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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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 정조 시대에 편찬된 24가지 무예의 도해와 설명을 담은 군사 훈련 지침서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명나라의 무예서를 참고하고, 조선 시대 무예들을 정리하여 편찬되었다. 몽골 침략과 왜구의 침입, 문치주의로 인한 국방력 약화, 임진왜란을 겪으며 무예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사도세자의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정조가 6가지 무예를 추가하여 완성했다. 이 책은 창, 도검, 검술, 권법과 기마술 등 다양한 무예를 다루며, 당시 무예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무예도보통지는 훈련의 실질적인 내용과 기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으며, 중국 무술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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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 |
---|---|
개요 | |
![]() | |
명칭 |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
종류 | 무예 훈련 교본 |
발행년도 | 1795년 |
소장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내용 | |
특징 | 조선 후기 군사 훈련에 사용된 무예 훈련 교본 이전의 무예 관련 서적들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 |
구성 | 기예 (技藝): 창, 검, 곤봉 등 다양한 무기술 수련법 설명 도보 (圖譜): 각 무기술의 자세와 동작을 그림으로 표현 통지 (通志): 무기술의 역사, 이론, 사용법 등을 상세히 기록 |
수록 무예 | 권법 곤방 기창 죽장창 기창 낭선 쌍수도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곤 등패 편전 기사 마상재 마상창 마상검 |
역사적 의의 | |
중요성 | 조선 후기 군사력 강화 노력의 일환 전통 무예의 체계화 및 보존 한국 무술 연구의 중요한 자료 |
참고 자료 | |
관련 링크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정보 |
2. 역사적 배경
세계의 모든 문화는 호신과 전투를 위한 무예를 발전시켜 왔다. 한국 역시 고대부터 수박과 같은 맨손 격투기와 검술, 창술, 궁술 등 무기를 이용한 다양한 무예를 연마해 왔다.[6] 조선시대에는 무과 시험을 통해 무인을 선발했으며, 무과 시험 과목에는 활쏘기, 창술 등 무기 기술과 기마술 시험을 위한 격구가 포함되었다.[7]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병사 훈련을 체계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였다. 선조 때 한교는 《기효신서》 등을 바탕으로 《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8] 《무예제보》는 이후 병사 양성의 지침서가 되었으나,[9] 《기효신서》는 여전히 훈련의 기본 지침서로 사용되었다.[10]
영조 때 사도세자는 《무예신보》 편찬에 참여하여 죽장창 등 12종을 추가, 18종의 무예를 수록했다.[11] 이는 사도세자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며, 영조와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11]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기예 등 6종을 추가하여 총 24종의 무예를 담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도록 명했다.[11] 1790년[12](정조 14년) 4월 29일(음)에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는 한문본과 한글 해석본으로 간행되었다.
2. 1. 몽골 침략과 왜구의 침입
몽골의 고려 침략으로 고려의 궁궐과 서고가 파괴되면서 고대 및 전근대 무술 관련 기록이 소실되었다. 이후 몽골 원나라의 지배가 끝났으나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1]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와 아시카가 막부의 통제력 약화로 왜구의 침입이 증가했고,[1] 이는 조선이 군사 시설과 부대를 재건하는 계기가 되었다.[1]2. 2. 조선 왕조의 문치주의와 국방력 약화
조선은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삼아 학문, 문민 활동, 문화 예술을 중시하고 무술과 군사적 활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국가 및 지방 방어 구조, 무장 전투 훈련 및 실습이 제한되어 소규모 습격과 부족의 공격을 격퇴하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약화되었다.임진왜란(1592~1598)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한 것과 같은 주요하고 조직적이며 대규모 군사 침략을 막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군사적으로 안일한 한국을 발견했다.
2. 3. 임진왜란과 무예 재정비
임진왜란은 군사적으로 안일했던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 조정은 부족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쟁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일본의 침략으로 국방 강화의 필요성이 명확해진 후, 1593년 선조는 어영청을 설립했다. 1610년 한교는 《무예제보》를 편찬하여 곤방한국어 (긴 막대), 등패한국어 (방패), 낭선한국어 (여러 갈래의 창), 장창한국어 (긴 창), 당파한국어 (삼지창), 쌍수도한국어 (양손 검)의 6개 무기 기반 전투 시스템을 정리했다.
영조 재위 기간 동안 사도세자는 《무예제보》를 개정하고 12개의 전투 기술을 추가하여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무예신보》는 죽창한국어 (긴 대나무 창), 기창한국어 (깃발 창), 예도한국어 (단검), 왜검한국어 (일본도), 교전보한국어 (전투 삽화), 제독검한국어 (제독의 칼), 본국검법한국어 (문자 그대로 "본국 검술"), 쌍검한국어 (문자 그대로 "쌍검"), 월도한국어 (문자 그대로 "달 검", 일본의 나기나타와 유사), 협도한국어 (창 검), 편곤한국어 (플레일), 권법한국어 (맨손 격투)을 포함했다.
