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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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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효신서》는 16세기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저술한 병법서로, 당시 명나라 군대의 열악한 상황과 몽골,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 조직, 훈련, 전술 등을 체계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1560년에 18장본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14장본으로 재편집 및 증보되어 출판되었다. 이 책은 군사 전략, 무기, 병사 훈련, 진법, 군율 등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며, 특히 왜구 토벌에 기여한 척계광의 경험을 바탕으로 낭선, 원앙진과 같은 독창적인 전술을 제시했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이후 한국에 도입되어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활용되었으며, 조선의 무예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의 병법서에도 그 내용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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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신서
개요
제목기효신서
원제紀效新書
저자척계광
저술 시기1560년 ~ 1580년
언어한문
분야군사학
내용
주제병법, 군사 훈련, 전술
구성18권 (초본), 14권 (수정본)
영향동아시아 군사학 발전
기타
관련 문서무비지

2. 역사적 배경

기효신서는 1560년(가정 39년)에 초판(18권본)이 간행되었고, 1588년(만력 16년)에 내용이 추가된 개정판(14권본)이 출판되었다. 14권본은 1561년(가정 40년) 명나라 해안을 침공한 왜구 진압에 활용되었으며, 일본 음류의 검술 목록인 《음류지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2. 1. 명나라 군대의 쇠퇴

16세기 후반, 명나라 군대는 열악한 상태였다. 알탄 칸몽골 군대가 북쪽 국경을 침략하고, 중국 해안은 일본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 해적의 표적이 되었다.[2]

2. 2. 북방 몽골족과 왜구의 침입

16세기 후반, 명나라 군대는 열악한 상태였다. 북쪽에서는 알탄 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의 침입이 잦았고, 남쪽 해안에서는 일본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 해적의 약탈이 극심했다. 특히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라, 잘 훈련된 무사 집단으로 명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2] 척계광은 1555년 저장성 방어를 맡게 되었고, 왜구 토벌 등에 종사하며 군사 기술, 전술 및 전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효신서''에 담았다. 실제 왜구들이 쓰는 검을 대적하기 위한 전술로써 칼을 떨쳐낼 수 있는 낭선과,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적을 대적하는 전법은 왜구 진압에 크게 효과를 보았다.

2. 3. 척계광의 등장과 군사 개혁

1555년 저장성 방어를 맡게 된 치지광(척계광)은 군사 조직, 장비, 전술, 훈련 및 절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었다.[2] 당시 명나라 군대는 열악한 상태였다. 알탄 칸몽골 군대가 북쪽 국경을 침략하고, 중국 해안은 일본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 해적의 표적이 되었다. 척계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군사 기술, 전술 및 전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효신서''에 담아 출판했다.

3. 판본

《기효신서》는 1560년(가정 39년)에 처음 간행된 18권본과, 1588년(만력 16년)에 내용을 추가하여 출판된 14권본, 두 가지 판본이 있다. 14권본은 1561년(가정 40년) 왜구가 명나라 해안을 침공했을 때 활용되었으며, 일본 음류지목록을 소개하고 있다.[3]

척계광은 이 책에서 전략, 무기, 맨손 격투, 병사 선발 및 훈련, 진법, 군율, 행군, 막사 설치, 병법 등 다양한 군사 분야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다루었다. 특히 왜구의 칼을 쳐낼 수 있는 낭선과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적에 맞서는 전법은 왜구 진압에 큰 효과를 보였다.[3]

임진왜란 전후, 조선 류성룡의 건의로 《기효신서》를 적극 수입하여 훈련도감 교범으로 삼았다. 이후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시대까지 '척법(戚法)'이라 불리며 조선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3. 1. 18권본 (초판)

《기효신서》에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첫 번째 판본은 1560년부터 1561년까지 집필되었으며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본은 18권본으로 알려져 있다.[3]

18권본에 포함된 장들은 다음과 같다.[3]

