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니시 후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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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니시 후토시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52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 신인왕,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 등 다양한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956년에는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을 역임하며 1963년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여러 팀에서 감독,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선수 시절에는 '괴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강력한 타구를 선보였고, 199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3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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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니시 후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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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나카니시 후토시 |
원어 이름 | Futoshi Nakanishi |
일본어 표기 | 로마자 표기: Futoshi Nakanishi 가나 표기: なかにし ふとし 한자 표기: 中西 太 |
출생일 | 1933년 4월 11일 |
사망일 | 2023년 5월 11일 |
출생지 |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
사망지 | 도쿄 |
신장 | 174 |
체중 | 93 |
利き腕 | 오른손 |
타석 | 우타석 |
수비 위치 | 3루수, 1루수 |
프로 입단 연도 | 1952년 |
첫 출장 | 1952년 3월 21일 |
마지막 출장 | 1969년 10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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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 |
선수 팀 | 니시테쓰 라이온스 (1952-1969)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 니시테쓰 라이온스 (1962-1969) 닛폰햄 파이터스 (1974-1975) 한신 타이거스 (1980-1981) 야쿠르트 스왈로스 (1984) 지바 롯데 마린스 (1994) |
코치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1-1973, 1983) 한신 타이거스 (1979) 긴테쓰 버펄로스 (1985-1990)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2)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5-1997) |
수상 내역 | |
신인왕 | 퍼시픽 리그 신인왕 (1952) |
MVP |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 (1956) |
베스트 나인 | 7회 (1953-1958, 1961) |
일본 시리즈 우승 | 3회 (1956, 1957, 1958)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1999년 |
통산 기록 | |
타율 | .307 |
홈런 | 244 |
타점 | 785 |
안타 | 1,262 |
감독 승리 | 748 |
감독 패배 | 811 |
기타 정보 | |
명예의 전당 유형 | 일본 |
선출 연도 | 1999년 |
2. 선수 경력
현역 시절에는 뛰어난 타자로 명성을 떨쳤고, 은퇴 후에는 훌륭한 코치로 많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후토시’’’(太일본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
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며 야구 실력을 키웠다. 일본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세 번 출전했으며,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부모님의 동의 없이 니시테쓰 라이온스와 계약했다.[1]
니시테쓰에서 홈런왕 5회, 타점왕 3회, 최고 타율 2회를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3루수)에 7번 선정되었다.[1] 1953년에는 역대 최연소로 트리플 크라운과 2관왕(홈런왕·타점왕)을 달성했고, 1955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를 차지했다.[1] "괴동(怪童)"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과 빠른 발을 자랑했다.[1]
1953년, 1955년, 1956년, 1958년 시즌에는 트리플 크라운에 근접했지만 아쉽게 달성하지 못했다.
- 1953년: 오카모토 이사미에게 밀려 안타 부문 2위[1]
- 1955년: 야마우치 가즈히로에게 타점왕 타이틀을 내줌[1]
- 1956년: 팀 동료 도요다 야스미쓰에게 밀려 타율 2위[1]
- 1958년: 가쓰라기 다카오에게 타점왕 타이틀을 빼앗김[1]
1959년 시즌에는 스파이크에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1960년에는 손목 건염으로 고생했다. 이러한 부상들은 그의 선수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1962년 가와사키 도쿠지의 뒤를 이어 라이온스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1969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1]
2. 1. 프로 입단 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출신으로, 고시엔 대회에 세 차례(1949년 봄, 1949년 여름, 1951년 여름) 출전했다. 홈런을 칠 정도로 ‘괴동’(怪童|괴동일본어)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1949년 봄과 1951년 여름에는 팀을 4강으로 이끌었지만 모두 패했다.[1]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했으며, 당시 팀에는 야구 용품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며, 미군이 남긴 야구공을 줍고 연습했다.[1]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45년 7월 4일, 고마쓰 공습을 겪었다. 방공호에 피했다가 주변 어른들의 부름으로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있던 방공호가 폭격을 맞았다. 나카니시는 "그대로 방공호에 있었다면 목숨이 없었을 테니 운이 좋았다"라고 회고했다.[3]
1946년, 구제 고마쓰 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1948년 학제 개혁에 따라 고마쓰 제일고등학교가 됨). 고마쓰 제일고 시절에는 홈런을 많이 쳐서 "괴동"이라고 불렸다.[4] 나카니시가 타격 연습을 시작하면 타구가 너무 빨라 위험하여 내야수는 외야로 이동했다고 한다.[5]
고교야구선수권대회(甲子園)에는 3루수로 3번 출전했다.