정조는 《무예신보》를 다시 개정하고 6가지 전투 기술을 추가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3. 무예 인식
《무예도보통지》는 연속되는 동작인 무예를 정지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를 실제 훈련에 사용하려면 그림과 실제 동작 사이의 관계를 정의해야 했는데, 이를 '세(勢)'와 '보(譜)'로 표현하였다.[13]
'세'는 그림으로 나타낸 하나의 자세, 또는 품세를 말한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한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응용해야 한다.[13] '보'는 각 세의 순서를 연결한 것이다. 이를 통해 공격과 방어의 흐름을 익힐 수 있었다.[13] 이러한 세와 보의 표현은 이전의 《무예제보》 등에서도 사용된 일반적인 방식이었다.[8]
《무예도보통지》에 나타난 세와 보를 보면 방어보다는 공격적인 흐름이 많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에 공격적인 전술 운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14]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될 당시에는 화약 무기가 이미 기존 무기의 장단점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는 이전의 무예지들이 분류했던 긴 무기와 짧은 무기의 분류 대신 찌르고, 찍고, 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무기를 다시 분류하였다.[13]
4. 구성
《무예도보통지》는 장용영의 군사 훈련용 지침서로, 보병과 기병의 별기를 다룬 책이다. 모두 24가지 무예를 4권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1] 책 머리에는 군사 운용의 역사를 요약한 《병기총서(兵技摠敍)》, 척계광과 모원의의 전기인 《척모사실(戚茅事實)》, 한교가 훈련도감을 운영하며 병사 훈련에 필요한 실무를 적은 《기예질의(技藝質疑)》가 실려있다.[15]
각 권에 배치된 24반 무예는 다음과 같다.
권 | 무예 |
---|---|
1권 | 창: 장창, 죽장창, 기창, 당파, 기창, 낭선 |
2권 | 도: 쌍수도, 예도, 왜검, 왜검교전 |
3권 | 검: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패 |
4권 | 권법과 기마술: 권법, 곤방,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 |
4. 1. 1권: 창술
- 장창(長槍): 창은 병사의 기본 무기였다. 활은 일반인도 흔히 지녔으나 창은 군인만 소지가 허용되었다.[16] 장창은 일반적인 창보다 긴 창으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서 도입되었다. 당시 개인 무기로 검을 주로 사용하는 일본 군대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조선 병사의 주요 무기로 채택되었다.[17] 주목나무로 만든 약 3.96m 길이의 창으로, 적절한 기후 조건에서는 대나무를 포함하여 유사하게 부드러운 나무로도 만들 수 있었다. 유연성과 길이 때문에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일반 무기로 여겨졌다. 장창은 1592년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 중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 죽장창(竹長槍): 대나무를 이용한 장창으로, 임진왜란 시기 도입되었다.[18] 약 4.27m 길이의 창으로, 자루는 대나무로 만들어 유연성을 더했으며, 끝에 약 10.16cm 칼날이 달려 있었다.
- 기창(旗槍): 깃발을 단 짧은 단창이다.[19] 약 2.74m 길이의 자루 끝에 약 22.86cm 칼날이 달린 무기이다.
- 당파(鐺鈀): 끝이 세 갈래인 삼지창이다. 삼국 시대부터 한국에서 흔히 쓰였던 무기이나 당파는 척계광이 일본의 왜검에 대적하기 위해 고안한 것을 받아들인 형태이다. 갈라진 틈으로 적의 창이나 칼을 걸어 넣어 잡아 챌 수 있었다.[20] 길이는 약 2.13m에서 약 5.49m 사이이며, 철 또는 나무로 된 끝을 가지고 있다.
- 기창(騎槍): 말을 탄 채 사용하는 기병용 창이다. 조선 무과 시험 6과목 가운데 하나였다.[21] 일반적으로 기창을 사용한다.
- : 동일한 발음으로 혼동될 수 있는데, 한자가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기창(旗槍)은 旗(깃발, 작은 깃발 또는 작은 깃발)를 사용하며, '네모' 부수(方)로 고정되어 있고, 기창(騎槍)은 騎(기병, 또는 기병대)을 사용하며, '말' 부수(馬)로 고정되어 있다. 비록 마상(馬上; 문자 그대로 "말 위에서")이 목록에 있는 다른 기마 무기와 함께 사용될 수 있지만, 한국어의 많은 단어가 동일하게 발음되기 때문에 언어유희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널리 애용된다.
- 낭선(狼先): 가지를 쳐내지 않은 대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끝에 창날을 붙인 무기이다. 1444년 명나라의 엽종류가 반란을 일으키며 최초로 사용하였고, 잔가지들 때문에 단칼에 자루가 잘리는 창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어 척계광이 왜구와의 싸움에 도입하였다.[22] 주 자루에서 9~11개의 가지나 가시가 뻗어 나와 있으며, 각 가시에는 작은 금속 갈고리가 박혀 있다. 이 가시는 일반적으로 독에 담가 사용했다.
