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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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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정자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첩보원 및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 김해 출생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기생 생활을 거쳐 승려가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안경수, 김옥균 등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와 인연을 맺고 그의 수양딸이 되어 첩보원 교육을 받았다. 1894년 스파이 임무를 띠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접근, 정보를 빼내는 등 밀정으로 활동했으며,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의 평양 천도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현영운과의 결혼과 이혼 후, 이토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1909년 이토 사후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헌병대 촉탁,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 첩보 활동을 벌였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출옥했으며, 한국 전쟁 중 사망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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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배정자의 모습
이름배정자
원래 이름裵貞子
출생일1870년 2월 23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김해 (現 경상남도 김해시)
사망지서울특별시에서 저혈압 증세로 병사
사망일1952년 2월 27일
학력일본 도쿄 소쓰나(尙綱) 여자중학교 중퇴
국가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직책만저우 지방 펑톈 성 펑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촉탁위원
정당무소속
군주요시히토 (일본 군주)
섭정히로히토 (일본 왕태자)
대통령쉬스창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총통)
종교불교
배우자전재식(사별), 현영운(이혼), 박영철(3혼)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경기도 시흥군
자녀현송자(딸) 외
부모아버지 배지홍(裵祉洪)
형제오빠 1명, 남동생 1명
친인척배구자(조카딸)
이철(사위)
이영호(외손자)
김성흠(조카사위)
추가 정보
한자 표기裵貞子
참고 자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이토 히로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 하리' 오마이뉴스

2. 생애

경상남도 김해에서 본명 배분남(裵粉男)으로 태어났다.[3][4] 1870년 아전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으나,[3] 1873년 아버지가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 사형당했다.[3] 어머니는 충격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연좌제로 천민이 되어 어머니와 각지를 유랑했다.[3][4]

밀양에서 기생이 되었다가 도주, 양산군 통도사로 은신했다.[3] 1882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12살 때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3년간 수도 생활을 했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수배되자 14살 때 도망쳤다.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의 도일로 헤어졌다. 이후 전재식이 일본 유학을 오면서 재회하여 결혼,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낳았다. 그러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재학 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했다.[3]

1885년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의 주선으로 무역상 마쓰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5], 안경수를 만났다. 갑신정변과 관련 없던 안경수는 오카야마(岡山縣) 이토 히로부미 집 사랑채에서 방적(직조 기술) 자비 유학 중이었고 배정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배정자는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안경수의 주선으로 김옥균, 이토 히로부미와 만났다. 1887년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었다.

1894년 사다코(貞子)로 개명, 일본에서 정보원 교육을 받은 뒤 귀국, 고종에게 접근하여 정치 정보를 빼내는 고급 밀정으로 활동했다. 러일전쟁 직전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 계획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여 무산시켰다.[3]

1895년 현영운(玄暎運)[6]과 재혼했으나 1년 후 이혼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다가 절영도에 유배되었으나,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자 복귀했다.[7]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본군 헌병대 조선인 촉탁, 일본 제국 외무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했다. 1918년~1919년 만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1920년 조선총독부 첩보 단체 만주보민회에서 활동했고,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때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다.

간도,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장서다가 1922년 귀국,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근무했다.[3] 1927년 은퇴 후에도 총독부로부터 토지와 월급을 받았다.[3]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민간업자 부탁으로 일본군 위안부 송출에 관여했다. 70대 고령에도 '군인위문대' 명목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남양 군도로 데려가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 금품을 받았다.[3]

광복 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야산에 숨어 살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반민족행위처벌법 발효,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구속되었다. 반민법 제1조에 의해 최초로 구속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정치적 이유로 해산되면서 출옥하였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여생을 보내다 한국 전쟁 중 사망했다.

2. 1. 생애 초반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배분남(裵粉男)이다.[3][4]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으나,[3] 1873년 아버지 배지홍은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3] 어머니는 충격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이후 연좌제에 의해 죄적(罪籍)에 올라 천민이 되어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머니를 따라 각지를 유랑하였다.[3][4]

경상남도 밀양기생으로 팔려갔으나, 도주하여 양산군 통도사로 은신하였다.[3] 1882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12살 때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여승으로 활동하며 3년간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수배되자 14살 때 도망쳤다.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후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하여 결혼하였고,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재학 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3]

1885년 밀양부사로 전임한 정병하(鄭秉夏)의 주선으로 무역상 마쓰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5], 이때 인맥을 통해 안경수를 만나게 되었다. 갑신정변과 직접 관련이 없었던 안경수는 오카야마(岡山縣) 이토 히로부미 집 사랑채에 식솔로 머물면서 방적(직조 기술)에 관한 자비 유학 중이었고 배정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배정자는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안경수의 주선으로 김옥균을 만나 알게 되었고[3] 이토 히로부미와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안경수, 김옥균 등에게 의탁하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1887년 그의 수양딸이 되었다.