내용
1.5인 1조 부대
2.신호 및 명령
3.군대 사기 진작
4.명령 발령; 전투 중 금지 사항
5.장교 훈련
6.병사 평가; 상벌
7. 및 8.야전 훈련 활동; 깃발과 북을 이용한 야영 훈련
9.행군
10.장병기 사용법
11.방패 사용법
12.검술
13.궁술
14.권경첩요편; 맨손 격투
15.성벽 방어를 위한 장치 및 진형
16.기(旗), 깃발 및 신호 북의 그림
17.초소 경비
18.연안 해전


3. 2. 14권본 (재편집 및 증보판)

紀效新書|기효신서중국어 14권본은 척계광이 강제 은퇴한 후인 1584년(萬曆)에 출판된 판본으로, 재편집된 내용과 새로운 자료가 14개의 장으로 묶여 있다.[3] 이 판본은 1561년(가정 40년) 명나라 해안을 침공한 왜구 진압에 활용되었고, 일본의 《음류지목록》(陰流之目録)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3]

4. 주요 내용

《기효신서》는 명나라의 장군 척계광이 저술한 병법서로, 가정 39년(1560년)에 처음 간행된 18권본과 만력 16년(1588년)에 출판된 14권본 두 가지 판본이 있다. 14권본은 1561년왜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으며, 일본의 《음류지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기효신서》는 전략, 무기 및 맨손 격투, 병사 선발, 훈련, 무기, 진법, 군율, 행군, 막사, 병법 등 다양한 내용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왜구 토벌에 종군했던 척계광의 경험을 바탕으로, 낭선과 6인 1조 전법 등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술을 제시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류성룡의 건의로 《기효신서》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삼았으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시대까지 '척법(戚法)'이라 불리며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18권본에 포함된 장들은 다음과 같다.[3]

내용
1.5인 1조 부대
2.신호 및 명령
3.군대 사기 진작
4.명령 발령; 전투 중 금지 사항
5.장교 훈련
6.병사 평가; 상벌
7. 및 8.야전 훈련 활동; 깃발과 북을 이용한 야영 훈련
9.행군
10.장병기 사용법
11.방패 사용법
12.검술
13.궁술
14.《권경첩요편(拳經捷要篇)》; 맨손 격투
15.성벽 방어를 위한 장치 및 진형
16.기(旗), 깃발 및 신호 북의 그림
17.초소 경비
18.연안 해전


4. 1. 병사 선발 및 훈련

가정(嘉靖) 39년(1560년)에 처음 간행된 《기효신서》는 정예병 선발, 훈련, 무기, 진법, 군율 등 다양한 방면을 다루고 있다. 특히 척계광이 왜구 토벌에 종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왜구의 검을 대적하기 위한 낭선과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는 전법 등 효과적인 전술을 제시하였다.[1]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류성룡의 건의로 《기효신서》를 적극 수입하여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삼았다. 《기효신서》는 '척법(戚法)'이라고 불리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시대까지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으로 활용되었다.[1]

4. 2. 무기 및 장비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는 당시 사용되던 각종 무기와 장비에 대한 설명과 사용법을 제시하고 있다. 왜구 토벌 등에도 종군했던 척계광의 군인으로서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저술로,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무기, 진법 등을 다루고 있다.[1]

무기 제작에 있어서는 질 좋은 무기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조총은 폭발하는 경우가 잦아 칼, 등패(등나무 방패),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 창과 같은 근접 무기를 선호하였다.[7] 칼 제작에 대해서는 사용되는 철 재료를 여러 번 단조해야 하고, 절삭날은 불순물이 없는 최고의 강철로 만들어야 하며, 칼날의 등 부분은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4. 2. 1. 근접 무기

실제 왜구들이 쓰는 검을 대적하기 위한 전술로써 칼을 쳐내는 낭선(狼筅)과, 6인 1조로 적에게 대항하는 전법은 왜구 진압에 큰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1]

4. 2. 2. 화기

척계광은 해적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한 후, 활과 화살에 비해 사정거리와 화력이 우월한 조총 부대를 군대에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6] 그는 조총에 매료되었고, 명나라 군대에서 조총 사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척계광은 조총의 정확성과 갑옷 관통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6]

