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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카와 히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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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깃카와 히로이에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무장이다. 1561년 깃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깃카와 가문을 계승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내통하여 모리 가문을 위기에서 구했으나, 이후 이와쿠니 3만 석의 영지를 받아 이와쿠니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그는 이와쿠니의 개발에 힘썼으며, 1625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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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카와 히로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깃카와 히로이에
이름깃카와 히로이에 (吉川 広家)
본명쓰네노부 (経信)
이명사이주마루 (才寿丸, 유년기 이름)
쓰네노부, 쓰네코토 (経信, 経言)
지로고로 (次郎五郎)
마타지로 (又次郎)
구란도노카미 (蔵人頭, 통칭)
인물 정보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1561년 12월 7일
사망1625년 10월 22일
묘소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요코야마 동센지
교토시 기타구 다이토쿠지 탑두 류코인
관위종4위하 민부소보, 시종
막부에도 막부
주군모리 다카모토, 데루모토
스와오 이와쿠니 영주
씨족후지와라 남가구도류깃카와 씨
부모아버지: 깃카와 모토하루
어머니: 신조노쓰보네
형제자매모토나가
모리 모토우지
히로이에
쇼주마루
마스다 모토요시 정실
세쓰간 슈바이
배우자요코인 (우키타 나오이에 딸)
와카바야시 도헤이 딸
시나가와 노부시게 딸
아리후케 이에쓰네 딸
자녀사이타로
히로마사
로하쿠
모리 나리요리
이마코 (마스다 나리오키 정실)
양자딸 (아마노 모토요시 정실)
군사 경력
소속[[File:Ichimonjimitsuboshi.svg|15px]] 모리 씨
[[File:Goshichi no kiri 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File:大一大万大吉.svg|15px]] 서군
[[File:Tokugawa_family_crest.svg|15px]] 도쿠가와 막부
복무 기간알 수 없음
계급알 수 없음
부대[[File:Marunouchinimitsuhikiryo.svg|15px]] 깃카와 씨
지휘이와쿠니 번
주요 전투고즈키성 공방전(1578년)
임진왜란(1592-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가문
가문깃카와 씨
관직
직위깃카와 씨 당주 (1587년 - 1614년)
이와쿠니 성주(1601년 - 1615년)
선대 당주깃카와 모토하루
후대 당주깃카와 히로마사

2. 생애

1561년 11월 1일 아버지 깃카와 모토하루와 어머니 신조노 츠보네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쓰네노부(経信)였다. 1578년 아버지와 함께 아마고 가쓰히사를 상대로 한 전투에 처음 참전했다.[4] 1583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졌으나, 곧 풀려나 아키로 귀국했다.

1586년부터 1587년 사이에 아버지와 형 깃카와 모토나가가 모두 사망하면서 깃카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 무렵 이름을 히로이에(広家)로 바꾸었다.[8] 아버지와 형은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히로이에는 전략과 외교를 중시하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후 모리 씨 가문을 통합한 공로로 히데요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9] 1597년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사망한 후, 모리 데루모토는 히로이에에게 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모리 가문을 지탱해 줄 것을 요청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모리 데루모토를 비롯한 다수의 모리 가신들은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친 도요토미 세력을 지지했지만, 히로이에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도쿠가와 측과 비밀 협정을 맺었다. 모리 가문이 전투에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영지를 보장받기로 약속했다.[10]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 총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오사카 성에 머물렀고, 모리 히데모토가 모리 군을 이끌었다. 히로이에는 선봉을 맡았으나, 9월 15일 본 전투에서 히데모토의 공격 명령에 불응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용해 공격로를 막았다. 이로 인해 모리 군 주력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12] ("재상 전하의 텅 빈 도시락"이라는 일화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전투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지만, 오사카 성에서 발견된 문서들로 인해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에 깊이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야스는 비밀 협정을 무효화하고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려 했으나, 히로이에에게는 스오나가토 2개 국을 주겠다고 제안했다.[15]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존속을 위해 이를 거부하고 이에야스에게 탄원했다. 결국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의 은퇴를 조건으로 모리 가문의 영지를 2개 국으로 줄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17]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다이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지의 4분의 3 이상을 잃었다.

히로이에는 가문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비밀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에, 사건 이후 가문 내부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를 반역자로 여겼으며, 특히 히데모토는 히로이에의 정적이 되었다.