2. 1. 1. 불우한 초년기

경상남도 김해 출생으로, 본명은 배분남(裵粉男)이다.[3][4]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3] 아버지 배지홍은 세무 관리를 역임했으나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가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3] 어머니는 충격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어 배정자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3][4] 이후 연좌제에 의해 죄적(罪籍)에 올라 천민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후 경상남도 밀양기생으로 팔려갔으나, 도주하여 양산군 통도사로 은신하였다.[3] 1882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2살 때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여승으로 활동하며 3년간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수배되자 14살 때 도망쳐서, 아버지와 친분 관계가 있던 동래 부사 정병화(鄭秉和)의 보호를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4] 역대 동래부사 중 정병화라는 이름은 없으며 비슷한 이로 정병하(鄭秉夏)가 있지만 그는 동래부사를 역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지방 관리직은 1888년 밀양부사가 처음이다.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재학 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3]

2. 1. 2. 일본으로 건너가다

1885년 밀양부사로 전임한 정병하(鄭秉夏)의 주선으로 무역상 마쓰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는데[5], 이때 인맥을 통해 안경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갑신정변과 직접 관련이 없었던 안경수는 오카야마(岡山縣) 이토 히로부미 집 사랑채에 식솔로 머물면서 방적(직조 기술)에 관한 자비 유학 중이었고 배정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배정자는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안경수의 주선으로 김옥균을 만나 알게 되었고[3] 이토 히로부미와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안경수, 김옥균 등에게 의탁하다가 미모가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1887년 그의 수양딸이 되었고, 18살 때부터 승마와 수영, 사격, 변장술 등 간첩으로서의 밀봉 교육을 받았다는 설이 있지만 일본 쪽 사료에서는 배정자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없다.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에 대한 관계 및 일화는 전부 한국 쪽에서만 나오는 얘기들이다.

2. 2. 일본 첩보원 및 관리 활동

1894년 사다코(貞子)로 개명하고 일본에서 정보원 교육을 받은 뒤 귀국, 고종에게 접근하여 정치 정보를 빼내는 고급 밀정으로 활동했다. 러일전쟁 직전에는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 계획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여 무산시켰다.[3]

1895년 현영운(玄暎運)[6]과 재혼했으나 1년 후 이혼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다가 절영도에 유배되었으나,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자 복귀했다.[7]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본군 헌병대 조선인 촉탁, 일본 제국 외무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했다. 1918년~1919년 만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192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첩보 단체 만주보민회에서 활동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다.

이후 간도,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장서다가 1922년 귀국하여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근무했다.[3] 1927년 은퇴 후에도 총독부로부터 토지와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다.[3]

2. 2. 1. 첩보원 활동

1894년 사다코(貞子)로 개명하고 철저한 정보원 교육을 받은 뒤, 스파이 임무를 띠고 일본어 통역 명목으로 귀국하여 신분을 숨기고 고종에게 접근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이후 정치 정보를 빼내는 등 고급 밀정으로 활동했다.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가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遷都)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 계획을 세웠으나 배정자가 정보를 사전에 빼내어 일본 공사관에 전달함으로써 실패한다.[3]

1895년 일본 제국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暎運)[6]과 재혼했다.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 겸 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종2품 육군 참장으로 승진하고, 농공상부 협판을 지냈다.[3] 그러나 배정자는 약 1년 후 이혼하였으며, 현영운에게서 딸 현송자를 얻었다. 그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朴榮喆. 일본육사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역임)과 5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하다 또 이혼하였다.[3]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기도 했다.[7]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가 초대 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자 풀려나 다시 밀정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토의 양녀가 아닌 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기에 이 시기에 막강한 권력자로 행세하였고,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2. 2.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 생활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배정자는 조선 주둔 일본군 헌병대 조선인 촉탁, 일본 제국 외무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했다. 1918년 10월부터 1919년 10월 29일까지 만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직원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에는 조선총독부만주 지역에 설립한 첩보 단체 만주보민회에 가입했다. 같은 해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봉천(奉天) 일본 제국 총영사관 직원으로서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고, 이 기간 중 마적단(馬賊團) 단원 포섭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이후 간도,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암약하다가 1922년 국내로 돌아와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근무했다. 만주 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 대상자로 지목하자,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3]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는 배정자의 귀국을 기다려 경무국 공무원으로 다시 고용하였다.[3]

그 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의 지령을 받아 만주, 간도, 상하이, 중국 본토 등을 오가며 활동했다. 당대 친일파 및 일본인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박희광(대한통의부 비밀암살단)의 암살 시도로 위협을 느끼다 1927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배정자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백여 평의 토지를 증여받고, 월급도 받으며 지냈다.[3]

2. 2. 3. 태평양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배정자는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송출 업무에 관여하였다. 배정자는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군인위문대'라는 명목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남양 군도로 데려가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배정자는 업자로부터 금품을 받기도 했다.[3]

2. 3. 광복 이후

광복 이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는 야산에 숨어 살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발효되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자 특위에 의해 1949년 배정자도 체포, 구속되었다. 반민법에 따라 구속된 여성은 모두 6명에 불과했는데, 배정자는 이들 중 가장 먼저 구속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와 모의하여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한 자를 처벌하는 반민법 제1조에 의해 최초로 구속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정치적 이유로 해산되면서 출옥하였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한국 전쟁 중 성북에서 사망했다.

3.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밀정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해외 부문에 선정했다.

정식 직책이 아닌 막후의 밀정으로 활동했기에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화려한 남성 편력과 극적인 삶으로 인해 《요화 배정자》(1966), 《요화 배정자 2》(1973)로 영화화되는 등 대중 매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이 두 영화에서는 김지미윤정희가 각각 배정자 역을 맡았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남편현영운
현송자
첫째 사위윤치오 (1934년 이혼)
둘째 사위이철 (1944년 사망)
외손자이영호
외손녀이씨 (이름 미상)


5. 인간 관계

그녀는 생전 이토 히로부미를 사부(師父)이자 주군(主君)으로 섬겼으며, 사저(師姐)의 입장으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을 사제(師弟)로 삼았다.

6. 배정자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일반텍스트
[2] 서적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3] 뉴스 이토 히로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 하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3-24
[4]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5] 웹사이트 정병하가 밀양부사로 부임한 때는 1888년이다 http://encykorea.aks[...]
[6] 일반텍스트
[7] 일반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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