4. 2. 2권: 도검술
- 쌍수도(雙手刀): 원래 이름이 장도(長刀)인 쌍수도는 칼이 길어 양손으로 잡아야 하는 무기이다.[23]
- 예도(銳刀): 예도는 조선의 전통 도검인 환도와 비슷하나 끝이 더 뾰족하게 제작된 칼이다.[24]
- 왜검(倭劍): 왜검은 일본의 카타나를 뜻한다. 카타나는 특유의 베기 성능이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고려 시대부터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입만으로는 수가 충분하지 않아 왜검의 특징을 받아들인 환도가 제작되었다.[25]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대의 카타나는 조선에 위협적인 무기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당파와 같은 무기가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왜검 자체에 대한 도입도 모색되었다. 숙종 시기 훈련도감의 무인 김체건은 초량왜관에 노비로 위장 잠입하여 왜검술을 배웠다. 그는 통신사 일행으로도 따라가 왜검을 배웠는데 훗날 왜검을 네 가지 유파로 정리하였다.[26] 《무예도보통지》의 제작에 참여한 백동수는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왜검도 함께 전수받았다.[27]
- 왜검교전(倭劍交戰): 왜검과 교전하는 방법을 도해하였다.
4. 3. 3권: 검술
- 제독검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전한 허리에 차는 검이다. 이여송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독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9]
- 본국검은 신라에서 유래하여 신라검이라 불린다. 한국 고유의 검으로, 한동안 맥이 끊겨 전해지지 않던 것을 중국의 모원의가 《무비지》에 〈조선세검〉으로 수록한 것을 발견하여 되살렸다.[30]
- 쌍검은 양손에 검을 들고 싸우는 검법이다.
- 마상쌍검은 말을 타고 쌍검을 사용하는 검법이다.
- 월도는 언월도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자루가 긴 큰 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검에 맞서기 위해 명나라로부터 도입되었다. 원래는 기병의 무기로 가야와 같은 고대 기병들도 사용하였다.[31]
- 마상월도는 말을 타고 사용하는 월도이다.
- 협도는 월도보다 칼의 폭을 줄여 다루기 쉽게 만든 무기이다.[32]
- 등패는 등나무로 만든 방패이다. 도검을 방어하기 위해 쓰였다.
4. 4. 4권: 권법과 기마술
권법 (拳法): 맨손 격투술이다. 삼국 시대부터 택견, 수박 등으로 불리며 연마되었다.[33]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은 약 20페이지 분량이며, 뚜렷한 형식의 패턴은 나타나지 않는다.곤방 (棍棒): 오리 부리 형태의 날을 단 긴 봉으로, 치고 찌르는 무기로 사용되었다.[34] 곤봉 기술은 타격, 찌르기, 막기 등 모든 무술 기술의 기본이며, 이를 익히면 창, 검 등 다른 장병기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
편곤 (鞭棍): 주로 기병이 사용하던 도리깨 모양의 무기이다. 보병은 더 긴 장대 형태의 편곤을 사용하였다.[35] 짧은 막대기에 고통스러운 돌기가 많은 강철 외피를 씌워 채찍처럼 사용했다.
마상편곤 (馬上鞭棍): 말을 타고 편곤을 사용하는 기술이다.
격구 (擊毬): 말을 타고 하는 하키와 비슷한 운동이다. 기마술 수련을 위한 군사 훈련으로 쓰였다.[36] 고구려 기병이 서기 400년경부터 즐겼던 스포츠로, 선수들은 한쪽 끝이 구부러진 고리가 달린 막대기로 공을 쳐서 골대에 넣어야 한다.
마상재 (馬上才): 말 위에서 각종 묘기를 선보이는 서커스이다. 조선의 마상재는 통신사 일행에 포함되어 기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37] 말 위에서 거꾸로 서거나, 말 아래로 타는 등 기병이 숙달해야 할 여섯 가지 승마 기술을 포함한다.
5. 현대적 의의
화기 발달로 《무예도보통지》는 군사 훈련 교범으로서 실용성이 사라졌지만, 한국 전통 무예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 이 책은 총병기 해설이나 전략·전술 이론 중심에서 벗어나, 그림과 문장으로 전투 동작(형)을 자세히 설명한다. 권법, 궁술, 마술, 창술, 검술 등 조선의 무예 18반(십팔기)을 총 4권 24개 항목에 걸쳐 상세히 해설하며, 무예제보 이래 24기 중 중국 무술 기원이 21개, 일본 무술 기원이 2개,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 1개이다. 편찬자 백동수는 동시대 학자들로부터 "무(武)로 문(文)을 일으켰다"고 평가받았다.
조선 왕조 말기,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은 사본이 손실되거나 파괴되어 한국의 군사 과학과 무술 지식 및 실습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원본은 현재 수원 화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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