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하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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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준하는 1930년 강원도 철원군 출생으로, 언론인, 정치인,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3년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3.15 부정선거를 취재 보도했다. 이후 민주당 강원도 철원군지구당 위원장, 윤보선 대통령 공보담당 비서관 및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는 우풍화학, 동부고속 등 기업의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며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강원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삼동그룹 회장, 대한지적공사 감사 등을 지냈다. 2002년에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2014년 서울언론인클럽 원로 언론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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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하 (1930년) | |
|---|---|
| 기본 정보 | |
| 출생일 | 1930년 |
| 사망일 | 2018년 4월 22일 |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 배우자 | 김정례 |
| 자녀 | 2남 2녀 |
| 학력 | |
| 학력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
| 경력 | |
| 경력 | 외무부 근무 주이탈리아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외무부 아주국장 외무부 차관보 주유엔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 제13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외교안보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 한일의원연맹 간사 한일협력위원회 위원 제14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 국제담당 특보위원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위원장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한일협력위원회 위원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김대중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 |
| 수상 | |
| 수상 |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
| 기타 | |
| 출생지 | 경상북도 선산군 (현 구미시) |
2. 생애
김준하는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 윤보선 대통령 공보비서관, 민주당 및 민정당 간부, 김진만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우풍화학 사장, 동부그룹 계열사 사장, 강원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 윤보선 대통령 공보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1963년에는 민정당에 참여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의 공보보좌역을 맡았으며, 당내에서 선전부 차장, 공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범국민위원회에 참가, 굴욕외교반대투쟁위 선전위원회 부의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1973년부터는 김진만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우풍화학, 동부그룹 계열사, 강원일보 등에서 사장 및 임원을 역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수학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1970년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하였다. 1953년 고려대학교 정외과 재학 중에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수습기자가 되었고, 1954년부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다.[1]2. 2. 언론인 활동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하였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철원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8]2. 2. 1. 동아일보 기자 시절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1953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수습기자가 되었다.[8] 1954년부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사병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국군 담요 수만여 장이 사라진 것을 취재하여 폭로하였다.[8]1960년 3.15 부정선거를 취재 및 보도하였고, 3.15 부정선거 지령문을 입수하여 보도했다.[8] 이 때문에 전라북도 김제시, 옥구, 군산시 일대로 피신하여 낚시 등으로 소일하다가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동아일보 기자로 복귀, 2호봉 특진하였다.[8]
2. 3. 정치 활동
1960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해 11월 27일 민주당 강원도 철원군지구당 준비대회에서 강원도 철원군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다.[2]1960년 9월 윤보선 대통령 공보담당 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다. 1963년 3월 22일 서울 종로구 백조그릴호텔에서 열린 3.22 민주구국선언식에 참여하였다.
1963년 민정당에 참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의 공보보좌역을 맡았다. 이후 민정당 선전부 차장, 공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범국민위원회에 참가, 굴욕외교반대투쟁위 선전위원회 부의장에 선임됐다.[9] 1965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탈당했다.
1966년 동양통신에 입사하여 심사부장과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1970년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1971년 귀국 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강사로 출강했다. 1973년 김진만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이 되었다.
2. 3. 1. 민주당 활동
1960년 11월 27일 민주당 강원도 철원군 지구당 준비대회에서 강원도 철원군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2. 3. 2. 윤보선 정부 시절
1960년 9월 윤보선 대통령 공보담당 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다.[2] 1960년 10월 8일 대통령 자문회의가 구성되자 자문회의 간사직을 겸임하였다.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윤승구 비서관, 김남 비서관 등 다른 청와대 비서관들과 함께 국군의 각 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동태를 파악하고 되돌아왔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자 다른 비서관들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군사정권은 공무원 복무규정을 들어 처벌하겠다며 비서관 전원의 사직서를 반려하였다. 이후 윤보선 정권의 비리를 수사한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의 비리혐의를 찾을 수 없자 사직서를 수리하였다.[3]
1962년 4월 17일 청와대 비서관에서 의원면직되었다.[3] 윤보선이 청와대를 떠난 후에도 청와대에 남아 윤보선의 제의로 그의 비서로 계속 활동했다. 1964년 1월 4일 당시에는 윤보선의 공보비서로 재직 중이었다.[4]
2002년 그는 5·16 군사 정변에 대해 왜곡 조작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회고록을 펴냈다고 밝혔다.[1] 그는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에 협력했다는 설에 대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반박하였다.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준하는 “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고 증언했다.[1] 또한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고 하였다.[1] 그는 5·16을 쿠데타로 정의하였다.[22]
2. 3. 3. 야당 활동
1960년 11월 27일 민주당 강원도 철원군 지구당 주비대회에서 강원도 철원군 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다.[2] 1963년 5월 20일 민정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5]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윤보선 대통령 후보자 공보보좌역으로 활동했다. 그해 11월 4일 민정당 선전부 차장이 되었으며,[6][7] 12월 30일 민정당 공보부장이 되었다.[8] 19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범국민위원회에 참가, 굴욕외교반대투쟁위 선전위원회 부의장에 선임됐다.[9]1964년 야당 민정당과 자민당의 합당 논의 때 민정당 측 대표로 협상에 참여, 자민당 측과 교섭했다.[10] 1965년 3월 5일 민정당 중앙위원회에서 원외 상무위원을 선임할 때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11] 이후 민중당에 입당했으나, 1965년 8월 21일 윤보선의 비서관 출신 김남 등과 함께 민중당을 탈당했다.[12][13]
2. 3. 4. 김진만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1973년 3월 19일 김진만 국회 부의장 1급 상당 비서관 및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14][15] 이후 김진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16]2. 4. 기업인 활동