- 1949년 춘계 선발고교야구대회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후쿠오카현립 오구라 고등학교(小倉北高)의 에이스 후쿠시마 카즈오(福嶋一雄)에게 완봉패를 당했다.
- 같은 해 여름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사사키 신야(佐々木信也)(다카하시 유니온즈)가 있던 가나가와현립 쇼난 고등학교(湘南高)에 연장 10회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 1951년 여름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우승팀이 된 류코쿠대학 부속 헤이안 중고등학교(平安高)의 시미즈 히로카즈(清水宏員)(당시 마이니치 오리온스)-우에시치 아키라(上市明)(당시 다이에이 유니온즈) 배터리에 막혀 3-4로 아쉽게 패배했다. 이 대회에서는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토 상업고등학교(岡山東高)의 아키야마 노보루(당시 다이요 웨일스) 등으로부터 2경기 연속으로 런닝 홈런, 총 6타점을 기록했다.[6]
- 같은 해 히로시마 국체(広島国体)에서는 8강(1차전)에서 오사카시립 도지마 공업고등학교(都島工)와 대결하여 연장 21회 접전 끝에 0-1로 끝내기 패배했다.
고등학교 2년 선배 야마시타 켄(한큐 브레이브스), 1년 선배 타마키 하루오(세이부 라이온스), 동기 마츠오카 마사토시(닛폰햄 파이터스), 1년 후배 아라이 켄(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마츠이 키요시(세이부 라이온스) 등 나중에 프로에 입단하는 팀 동료들이 함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히다 호슈로부터 와세다대학 진학을 권유받고 견학을 위해 상경했다. 이때 고향인 가가와현의 선배이자 와세다대학 출신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을 만났다.[6]
미하라는 가난한 나카니시의 와세다대학 진학 비용을 세이부가 대신 부담하는 대신, 졸업하면 입단하도록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와카바야시 다다시 감독이 마이니치 신문 고마쓰 지국장을 대동하고 나카니시의 형을 포섭하여 계약 직전까지 갔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미하라는 즉시 나카니시의 집으로 향했고, 세이부 측에서는 고마쓰 제일고 야구부 후원회와 시의원까지 나서 입단을 후원했다. 최종적으로는 "고향 선배를 믿는 것이 가장 좋다"라는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세이부 입단이 결정되었다. 와세다대학 진학의 꿈이 깨진 것과 프로에서 해나갈 자신이 없어서 결정의 순간 나카니시는 큰 소리로 울었다.[7][8]
2. 2. 니시테쓰 라이온스 시절 (1952년 ~ 1969년)
'''나카니시 후토시'''(일본어: 中西 太)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1952년 니시테쓰에 입단하여 프로 1년차부터 3루수로 활약하며 그 해 신인왕을 차지했다.[1] 이후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을 여러 차례 차지하며 1958년까지 거의 매년 3관왕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특히 1953년부터 1956년까지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1953년에는 시즌 3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3할, 30홈런, 30도루(트리플 쓰리)를 달성했다.[9][10] 3루 수비에도 능숙하여 도요다 야스미쓰와 함께 ‘철망 데드 매치’(金網デスマッチ일본어)라고 불릴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1] 이 때문에 앞니 3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오시타 히로시, 도요다 야스미쓰, 세키구치 세이지, 다카쿠라 데루유키, 고노 아키노부 등과 함께 ‘유선형 타선’으로 불리는 강력한 타선을 구축하여 1954년 리그 우승, 이나오 가즈히사가 입단한 1956년부터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니시테쓰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1]
1958년까지는 좋은 타격 성적을 유지했지만, 1959년 경기 도중 긴테쓰의 고다마 아키토시와 충돌하여 오른손이 스파이크에 찔리는 부상을 당했다.[12] 1960년에는 건초염을 앓아 주로 대타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졌다.[1] 1961년에는 1루수로 78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타율 .304, 21홈런을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1962년부터는 니시테쓰의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1963년에는 난카이 호크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 끝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3승 4패로 패했다.