전투 후, 데루모토는 히로이에에게 축소된 영지의 일부를 주었다. 히로이에는 이와쿠니 번의 초대 번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깃카와 가문은 다이묘가 아닌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남았다.

1614년 장남 깃카와 히로마사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1626년 사망할 때까지 영지 경영에 힘썼으며, 188개 조항으로 구성된 법(『깃카와 씨 핫토』)을 제정하여 영지 번영에 기여했다.[1]

2. 1. 어린 시절과 가문 계승

에이로쿠 4년(1561년) 11월 1일, 깃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조노 츠보네이다. 어렸을 때에는 오다 노부나가처럼 "바보(うつけ)"라고 불려 아버지 모토하루를 한탄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잔을 받을 때 예의범절이 없다는 것 등을 주의받은 서장이 남아있다. 또한, 성인이 된 후에도 상속받은 미야쇼 씨의 영지가 적다는 이유로, 덴쇼 8년(1580년)부터 덴쇼 10년(1582년)에 걸쳐 이와미 오가사와라 씨 측의 양자 연계 요청에 응하여 오가사와라 나가노리의 양자가 되려 했지만, 주군 모리 데루모토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4]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와 함께 아마고 가쓰히사 토벌전에서 첫 출진하였다. 덴쇼 9년(1581년 2월 17일), 형인 모토나가로부터 새로운 가명을 받아, 가명을 "지로고로"에서 "마타지로"로 고쳤다. 덴쇼 11년(1583년) 10월, 오다 노부나가 사후 천하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숙부 고바야카와 모토후사(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와 함께 모리 시게마사·다카마사 형제와의 교환 조건으로 인질로 보내졌다. 처음에는 모토하루가 은거 후의 상대로 히로이에를 곁에 두고 싶어했지만, 모리 가문의 안위를 위해 인질로서 오사카 성으로 보냈다. 같은 해 10월 3일(1583년 11월 17일)에 히데요시와 알현하였고, 곧 오사카에서 모리 가문으로 돌려보내져 같은 해 11월에 아키로 귀국했다.

덴쇼 14년(1586년)부터 덴쇼 15년(1587년)에 걸쳐 아버지 모토하루, 이어서 형인 깃카와 모토나가가 죽었기 때문에, 깃카와 가문의 당주가 되어 거성 갓산토다성과 14만 석의 소령을 계승했다. 1587년 9월 2일 당주가 된 후 모리 데루모토에게 "히로(広)" 자를 받아, "게이겐(経言)"에서 "히로이에(広家)"라고 개명했다.

2. 2.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활동

덴쇼 14년(1586년)부터 덴쇼 15년(1587년)에 걸쳐 아버지 모토하루, 이어서 형인 깃카와 모토나가가 죽었기 때문에, 깃카와 가문의 당주가 되어 거성 갓산토다 성과 14만 석의 소령을 계승했다.[8] 당주가 된 후 모리 데루모토에게 "히로(広)"의 한 글자를 받아, "히로이에(広家)"라고 개명했다. 다음 해인 1588년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히고(肥後) 국인 일규 진압을 위해 출진했다. 히로이에는 용장이었던 아버지나 형과 달라서 무용보다는 지략 면에서 인정받았으며, 히데요시로부터도 모토하루·모토나가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후의 모리 가문을 지지할 그 수완을 높이 평가받았다.[8]

1588년 7월 25일, 도요토미 히로이에(豊臣広家)로서 종오위하에 서임되어 시종에 임명되었다.[8] 같은 해 8월 2일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으며, 시종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 등 히데요시 측근에게는 평가가 낮았던 것인지, 인질로 보낸 히로이에의 딸은 히데요시와 대면이 허락되지 않았다.

1588년 10월, 히데요시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가 된 요코인을 히로이에와 혼인시켰다. 그러나 2년 후인 1591년 봄에 요코인이 병사하자, 이후 히로이에는 정실을 맞이하지 않고 측실만을 두었으며, 요코인의 명복을 빌었다.

