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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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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를 두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며 서인에서 분파된 붕당이다. 숙종 대 경신환국을 거치며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이 형성되었고, 이후 소론과의 대립 속에서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대립 구도가 완화되었으나, 사도세자 사건을 거치며 시파와 벽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세도정치 시기 안동 김씨의 권력 장악으로 쇠퇴하였으며, 유교와 성리학적 대의사상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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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 [정당]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노론 (老論)
로마자 표기Noron
로마자 표기 (문화관광부 2000년식)Noronpa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식)Noronp'a
로마자 표기 (북한 1992년식)Roronpha
기본 정보
지도자송시열
지도자권상하
창당1680년 (경신환국)
해산1727년 (정미환국)
종교유교 (성리학)
역사
분당 전산당, 한당
후계 정당청명당
탕평당
관련 정당
관련 정당벽파
시파

2. 역사

숙종 대 서인남인의 대립 중, 장희빈의 몰락으로 남인이 약화되자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3]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김조순 (시파 계통의 노론)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소론 일부도 등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하였고, 이후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분열되었다.[3]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2. 1. 분파 배경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서인의 분파가 싹텄다.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복귀하여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서인 중 소장파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김익훈을 옹호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3]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3]

그러나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2. 2. 형성 과정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송시열영중추부사로 조정에 복귀하면서 서인 내 소장파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시도한 김익훈을 소장파가 엄벌하려 하자, 송시열 등은 김익훈을 옹호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서인은 소장파 중심의 소론과 노장파 중심의 노론으로 분열되었다.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3]

2. 3. 노론의 집권과 탕평책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3]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하였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3]

2. 4. 시파와 벽파의 분열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서인의 분파가 싹텄다.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송시열영중추부사로 입조하자, 서인 중 소장파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을 놓고 소장파가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김익훈을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3]

그러나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2. 5. 세도 정치와 노론의 쇠퇴

세도 정치 이후 노론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순조 때 외할아버지 김조순이 사실상 대리청정을 하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지만, 노론은 안동 김씨를 당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결국 세도 정치가 시행되어 노론은 몰락하였으나, 안동 김씨시파(時派)로 정권을 다시 잡아 세도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3. 사상적 기반

노론은 유교, 특히 성리학적 대의사상을 당의 강령으로 삼았다. 이는 송시열, 김창집, 김종수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노론 내 각 계파인 벽파와 시파, 청명파 등에게도 공통적으로 전승되었다.

4. 주요 인물

5. 평가 및 영향

노론에 대한 평가와 영향은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

6. 기타

1890년대 한국에 서점 개념이 도입된 이후, 자유롭게 책을 구매하여 읽을 수 있었음에도 노론계 인사들의 후손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극도로 혐오하여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다. 윤치호1935년 7월 17일자 일기에서 노론계 인사들이 정약용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4]

정약용이 죽은 지 130년이 지난 1930년대까지도 노론은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남아있던 노론들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7. 붕당 계보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3]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3]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 서인
  • * 노론
  • ** 시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
  • ** 벽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옹호
  • ** 청명파 - 노론 당내 외척세력 반대 및 탕평책 반대파
  • ** 북학파 - 노론내 비주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입장. 벽파, 시파 이전에 당내 주류에서 갈라진 파벌로 학문적 성향의 계파
  • * 소론

참조

[1] 웹사이트 노론(老論) http://encykorea.aks[...] 2018-06-09
[2] 문서
[3] 뉴스 동북아재단이 왜 동북공정 논리를 옹호하나? http://newsmaker.kha[...] 위클리경향 2009-07-07
[4] 서적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사 2009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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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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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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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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