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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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제는 흉노 휴저왕의 아들로, 한나라 무제 시대에 투항하여 벼슬에 오른 인물이다. 곽거병의 흉노 정벌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들어왔으며, 무제의 눈에 띄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를 거쳐 거기장군에 이르렀다. 무제 사후 소제를 보좌하다 기원전 8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경후의 시호를 받았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후한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신라 김씨 왕족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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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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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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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일제 |
한자 표기 | 金日磾 |
로마자 표기 | Gim Il-je |
자 (字) | 옹숙(翁叔) |
작위 | 투정후(秺亭侯) |
시호 | 경후(敬侯) |
출생 | 기원전 134년 |
출생지 | 흉노 휴저(休屠) |
사망 | 기원전 86년 음력 8월 |
사망지 | 전한 장안현 |
사망 원인 | 병사 |
거주지 | 흉노 휴저 → 전한 무위군 → 전한 장안 |
국적 | 흉노, 전한 |
가족 | 아버지: 휴저왕 어머니: 연지 부인 아들: 김상, 김건 |
경력 | |
직업 | 군인, 정치가 |
주요 활동 | 전한의 신하 한무제 모시기 |
기타 | |
관련 인물 | 한무제, 곽광 |
2. 생애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흉노 왕족 출신으로 태어났다.[8] 그는 흉노 휴도왕의 후계자였으며, 휴도왕은 흉노의 최고 통치자인 군신 선우 밑의 주요 왕 중 한 명이었다. 기원전 121년, 한 무제는 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곽거병은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금 동상을 포획했다.[9] 이치사 선우는 이에 분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을 처형하려 했다. 두려움을 느낀 두 왕은 한나라에 투항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제가 곽거병을 보내 항복을 받으려 하자 휴도왕은 마음을 바꿔 투항을 거부했다. 결국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자신의 영토와 함께 한나라에 항복했다.
휴도왕이 살해되면서 그의 아들 김일제는 어머니, 형제와 함께 황실 노예가 되었다. 김일제는 황실 마구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황제가 연회에서 말을 검사하도록 명령했을 때, 김일제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황제의 후궁들을 쳐다보지 않고 말에만 집중했다. 황제는 김일제의 품행, 큰 키, 그리고 김일제가 돌보는 말들이 건강하고 튼튼한지에 감명을 받았다. 같은 날, 그는 김일제에게 옷을 하사하고 황실 마구간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그 이후 김일제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10] 황제는 휴도왕이 금으로 된 조각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기억하며, 김일제에게 "금(金)"이라는 성을 하사했다.[11][12]
기원전 91년 강충·유거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기원전 88년 마하라는 한무제를 암살하려 했으나, 김일제가 이를 저지했다. 김일제는 칼을 들고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려는 마하라를 붙잡아 다른 황실 경비병들이 마하라를 결박할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는 병세가 위중하여 막내 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세웠다. 그는 곽거병의 동생인 곽광을 섭정으로 지명하려 했으나, 곽광은 김일제가 더 유능하다며 사양했다. 김일제는 자신이 흉노 출신이기에 다른 관리들과 흉노가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무제는 곽광을 주요 섭정으로, 김일제와 상관걸을 부섭정으로 지명하고 곧 죽었다. 유불릉은 한 소제로서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86년 가을, 김일제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곽광은 소제와 상의한 후, 소제의 재가를 받아 김일제를 독후후에 봉했다. 김일제는 다음 날 사망하여 무제의 묘 근처에 묻혔다. 그의 가족은 서한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총 7대에 걸쳐 황실의 시종으로 계속 복무했다.
2. 1. 젊은 시절
김일제는 흉노 휴저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원전 150년경, 아버지 휴저왕이 전한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자, 이치사 선우는 휴저왕을 소환하여 처형하려 했다. 이에 휴저왕은 혼야왕과 함께 전한에 투항하려 했으나, 혼야왕은 휴저왕을 죽이고 투항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제는 어머니, 형제와 함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졌다.[8]기원전 121년, 한 무제는 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곽거병은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금 동상을 포획했다.[9] 이 일로 휴저왕과 혼야왕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한나라에 투항하려 했으나, 휴저왕이 마음을 바꾸면서 혼야왕에게 살해되었다.
휴도왕이 살해된 후, 김일제는 어머니, 형제와 함께 황실 노예가 되었고, 황실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 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여 휴저왕의 황금 조각상을 손에 넣었다. 같은 해 가을, 혼야왕은 휴저왕을 죽이고 4만 명의 흉노와 함께 투항했다. 이때 14세였던 김일제와 그 가족은 관노가 되었고, 김일제는 말 지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제는 김일제의 훌륭한 풍채와 위엄 있는 용모를 보고 마감을 삼았다.[19] 이후 김일제는 총명함을 인정받아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고, 무제의 측근 신하가 되었다.
