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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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은숙(1958년)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번역가, 사회운동가이다. 1958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으며, 고신대학교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소 후 노동운동, 야학 운영, 소설 및 번역 활동을 펼쳤으며, 1993년 소설가로 등단하여 장편소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 등을 발표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지역아동센터 대표교사로 활동했으며, 2011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2011년 민주화 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제5회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1958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김은숙은 1977년 고신대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 보수적인 신앙 배경을 가졌지만, 사회 참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복역 중 1983년 5년으로 감형되어 4년 8개월을 복역하고 1986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으며,[2] 1988년 12월 21일부로 법적으로 사면 복권되었다.
김은숙은 1958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으며, 1977년 고신대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 부모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고신교단 교회 중진이었지만, 김은숙은 신학의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삼촌 김정준 박사가 학장으로 있던 한국신학대학으로 편입을 고려했으나, 고신대에 남아 사회 참여 운동을 이어갔다.
다나베 다모쓰가 저술하고 김은숙이 번역하여 1991년 도도 출판사에서 출간한 Simone Weil, la pureté absolue|시몬느 베이유, 완전한 순수프랑스어가 있다.[1]
2. 생애
출소 후 마산과 서울에서 노동 운동과 야학 운영에 참여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1993년 등단 이후, 1995년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지역 아동 센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2010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2011년 5월 24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하던 해 5월, 민주화 운동 및 야학과 노동자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한 공로로 '제5회 오월 어머니상'을 받았다.[5] 천주교 영세명은 에스더였으나, 개신교 고신 교단의 전도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별세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개신교회를 출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58년 ~ 1982년)
1958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부모의 고향인 부산에서 성장했고, 1977년 고신대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1] 부모는 전통적 보수신앙 집안이었고 고신교단 교회의 중진들이었으나, 김은숙은 보수 교단으로 알려진 고신대의 신학생이었지만 신학의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삼촌인 김정준 박사가 학장으로 있었던 진보적 신학의 중심으로 알려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고신대에서 사회참여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고신대를 1년 휴학할 때는 사회경험과 학비를 위해 금호고속버스의 안내양으로 몇 달 일하기도 했다.[1]
1980년 대학 3학년에 다니면서 영도구 봉래성당 밀알야학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1]
2. 2.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2년)
1982년 3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묵인하고 비호했던 미국에 대한 항의로, 고신대 4학년 재학 중 문부식 및 동료, 후배들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켜 구속되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 3심에서 10년 형이 확정되어 경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1] 재판 과정에서 황인철, 홍성우, 이돈명, 이순백, 유봉묵, 조성래, 이흥호, 노무현, 정차두, 김광일 등 인권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았으며, 이들 중 상당수와 훗날까지 교류하였다.
문부식과는 1977년 고신대 입학 후 같은 과 친구 소개로 처음 만났으나, 당시에는 사귀지 않았다. 1980년 김은숙이 1학년을 마치고 휴학 후 3학년에 복학하여 영도구 봉래성당 밀알야학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중 문부식과 다시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방화 이후 두 사람은 각각 군 입대 및 노동 현장에 투신할 계획이었으나, 3월 20일 서정화 당시 내무부 장관의 강경한 담화 발표로 인해 도피를 결정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지학순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3월 20일 밤차를 타고 3월 21일 원주에 도착했으나, 지학순 주교가 해외 출장 중이어서 원주교육원의 최기식 신부를 찾아갔다. 1982년 4월 1일, 자수하기 두 시간 전 문부식과 결혼식을 대신한 예식을 올렸다.[1] 수감 중에는 옥중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출소 후 여러 이유로 헤어졌다.
재판 과정에서 리영희 교수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하여, 리영희 교수가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기도 했다. 김은숙은 출소 후 리영희 교수의 자택에서 거주하며 그의 집필 활동을 돕기도 했다.
2. 3. 복역과 가석방 (1982년 ~ 1986년)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3심에서 10년 형이 확정되어 경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1] 1983년 5년으로 감형되었고, 4년 8개월 복역 후 1986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다.[2] 1988년 12월 21일에 사면 복권되었다.
2. 4. 출소 후 활동 (1986년 ~ 2011년)
1986년 8월 15일 가석방된 후,[2] 곧바로 마산으로 가 마산 창원지역 노동자 외곽조직에서 교육사업을 1년 간 하였다. 이후 서울로 와 구로지역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리영희 교수의 집에서 거주하며 그의 집필작업을 돕기도 했다. 소설가의 뜻을 품고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해서 '백리를 가는 꽃향기'라는 뜻의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저작활동을 했다.
1993년 계간지 <노둣돌>에 중편소설 <갇힌 자의 순례 1-인영의 하루>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번역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펼쳐보는 이슬람〉, 〈밥 딜런 평전〉, 〈흑색수배〉, 〈아프리카 소녀 나모〉, 〈꿈길의 요술램프〉 등 20여 편의 번역서를 냈다. 결혼 후 이혼하고 두 딸을 홀로 키웠다.[3] 이혼 후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하여 2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소설 집필과 번역 활동을 했다.
1995년에 첫 장편소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를 발표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의 권유로 평화시장 주변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종로구 창신동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대표교사로 지냈다.[1] 대표교사 재직 중 전 학생들을 데리고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실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2. 5. 투병과 사망 (2010년 ~ 2011년)
2010년 9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여러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했으며, 오랜 친분이 있었던 임수경은 그 사실을 트위터로 알리고 후원 모금을 시작했다.[4] 2011년 4월 6일 병원 로비에서 ‘김은숙과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 - 김은숙에게 사랑과 희망을’이 열렸다.[4] 고은 시인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김은숙을 비유한 '숨은 꽃'이라는 자작시 낭독으로 김은숙의 회복을 기원했다. 2011년 5월 24일 아침 7시 50분경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성남 삼성공원묘역에 묻혔다. 그가 출석하던 교회, 소설가 조성기 목사가 이끄는 산울교회의 교인들과 많은 조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김현장(金鉉奬)과 임수경 등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5]
3. 사상과 신념
1982년 3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묵인하고 비호한 미국에 항의하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하여 구속되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황인철, 홍성우, 노무현 등 인권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았고, 이들 중 다수와 훗날까지 교류했다.
1983년 5년으로 감형, 1986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고,[2] 1988년 12월 21일 사면 복권되었다. 출소 후 마산 창원지역 노동자 조직에서 교육 사업을, 서울에서는 구로지역 노동 야학을 운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하여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영세명 에스더로 영세를 받았으나, 개신교 전도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족과 함께 개신교회를 다녔다.[5]
4. 저서 및 번역
4. 1. 저서
5. 수상 내역
2011년 제5회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하였다.[1]
참조
[1]
웹인용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김은숙을 추모하며
http://www.newscham.[...]
참세상
2012-05-09
[2]
웹인용
시사요리사 '찜' 김은숙과 광주, 그리고 '미국'
https://www.youtube.[...]
하니TV
2012-05-04
[3]
뉴스
5년8개월 감옥 살고 어디 간 줄 알아요?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5-04
[4]
웹인용
민족과 타인 위했던 우리의 에스더, 김은숙
http://www.nahnews.n[...]
가톨릭뉴스
2012-05-04
[5]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s://web.archive.[...]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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