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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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구하는 경상남도 울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승려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하에 통도사 초대 주지가 되었으며, 친일 행적과 독립운동 지원 의혹을 동시에 받았다. 3·1 운동 직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선언문에 가명으로 서명하기도 했으나, 통도사 재산 횡령 의혹도 제기되었다. 1925년 통도사 주지직에서 물러난 후, 중일 전쟁 시기에는 일본군 위문 등 전쟁 협력 행위에 가담했다. 해방 후 1949년 조선 불교 제3대 총무원장에 취임하여 불교계에서 활동했으며, 1965년 94세로 사망했다. 사후 친일 논란에 휩싸였으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의 독립운동 지원 사실을 고려하여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에서 제외했다.
김구하는 경상남도 울주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 통도사 동승을 거쳐 1884년 13세의 나이로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1년 사찰령 공포 속에서 통도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고,[1] 1917년에는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일제강점기 초기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위한 축하식을 열거나 일본 시찰 중 메이지 천황 묘 참배 및 천황 찬양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행적으로 평가받는 활동을 하였다.
이능화는 김구하를 교(敎)를 중시하고 불사(佛事)에 힘쓴 인물로 평가했다.[3] 한편, 사후 친일 행적 논란으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검토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통도사 측의 이의 제기와 소명 자료 제출 후, 독립운동 지원 사실 등이 고려되어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4]
2. 생애
그러나 3·1 운동 직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선언서에 가명으로 서명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2]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통도사 주지직을 여러 차례 연임했으나, 여성 문제, 선거 부정, 공금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 1925년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불교계에 복귀하여 총본산 건설 고문 등을 맡았고, 전시 체제 하에서 일본군 위문 등 전쟁 협력 행위에 가담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는 조선 불교 제3대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1965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가와 승려 생활
경상남도 울주군 출신이다. 갓난아기 때 절에 버려졌다는 설이 있으며, 경남 양산의 통도사에서 동승으로 지내다가 1884년 13세의 나이로 양산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한 상황에서, 김구하는 30개 주요 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다.[1] 조선 시대 동안 억압받았던 불교계는 불교에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일제의 통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주요 사찰 주지들이 조선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관계를 맺었다. 특히 김구하는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가깝게 지냈으며, 1916년 데라우치가 식민 통치의 공로로 원수 칭호를 받았을 때 수백 명의 승려를 동원해 축하 행사를 열기도 했다.
1917년에는 불교계의 대표 기구 격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제3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조선불교총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총독 정치 이후 조선의 승려들이 국가의 은혜를 입어 종교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8월, 김구하는 일본불교시찰단 단장 자격으로 약 3주간 일본 각지를 방문했다. 당시 일본 수상은 초대 조선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였기에, 시찰단은 수상 관저에서 그를 만나 선물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한 메이지 천황의 묘를 참배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하는 "천황의 권속인 우리들"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축문을 읽었다. 일본 방문을 마친 뒤에는 《매일신보》에 '천은(天恩)이 막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일본 천황의 행차를 목격한 감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당시 발달한 일본 문물을 접하고 느낀 단순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편, 김구하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3·1 운동 직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불교 승려들의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라는 문서에 '김취산'이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2] 이 시기 통도사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자금의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김구하가 사전에 사찰 내부와 상의 없이 자금을 사용했다가 나중에 공금 횡령 의혹이 제기되자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해명했기 때문이다.
김구하는 통도사 주지직을 다섯 차례 연임하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직도 2년간 연임하는 등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여러 여성 문제와 관련된 추문, 주지 연임을 위한 투표 조작 등 부정한 방법 사용, 공금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오랜 기간 사찰 내 분규와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조선총독부 학무과의 정식 조사를 거쳐 1925년 통도사 주지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되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한 가운데, 김구하는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다.[1] 그는 조선총독부와 관계를 맺었으며, 1917년에는 불교계의 대표 기구 격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3·1 운동 직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선언서에 가명으로 서명하고,[2]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상반된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김구하는 통도사 주지직을 다섯 차례 연임했으나, 여러 여성이 관련된 문제, 주지 연임을 위한 부정한 방법 사용, 공금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오랜 분규 끝에 1925년 주지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이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다시 불교계에서 활동하며 총본산 건설 고문, 경남3본산종무협회 고문,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종무 고문 등을 맡았고, 일본군 위문 등 전쟁 협력 행위에 가담했다.
