하임 성에 정착했다.[3]

마르가리타는 주변 사람들을 돌볼 때 외에는 자선 사업에 참여하여 호엔로에-란겐부르크 공국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7년 5월 1일, 마르가리타는 남편과 함께 나치당에 가입했다.[4][5] 이후 부부는 가족 관계를 이용하여 영국 내 나치 정권의 접근을 촉진했고, 국방군(Wehrmacht)에 입대한 고트프리트는 1938년 안슐루스에 참여했다.

1934년, 마르가리타 부부는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의 양육권 소송에서 그녀를 옹호하기 위해 증언하러 뉴욕을 방문했다. 1938년 1월에는 파블로스 왕세자와 하노버의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남편과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2. 3. 1. 가족 생활과 나치즘



1930년, 25세의 마르가리타는 자신처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호엔로에-란겐부르크의 세습 공작 고트프리트("프리델")를 만났다.[3] 호엔로에 가문 출신인 고트프리트는 성, 농지, 숲으로 이루어진 재산의 상속자였다.[3] 마르가리타와 고트프리트는 사랑에 빠져 1931년 4월 20일에 결혼했다.[3] 란겐부르크 성에서 열린 그들의 결혼식은 루터교와 정교회 모두의 이중 종교 의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행사는 대규모 가족 재회였으며, 루마니아의 마리 여왕,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여대공(신랑의 이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 스웨덴의 루이즈 왕세자비(신부의 삼촌과 이모)가 하객으로 참석했다.

결혼 후, 마르가리타와 고트프리트는 란겐부르크 마을에서 멀지 않은 바이커스하임 성에 정착했다. 1933년 사산 후, 마르가리타는 크라프트(1935–2004), 베아트릭스(1936–1997), 게오르크 안드레아스(1938–2021) 세 자녀를 낳았다.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 걱정하며, 마르가리타는 크로이츠링겐에서 여러 번 그녀를 방문했고, 그들의 재회는 종종 감정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을 정신병원에 보낸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했고, 1933년 그곳에서 풀려난 후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자발적인 망명을 끝내기 전에 4년이 지났다. 공주와 그녀의 자녀들의 화해는 결국 1937년에 이루어졌고, 마르가리타는 7월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다. 몇 달 후인 11월, 그녀의 여동생 체칠리에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가족은 다름슈타트에서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재회했다.

마르가리타는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않을 때, 자선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는 곧 전 호엔로에-란겐부르크 공국의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녀의 측근 여러 명처럼,[4][5] 마르가리타는 남편과 같은 시기에 1937년 5월 1일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 후, 부부는 가족 관계를 이용하여 영국 내 나치 정권의 접근을 촉진했다. 국방군(Wehrmacht)에 입대한 고트프리트는 1938년 안슐루스에 참여했다.

1934년 10월,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딸 글로리아 밴더빌트의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시가 간의 소송에서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를 옹호하기 위해 증언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고트프리트는 마르가리타와 결혼하기 몇 년 전, 부유한 미국인 미망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심지어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그녀와 결혼할 뻔했다. 한편, 마르가리타는 이모인 나데주다 마운트배튼의 집에 있는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를 방문했다. 그러나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의 시가는 그녀가 유럽에서 고트프리트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딸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마르가리타는 또한 젊은 여성이 나데주다와 낭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했다. 따라서 마르가리타는 남편과 함께 재판에 참여하여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언론과 법정에서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친구의 도덕성을 긍정하는 증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는 소송에서 패소했다. 그녀의 딸은 성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고모인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11월 초에 미국을 떠나 런던에서 열린 공주의 사촌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와 켄트 공작 조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933년 독일이 독재로 빠져드는 동안, 1935년 10월 게오르기오스 콘딜리스 장군에 의해 헬레닉 공화국이 전복되었다. 한 달 후, 마르가리타의 사촌인 게오르기오스 2세가 국민투표 이후 다시 왕위에 올랐다.