1964년부터는 대타 출전이 많아졌다. 같은 해 와카바야시 다다시 수석 코치의 처우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1]
1969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직도 사임했다.
== 통산 타격 성적 ==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2년 | 니시테쓰 | 111 | 410 | 384 | 57 | 108 | 20 | 7 | 12 | 178 | 65 | 16 | 4 | 0 | 26 | 0 | 38 | 12 | .281 | .327 | .464 | .790 | ||
1953년 | 120 | 509 | 465 | 92 | 146 | 20 | 7 | 36 | 288 | 86 | 36 | 16 | 1 | 41 | 1 | 52 | 13 | .314 | .370 | .619 | .989 | |||
1954년 | 130 | 554 | 493 | 87 | 146 | 28 | 8 | 31 | 283 | 82 | 23 | 9 | 2 | 4 | 51 | 4 | 73 | 10 | .296 | .364 | .574 | .938 | ||
1955년 | 135 | 549 | 473 | 96 | 157 | 28 | 4 | 35 | 298 | 98 | 19 | 12 | 0 | 3 | 71 | 17 | 2 | 91 | 10 | .332 | .419 | .630 | 1.049 | |
1956년 | 137 | 523 | 462 | 74 | 150 | 27 | 5 | 29 | 274 | 95 | 15 | 12 | 1 | 5 | 54 | 17 | 1 | 70 | 8 | .325 | .393 | .593 | .987 | |
1957년 | 132 | 538 | 486 | 84 | 154 | 31 | 3 | 24 | 263 | 100 | 15 | 6 | 0 | 2 | 49 | 6 | 1 | 71 | 14 | .317 | .379 | .541 | .920 | |
1958년 | 126 | 469 | 404 | 61 | 127 | 19 | 1 | 23 | 217 | 84 | 8 | 9 | 0 | 2 | 60 | 10 | 3 | 59 | 10 | .314 | .405 | .537 | .942 | |
1959년 | 59 | 181 | 153 | 21 | 45 | 10 | 1 | 7 | 78 | 29 | 2 | 3 | 0 | 3 | 24 | 7 | 1 | 24 | 6 | .294 | .387 | .510 | .897 | |
1960년 | 32 | 54 | 47 | 6 | 17 | 2 | 1 | 1 | 24 | 10 | 1 | 0 | 0 | 1 | 6 | 4 | 0 | 8 | 4 | .362 | .426 | .511 | .937 | |
1961년 | 99 | 301 | 253 | 48 | 77 | 6 | 1 | 21 | 148 | 54 | 4 | 6 | 0 | 3 | 44 | 13 | 1 | 42 | 8 | .304 | .405 | .585 | .990 | |
1962년 | 44 | 82 | 71 | 6 | 19 | 1 | 0 | 2 | 26 | 11 | 2 | 1 | 0 | 1 | 9 | 2 | 1 | 8 | 4 | .268 | .354 | .366 | .720 | |
1963년 | 81 | 241 | 216 | 26 | 61 | 7 | 0 | 11 | 101 | 26 | 0 | 3 | 0 | 0 | 24 | 2 | 1 | 47 | 10 | .282 | .357 | .468 | .824 | |
1964년 | 33 | 46 | 40 | 2 | 6 | 2 | 0 | 0 | 8 | 4 | 0 | 0 | 0 | 0 | 6 | 1 | 0 | 10 | 2 | .150 | .261 | .200 | .461 | |
1965년 | 34 | 58 | 51 | 3 | 15 | 2 | 0 | 2 | 23 | 9 | 0 | 0 | 0 | 1 | 6 | 1 | 0 | 8 | 4 | .294 | .362 | .451 | .813 | |