이상적인 조총 부대는 10명의 조총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4명 또는 2명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척계광이 제안한 최적의 조총 부대 편성은 원앙진과 유사하게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근접전 대신, 『기효신서』 초판 발행 전에 그가 개발한 일제 사격 전술을 활용했다.[6] 부대는 일렬로 배치되거나, 5명씩 2열 종대로, 또는 2명씩 5개 층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각 층이 차례로 사격하고, 이후 전통 무기를 든 부대가 조총병 앞으로 전진하여 근접전을 벌였다. 조총병은 나무 울타리나 요새 뒤에서 교대로 사격하고 재장전할 수도 있었다.[6]

적이 100보 이내로 접근하면 지휘관의 사격 명령에 따라 나팔 소리에 맞춰 조총병이 한 층씩 사격한다. 5번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5개 층이 모두 사격한 것이다. 이후 북소리에 맞춰 전통 무기를 든 소대가 조총병 앞으로 나와 백조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전투를 벌인다.[6]

각 소대는 명확한 역할 분담을 통해 상호 협력적인 전투를 훈련받았다. 척계광의 병사들은 농민 출신으로 일본군과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병과 합동 및 소대 전술을 강조했다. 부대는 집단으로 상벌을 받았다. 부대 전체가 도망치면 장교가 처형되었고, 소대장이 전사하면 소대 전체가 처형되었다.[6]

4. 2. 3. 무기 제작

기효신서는 질 좋은 무기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조총은 폭발하는 경우가 잦아 칼, 등나무 방패,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 창과 같은 근접 무기를 선호하였다.[7]

칼 제작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사용되는 철 재료는 여러 번 단조(가열, 망치질, 접기)해야 한다.
  • 절삭날은 불순물이 없는 최고의 강철로 만들어야 한다.
  • 칼날의 등 부분은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다듬어야 한다. 이는 칼이 잘 잘리도록 하는 데 필요하다.

4. 3. 전술

척계광은 왜구를 상대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술들을 고안했다. 특히 왜구들이 사용하는 칼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낭선이라는 무기를 활용하고,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적을 상대하는 전법을 개발하여 왜구 진압에 큰 효과를 보았다.

척계광은 11명의 병사와 1명의 군수 담당으로 구성된 12인 팀인 원앙진을 제안했다.[4] 또한, 조총 부대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일제 사격 전술을 제시했다. 원앙진과 조총 일제 사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4. 3. 1. 원앙진

鴛鴦陣|yuānyāng zhèn중국어이라고 알려진 12인 팀은 11명의 병사와 1명의 군수 담당으로 구성되었다.[4] 각 병사의 역할과 무기 구성은 다음과 같다.

역할무기인원비고
긴 창을 가진 병사 (chang qiang shou 長槍手)긴 창 (약 3.66m 이상)4명
등패환도를 가진 병사 (dun pai shou 盾牌手)등패, 환도2명창병의 양쪽에 각각 1명 배치
낭선을 가진 병사 (lang xian shou 狼筅手)낭선2명
삼지창 또는 칼을 가진 병사 (duan bing shou 短兵手)삼지창 또는 칼2명
조장 (dui zhang 隊長)분대 깃발1명분대 깃발 소지
취사병/운반병 (fuze huoshi de huobing 負責夥食的火兵)없음1명군수 담당



원앙진은 이상적으로 대칭을 이루었다. 조장과 취사병/운반병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5인 분대 2개로 나눌 수 있었다. 이는 일본 해적이 긴 창을 뚫고 들어왔을 때 환도등패를 가진 병사들이 취약한 창병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투에서 환도등패를 가진 두 병사는 서로 다른 역할을 했다. 오른쪽에 있는 병사는 분대의 전진 위치를 유지하고, 왼쪽에 있는 병사는 투창을 던져 적을 유인했다. 낭선을 가진 두 병사는 해적을 얽어매고 창병들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삼지창을 든 병사들은 측면과 후방을 방어했다.[5]

