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궁침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7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암행어사,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며 관료로서 활동했다. 특히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진구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생을 살피는 등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 또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13년 출생 - 사나다 유키타카
사나다 유키타카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며 시나노 평정을 돕고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만년에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1513년 출생 - 오만도코로
오만도코로는 센고쿠 시대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이며,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된 후 오만도코로의 호를 받았고 1592년 사망했다. - 함열 남궁씨 - 남궁진
남궁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여 신민당, 평민당, 민주당 등에서 주요 당직을 맡았고, 제14대, 15대 국회의원과 김대중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 함열 남궁씨 - 남궁영 (1962년)
남궁영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으로, 기술고시 합격 후 충청남도청 주요 보직, 행정자치부 정책기획관 및 대변인을 거쳐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도지사 권한대행을 역임하고 현재는 세종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1573년 사망 - 정숙옹주 (성종)
정숙옹주는 조선 성종과 숙의 홍씨의 딸로, 영평위 윤섭에게 출가하여 사후 양자를 들여 의지하며 장수하고 예법을 중시한 삶을 살았으며, 사망 후 선조가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 1573년 사망 -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은 가이 겐지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며 우에스기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마가와 요시모토, 호조 우지야스와의 동맹, 오다 노부나가와의 일시적 동맹,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 남궁침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의령(宜寧) |
| 자 | 성여(聖汝) |
| 호 | 모재(慕齋) |
| 생애 | |
| 출생 | 1540년 |
| 사망 | 1598년(선조 31년) |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三河里) |
| 가족 | |
| 아버지 | 남궁찬(南宮璨) |
| 어머니 | 정부인 연안 이씨(貞夫人 延安李氏) |
| 부인 | 정부인 파평 윤씨(貞夫人 坡平尹氏) |
| 아들 | 남궁황(南宮璜) |
| 관력 | |
| 과거 | 1573년(선조 6년) 진사시 합격 1588년(선조 21년) 문과 급제 |
| 주요 관직 |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성균관 저작(成均館著作)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상의원 정(尙衣院正) 동래부사 병조참지(兵曹參知) |
| 기타 | |
| 관련 정보 | 남궁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성여(聖汝), 호는 모재(慕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
2. 생애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2] 1546년(명종 1) 사헌부지평을 거쳐[3]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다.[4]
아버지 남궁익이 동복 현감으로 재직 중일 때, 남궁침은 1548년 1월 조강에서 지평으로서 호남 지방의 흉년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에게 아뢰고 진구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5] 같은 해 홍문관 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과 농사 형편을 살폈다.[6] 또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7]
이후 이조좌랑, 부응교 등을 거쳐 1550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8] 1552년 홍문관전한을 지내고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1553년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558년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장례원판결사와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9]
1563년(명종 18) 한성부우윤과 한성부좌윤을 지내고,[10] 형조 참판에 올랐다.[11] 1564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65년 다시 형조 참판을 지내고,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12]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 승하 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 즉위 시 형조참판으로 재직하였다.[13]
2. 1. 초기 활동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2] 1546년(명종 1) 사헌부지평을 거쳐[3]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다.[4]아버지 남궁익이 동복 현감으로 재직 중일 때, 남궁침은 1548년 1월 조강에서 지평으로서 호남 지방의 흉년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에게 아뢰고 진구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5] 같은 해 홍문관 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과 농사 형편을 살폈다.[6] 또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7]
이후 이조좌랑, 부응교 등을 거쳐 1550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8] 1552년 홍문관전한을 지내고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1553년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558년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장례원판결사와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9]
1563년(명종 18) 한성부우윤과 한성부좌윤을 지내고,[10] 형조 참판에 올랐다.[11] 1564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65년 다시 형조 참판을 지내고,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12]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 승하 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 즉위 시 형조참판으로 재직하였다.[13]
2. 2. 민생 안정 노력
남궁침은 1548년(명종 3) 홍문관 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 상황과 농사 형편을 살폈다.[6] 같은 해, 사헌부지평으로서 호남 지역의 흉년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에게 아뢰고, 진구(賑救)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5] 당시 호남은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에 달했고, 수재로 인해 수확할 곡식이 전혀 없어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5] 수령들은 조곡을 거두어 종자와 구황에 대비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5] 남궁침은 목화 열매도 맺지 못해 겨울옷을 준비하지 못한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진구 방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1552년에는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었다.[8]2. 3. 관직 역임
남궁침은 1550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8] 1552년 홍문관전한을 지내고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1553년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1558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장례원판결사와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9]1563년(명종 18) 한성부우윤과 한성부좌윤을 지내고,[10]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11] 1564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65년 다시 형조 참판을 지내고,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12]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의 승하 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가 즉위했을 때 형조참판으로 재직하였다.[13]
2. 4. 실록 편찬 참여
1548년(명종 3)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7]3. 가족
남궁찬(南宮璨)을 할아버지로, 남궁익(南宮翼)을 아버지로 두었다. 숙부는 남궁숙(南宮淑)이다. 외할아버지는 김인각(金麟角)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延安 金氏)이다. 형제로는 형인 남궁희(南宮憘)와 남궁개(南宮愷)가 있다. 허윤관(許允寬)을 처부로, 양천 허씨(陽川 許氏)를 배우자로 맞이하였다.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EXM_MN_6JOa_1540_003090
[2]
실록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4월 23일 신묘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실록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1월 13일 신미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4]
실록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3월 26일 계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5]
실록
명종실록 7권, 명종 3년 1월 5일 임오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6]
실록
명종실록 7권, 명종 3년 3월 30일 을사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7]
실록
중종실록 105권, 부록 편수관 명단
http://sillok.histor[...]
[8]
실록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윤6월 21일 계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9]
실록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8월 19일 계해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0]
실록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 4월 13일 경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1]
실록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 6월 20일 병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2]
실록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5월 29일 갑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3]
웹인용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 11월 7일 무오 1번째기사
https://web.archive.[...]
2017-02-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