1966년 | 51 | 55 | 51 | 6 | 14 | 2 | 0 | 6 | 34 | 15 | 1 | 0 | 0 | 1 | 3 | 2 | 0 | 9 | 0 | .275 | .309 | .667 | .976 | |
1967년 | 32 | 40 | 36 | 3 | 10 | 2 | 0 | 3 | 21 | 9 | 0 | 0 | 0 | 0 | 3 | 0 | 1 | 7 | 1 | .278 | .350 | .583 | .933 | |
1968년 | 26 | 28 | 25 | 1 | 10 | 0 | 0 | 1 | 13 | 8 | 0 | 0 | 0 | 0 | 3 | 3 | 0 | 5 | 1 | .400 | .464 | .520 | .984 | |
1969년 | 6 | 7 | 6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 | 2 | 0 | .000 | .143 | .000 | .143 | |
통산: 18년 | 1388 | 4645 | 4116 | 673 | 1262 | 207 | 38 | 244 | 2277 | 785 | 142 | 81 | 4 | 26 | 481 | 85 | 17 | 624 | 117 | .307 | .379 | .553 | .93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3. 지도자 경력
현역 시절에는 뛰어난 타자였고, 은퇴 후에는 명코치로 알려져 있다. 1969년 검은 안개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니시테쓰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등번호 6번은 보류 결번되었다가 1973년 이나오 가즈히사 감독의 추천으로 기쿠카와 쇼지로가 착용했다.
은퇴 후 1년간 도쿄 방송(현재의 TBS TV,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 위원을 맡은 후[67] 여러 팀에서 감독, 타격 코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 야쿠르트 (1971년~1973년, 1983년~1984년 도중)
- 닛폰햄 (1974년~1975년, 감독)
- 한신 타이거스 (1979년~1981년, 1980년부터 감독)
- 긴테쓰 (1985년~1990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2년)
- 지바 롯데 마린스 (1994년, 감독 대행)
- 오릭스 (1995년~1997년)
감독으로서는 에모토 다케노리의 "벤치가 바보"라는 발언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A클래스(1위~3위) 6차례(리그 우승 1회)의 실적을 기록했다. 코치로서는 뛰어난 타격 이론으로 많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특히 긴테쓰 수석 코치 시절 10월 19일의 비극이 있었던 1988년 시즌과 극적인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1989년에는 오기 아키라 감독과의 명콤비로 선수나 팬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닛폰햄 감독 시절에는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며 해임되었고,[18] 한신 감독 시절에는 에모토 마사키와의 불화가 있었다.[22][23] 긴테쓰와 오릭스에서는 오기 아키라 감독과 함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13] 롯데에서는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정식 감독 제안을 거절했다.
오릭스에서 코치직을 물러난 이후에도 야쿠르트 등 여러 구단에서 '특별 코치', '임시 코치'를 맡았다. 1999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0년부터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맡았다.