4. 3. 2. 조총 일제 사격

척계광(戚繼光)은 조총 부대를 이상적으로는 조총병 10명으로 구성했지만, 실제로는 4명 또는 2명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척계광이 제안한 최적의 조총 부대 편성은 12명의 조총 부대였으며, 원앙진과 유사하지만 근접전 대신 일제 사격 원칙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6] 부대는 일렬로 배치되거나, 각 5명의 조총병으로 이루어진 2열 종대로 배치될 수 있었다.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각 열은 차례대로 사격하고, 그 후 전통적인 근접 무기로 무장한 부대가 조총병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은 함께 적과 근접전을 벌였다. 또는 조총병은 나무 울타리나 기타 요새 뒤에 배치되어 교대로 끊임없이 사격하고 재장전할 수도 있었다.[6]

『기효신서』(18장본, 1560년)에 기록된 조총 일제 사격 방식은 다음과 같다.



적이 100보 이내로 접근하면, 지휘관(總)의 한 번의 사격 명령에 따라 각 나팔 소리에 맞춰 조총병이 한 층씩 사격한다. 차례로 5번의 나팔 소리가 울리고 5개 층이 사격한다. 이것이 끝나면 북 소리에 맞춰 한 소대(哨)가 [전통 무기로 무장하고] 앞으로 나와 조총병 앞으로 전진한다. 그들 [소대원]은 북 소리에 맞춰 백조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 전투를 벌인다.[6]


4. 4. 맨손 격투 (권법)

기효광은 무기술이 전장에서 쓸모없다고 여겼으나, 병사들의 체력과 자신감을 향상시키는 기본적인 훈련 형태로 그 가치를 인정했다.[9] '기효신서' 제14장 '권경요약편'은 맨손 격투, 즉 권법을 다룬다.

기는 당시 무술에서 32개의 절에 걸쳐 여러 맨손 기술을 설명한다. 기술에 대한 묘사는 절의 형태로, 한 줄에 일곱 글자, 한 절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간결하다. 이러한 묘사는 기술을 재현 가능한 세부 사항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대략적인 그림, 후속 책략, 행동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이는 독자가 이미 기술에 익숙하거나, 기가 실제로 맨손 격투 방법을 공개하는 데 관심이 없었음을 암시한다.

기의 텍스트에서 확인된 약 40개의 무술 자세는 다음과 같다.

번호자세 이름현대 태극권과의 유사성
1출문식(Going Out the door posture)O (막의부(Block Brushing Clothes) 또는 수의부의(Casually Fixing Clothes))
2단편식(Single whip stance)O
3금계독립(Golden rooster stands on one leg)O
4와우식(Reclined ox stance)X
5탐자법(spy technique)O (탐자(Seek the Spy)/측마(Measure the Horse))
6단타(short strike)X
7황화근신(Yellow flower close in tightly)X
8추도태산(push to upend Mt.Tai)O (개두추산(Cover Head Push Mountain))
9침향식(Aloes wood posture)X
10칠성추(Seven star strike)O
11역룡등(Mount the dragon backwards)O (역려등(Mount The Donkey Backwards))
12저삽세(lower jabbing position)X
13잠복보(Ambush crouch posture)X
14수집법(Elbow in hand position)O (비주(Fist Under Elbow))
15개타추(splitting strike and pushing press)X
16일순보(One instant step)X
17금나세(Capture and grab stance)O (소금나(Small Catch & Grab))
18중사급(middle four level position)X
19부호보(Crouched tiger posture)X
20상사급(upper four level position)X
21역자세(Reverse stabbing position)X
22배궁보(Back-facing bow stance)X
23정란사평(Well railing four-wise balanced)X
24급찬분(rapid boring split)X
25귀도각(Ghost kicking foot)X
26도지(fall recovery)X
27철심주(elbow that bores the heart)O
28지상세(Finger opposition posture)X
29야수두(Beast head position)O
30신권(Spirit fist)X
31용저작(Grounded sparrow beneath the dragon)X
32향일수(Sun-facing hand)X
33견도보(Knockdown posture)X
34대안시(Wild goose wings stance)O (백안(White Goose (or Crane) Spreads Wings))
35전분(clipping split)X
36기호보(Straddling tiger posture)O
37사수교(Loose hands scissor maneuver)X
38응조박토(Eagle seizes the rabbit position)X
39포두(Canonball against the head maneuver)O
40쌍수타(Shuan shouh strike)X
41기고식(Banner and drum posture)X
42홍권(Red fist)O



