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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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은 1939년 8월 3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하인리히 힘러가 계획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실행을 맡았으며, 알프레트 나우요크스가 지휘했다. 독일군은 폴란드군 군복을 입고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공격하여 폴란드어로 선언문을 방송하고,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군과 수용소 출신 죄수들을 살해하여 폴란드의 공격으로 위장했다. 이 사건은 '힘러 작전'의 일부였으며,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즉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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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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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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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글라이비츠 사건 |
원어 명칭 (독일어) | Überfall auf den Sender Gleiwitz (위버팔 아우프 덴 젠더 글라이비츠) |
원어 명칭 (폴란드어) | Prowokacja gliwicka (프로보카치아 글리비츠카) |
유형 | 거짓 깃발 작전 |
위치 | 글리비체, 오폴레 주, 폴란드 (당시 글라이비츠, 슐레지엔 현, 독일) |
작전 개요 | |
작전명 | 힘러 작전 |
목표 | 폴란드 침공의 구실 마련 |
대상 | 글라이비츠 라디오 방송국 |
날짜 | 1939년 8월 31일 |
실행 주체 | 나치 친위대 |
결과 | 폴란드 침공의 구실로 사용됨 |
배경 | |
계획 |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나치 독일의 계획의 일환 |
계획 주체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뮐러 |
사건 | |
공격 주체 | 친위대 (SS) |
가장 | 폴란드 군인으로 위장 |
내용 | 글라이비츠 라디오 방송국 공격 폴란드어로 반독일 성명 방송 알프레트 나우요크스 지휘 |
희생자 | 프란치셰크 호니오크 (폴란드인) "통조림"으로 위장되어 사망 |
결과 및 영향 | |
영향 | 폴란드 침공의 구실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서 언급됨 |
2. 배경
1939년 5월 23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군 최고 지휘부 회의에서 폴란드 침공을 지시하며, 폴란드가 먼저 도발하여 전쟁이 시작된 것처럼 보일 명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공작 임무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맡겨졌다.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여러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작전은 전체적으로 힘러 작전(Unternehmen Himmler|운터네멘 힘러deu)이라는 암호명 아래 친위대(SS)와 아프베어(Abwehr)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작전의 핵심 목표는 폴란드가 독일에 대해 도발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처럼 꾸며, 독일의 침공을 정당한 자위권 행사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힘러가 구상하고, 실행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총괄했다. 하이드리히는 이 임무를 SS 소령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에게 맡겼다. 나우요크스는 1931년 킬에서 하이드리히를 알게 된 후 그의 권유로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는 하이드리히가 이끌던 SD에 합류했다. 당시 나우요크스는 베를린에서 외국 활동 SD 요원에게 필요한 위조 증명서, 통행증, 가짜 여권 등을 제작하는 '그룹 F'를 지휘하고 있었다.
작전에 필요한 폴란드군 군복, 신분증, 무기 등은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 소속 정보부(아프베어)에서 준비했다. 형사경찰장관 아르투어 네베는 1939년 5월, 폴란드 침략을 다루는 영화 제작을 명분으로 군 최고사령부에 폴란드 군복을 요청했고, 독일 육군은 이를 알고도 협조했다. 나우요크스의 F그룹 역시 자체적으로 폴란드군 증명서와 제복을 준비했다.
글라이비츠 사건은 아프베어와 친위대 병력이 수행한 더 큰 규모의 작전, 즉 힘러 작전(Unternehmen Himmler|힘러 운터네멘ger)의 일부였다. 이 작전은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공격으로 위장하기 위해 조작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었다. 글라이비츠 공격과 동시에 폴란드 회랑에서의 가옥 방화, 허위 선전 등 다른 조작 사건들도 폴란드-독일 국경에서 진행되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독일을 향한 폴란드의 부당한 공격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총 21건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몇 달 전부터 독일 언론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폴란드 내 독일계 주민(Volksdeutsche)에 대한 폭력적인 인종 청소가 폴란드 당국에 의해 조직되거나 묵인되고 있다고 거짓 비난을 퍼부었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22일 장군들에게 "나는 선전 목적의 카수스 벨리(전쟁 명분)를 제공할 것이다. 그 신빙성은 중요하지 않다. 승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글라이비츠 사건의 진상은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친위대 소령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의 선서 진술서를 통해 상당 부분 밝혀졌다. 나우요크스는 이 사건이 친위대 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준비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작전의 일환으로, 습격 장면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독일 측은 프란치셰크 호니오크(Franciszek Honiok)라는 인물을 이용했다. 당시 44세였던 그는 폴란드인에게 호의적인 독일계 실롱스크인으로, 사건 전날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호니오크는 폴란드군 공작원처럼 옷이 입혀진 채 독극물 주사를 맞고 총에 맞아 살해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마치 습격 중 사망한 것처럼 현장에 남겨졌다. 호니오크에게 입혀진 폴란드군풍의 옷을 조달한 것은 오스카 쉰들러이다. 이는 폴란드 측의 공격 증거로 제시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호니오크 외에도 다른 몇 명의 죄수가 이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독일은 이 습격 계획을 Konserveger(콘제르베, 통조림)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글라이비츠 공격 다음 날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 작전인 백색 작전(Fall Weiß|팔 바이스ger)을 개시하여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같은 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의 연설에서 글라이비츠 사건을 포함한 21건의 국경 사건들을 언급하며, 폴란드 침공이 정당한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했다.