김준하는 우풍화학 감사를 거쳐 1977년 3월 우풍화학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17][18] 이후 동부그룹 관련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82년 서울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다.[20] 1992년 강원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93년 삼동그룹 회장을 지냈고, 같은 해 강원일보 고문에 선임됐다. 1994년 대한지적공사 본부 감사, 1998년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96년 대한지적공사 감사에 재선임되어 1998년까지 있었다.2. 4. 1. 우풍화학 및 동부그룹
1977년 3월 우풍화학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17][18] 1978년 2월 주식회사 동부고속 대표이사 사장을 겸직했다.[19] 1981년 동부보험대행 사장, 1982년 동부관광 사장, 1984년 주식회사 동부 총괄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5년 동부건재 사장, 1986년 동협 사장을 역임했다.2. 4. 2. 기타 기업 활동
1985년 동부건재 사장, 1986년 동협 사장을 역임했다.[20] 동곡문화재단 이사, 강원일보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2. 5. 사회 활동 및 기타 경력
1977년 3월 우풍화학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17][18] 1978년 2월 주식회사 동부고속 대표이사 사장을 겸직했다.[19] 1981년 동부보험대행 사장, 1982년 동부관광 사장, 1984년 주식회사 동부 총괄사장 등을 역임했다.1982년 서울시씨름협회 회장이었다.[20] 1985년 동부건재 사장, 1986년 동협 사장을 역임했다. 동곡문화재단 이사, 강원일보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92년 강원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93년 삼동그룹 회장이 되고, 그해 강원일보 고문에 선임됐다. 1994년 대한지적공사 본부 감사, 1998년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96년 대한지적공사 감사에 재선임되어 1998년까지 역임했다.
3. 5.16 군사정변 관련 증언
김준하(金俊河중국어)는 2002년 "5·16과 관련해 왜곡 조작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회고록을 펴내게 됐다"며 회고록을 편찬했다.[1] 그는 5·16 군사 정변 당시 윤보선이 쿠데타에 협력했다는 설에 대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반박했다.[1]
김준하(金俊河중국어)에 따르면, 쿠데타 바로 다음 날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한림 1군사령관, 민기식 2군단장, 최석 5군단장을 만나러 전방 부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명하복이 중요한 군대 내부가 이미 엉망이었고,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세력을 비난했지만 민기식 군단장은 혁명 지지를 선언했으며, 박춘식 사단장은 민기식 군단장 앞에서 '나는 누구의 명령도 안 듣는다'고 무례하게 굴었다고 증언했다.[1]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보선 대통령이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 동원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무력 충돌 없이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김준하는 "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고 증언했다.[1] 또한,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시위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고 보았다.[1] 그는 5·16을 쿠데타라고 정의했다.[22]
4. 저서
- 《대통령과 장군 : 숙명의 대결-쿠데타에서 사상논쟁까지》 (나남출판, 2002)
5. 수상 경력
6. 가족 관계
7. 약력
김준하|金俊河한국어는 1930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동아일보사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1954년부터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다.[2] 1960년 5월 민주당 강원도 철원군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고,[2] 같은 해 7월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강원도 철원군 지역구 민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9월 대통령 공보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다.[3]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윤보선 대통령후보 공보보좌역을 지냈고, 1966년 동양통신사 기획심사부장 및 조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에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하였다. 1971년 고려대학교 정치경제학부 강사로 출강하였다.
1973년 3월 19일 김진만 국회 부의장 1급 상당 비서관 겸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14][15]
1976년 우풍화학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동부고속 사장을 역임하였다.[17][18][19] 1979년 주식회사 한국자갈공영사 사장, 1981년 동부보험대행 사장, 1982년 동부관광 사장, 1984년 주식회사 동부 총괄사장, 1985년 동부건재 사장, 1986년 동협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92년 강원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93년 삼동그룹 회장 및 강원일보사 고문을 역임하였다. 1993년 대한지적공사 감사로 선임되었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지적공사 감사를 연임하였다. 2000년부터 대한언론인회 이사, 2000년 2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대한언론인회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참조
[1]
뉴스
김준하씨 "尹대통령,5·16세력과 내통안했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2-07-09
[2]
뉴스
"新民黨籌備大會"
조선일보
1960-12-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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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府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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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62-04-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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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
196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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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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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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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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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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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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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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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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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8-21
[14]
뉴스
國會議長 秘書室長 金鍾河씨를 임명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73-03-20
[15]
뉴스
國會議長 비서실장에 金鍾河씨 任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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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3-03-19
[16]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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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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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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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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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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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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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6-24
[21]
뉴스
https://newslibrary.[...]
1966-11-16
[22]
뉴스
김준하씨에 듣는 ‘5·16’의 진실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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