1591년, 히데요시는 히로이에에게 스에즈미 야스카도의 거성이었던 갓산토다 성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령하여, 이즈모 3군·호키 3군·아키 1군 및 오키 1국에 달하는 14만 석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산인의 정치·경제 지배 거점으로서 근세 성곽인 요나고 성 축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분로쿠·게이초의 역으로 인해 중단되어, 완성을 기다리지 못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개역되었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출진하여, 종종 모리 씨의 별동대를 지휘했으며, 벽제관 전투 등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히로이에를 일본 창기둥 7인 중 한 사람으로 칭찬했다. 울산왜성 전투에서는 농성한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기 위해 울산왜성을 포위한 명나라 장수 양호의 명·조선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9]

1597년, 숙부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사망하자, 당주인 모리 데루모토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히로이에에게 모리 씨를 지탱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다카카게의 죽음과 함께 반환될 예정이었던 미하라 5만 석 등 모리 본가로부터 하사받았던 영지 처리, 그리고 데루모토의 적남 히데나리에게 후계자를 물려주는 대신 독립된 다이묘로 대우받게 된 히데모토에게 영지 분배 문제가 발생했다. 구로다 나가마사를 대신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중재인이 된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모토에게 히로이에의 영지를 주고, 히로이에에게는 다카카게가 모리 본가에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승시키는 안을 냈다. 이에 영지를 빼앗길 히로이에뿐만 아니라, 나가토 국을 원했던 히데모토, 히데모토를 이즈모 국으로 옮기는 것은 찬성하지만 히로이에에게는 대체 영지로 빈추 국을 주는 것을 생각했던 데루모토는 각자의 생각으로 반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직후인 1599년 1월, 도요토미 정권은 히로이에에게 줄 대체 영지를 미룬 채, 히데모토에게 히로이에의 영지 14만 석만을 주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안을 추진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도요토미 7장의 습격으로 실각하자, 6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재검토가 이루어져, 히데모토에게는 나가토 국이 주어지고, 히로이에의 영지는 변경 없이 유지되었다.[10]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모리 가문의 운명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가문의 당주였던 모리 데루모토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등의 권유로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다.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담할 것을 제안했으나, 미쓰나리 등의 뒷공작으로 데루모토가 추대되었다고 한다. 외교에 능한 에케이는 히로이에를 싫어했으며[11], 주가에 등을 돌리고 동군 가담을 주장하는 히로이에와, 서군 총대장의 입장을 관철해야 한다는 에케이는 오사카 성에서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를 확신한 히로이에는 후쿠바라 히로토시와 모의하여 에케이와 데루모토에게는 비밀로 한 채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내통, 모리 영지의 안도라는 밀약을 맺었다.[10] 한편, 안노쓰 성 공략전에서는 주력으로 분전하여 나가마사가 안색을 잃는 국면도 있었다.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 전날에도 히로이에는 후쿠하라·아야야 스미미쓰 두 중신의 친척 2명을 인질로 보내고, 모리의 전투 불참을 맹세하는 서장을 나가마사에게 보냈다. 같은 날짜의 혼다 다다카쓰이이 나오마사가 히로이에·후쿠하라 히로토시에게 보낸 연서 기청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12]

  • 데루모토에 대해, 이에야스는 소홀히 할 마음이 없다.
  • 히로이에·히로토시도 이에야스에게 충절을 다하고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소홀히 할 마음이 없다.
  • 데루모토가 이에야스에게 충절을 맹세한다면, 이에야스의 판물을 보낼 것이며, 데루모토의 분국은 틀림없이 안도할 것이다.


같은 날짜의 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의 연서 기청문에서는, 앞서 언급한 다다카쓰·나오마사의 기청문에 거짓이 없음을 거듭 증명하고 있다.[13]

9월 15일 본전에는 서군으로 참가했지만, 이에야스에게 내통하고 있던 히로이에는 난구산에 포진, 총대장인 모리 히데모토 등의 출진을 방해하는 위치에 진을 쳐 모리 세력의 움직임을 묶어 두었다. 서군에 가세하려는 에케이와 조소카베 모리치카, 나가쓰카 마사이예의 사자가 방문하지만, 히로이에는 안개의 농도 등을 이유로 출격을 거부, 히데모토에게 "지금부터 도시락을 먹겠다"라고 말하며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재상 전하의 텅 빈 도시락"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결과는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가 되었고, 모리군은 싸우지 않고 전장을 이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합전 직후에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세워 서장을 보냈다. 9월 17일에는 나가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연서로, "데루모토는 명목상의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을 뿐이므로 본령을 안도한다"라는 취지의 서장이 오사카 성의 데루모토에게 송부되어, 히로이에로서는 이것으로 데루모토의 내의와 맞아 모리씨도 안태라고 생각했다.

