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교헌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2대 교주가 되었고, 중광단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를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발전시켜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했으며,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종교 지도자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종교 지도자 - 박인호 (1854년)
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 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박은식
박은식은 언론인, 역사학자, 정치인으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며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외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당성을 알린 독립운동가이다. - 일제강점기의 대종교인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일제강점기의 대종교인 - 박찬익 (1884년)
박찬익은 경기도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임시정부 운영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로, 보안회, 신민회 참여, 상해 망명,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 외사국장, 법무부장 등을 역임하고 광복 후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교포 권익 보호에 힘썼으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교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제목 | 유금교헌 |
한글 | 김교헌 |
한자 | 金教獻 |
일본어 가나 | 기무 교혼 |
로마자 표기 | Kim Gyo-heon |
기본 정보 | |
이름 | 김헌 |
원어 이름 | 金獻 |
본명 | 김교헌(金敎獻) → 김헌(金獻) |
출생일 | 1868년 7월 5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수원유수부 |
사망일 | 1923년 12월 25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별명 |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
국적 | 대한제국 |
사망 원인 | 병사 |
칭호 | 대종교 제2대 도사교 |
민족 | 한민족(경주 김씨) |
거주지 | 대한제국 경기도 광주군 |
부모 | 김창희(부), 한양 조씨 부인(모) |
친척 | 김정집(친조부), 조희필(외조부), 김영수(친증조부), 김사목(친고조부) |
활동 기간 | 1885년 ~ 1923년 11월 22일 |
칭호 기간 | 1916년 9월 1일 ~ 1923년 11월 22일 |
전임자 | 나철 |
후임자 | 윤세복 |
학력 | 1885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
상훈 | 1909년 대한제국 가선대부 수훈,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웹사이트 | 김헌 - 두피디아 |
경력 | |
경력 | 조선 시대 말기의 〈성균관〉의 강독관·비서원·부사성 등을 두루 역임 대한제국 시대 말기의 〈성균관〉의 대사성 등을 거쳐, 〈규장각〉의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 관직 은퇴 이후 대한제국 시대 말기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간부 등을 두루 역임 일제강점기 시대 초기의 대종교 제2대 교주(도사교)를 역임 |
종교 | |
교파 | 대종교 |
2. 생애
김교헌은 조선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훗날 개명(改名)한 이름은 '''김헌'''(金獻)이다.
1885년 조선 시대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만민공동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9년 3월 하순 규장각 부제학, 1910년 1월 중순 규장각 가선대부를 지냈으며, 같은 해 2월 초순 관직을 그만두고 1910년 3월 6일 대종교에 입문하였다.
2. 1. 대종교 입문과 독립운동
1910년 3월 6일 대종교에 입문하여, 1916년 9월 1일 나철의 뒤를 이어 제2대 도사교(대종교 교주)가 되었다.[1]1918년 12월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1920년 청산리 전투에 기여하였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23년 11월 22일 윤세복에게 대종교 교주 직함을 물려주고, 1923년 12월 25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나철이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며 자결하자, 김교헌은 1916년 9월 1일 대종교 2대 교주가 되었다. 총본사를 동간도 화룡(和龍)으로 옮기고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1]
3. 구국운동과 대종교
1909년 1월 15일, 오기호 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 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고(신도 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 지역에도 대종교 포교 지사를 설치하였는데, 1914년 3월 13일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대종교의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 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9월 1일(음력 8월 4일) 김교헌에게 도사교(대종교 교주)를 물려주었다. 이후 나철은 같은 해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1]
3. 1. 대종교의 발전과 수난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에게서 대종교 2대 교주 자리를 물려받은 김교헌은 총본사를 동간도 화룡(和龍)으로 옮겼다. 그는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중광단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1]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다음 해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김교헌은 이에 통분하다가 병을 얻어 1923년 11월 22일 윤세복에게 대종교 교주 자리를 물려주고, 같은 해 12월 25일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1]
3. 2. 윤세복의 계승과 박해
1923년 11월 22일 대종교 3대 교주가 된 윤세복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화민국 길림성장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만주의 대한제국 동포 서상용의 원조를 받으며 대종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북간도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3] 그러나 천전(天殿)의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3]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대종교 제2대 교주였던 김교헌과 제3대 교주였던 윤세복을 생전에 직간접적으로 원조했던 서상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세복은 이미 15년 전인 1962년에 같은 훈격의 훈장을 추서받았다.
4. 역사관
김교헌은 한반도 밖에 한사군이 있었으며, 요동반도에 위치해 있었다는 민족주의적 주장을 신채호, 박은식, 이상룡과 같이 펼쳤다.[2]
5. 저서
6.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교헌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때에 대종교 제2대 교주였던 김교헌과, 대종교 제3대 교주였던 윤세복을 생전에 직간접적으로 원조해 주었던 서상용도 같은 훈격의 서훈을 추서받았다. 윤세복은 이미 15년 전인 1962년에 같은 훈격의 훈장(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3]
참조
[1]
서적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2]
서적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Nationalist History
[3]
서적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