1936년 초, 마르가리타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1922년에 내려진 추방령이 해제되어 다시 조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헬레닉 언론의 단골 표적이 된 왕자는 그러나 그 해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 출산 이후 남편과 사이가 멀어진 앨리스 공주는 1938년 11월에 정착한 아테네로 돌아가 살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마르가리타는 1938년 1월 파블로스 왕세자와 하노버의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고트프리트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2. 3. 2. 글로리아 밴더빌트 사건

1934년 10월,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딸 글로리아 밴더빌트의 양육권을 놓고 벌어진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와 시가 간의 소송에서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를 옹호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하여 증언했다.[1]

고트프리트는 마르가리타와 결혼하기 몇 년 전, 부유한 미국인 미망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심지어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그녀와 결혼할 뻔했다.[2] 한편, 마르가리타는 이모인 나데주다 마운트배튼의 집에 있는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를 방문했다.[3] 그러나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의 시가는 그녀가 유럽에서 고트프리트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딸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마르가리타는 또한 젊은 여성이 나데주다와 낭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했다.[4] 따라서 마르가리타는 남편과 함께 재판에 참여하여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5]

언론과 법정에서[6]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친구의 도덕성을 긍정하는 증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리아 모건 밴더빌트는 소송에서 패소했다. 그녀의 딸은 성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고모인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7] 고트프리트와 마르가리타는 11월 초에 미국을 떠나 런던에서 열린 공주의 사촌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와 켄트 공작 조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8]

2. 3. 3. 그리스 여행

1938년 1월, 마르가리타는 파블로스 왕세자와 하노버의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남편 고트프리트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의 사건

제2차 세계 대전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진영에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마르가리타의 남편과 매형은 독일군에 합류했고, 남동생 필리포스는 영국 왕립 해군에서 복무했다.,,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프랑스 공방전 이후 프랑스에 고립되었고,, 어머니 앨리스 오브 배텐버그 공주는 독일의 그리스 침공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남아 난민들을 돕고 유대인들을 숨기는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쳤다.,

마르가리타는 전쟁 기간 동안 랑엔부르크에서 아이들과 함께 비교적 안전하게 지내며 1944년 쌍둥이 아들을 출산했다.,,, 남편 고트프리트의 행적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왕족 군 복무 금지령으로 인해 군에서 제대했다는 기록이 있다.[9]

전쟁은 마르가리타에게 슬픔을 안겨주기도 했다. 1942년 시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사망했고, 1943년에는 여동생 소피의 남편 크리스토프 공이 비행기 사고로, 1944년에는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했다.,,,,,

2. 4. 1.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분열

제2차 세계 대전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가족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남편 고트프리트와 매형인 헤세의 크리스토프 공,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는 독일군에 합류한 반면, 남동생 필리포스는 영국 왕립 해군에서 복무하면서 가족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게 되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점령으로 인해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프랑스에 고립되어 연락이 어려워졌다., 어머니 앨리스 오브 배텐버그 공주는 독일의 그리스 침공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남아 난민을 돕고 유대인을 숨기는 등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쳤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전쟁 기간 동안 랑엔부르크에서 아이들과 함께 비교적 안전하게 지냈으며, 1944년에는 쌍둥이 아들 루프레히트와 알브레히트를 출산했다.,,, 남편 고트프리트의 전쟁 중 행적은 다소 불분명하나,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왕족의 군 복무 금지령으로 인해 군에서 제대했다는 기록이 있다.[9]

전쟁은 마르가리타 공주에게 슬픔을 안겨주기도 했다. 1942년 시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사망했고, 1943년에는 여동생 소피의 남편 크리스토프 공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44년에는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세상을 떠났다.,,

독일의 패전 이후, 마르가리타 공주의 가족은 미국 점령 지역에 있어 안전했으나, 베르마흐트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면서 가족 관계에 어려움이 생겼다.[10],[11]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독일인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고,, 동생 필리포스는 영국 공주와의 결혼식에 누이들을 초대할 수 없었다.,,,,,,,,,,

마르가리타 공주와 자매들은 이러한 상황에 상처를 받았지만, 1947년 마리엔부르크 성에서 열린 동생의 결혼 축하 행사에 참석하여 가족 간의 유대를 확인했다.