10월 2일이 되자, 구로다 나가마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이 도착했다.

  • 이에야스가 모리 영지를 안정시키겠다는 밀약은, 테루모토가 거부할 수 없이 총대장으로 추대된 경우에만 유효하다. 그런데, 오사카성에서 발견된 서군의 연판장 중 다수에 테루모토의 화압이 찍혀 있었다. 큰일이다. 모리의 영지는 몰수되어 개역될 것이다.
  • 귀하의 충절은 이이 나오마사, 혼다 마사노부도 잘 알고 있으며, 모리 영지 중 한두 개 국을 주려고 지금 이에야스에게 교섭 중이다.
  • 나오마사에게 불려가면, 즉시 가십시오. 수행원은 몇 명으로 충분하며, 창 등은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함정이 아닙니다.


모리 종가의 본령 안도는 무효가 되었고, 그 후, 히로이에에게는 스오나가토의 2개 국을 주겠다는 통보가 있었다.[15]

10월 3일, 히로이에는 이 통보에 대해, 모리 본가를 존속시키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청문을 제출했다.

  • 저에 대한 은혜는 후세에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만, 부디 모리가라는 가명을 남겨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 이번 일은 테루모토의 본의가 아닙니다. 테루모토가 마음속으로 사람이 성숙하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것은, 여러분 모두 알고 계시는 바 아니십니까.
  • 테루모토는 앞으로, 이에야스 님께 충절을 다할 것이니, 부디 부디 모리의 성씨를 남겨주십시오.
  • 테루모토가 처벌받고 저만 발탁되면 면목이 서지 않으니, 저에게도 테루모토와 같은 벌을 내려주십시오.
  • 만약, 고맙게도 모리의 가문을 남겨주신다면, 테루모토는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만에 하나, 테루모토가 도쿠가와에 대해 활을 쏜다면, 설령 본가라고 해도, 테루모토의 목을 베어 바칠 각오입니다.


히로이에의 이 기청문에 대해, 이에야스는 10월 10일이 되자, 테루모토에게 히로이에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던 스오, 나가토의 2개 국을 모리 종가에 안도할 것, 모리 테루모토・히데나리 부자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취지의 기청문을 발행했다.[17]

히로이에의 행동은 합전 전인 7월 15일에 히데모토와 안코쿠지 에케이에 대한 방침에 불안을 품은 후쿠하라 히로토시・시시도 모토쓰구・마스다 모토요시・구마가이 모토나오 등 중신들에 의해 은밀하게 이루어진 회의의 결과를 받은 것이지만, 이봉 후에는 모리 씨의 가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모리 종가에서는 세키가하라 이후, 아키국 외 산요・산인 8개국 120만 5천 석에서 보초 2개국 29만 8천 석으로의 감봉에 따른 감수를 보충하기 위해, 영내의 철저한 검지에 착수하지만, 야마시로 게이초 잇키, 요시미 히로나가의 반란 등, 감봉에 따른 혼란이 일어났다. 1610년에 모리 종가(조슈 번)는 막부의 승인을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쳐졌다.

2. 4. 이와쿠니 번주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깃카와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스오나가토 2개 국 37만 석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전달된 내용은 달랐다.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 연판장에 서명한 것을 문제 삼아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려 했고, 히로이에에게는 2개 국을 주겠다고 제안했다.[15]

히로이에는 이에 반발하여 모리 가문의 존속을 위해 이에야스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모리 가문의 가명을 남겨줄 것을 간청하며, 데루모토가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에야스는 히로이에의 탄원을 받아들여 10월 10일 모리 가문의 영지를 안도하고 데루모토와 히데나리 부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서약문을 주었다.[17]

결과적으로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을 개역 위기에서 구했지만, 7월 15일 중신들과의 비밀 회의 결과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모리 가문의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은 영지가 크게 줄어들어 (아키 등 8개 국 120만 5천 석에서 보초 2개 국 29만 8천 석) 큰 혼란을 겪었다. 야마시로 게이초 잇키, 요시미 히로나가의 반란 등이 일어났고, 1610년에는 막부의 승인을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쳤다.