무제는 김일제에게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했는데, 이는 휴저왕의 황금 조각상(금인[20])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일제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며 매일 울면서 기도하고 묵념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2. 2. 중국 포로 생활
기원전 121년, 한 무제는 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곽거병은 이 작전에서 흉노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금 동상을 포획했다.[9] 흉노의 왕 이치사 선우는 이에 분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을 처형하려 했다. 두려움을 느낀 두 왕은 한나라에 투항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제가 곽거병을 보내 항복을 받으려 하자 휴도왕은 마음을 바꿔 투항을 거부했다. 결국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자신의 영토와 함께 한나라에 항복했다.휴도왕이 살해되면서 그의 아들 김일제는 어머니, 형제와 함께 황실 노예가 되었다. 김일제는 황실 마구간에서 일하게 되었다.[8]
같은 해 봄, 표기장군 곽거병은 1만 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여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황금 조각상을 획득했다. 가을에는 휴저왕과 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하려 했으나, 휴저왕이 변심하자 혼야왕이 그를 죽이고 4만 명의 흉노와 휴저왕의 태자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이때 14세였던 휴저왕의 태자 김일제와 그 가족은 관노가 되었다.
2. 3. 김씨성 사성
김일제는 망하라 등의 한무제 암살 시도를 막은 공로로 거기장군이 되었고,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11][12] 김(金)은 황금을 뜻하는데, 휴저왕이 금인(金人)으로 천주(天主)에 제사 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여 성씨로 삼았다.[20]2. 4. 최후
소제 즉위 후, 곽광은 소제와 의논하여 김일제에게 열후(저후) 작위를 내렸으나, 김일제는 인수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죽었다.[31] 시호는 경후(敬侯)이며, 무제의 능묘인 무릉 근처에 묻혔다.[31]김일제의 작위는 아들 김상이 이었으나, 김상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이후 김일제의 증손 김당이 다시 투후에 봉해졌다.
김일제의 무덤은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로서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오늘날 중국 감숙성 흥평현(兴平县) 남귀향 도상촌에 있다.[31]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3. 사후
기원전 86년 가을, 김일제는 병이 깊어져 곽광의 주선으로 소제에게서 독후후에 봉해졌으나 다음 날 사망하여 무제의 묘 근처에 묻혔다. 그의 가족은 서한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7대에 걸쳐 황실의 시종으로 복무했다.[15] 김일제의 묘는 곽거병의 묘 옆, 한 무제의 마오링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15]
김일제의 자손들은 신나라 때 왕망의 외가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으나, 후한 광무제가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중국 산둥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祠堂)인 투후사(秺侯祠)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대대로 벼슬하여 후한 때까지 가문이 이어져, 김선과 김의 등을 배출하였다. 열후는 아들 김상이 계승했다. 김상 및 동생 김건은 소제와 나이가 비슷했고, 소제와 함께 잠자고 일어났다. 또한, 김일제의 동생 김륜은 황문랑이 되었지만 요절했고, 김륜의 아들인 김안상 이후에 번성했다. 후한 말의 김선·김의 부자는 김일제의 후손이다[21]。
1954년에 산시성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나 신라문무왕릉비나 신라의 각종 금석문 등에는, 신라 왕가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학자들 중에는, 적석목곽분의 부장품과 흉노계와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신라 왕가의 흉노 도래설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22][23][24][25][26]。이에 대해, 한국의 공영방송KBS가 다큐멘터리를 보도하기도 했다[27][28][29]。
4.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32]'(5행),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7세기 후반 들어 형성된 신라 김씨의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이지 실제로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33][34]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35]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 다큐멘터리나 재야사학자들은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선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헌 기록 외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및 부장품이 일부 북방민족 계통과 유사하다는 사실도 증거로 거론된다.[36][37]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 성과의 누적을 통해 돌무지덧널무덤과 부장품의 발전 단계가 모두 밝혀지면서 4세기 신라 묘제의 북방민족 유래설도 역사학계 및 고고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38]
1954년 산시성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나 신라 문무왕릉비나 신라의 각종 금석문 등에는, 신라 왕가는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학자들 중에는, 적석목곽분의 부장품과 흉노계와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신라 왕가의 흉노 도래설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22][23][24][25][26]이에 대해, 한국의 공영방송KBS가 다큐멘터리를 보도하기도 했다.[27][28][29]
5. 가족 관계
김일제는 휴저왕의 아들로, 김상, 김건, 김륜, 김안상과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상의 아들은 김당이다.[10] 김일제의 후손으로는 후한 시대의 김상과 김선이 있다.[21]
김일제의 두 아들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장남은 궁녀와 부적절한 행동을 하여 김일제에게 살해당했다.[10] 김상과 김건 형제는 소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1] 김일제의 동생 김륜은 요절했지만, 그의 아들 김안상을 통해 가문이 번성했다.[21]
1954년 산시성에서 발견된 大唐故金氏夫人墓銘중국어과 신라 문무왕릉비를 비롯한 각종 금석문에는 신라 왕가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2][23][24][25][26]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적석목곽분의 부장품과 흉노 유물 간의 유사성을 근거로 신라 왕족의 흉노 도래설을 제기하기도 한다.[22][23][24][25][26] KBS는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했다.[27][28][29]
6. 세계도(世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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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仮リンク|張晏 (後漢)|label=張晏|zh|張晏}}注釈では「佛徒祠金人也」(金人とは西域から得た仏像のこと)と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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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濯板として使われてきた新羅文武王陵碑の上部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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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금관의 나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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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천왕사(寺)사천왕상(四天王像)왜 4개가 아니라 3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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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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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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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돋보기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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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屠) 자의 발음은 저(儲)로 읽는다"(屠音儲), 한서(漢書) 안사고주(顏師古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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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11일, 흥평현 인민정부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선정된 무릉배장묘인 김일제묘 앞에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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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秺侯祭天之胤傳七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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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해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을 발견한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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