2. 4. 2. 전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마르가리타 공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가족은 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다.[1] 남편과 매형인 헤세의 크리스토프 공과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는 독일군에 합류한 반면, 그녀의 남동생 필립은 영국 왕립 해군에서 복무했다.[2]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앙드레 왕자는 프랑스 리비에라에 갇히게 되었고, 그와 연락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3] 앨리스 공주는 침공 당시 그리스를 떠나기를 거부하고[4] 아테네에서 난민들을 돕고 유대인들을 숨기면서 전쟁의 대부분을 보냈지만,[5] 1940년,[6] 1942년,[7] 그리고 1944년에 딸들을 몇 번 방문할 수 있었다.[8][9][10]

마르가리타는 전투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인 랑엔부르크에서 아이들과 함께 전쟁 기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가족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11][12][13] 그곳에서 그녀는 1944년 4월 7일에 쌍둥이 루프레히트와 알브레히트를 낳았다.[14]

전쟁 기간 동안 고트프리트의 행적은 다소 불분명하다. 스페인 전기 작가 리카르도 마테오스 사인스 데 메드라노에 따르면,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은 아미앵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랑엔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15] 그러나 영국 전기 작가 휴고 비커스에 따르면, 고트프리트는 당시 예비 장교였고 1940년 여름을 아내와 함께 보헤미아 및 모라바 보호령에서 보냈다.[16] 이후 영국 언론에서 퍼진 소문에 따르면, 고트프리트는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에 참여한 혐의로 1944년 군대에서 해고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모든 역사가들이 이 소문을 부인했다.[6][7] 이와 관련하여 ''호엔로어 타크블라트''는 2010년 기사에서 고트프리트가 동부 전선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1944년까지 정찰 부대를 지휘했으며, 왕족의 군 복무 금지령으로 인해 군대에서 해고되었다고 밝혔다. 랑엔부르크로 돌아온 공작은 가족 성을 병원으로 개조한 후 그곳에서 난민들을 맞이했다.[9]

전쟁은 마르가리타 가족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1942년 4월, 그녀의 시어머니인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과부 공주가 오랜 투병 끝에 슈바비쉬 홀에서 사망했다. 1년 남짓 지난 1943년 10월, 마르가리타의 여동생 소피의 남편인 크리스토프 공이 아펜니노 산맥 상공을 비행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17][18] 1944년 12월, 그녀의 아버지 앙드레 공은 자녀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모나코에서 사망했다.

2. 5. 평범한 삶으로의 복귀

마르가리타는 1981년 서독 랑엔부르크에서 사망했다.[1] 게오르기오스 1세의 넷째 아들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오브 배텐버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리스 코르푸 섬 출신이다. 외할아버지는 영국으로 귀화한 독일 귀족 초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이스 알렉산더 마운트배튼이다. 남동생 필리포스는 엘리자베스 2세와 결혼하여 에든버러 공작이 되었다. 세 여동생 테오도라, 체칠리에, 소피아는 모두 독일 왕후 귀족과 결혼했다.

1931년 4월 20일, 마르가리타는 제8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후작 고트프리트와 결혼했다. 고트프리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고, 마르가리타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현손이므로 둘은 먼 친척 관계였다.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으며, 막내 아들 루프레히트와 알브레히트는 쌍둥이였다.

2. 5. 1. 왕실과의 관계 회복

1948년 3월,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세 아이들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 지급하는 연금 덕분에 앨리스 공주의 초청으로 아테네로 갔다. 파울 1세 국왕과 프리데리케 왕비의 초청으로 왕궁에 머물게 된 마르가리타는 고국으로 돌아온 것에 기뻐했다.[1] 이후 몇 년 동안 호엔로에-랑엔부르크가는 그리스에 여러 번 머물렀다. 1954년에는 "왕들의 크루즈"에 참여했고,[2] 1962년에는 소피아 그리스 공주와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카를로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963년에는 헬레니즘 왕조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3]

그리스 왕족 외에도 호엔로에-랑엔부르크가와 재결합하려는 왕가는 있었다. 1950년, 마르가리타는 할머니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4] 몇 달 후, 공주는 조카 앤 공주의 대모 중 한 명이 되었다.[4][5] 1953년에는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자매들, 남편들과 몇몇 자녀들이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았다.[5][6][7][8]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주는 오빠 필립이 배우자 공으로서의 새로운 지위를 불안해하는 것을 슬픔으로 바라보았다.[9][10]

1950년대에 마르가리타와 남편은 스페인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트프리트의 친척들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베아트리스 공주와 그의 남편 인판테 알폰소, 갈리에라 공작,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공작의 여동생),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알폰소 공과 그의 아내 이라 폰 퓌르스텐베르크 (공작의 먼 친척) 등을 만났다.[5]