3. 1. 니시테쓰 라이온스 감독 시절 (1962년 ~ 1969년)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62년 | 니시테쓰 | 3위 | 136 | 62 | 68 | 6 | .477 | 16.0 | 92 | .245 | 3.00 | 29세 |
1963년 | 1위 | 150 | 86 | 60 | 4 | .589 | - | 146 | .244 | 2.69 | 30세 | |
1964년 | 5위 | 150 | 63 | 81 | 6 | .438 | 19.5 | 116 | .242 | 3.57 | 31세 | |
1965년 | 3위 | 140 | 72 | 64 | 4 | .529 | 15.5 | 112 | .246 | 3.00 | 32세 | |
1966년 | 2위 | 138 | 75 | 55 | 8 | .577 | 4.0 | 125 | .231 | 2.13 | 33세 | |
1967년 | 2위 | 140 | 66 | 64 | 10 | .508 | 9.0 | 98 | .222 | 2.50 | 34세 | |
1968년 | 5위 | 133 | 56 | 74 | 3 | .431 | 24.0 | 110 | .237 | 3.17 | 35세 | |
1969년 | 5위 | 130 | 51 | 75 | 4 | .405 | 25.0 | 119 | .225 | 3.40 | 36세 |
나카니시 후토시는 1962년부터 1969년까지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감독을 맡았다. 1963년에는 팀을 리그 1위로 이끌었지만, 1964년, 1968년, 1969년에는 5위에 그치는 등 기복이 있는 성적을 보였다. 1965년에는 경기 전 연습 중 부상으로 인해 후카미 야스히로가 감독 대리를 맡기도 했고,[45] 1969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기도 마사이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45]
3. 2. 여러 팀에서의 코치 및 감독 경력 (1971년 ~ 1997년)
은퇴 후 1년간 도쿄 방송(현재의 TBS TV,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 위원을 맡았고,[67] 이후 여러 팀에서 코치 및 감독 경력을 쌓았다.- 야쿠르트 (1971년~1973년, 1983년~1984년 도중)
- 닛폰햄 파이터스 (1974년~1975년, 감독)
- 한신 타이거스 (1979년~1981년, 1980년부터 감독)
- 긴테쓰 버펄로스 (1985년~1990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2년)
- 지바 롯데 마린스 (1994년, 감독 대행)
-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5년~1997년)
감독으로서는 에모토 다케노리의 "벤치가 바보" 발언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A클래스(1~3위) 6회, 리그 우승 1회의 성과를 거두었다. 코치로서는 뛰어난 타격 이론으로 많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특히 긴테쓰 수석 코치 시절, 10월 19일의 비극이 있었던 1988년 시즌과 극적인 리그 우승을 이끈 1989년에는 오기 아키라 감독과의 콤비 플레이가 선수와 팬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닛폰햄에서는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2년 연속 최하위로 해임되었다.[18] 구단 대표 미하라는 1회 주자가 나가면 번트 사인을 자주 내는 나카니시 감독의 작전을 보고 감독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19] 하라모토 이사오는 역전 가능한 상황에서 벤치 뒤로 내려가 매니저를 통해 상황을 확인하는 나카니시의 작전에 선수들이 싸울 의욕을 잃었다고 회상했다.[20]
한신에서는 돈 브레이저 감독 사임으로 감독에 취임했으나 5위에 그쳤고, 1981년에는 3위를 기록했지만 사임했다. 재임 중 코치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토 마사키에게 "벤치가 바보다"라고 공개적으로 비판받아,[22] 불화가 심해져 에모토가 은퇴하게 되었다.[23] 그러나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동무를 할 정도로 관계가 회복되었다.[24][25]
긴테쓰 코치 시절에는 절친 오기 아키라 감독과 함께 1989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13] 오릭스 코치 시절에는 다시 한번 오기와 함께 리그 2연패 및 1996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오기와의 콤비는 명콤비로 불렸다.[13]
롯데에서는 시즌 중반 야기자와 소우로쿠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 대행을 맡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 해 정식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연봉 등의 조건이 맞지 않아 거절했다.
오릭스 퇴단 후에도 야쿠르트 등 여러 구단에서 '특별 코치', '임시 코치'를 역임했다.
4. 타격 스타일 및 지도 철학
나카니시 후토시는 현역 시절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여준 선수였으며, 은퇴 후에는 훌륭한 코치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애칭은 '후토시'(太일본어)였다.