모리 가문은 하기에 본거지를 두고 번을 분할하여 조후, 도쿠야마 등의 분가와 이와쿠니 깃카와 령을 두었다. 히로이에게는 이와쿠니 3만 석(후에 6만 석)이 주어져 이와쿠니 령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쿠니 령은 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깃카와 가문은 조슈 번의 가신으로 취급되었다. 반면, 이에야스로부터 이와쿠니 성 축성을 허가받고 막부로부터는 다이묘 대우를 받는 등 복잡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와쿠니 성 파각 문제, 2대부터 11대까지 이와쿠니 영주의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는 등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한편, 조후 번주 모리 히데모토는 히로이에의 내통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히로이에와 대립하게 되었다. 히로이에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반 히데모토 파 중신들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1605년 고로타 돌 사건이 발생하자, 히로토시는 신속하게 진압하고 히데모토와 히로이에에게 화해를 요청하여 두 사람은 화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히데모토와 히로토시, 그리고 히로이에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히로이에는 1601년, 1603년, 1604년, 1606년에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부자를 알현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 때 히데모토가 비밀리에 도요토미 측에 나이토 모리모리(사노 미치카)를 파견한 사실을 알게 된 히로이에는 격노하여 1614년 12월 22일 은거하고 히로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이후 번의 정치는 히데모토 등에 의해 운영되었고, 히데모토는 깃카와 가문의 세력 삭감을 꾀했다.

히로이에는 은거 후에도 이와쿠니 령의 실권을 장악하고, 1617년에는 188조에 달하는 영내 통치법을 제정하는 등 이와쿠니 개발에 힘썼다. 실제 10만 석(최성기에는 17만 석)이라고 하는 이와쿠니 령, 그리고 현재의 이와쿠니시의 기초를 쌓았다. 1625년 9월 21일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3. 평가 및 논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깃카와 히로이에의 역할과 그 이후의 결과는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를 예측하고, 모리 데루모토를 비롯한 모리 가문 가신들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지지하는 상황에서도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도쿠가와 측과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모리 가문은 전투 중 중립을 조건으로 영지를 보장받기로 했다.[1] 그러나 모리 히데모토의 공격 명령에 불응하고, 자신의 부대로 공격 경로를 막아 모리 군 주력의 참전을 방해했다.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모리 데루모토의 서군 개입 증거를 발견하고 비밀 협정을 무효화했다.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고 히로이에에게 두 국을 보상하려 했으나, 히로이에의 반발로 데루모토 은퇴를 조건으로 영지를 두 국으로 축소했다.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다이묘 지위를 지켰지만, 영지의 4분의 3 이상을 잃었다.[1]

히로이에는 가문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협상했기에, 이후 가문 내에서 배신자로 비판받았고, 특히 모리 히데모토와 정적이 되었다.[1]

3. 1. 부정적 평가

구로다 나가마사의 서신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추대한 경우에만 영토를 보장하겠다는 밀약을 언급했지만, 오사카 성에서 발견된 서군 연판장에 데루모토의 화압(花押)이 있어 모리 가문의 영지가 몰수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이 나오마사, 혼다 마사노부가 히로이에의 충절을 알고 있어 모리 가문의 영토 중 1, 2개국을 받을 수 있도록 이에야스와 교섭 중이라고 전했다.[1]

히로이에는 이에 대해 모리 가문의 가명(家名)을 남겨달라고 요청하며, 데루모토가 도쿠가와 가문에 충절을 다할 것이며, 만약 배신할 경우 데루모토의 목을 바치겠다는 서약문을 썼다. 이에야스는 히로이에에게 주려던 스오, 나가토 2개국을 모리 종가에 안도하고, 데루모토와 모리 히데나리 부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서약문을 주었다.[1]

결과적으로 히로이에는 처음부터 속임을 당해 모리 가문을 패전으로 이끌고 개역의 위기까지 몰고 간 셈이 되었다. 하지만 히로이에의 행동은 7월 15일 히데모토나 안코쿠지 에케이의 방침에 불만을 품은 중신들과의 은밀한 회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이에가 이에야스와 직접 내통 교섭을 하지 않은 것은 실수로 여겨져, 이후 가문 정치의 제1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종가에서는 감봉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보충하기 위한 측량으로 인해 야마시로 게이초 일규, 요시미 나리요리의 반란 등 혼란이 일어났다.[1]

히로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이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모리 데루모토와 여러 모리 씨 가신들은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친도요토미 세력을 지지했다. 히로에는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도쿠가와 측과 비밀 협정을 맺고, 전투 동안 모리 가문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기존 영지 보장을 약속받았다.[1]