3. 작전 개요
힘러 작전은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외에도 폴란드 회랑에서의 방화, 허위 선전 유포 등 총 21개의 크고 작은 조작 사건들로 구성되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폴란드-독일 국경 지대에서 발생했으며, 폴란드 측의 소행으로 위장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22일 장성들에게 "선전 목적의 카수스 벨리(casus belli, 전쟁 명분)를 제공할 것이다. 그 신빙성은 중요하지 않다. 승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작전의 본질을 드러냈다.
글라이비츠 사건 자체는 폴란드군 복장을 한 독일 요원들이 방송국을 습격하고, 폴란드어로 반독일 메시지를 방송한 뒤, 미리 준비된 시신(독일 측이 살해한 민간인이나 수감자)을 현장에 남겨 폴란드군의 공격 증거로 조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작전 실행 책임자 중 한 명이었던 친위대 소령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의 증언을 통해 상당 부분 밝혀졌다.
이러한 조작된 국경 사건들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작전인 백색 작전(Fall Weiss|팔 바이스deu) 개시의 명분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이어졌다.
3. 1. 작전 계획
작전의 초기 암호명은 "힘러 계획"으로 알려졌으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글라이비츠 사건에 대해 알려진 정보의 대부분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 친위대 소령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의 진술서에서 비롯되었다. 나우요크스는 이 작전이 친위대 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조직했다고 증언했다.
계획의 핵심은 폴란드군 군복을 입은 독일군 요원들이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었다. 점령 후에는 폴란드어로 폴란드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내용의 허위 선언문(하이드리히가 작성)을 방송하여, 마치 폴란드 측이 먼저 도발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작전 실행 단계에서의 암호명은 "''Grossmutter gestorben''"(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다.[2] 독일 측은 이 공격과 방송을 폴란드계 주민들의 반독일 감정에 기반한 사보타주 행위로 위장하고자 했다. 작전 계획 및 실행 준비는 Sławięcice 궁전(Schloss Slawentzitz)에서 이루어졌다.[3]
공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게슈타포는 폴란드에 우호적인 인물로 알려진 43세의 미혼 상부 실롱스크[4] 출신 가톨릭 농부 프란치셰크 호니오크를 이용했다. 그는 작전 전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약물 주사로 의식을 잃게 한 뒤 총격으로 살해되었다.[5] 호니오크는 폴란드군 공작원처럼 옷이 입혀진 채, 방송국 공격 중 사망한 것처럼 현장에 남겨졌다. 그의 시신은 이후 독일 경찰과 언론에 폴란드 측 공격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외에도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에서 끌려온 여러 수감자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약물 투여 후 현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었다.[6] 독일군은 이들 희생자를 Konserve|콘제르베ger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이 때문에 간혹 이 사건 자체를 "통조림 작전(Operation Canned Goods)"으로 잘못 지칭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에르빈 폰 라호우젠은 자신의 아프베어 부대가 작전에 필요한 폴란드군 군복, 장비, 신분증 등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빌헬름 카나리스로부터 수용소 수감자들을 이 군복으로 위장시켜 방송국을 공격하게 하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덧붙였다.[7] 아프베어 요원이었던 오스카 쉰들러 역시 이 작전에 사용될 폴란드 군복과 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8]
3. 2. 작전 실행
1939년 8월 31일 정오, 알프레트 나우요크스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부터 저녁 8시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암호 명령을 받았다. 암호명은 "Grossmutter gestorben|그로스무터 게슈토르벤deu"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다.[2] 나우요크스가 이끈 일단의 독일 공작원들은 폴란드군 군복을 입고 글라이비츠 방송국으로 향했다. 작전에 필요한 폴란드 군복과 장비 등은 아프베어 부대에서 제공했는데,[7] 오스카 쉰들러 역시 이 과정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있다.[8]
오후 8시경,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 요원들은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점거했다. 이들은 건물 안에 있던 직원들을 포박하고 방송을 중단시킨 뒤, 미리 준비된 짧은 반독일 메시지를 폴란드어로 방송했다. 이 과정은 약 4분 만에 완료되었다. 독일 측의 의도는 이 공격과 방송을 폴란드 반독일 사보타주 행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공격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게슈타포는 폴란드에 동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43세의 상부 실레지아[4] 가톨릭 농부 프란치셰크 호니오크를 이용했다. 그는 전날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사보타주범처럼 보이도록 폴란드군 군복을 입혀졌고, 약물 주사로 의식을 잃게 한 뒤 총격으로 살해되었다.[5] 호니오크의 시신은 방송국을 공격하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도록 현장에 남겨졌으며, 이후 경찰과 언론에 공격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에서 데려온 여러 수감자들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하이드리히에 의해 "Konserve|콘제르베deu" (깡통)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이 죄수들은 미리 폴란드군 군복을 입은 채 독약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상태로 현장으로 옮겨졌다. 나우요크스와 그의 부하들은 이들에게 총격을 가했으며, 일부는 도망치다 총에 맞은 것처럼 등 뒤에서 총격을 가했다. 이들의 시신 역시 현장에 남겨졌으며,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도록 얼굴이 훼손되기도 했다.[6] 나우요크스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는 명령을 실행하고 방송국 근처로 수인들을 운반했다. 그 수인들은 살아 있었으나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글라이비츠 사건에 대해 알려진 정보의 대부분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우요크스의 진술서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증언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의 수장인 하인리히 뮐러의 명령에 따라 사건을 조직했다고 밝혔다.