운동 신경이 매우 뛰어났으며, 특히 발목과 허리의 힘이 남달랐다. 스모를 좋아하여 이즈쓰 도장(이즈쓰部屋)에 출稽古를 나갈 정도였고, 삼단목 역사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63] 쓰루가미네는 나카니시가 스모 선수로 전향했어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이테쓰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호쾌한 타격을 선보였지만, 실제 성격은 섬세하고 성실하며 연습에 매우 열심이었다. 이나오 가즈히사는 나카니시가 매일 밤 훈련하는 모습에 유리창이 깨질까 봐 무서웠다고 회상했다.[54] 과도한 연습은 건초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약간 소심한 면모도 보였는데, 경기 전 팬의 야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기자에게 질문한 일화가 있다.[64] 유선형 타선의 일원으로서 1번 타자 타카쿠라 테루유키가 2루타를 치면 2번 타자 토요다에게 주자를 불러들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1958년 일본 시리즈 5차전에서 9회말 1사 3루 상황에서 3루 땅볼로 물러난 장면을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았다. 비록 팀은 기적적인 역전 우승을 거두었지만, 당시의 아쉬움을 자주 회상했다고 한다.
미하라 슈 감독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 "더 이상 그만해 달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5]
한신 감독 시절에는 통풍을 앓아 스파이크의 발끝을 잘라내고 경기에 임했다.[66]
4. 1. '괴동'의 타격
나카니시 후토시는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출신으로, 고시엔 대회에 세 차례 출전하여 팀을 두 번이나 4강으로 이끌었다. 1952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그 해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을 여러 차례 획득하며 1958년까지 매년 3관왕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1953년에는 시즌 3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3할, 30홈런, 30도루(트리플 크라운)를 달성했다. 3루수로서 뛰어난 수비 실력을 보였으며, 도요다 야스미쓰와 함께 '철망 데드 매치'(金網デスマッチ일본어)라고 불릴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 이 때문에 앞니 3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오시타 히로시, 도요다 야스미쓰 등과 함께 '유선형 타선'이라 불리는 강력한 타선을 구축하여 1954년 리그 우승, 1956년부터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니시테쓰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1959년 경기 도중 오른손 부상을 당했고, 1960년에는 건초염을 앓아 타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4. 2. 수비 및 주루
1953년에는 시즌 36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역사상 세 번째로 타율 3할, 30홈런, 30도루(트리플 크라운)를 달성했다.[51] 3루수로서 수비도 능숙했는데, 눈앞에 펜스가 다가와도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구를 쫓았기에 유격수였던 도요다 야스미쓰와 함께 ‘철망 데스 매치’(金網デスマッチ|가네아미 데스맛치일본어)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앞니 3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4. 3. 지도 철학
나카니시 후토시는 선수 시절의 경험과 폭넓은 코치 경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지도 철학을 확립했다.- 선수 육성: 여러 팀에서 타격 코치와 수석 코치를 역임하며 수많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특히 야쿠르트 코치 시절에는 와카마쓰 츠토무를 지도하여 2년 만에 최고 타자로 성장시켰고, 야에가시 유키오의 독특한 타격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15][16] 한신 시절에는 오카다 아키후미를 2루수로 기용하여 신인왕을 수상하게 했으며,[26] 카케후 마사유키의 타격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27] 긴테쓰에서는 랄프 브라이언트를 영입하여 성공적인 선수로 키워냈다.[31][32] 오릭스 시절에는 이치로에게 타격이 아닌 수비를 가르치기도 했다.[13]
- 감독과의 협력: 오기 아키라 감독과의 명콤비로 알려져 있으며, 긴테쓰와 오릭스에서 함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13]