이 중 15가지 기술은 현대 태극권, 특히 진가(陳家)를 중심으로 한 태극권의 기술과 이름이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포두(Canon Towards Head), 대안시(Goose Spreads Wings) 기술은 오늘날 거의 정확히 동일하다고 인식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단편(Single Whip), 금계독립(Golden Rooster), 추산(Push Mountain), 칠성(Seven Star Stance), 홍권(Red Fist), 야수두세(Beast Head Pose)와 같은 다른 기술은 여러 북방 중국 무술의 핵심 기술이다.

일부 학자들은 현대 태극권이 진왕정이 '기효신서'의 32개 권술을 기초로 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명명된 기술의 수는 초기 태극권 루틴 목록에서조차 일부만 차지하며, 후기 루틴은 훨씬 적다. 따라서 많은 기술이 그 시대에 널리 퍼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는 서론에서 16가지 다른 격투 스타일을 언급했는데, 이 모든 스타일이 불완전하게 전해졌다고 간주했다. "어떤 것은 아래 부분이 없고, 어떤 것은 위 부분이 없다".[10] 언급된 무술 중에는 소림곤법이 있으며, 이는 정종유의 '소림곤법찬종'(Exposition of the Original Shaolin Staff Method)에 자세히 기록되어 1610년경에 출판되었다.[11]

기의 맨손 격투에 대한 논의에는 무술의 정신적 요소나 기(qi) 순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면, 명청 교체기 이후의 중국 무술 텍스트는 기능적 무술 기술과 도교도인 건강 수련, 호흡 운동 및 명상을 통합하여 나타낸다.[13][14]

5. 한국에 미친 영향

紀效新書|기효신서중국어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군사 제도 및 전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류성룡의 건의로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채택되었고,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될 때까지 '척법'이라 불리며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紀效新書|기효신서중국어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저술한 병법서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효과를 보았던 전술과 무기 사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14권본은 1561년 명나라 해안을 침공한 왜구를 진압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일본의 《음류지목록》을 소개하기도 한다.[1]

임진왜란조선 조정에 군사 훈련 방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척계광의 저술은 일본 해적에 대한 그의 성공적인 전투로 인해 특히 주목받았다. 14장으로 구성된 紀效新書|기효신서중국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 군사 교범인 무예제보의 모델이 되었고, 조선의 군사 사상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4]

5. 1. 훈련도감 설치

임진왜란을 전후해 류성룡의 건의로 《기효신서》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삼았으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시대까지 척법(戚法)이라고 불리며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이 되었다.[1] 임진왜란은 조선 정부 내에서 군사 훈련 방법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기효광의 저술은 수십 년 전 일본 해적에 대한 그의 성공적인 전투로 인해 특히 주목받았다.[1]

5. 2. 무예도보통지 편찬

임진왜란을 전후해 류성룡의 건의로 《기효신서》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훈련도감의 교범으로 삼았다.[1] 정조 시대에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될 때까지 척법(戚法)이라고 불리며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이 되었다.[1] 임진왜란조선 정부 내에서 군사 훈련 방법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기효광의 저술은 일본 해적에 대한 그의 성공적인 전투로 인해 특히 주목받았다.[4] 14장으로 구성된 『기효신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 군사 교범인 무예제보의 모델이 되었고, 조선의 군사 사상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4]

6. 일본 등 다른 국가에 미친 영향

는 일본에서 14장본 및 18장본이 여러 차례 출판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16세기 야마모토 간스케가 저술한 일본 전략서인 《병법비전서(奥義書)》로 전해졌다.[1]

6. 1. 일본 병법서에의 영향

14권본은 가정 40년(1561년)에 명나라 해안을 침공한 왜구 진압에 활용되었고, 일본의 《음류지목록》(陰流之目録)을 소개하고 있다.[1] 《기효신서》의 일부 방법들은 16세기 야마모토 간스케가 저술한 일본 전략서인 《병법비전서(奥義書)》로 전해졌다.[1]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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