2. 2. 1. 조선총독부와의 관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한 가운데, 김구하는 30대 본산 중 하나인 통도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1] 당시 조선 시대 동안 억압받았던 불교계는 불교에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일제의 통치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주요 사찰 주지들은 조선총독 관저를 방문하며 관계를 맺었다. 김구하 역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가깝게 지냈으며, 1916년 데라우치가 식민 통치의 공으로 원수 칭호를 받자 승려 수백 명을 동원하여 축하식을 열기도 했다.
1917년에는 불교계의 대표 기구 격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제3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구하는 《조선불교총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총독 정치 이후 조선의 승려들이 국가의 은혜를 입어 종교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8월, 김구하는 일본불교시찰단 단장 자격으로 약 3주간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 수상은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는데, 시찰단은 수상 관저에서 그를 만나 선물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한 메이지 천황의 묘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김구하는 "천황의 권속(眷屬)인 우리들"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축문을 읽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 〈천은(天恩)이 막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일본 천황의 행차를 목격한 감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당시 발달했던 일본 문명을 접하고 느낀 단순한 문화적 충격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편, 김구하는 3·1 운동 직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불교 승려들의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에 '김취산'이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사실이 있어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도 한다.[2]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김구하는 다시 불교계 활동에 나섰다. 31대본산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설 고문으로 선정되었고, 1939년에는 경남3본산종무협회 고문, 1941년에는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종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 시기 김구하는 일본군 위문과 같은 전쟁 협력 활동에 참여했다.
2. 2. 2. 독립운동 지원 논란
김구하는 3·1 운동 직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라는 불교 승려들의 문건에 '김취산'이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일이 있어,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2] 이 무렵 통도사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는 설도 있다. 자금의 용처가 불분명한 것은, 김구하가 이 일을 사전에 사찰 내부와 상의 없이 진행했고, 나중에 공금 횡령 의혹을 받자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출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2. 3. 통도사 주지 퇴임과 이후 활동
김구하는 통도사 주지직을 다섯 차례나 연임하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도 2년간 연임하는 등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여러 여성이 관련된 스캔들을 시작으로 주지 연임을 위해 찬성표를 조작하는 등 편법을 사용한 사실, 공금횡령 비리가 드러나 오랜 분규와 반발에 휩싸였다. 결국 조선총독부 학무과의 정식 조사를 거쳐 1925년 통도사 주지직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37년 31대본산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설 고문 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불교계에 등장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전시 체제 속에서 1939년 경남3본산종무협회 고문, 1941년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종무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일본군 위문 등의 전쟁협력 행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도 조선 불교 제3대 총무원장에 취임하여 불교계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94세로 사망했다.
3. 평가
3. 1. 친일 논란
김구하는 사후에 친일 승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김구하를 포함시켰다고 발표했다.[4] 그러나 통도사 측에서 이에 대해 이의를 신청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자,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초기 친일 인사로 분류할 수 있으나 당시 불교계의 특수한 상황과 더불어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1930년대부터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4] 이에 따라 김구하는 최종적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4]
3. 2. 이능화의 평가
이능화는 김구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3]
:영산의 아홉 줄기 강물도 성스러운 바다에 이르면 다 똑같은 맛을 내게 된다. 이미 절의 살림살이를 맡는 직책에 임하여 대중을 통솔하였으니, 도술에 통함이 없이도 사람들을 제도할 만하였다. 특히 이회광, 강대련, 김구하 세 스님은 그 행적을 말하건대, 교(敎)를 종(宗)으로 삼고 불사공덕(佛事功德)을 주(主)로 하였다.
참조
[1]
뉴스
근대 통도사의 변화와 구하스님의 활동 (4)
http://www.tongdosa.[...]
등불
2005-08-01
[2]
뉴스
근대 통도사의 변화와 구하스님의 활동 (5)
http://www.tongdosa.[...]
등불
2005-09-01
[3]
뉴스
근대 통도사의 변화와 구하스님의 활동 (6)
http://www.tongdosa.[...]
등불
2005-10-01
[4]
뉴스
구하스님,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서 제외
http://www.bulgyofoc[...]
불교포커스
20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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