2. 5. 2. 랑겐부르크에서의 삶

1950년 12월, 마르가리타의 시아버지인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에른스트 2세 공자가 사망하면서 고트프리트가 호엔로에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12] 그는 농지, 숲, 랑엔부르크 성과 바이커스하임 성 두 성으로 구성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두 성 모두 유지 보수 비용이 매우 높았다.[12] 수입을 다양화하기 위해 고트프리트는 여러 귀족들과 힘을 합쳐 목재 수입 회사를 설립했다.[12] 또한 이전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국의 관광 산업을 개발하고자 랑엔부르크 성 정원에 카페를 열고, 별관을 부유한 외국인들을 위한 객실로 개조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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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랑엔부르크 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공주의 개인 아파트와 많은 개인 물품이 파괴되었다.[9] 건물 피해가 커서 크라프트 공자는 1967년에 보수 공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바이커스하임 성을 매각해야 했다.[13] 그러나 이로 인해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가문이 1965년 서독 공식 방문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을 성에서 맞이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14][15]

2. 5. 3. 말년

마르가리타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1976년 마리아 힐데가르트-피셔와 결혼했고, 그의 쌍둥이 형제 루프레히트는 1978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르가리타는 1981년 4월 24일 바이에른 바트 비스제의 한 병원에서 76세 생일 6일 후에 사망했다. 에든버러 공작인 그녀의 형제가 참석한 가운데 그녀의 장례식은 랑엔부르크에서 열렸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 곁에 묻혔다.[1]

3. 기록물

마르가리타 공주의 개인 서류(가족 서신 및 사진 포함)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노이엔슈타인 시의 노이엔슈타인 성에 있는 호엔로에 중앙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가문 기록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참조

[1] 문서 In a letter to her uncle [[Louis Mountbatten]], the princess describes in particular how much she misses the [[Mediterranean Sea]], and how tired she is of Swiss "little lakes".
[2] 문서 It seems that Alice's efforts to marry her daughters began in the early 1920s. At that time, the princess was planning to match one of her elder daughters with the wealthy William B. Leeds Jr, son of her sister-in-law Princess Anastasia from her previous marriage, though without success.
[3] 문서 This date corresponded to the 35th wedding anniversary of Gottfrie's parents
[4] 문서 Cecilie (her sister), [[Princess Alexandra of Saxe-Coburg and Gotha]] (her mother-in-law), Princesses Irma and [[Marie Melita of Hohenlohe-Langenburg]] (her sisters-in-law) as well as [[Georg Donatus, Hereditary Grand Duke of Hesse]], and Wilhelm Friedrich, Duke of Schleswig-Holstein (her brothers-in-law) also joined the party on the same day [[Ernst II, Prince of Hohenlohe-Langenburg]] (her father-in-law) and [[Prince Christoph of Hesse]] (another brother-in-law) have already been members since 1936 and 1931, respectively
[5] 간행물 Das große Wegschweigen https://www.kontextw[...] 2020-02-26
[6] 간행물 Prince Hohenlohe-Langenburg of German Noble Family Dies https://www.nytimes.[...] 1960-05-12
[7] 간행물 Prince William's Visit - The British Royal Family's Complicated History With Nazi Germany https://www.haaretz.[...] 2018-06-26
[8] 문서 Historian Jonathan Petropoulos did not identify any individual of royal blood among the conspirators of 1944.
[9] 간행물 In guter Erinnerung http://www.swp.de/cr[...] 2010-05-11
[10] 간행물 Princes et nobles d'Allemagne des années 1920 à l'effondrement du IIIe Reich https://www.cairn.in[...] 2001
[11] 간행물 How Britain planned to rescue 'royal relatives' https://www.telegrap[...] 2006-05-09
[12] 간행물 Kolonial Projekte: Das Fürsten Konsortium https://www.spiegel.[...] 1957-07-24
[13] 웹사이트 Geschichte https://www.schloss-[...] 2018-01-14
[14] 간행물 Queen Elizabeth II erinnert sich noch gern an Besuch in Hohenlohe https://www.swp.de/s[...] 2015-05-26
[15] 간행물 Als die Queen Hohenlohe ihr Lächeln schenkte https://www.stimme.d[...] 2004-11-04
[16] 문서 Prince Albrecht also committed suicide in 1992
[17] 웹사이트 Hohenlohe-Zentralarchiv Neuenstein https://www.landesar[...]
[18] 서적 Lines of Succession: 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 Little,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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