4. 경과
1939년 8월 10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에게 폴란드 국경 근처 슐레지엔 고원의 글라이비츠에 있는 독일 방송국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공격의 목적은 폴란드군이 이유 없이 방송국을 공격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독일의 침공 명분을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선전을 위해 폴란드의 공격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나우요크스의 뉘른베르크 재판 증언).
8월 15일, 나우요크스는 SD 요원 6명을 선발하여 글라이비츠로 이동했다. 당시 독일 국경경찰은 게슈타포 소속이었기에 비밀 유지가 용이했다. 나우요크스와 부하들은 글라이비츠에서 15일간 대기했다.
8월 말, 나우요크스는 글라이비츠 북쪽 약 70km 지점의 오베른으로 소환되어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로부터 작전에 필요한 '재료'를 받았다. 이 '재료'는 공격 후 현장에 폴란드군 시신으로 남겨질 죄수들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이들을 "깡통(Konserve|콘제르베de)"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으며, 뮐러가 강제수용소에서 직접 선별한 이들이었다.[6]
8월 31일 정오, 나우요크스는 하이드리히로부터 저녁 8시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암호 명령("할머니가 돌아가셨다", Grossmutter gestorben|그로스무터 게슈토르벤de)를 받았다.[2] 나우요크스와 부하들은 폴란드군 군복을 입고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습격하여 직원 3명과 경비원 1명을 포박했다. 저녁 8시 12분, 이들은 방송을 중단시키고 미리 준비된 폴란드어 반독일 감정 선언문을 낭독했다. 내용은 폴란드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취지였으며, 방송은 약 4분간 지속되었다. 이 작전은 Sławięcice 궁전(Schloss Slawentzitz)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3]
공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게슈타포는 폴란드에 동조적인 인물로 알려진 43세의 상부 실레지아[4] 출신 가톨릭 농부 프란치셰크 호니오크를 전날 체포했다. 그는 사보타주범처럼 옷이 입혀지고 약물 주사로 의식을 잃은 뒤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5] 호니오크의 시신은 방송국을 공격하다 사살된 것처럼 현장에 남겨져 경찰과 언론에 증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데려온 여러 수감자들도 약물 투여 후 현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얼굴이 훼손되었다.[6] 나우요크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는 명령을 실행하고 방송국 근처로 수인들을 운반했다. 그 수인들은 살아 있었으나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라고 증언하며, 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도망치다 사살된 것처럼 위장했다고 밝혔다.
글라이비츠 사건에 대한 정보 대부분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우요크스의 진술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하이드리히와 뮐러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조직했다고 증언했다. 에르빈 폰 라호우젠 역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의 아프베어 부대가 작전에 필요한 폴란드군 군복, 장비, 신분증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빌헬름 카나리스로부터 수용소 수감자들이 이 군복을 입고 방송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7] 오스카 쉰들러 또한 아프베어 요원으로서 작전에 사용될 폴란드 군복과 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8]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은 아프베어(Abwehr)와 친위대 병력이 수행한 더 큰 규모의 위장 작전인 힘러 작전(Operation Himmler)의 일부였다. 이 작전은 글라이비츠 공격 외에도 폴란드 회랑에서의 가옥 방화, 허위 선전 유포 등 총 21건의 조작된 사건들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독일의 소행을 폴란드의 공격으로 위장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몇 달 전부터 독일 언론과 아돌프 히틀러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폴란드 당국이 자국 내 독일계 주민(Volksdeutsche)에 대한 폭력적인 인종 청소를 조직하거나 묵인하고 있다는 거짓 비난을 퍼부었다.