모리 히데모토가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 히로에는 불응하고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선봉대를 사용하여 공격 경로를 차단하여 모리군의 주력이 도쿠가와군과 교전하는 것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모리군 주력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데루모토가 서군에 더 깊이 관여했다는 문서를 발견하고 비밀 협정을 무효화했다.[1]

이에야스는 처음에 모든 모리 영지를 몰수하고 히로에에게 두 개의 국을 보상으로 주려고 했으나, 히로에의 반발로 데루모토가 은퇴하는 조건으로 모리 씨족의 영지를 단 두 개 국으로 줄였다. 히로에는 모리 씨족의 ''다이묘'' 지위를 유지했지만, 모리 씨족은 이전 영지의 4분의 3 이상을 잃었다.[1]

히로에는 씨족의 승인이나 동의 없이 비밀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에, 사건이 드러나자 씨족 내부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반역자로 여겼으며, 특히 히데모토는 모리 씨족 정치에서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1]

4. 가족 관계


  • 아버지: 기카와 모토하루 (1530~1586)
  • 어머니: 신조노쓰보네 ( ? ~ 1606) -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
  • 양아버지: 기카와 모토나가 (1548~1587)
  • 정실: 요코인 ( ? ~ 1591) - 우키타 나오이에의 딸, 우키타 히데이에의 누나.
  • 측실: 와카바야시 도헤에의 딸
  • 장남: 기카와 사이타로 (1596~1598) - 1598년 1월 10일(게이초 2년 12월 3일) 갓산토다 성에서 사망. 향년 2세. 법명은 텐유 젠사이.
  • 차남: 기카와 히로마사 (1601~1666) - 스오노쿠니 이와쿠니 영 2대 영주.
  • 측실: 시나가와 노부시게의 딸
  • 4남: 모리 나리요리 (1607~1676) - 요시미 히로요리의 양자. 오노 모리가 초대 당주.
  • 측실: 아리후쿠 이에쓰네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3남: 로하쿠 ( ? ~ 1603) - 로하쿠는 법명. 1603년 9월 7일(게이초 8년 8월 2일) 사망. 묘소는 킨켄[19]의 코게츠안.
  • 장녀: 이마코 (1622~1662) - 마스다 나리노부 정실. 1662년 8월 21일(간분 2년 7월 8일) 사망. 향년 41세. 법명은 호운인 자쿠쇼 리쿠.
  • 양자
  • 여자 ( ? ~ ? ) - 아마노 모토요시 정실, 이마다 타다히사의 딸.

5. 대중문화 속의 깃카와 히로이에


  • 나카지 케이타의 소설 『바보의 지휘』 (주오코론 문고, 2014년) ISBN 978-4122060197
  • TBS 텔레비전 드라마 세키가하라 (1981년) - 깃카와 히로이에 역: 카츠베 노부유키
  •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 깃카와 히로이에 역: 나베오사미

참조

[1] 문서 Hall et al. 1981
[2] Kotobank 吉川広家
[3] 문서 長州藩の主張によれば、広家はあくまでも毛利氏の家老であるため、岩国藩主と呼ぶのは誤りであるとしている。
[4] 문서 吉川家文書
[5] 문서 吉川家文書
[6] 문서 吉川家文書
[7] 간행물 戦国後期における吉川氏の権力後世―親類衆・奉行人を中心として―
[8] 문서 小早川家文書 近代文芸社
[9] 웹사이트 立花遺香(淺川聞書)附・蔚山の後詰・十時但馬惟由覚書、立花丹後鎮久覚書) https://dl.ndl.go.jp[...]
[10] 간행물 豊臣~徳川移行期における<取次>―公儀-毛利間を中心に―
[11] 서적 戦国の交渉人 洋泉社
[12] 문서 吉川家文書にも広家宛に同じ内容のものがある。
[13] 문서 毛利家文書
[14] 서적 毛利輝元 西国の儀任せ置かるの由候 미ネルヴァ書房 2016-05
[15] 문서 吉川家譜
[16] 서적 関ヶ原前夜 日本放送出版協会
[17] 서적 日本の中世 放送大学教育振興会
[18] 문서 そもそも秀元の独立が承認されたのは、関ヶ原の戦いの2年前である。また、秀元の系統には万一の際の毛利宗家継承権があり、実際に2人が宗家に入嗣している。
[19] 문서 現在の山口県岩国市錦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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