- 타격 이론: "공을 불러들여 하체로 친다", "배트를 안쪽에서 낸다"를 기본으로 하며, 티 배팅을 중시하는 훈련법을 사용한다. 그의 타격 이론은 이세 다카오, 스기무라 시게루 등에게 계승되었다.[60][61]
- 소통: 젊은 선수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타격 코치가 천직이라고 스스로 밝혔다.[25][41]
- 좌우명: "나니쿠소(何苦楚, 무슨 일이든 고생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타구치 소와 이와무라 아키노리에게 계승되었다.[38][37]
노무라 가쓰야는 나카니시를 감독으로서는 실패했다고 평가했지만,[57] 코치로서의 지도 실적은 높이 평가했다. 요시다 요시오는 "나카니시 씨는 가르치는 명인이었죠"라고 말했고,[58] 에나쓰 유타카는 "명감독은 많아도 명코치는 적다"는 지론을 펼치며 나카니시를 타격 쪽 명코치로 꼽았다.[59]
5. 수상 및 영예
나카니시 후토시는 현역 시절 수많은 전설을 남긴 간판 타자이자 은퇴 후 명코치로 알려져 있으며, '후토시'(太일본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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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입단 7년 이내에 여러 타격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특히 1953년에는 쇼와 시대 출생 선수 최초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고, 20세에 홈런왕을 달성한 것은 NPB 최연소 기록(2리그 제 이후로는 유일)이다.[56]
삼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53년, 1955년, 1956년, 1958년에 타율, 홈런, 타점 중 한 부문에서 리그 2위를 기록하며 2관왕을 4회 차지했다. 이는 오 사다하루의 5회, 나가시마 시게오의 3회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6. 개인사 및 사망
나카니시는 1956년에 미하라 오사무의 딸 도시코와 결혼했다.[1] 미하라 오사무의 장녀가 아내였다.[62] 인생의 스승이기도 한 미하라로부터 "사람을 보고 법을 설명하라", "미하라 이즘", 메모광을 물려받았다.[62] 나카니시가 가지고 있던 "미하라 노트"는 구리야마 히데키에게 계승되고 있다.[62]
현역 시절에는 스모를 좋아했고, 관역・쓰루가미네(후의 이즈쓰 장로)와 매우 친했기 때문에, 자주 이즈쓰部屋에 출稽古를 나갔다. 삼단목 정도의 역사라면 가볍게 제압하고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63]
거친 사나이로 알려졌지만, 성격은 섬세하고 성실하며 남들보다 훨씬 연습에 열심이었다. 과도한 연습이 건초염의 원인 중 하나라고도 한다. 약간 소심한 면도 보였다.
1958년 일본 시리즈 5차전에서 9회말 1사 3루라는 중요한 타석에서 3루 땅볼로 물러난 장면을 현역 시절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꼽았다.
미하라 오사무에 대해 취재에서 질문을 받는 일이 많아 "미하라 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만해 달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65]
한신 감독 시절에는 통풍을 앓고 있어, 스파이크의 발끝을 잘라내고 통증을 무마하고 있었다.[66]
2023년 5월 11일, 심부전으로 향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7. 평가 및 영향
나카니시 후토시는 현역 시절 수많은 전설을 남긴 간판 타자였으며, 은퇴 후에는 훌륭한 타자들을 육성한 명코치로 알려져 있다. 太|후토시일본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괴동(怪童)"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과 빠른 발을 자랑했다.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미하라 오사무 감독 시대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홈런왕 5회, 타점왕 3회, 최고 타율 2회, 베스트 나인(3루수) 7회를 기록했다. 1953년에는 역대 최연소로 트리플 크라운과 2관왕(홈런왕·타점왕)을 달성했고, 1955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를 차지했다.
선수 겸 감독을 거쳐 감독이 된 후에는 1963년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니혼햄, 한신에서도 감독을 역임했다. 최종적으로 5개 구단에서 감독 또는 감독 대행을 맡았으며, 야쿠르트, 긴테쓰, 요미우리, 오릭스 등에서 코치 또는 임시 코치를 역임했다. 와카마쓰 츠토무, 오카다 아키후미, 카케후 야스유키, 미야모토 신야 등을 육성했다. 지도자로서는 "후토산(ふとっさん)"이나 "명박락(名伯楽)"이라고 불렸으며, 타격 지도는 높이 평가받았다.
"무슨 일이든 힘든 시기가 자신의 기초를 만든다"라는 "난고초(何苦楚)"가 좌우명이었으며, 이와무라 아키노리, 타구치 소에게 계승되었다.
아내는 미하라 오사무의 장녀였다. 인생의 스승이기도 한 미하라로부터 "사람을 보고 법을 설명하라", "미하라 이즘", 메모광을 물려받았다. 나카니시가 가지고 있던 "미하라 노트"는 쿠리야마 히데키에게 계승되고 있다.