글라이비츠 사건 다음 날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 작전인 백색 작전(de)을 개시하며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같은 날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국회(Reichstag) 연설에서 글라이비츠 사건을 포함한 힘러 작전의 사건들을 언급하며, 이를 폴란드에 대한 "자위권" 행사, 즉 침공의 정당한 명분(카수스 벨리, casus belli)으로 내세웠다. 그는 이미 8월 22일 장군들에게 "나는 선전용 침공 명분을 제공할 것이다. 그 신빙성은 중요하지 않다. 승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5. 작전 그 뒤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글라이비츠 사건을 언급하며 "국경을 침공한 폴란드"를 비난했고, 다음 날인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군은 폴란드 국경을 넘어 폴란드 전역을 개시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글라이비츠 사건은 아프베어(Abwehr)와 친위대(SS) 병력이 수행한 더 큰 규모의 힘러 작전(Operation Himmler)의 일부였다. 이 작전은 폴란드가 독일을 공격한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었으며, 폴란드 회랑에서의 가옥 방화, 허위 선전 활동 등이 글라이비츠 공격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독일은 이미 몇 달 전부터 폴란드 내 독일계 주민(Volksdeutsche)에 대한 폭력적인 인종 청소가 자행되고 있다고 비난하며 침공 명분을 쌓고 있었다. 히틀러는 9월 1일 국회 연설에서 이러한 국경 사건들을 폴란드 침공의 정당성으로 내세웠으며, 이미 8월 22일 장군들에게 "나는 선전적인 카수스 벨리(casus belli)를 제공할 것이다. 그 신빙성은 중요하지 않다. 승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질문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전을 실행했던 알프레트 나우요크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SD 요원들은 전쟁 중 숙청되었다. 사건의 진상은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우요크스가 증언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나우요크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의 명령으로 작전을 조직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1941년 하이드리히와의 불화로 무장친위대로 전속될 위기에 처했으나, "국가 기밀에 통한 자는 전투 부대 근무를 금지한다"는 히틀러의 지시 덕분에 덴마크와 벨기에에서 근무하다 미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1946년 구금 직전 탈출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에르빈 폰 라호우젠 또한 아프베어 부대가 작전에 필요한 폴란드군 군복과 장비 등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빌헬름 카나리스로부터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폴란드 군복으로 위장시켜 방송국 공격에 동원하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밝혔다.[7]
6. 국제 사회의 반응
사건 다음 날, 미국 특파원들이 현장에 소환되었지만, 중립적인 관계자들이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독일 측의 태도로 인해 국제 여론은 독일이 발표한 사건 설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7. 대중문화
이 사건은 여러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서 다루어졌다.
- 게르하르트 클라인 감독이 동독의 DEFA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영화 ''Der Fall Gleiwitz'' (1961)는 이 사건을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 폴란드 영화 ''Operacja Himmler'' (1979) 역시 이 사건을 다룬다.
- 볼커 슐뢴도르프 감독의 ''Die Blechtrommel'' (1979)과 짐 고다드 감독의 ''히틀러의 SS: 악의 초상'' (1985)에서는 사건이 짧게 언급된다.
- 비디오 게임 ''코드네임: 판처스'' (2004)에서도 사건이 언급된다. 이 게임은 출시 당시 폴란드에서 반폴란드적 역사 왜곡이라는 논란에 잠시 휩싸였으나, 이는 부정확한 보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참조
[1]
웹사이트
Address by Adolf Hitler – September 1, 1939
https://fcit.usf.edu[...]
2022-03-21
[2]
뉴스
Grossmutter Gestorben
https://www.spiegel.[...]
Spiegel-Verlag
2020-11-22
[3]
뉴스
Pałac w Sławięcicach i jego wojenna historia. Miał 45 pokoi i wielką salę balową. Co się z nim stało?' (The palace in Sławięcice and its wartime history. It had 45 rooms and a large ballroom. What has happened to it?)
https://kedzierzynko[...]
2023-02-28
[4]
웹사이트
The World War II's first victim. A farmer was murdered as part of a Nazi plot to provide an excuse to invade Poland, the story of a man forgotten by history.
https://web.archive.[...]
The Telegraph
2009-08-29
[5]
웹사이트
World War II's first victim – Telegraph
http://www.telegraph[...]
2022-01-11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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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rb.co.uk[...]
2015-09-24
[7]
웹사이트
20 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ume 2; Friday, 30 November 1945
http://avalon.law.ya[...]
Avalon Project
2012-11-08
[8]
웹사이트
80 years ago, how a very different Schindler's 'list' helped ignite WWII
https://www.timesofi[...]
20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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