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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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복한은 1894년 갑오개혁에 반발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한 인물로, 이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하고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 청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발송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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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안동 김씨 |
자 | 경수(景叟) |
호 | 규당(葵堂) |
생애 | |
출생 | 1831년 1월 24일 |
사망 | 1907년 10월 14일 (향년 76세)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
관력 | |
주요 관직 | 대사헌 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지경연사 예문관제학 홍문관제학 의정부찬성 판돈녕부사 중추원의관 |
봉작 | 자작 |
시호 | 문충(文忠)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흥근 |
어머니 | 청송 심씨, 심능건의 딸 |
배우자 | 양천 허씨, 허겸의 딸 |
아들 | 김석진 |
손자 | 김영수 |
기타 | |
신분 | 조선의 문신, 정치인, 외교관, 개화운동가 |
2. 생애
김복한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러 차례 항일 의병 운동과 독립 청원 운동을 주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한 후,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하여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목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896년에 석방되었으나, 이후에도 대사성 등의 관직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5]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고, 이설, 안병찬, 민종식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군의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다.[5] 1906년에는 민종식과 함께 충청도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재판 중에도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며 굴하지 않았다.[5]
1910년 국권 피탈 후에는 두문불출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영호남 유림을 규합하여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다시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사립학원인 인지사(仁智社)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5]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충청남도 홍성에 위치한 사당 추양사(秋陽祠)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김복한은 충청남도 홍성군 조휘곡[2]에서 안동 김씨 김봉진과 연안 이씨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혔다. 김상용의 12대 종손으로 당색은 노론이었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는데, 6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친 또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는 돌봐주던 조부마저 세상을 떠나 종조부 김민근에게 거두어져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3]음서로 관직을 시작하여 참봉을 지내고 순종이 왕세자 시절 서연관으로 일했으며, 1892년 별시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후 홍문관, 사간원, 성균관, 승정원에서 근무했다. 그 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대사성, 승지 등을 역임했다.[5]
2. 2. 항일 의병 운동
1894년 갑오개혁에 반발하여 관직에서 사임하고 낙향했는데,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떨어지자 비분강개한 유생들을 모아 충청남도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종사촌 형인 이설과 안병찬 등이 함께 참가했다.[5] 그러나 처음에는 같이 거사하기로 했던 홍주목사 이승우가 마음을 바꿔, 김복한 등이 체포되면서 의병 항쟁은 실패했다. 그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5]1896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된 뒤, 성균관장·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키우는 데 힘썼다.[5]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설 등과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였고,[5] 다시 이설, 안병찬,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재차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일본군에게 고문을 당하여 불구가 되었다. 1905년 다시 투옥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었다.[5]
1906년 참판 민종식과 함께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재판 중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을사5적의 처단 요구를 반복하였다.[5]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두문불출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 때에는 영호남 유림을 규합하여,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사립학원인 인지사(仁智社)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5]
2. 3. 독립청원운동과 최후
1894년 갑오개혁에 반발하여 관직에서 사임한 뒤 낙향했는데,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떨어지자 비분강개한 유생들을 모아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종사촌 형인 이설과 안병찬 등이 함께 참가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같이 거사하기로 했던 홍주목사 이승우가 마음을 바꿔, 김복한 등이 체포되면서 의병 항쟁은 실패했다. 그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5]1896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된 뒤, 성균관장·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키우는 데 힘썼다.[5]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설 등과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였고, 또다시 이설, 안병찬,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재차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일본군에게 고문을 당하여 불구가 되었다. 1905년 다시 투옥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었다.
1906년 참판 민종식과 함께 충청도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재판 중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을사5적의 처단 요구를 반복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두문불출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 때에는 영호남 유림을 규합하여, 유림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사립학원인 인지사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5]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김봉진(金鳳鎭) |
어머니 | 연안 이씨 |
아들 | 김명동 |
참조
[1]
웹사이트
근현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
http://gongju.grandc[...]
2023-09-27
[2]
문서
공주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3]
웹사이트
김복한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4]
문서
공주군(公州郡)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5]
웹사이트
김복한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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