1959년 6월 3일 긴테쓰전(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스즈키 타케시에게 주력 손을 스파이크로 찔려 6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1960년에는 왼쪽 손목에 건초염을 앓아 만족스러운 스윙을 할 수 없게 되어 상시 출전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부상은 그의 선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산 18년 동안 1388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07, 244홈런, 785타점을 기록했다.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타율 |
---|---|---|---|---|---|---|---|---|---|---|---|---|
1952 | 니시테쓰 | 111 | 410 | 108 | 20 | 7 | 12 | 65 | 16 | 26 | 38 | .281 |
1953 | 120 | 509 | 146 | 20 | 7 | 36 | 86 | 36 | 41 | 52 | .314 | |
1954 | 130 | 554 | 146 | 28 | 8 | 31 | 82 | 23 | 51 | 73 | .296 | |
1955 | 135 | 549 | 157 | 28 | 4 | 35 | 98 | 19 | 71 | 91 | .332 | |
1956 | 137 | 523 | 150 | 27 | 5 | 29 | 95 | 15 | 54 | 70 | .325 | |
1957 | 132 | 538 | 154 | 31 | 3 | 24 | 100 | 15 | 49 | 71 | .317 | |
1958 | 126 | 469 | 127 | 19 | 1 | 23 | 84 | 8 | 60 | 59 | .314 | |
1959 | 59 | 181 | 45 | 10 | 1 | 7 | 29 | 2 | 24 | 24 | .294 | |
1960 | 32 | 54 | 17 | 2 | 1 | 1 | 10 | 1 | 6 | 8 | .362 | |
1961 | 99 | 301 | 77 | 6 | 1 | 21 | 54 | 4 | 44 | 42 | .304 | |
1962 | 44 | 82 | 19 | 1 | 0 | 2 | 11 | 2 | 9 | 8 | .268 | |
1963 | 81 | 241 | 61 | 7 | 0 | 11 | 26 | 0 | 24 | 47 | .282 | |
1964 | 33 | 46 | 6 | 2 | 0 | 0 | 4 | 0 | 6 | 10 | .150 | |
1965 | 34 | 58 | 15 | 2 | 0 | 2 | 9 | 0 | 6 | 8 | .294 | |
1966 | 51 | 55 | 14 | 2 | 0 | 6 | 15 | 1 | 3 | 9 | .275 | |
1967 | 32 | 40 | 10 | 2 | 0 | 3 | 9 | 0 | 3 | 7 | .278 | |
1968 | 26 | 28 | 10 | 0 | 0 | 1 | 8 | 0 | 3 | 5 | .400 | |
1969 | 6 | 7 | 0 | 0 | 0 | 0 | 0 | 0 | 1 | 2 | .000 | |
통산: 18년 | 1388 | 4645 | 1262 | 207 | 38 | 244 | 785 | 142 | 481 | 624 | .307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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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村繁(東京ヤクルト打撃コーチ/高知県高知市出身)×二宮清純
https://www.ninomiya[...]
スポーツ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2015-10-26
[62]
뉴스
吉田義男氏、同い年の“ふとっさん“中西太さん訃報に「思い出語り尽くせません」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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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昔のプロ野球選手は、大相撲の力士と、とても仲が良かった 太っさんの上半身は見事!三段目では相手にならなかったそうな
http://column.sp.bas[...]
週刊ベースボールオンラインおんりい・いえすたでい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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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西鉄ライオンズとその時代
[65]
서적
完全保存版 草創期から支え続けた147人の監督列伝 日本プロ野球昭和の名将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66]
뉴스
やさしき怪童…記者だけが見た、中西太さんの思い出 痛風でスパイクはサンダル状態、新幹線・食堂車の酒も飲み干した|まいどなニュース
https://maidonanews.[...]
まいどなニュース
[67]
문서
해설 위원 경력 (마이니치 방송, 규슈 아사히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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