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매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르매시는 1951년 6월 22일 한국에 도착하여 1954년 11월 4일 노르웨이로 출국할 때까지 한국 전쟁에 참전한 노르웨이 야전 병원이다. 1950년 노르웨이 적십자사의 요청으로 시작되어, 의정부에 개원한 후 동두천으로 이동하며 9만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노르웨이 군인 3명이 파견 활동 중 사망했으며, 미국 육군 부대 표창과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노르웨이의 군사사 - 데인 도끼
데인 도끼는 9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전투용 도끼로, 넓고 얇은 날과 뿔 모양의 특징을 가지며 바이킹, 기사, 보병 등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되었다. - 노르웨이-대한민국 관계 -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은 대한민국에 주재하며, 한국 정부와의 외교, 투자 유치, 노르웨이 국민 보호, 문화 교류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한국인은 관광 등의 목적으로 90일간 사증 없이 노르웨이에 체류할 수 있다. - 노르웨이-대한민국 관계 - 주노르웨이 대한민국 대사관
주노르웨이 대한민국 대사관은 대한민국이 노르웨이 오슬로에 설치하여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를 관할하는 대사관으로, 1973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 6.25 전쟁의 의료 지원 -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6.25 전쟁 중 스웨덴 정부가 파견한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부산에서 부상병 치료 및 민간인 구호 활동을 수행했으며, 이후 한국 의료 체계 복구에 기여했다. - 6.25 전쟁의 의료 지원 - 6.25 전쟁 의료지원 국가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측의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서독과 공산군 측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여러 국가들이 병원선 파견, 야전 병원 운영, 의료진 파견 등의 의료 지원을 제공했으며, 부산광역시에는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노르매시 | |
---|---|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병원 (NORMASH) | |
![]() | |
기본 정보 | |
부대 명칭 |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병원 |
영문 명칭 | NORMASH (노르매시) |
활동 기간 | 1951년 7월 19일 – 1954년 11월 10일 |
국가 | 노르웨이 |
소속 | 국제 연합 |
종류 | 이동 외과 병원 |
규모 | 83–105명 |
참전 | |
참전 | 6·25 전쟁 |
훈장 | |
훈장 | 2 × 미국 육군 부대 표창 (Meritorious Unit Commendation) 2 × 대통령 부대 표창 |
2. 역사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말, 노르웨이 적십자사는 한국에 의료 지원 요청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미국 육군의 이동외과병원(MASH)을 모델로 한 야전 병원인 노르매시(NORMASH,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노르웨이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1951년 5월 파견된 노르매시 인원들은 같은 해 7월 경기도 의정부에서 병원 운영을 시작했으며, 이후 전선 변화에 따라 동두천 등지로 이동하며 활동했다. 노르매시는 약 3년간의 활동 기간 동안 약 90,000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이 중에는 미국군, 한국군, 영연방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과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도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적십자 소속이었으나, 1951년 말 정규 군병원으로 전환되어 유엔군 작전을 지원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는 부상병 대신 민간인 진료에 집중했으며, 정전 상태의 불안정성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이후 서울 내 스칸디나비아 재활 병원 설립을 기다리다[1] 1954년 10월 철수 명령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 모든 임무를 마치고 노르웨이로 복귀했다.[2][3]
2. 1. 설립 배경
1950년 12월 29일, 노르웨이 적십자사는 한국 전쟁 중인 한국에 병원 시설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51년 첫 활동 계획으로 60개의 병상과 83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미국 육군의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을 모델로 한 야전 병원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1951년 3월 2일, 노르웨이 의회는 이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첫 파견 인원은 1951년 5월 16일에 노르웨이를 떠났고, 다음 인원은 5월 23일에 출발했다. 이들의 한국행 여정은 매우 길었는데, 스타방에르를 출발하여 뮌헨, 니스, 나폴리, 베이루트, 카이로, 카라치, 캘커타, 방콕, 홍콩을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군용 수송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이동했다.
노르매시(NORMASH,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인원들은 1951년 6월 22일 한국에 도착했으며,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서 북쪽으로 약 약 19.31km 떨어진 의정부에 처음으로 병원을 개원했다. 병원 시설은 조립식 건물인 니센 허트와 텐트로 구성되었고, 4개의 수술대를 갖춘 진료소가 마련되었다. 이후 전선 변화에 따라 서울 북쪽 약 64.37km 지점인 동두천으로 이전했고, 다시 몇 마일 더 북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개원 후 첫 40일 동안 노르매시는 1,048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이 중 23명은 민간인이었다. 노르매시가 활동한 전체 기간 동안 약 90,000명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자 국적은 미국 (36%), 한국 (33%), 영연방 국가 (27%) 순으로 많았으며,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 172명도 치료했다.
노르매시는 하루 평균 8건의 수술을 시행했으며, 때로는 하루에 64건의 수술을 하기도 했다. 전방에서 부상병들이 끊임없이 후송되어 의사들은 24시간 이상 연속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1년 가을,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인원을 83명에서 105명으로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한국에서의 유엔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야전 병원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노르매시는 노르웨이 적십자사 소속 병원에서 정규 군병원으로 전환되었고, 소속 인원들도 적십자 복장 대신 정규 미 육군 복장을 착용하고 계급을 부여받았다. 또한 노르웨이 군인들이 병원 시설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노르매시는 부상병 수용을 중단했지만, 이후 상당수의 민간인 환자를 치료했다. 휴전이 발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노르매시는 정전 상태가 깨질 경우를 대비하여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1953년 가을에는 미국 제1군단 예하 4개 사단을 지원하는 유일한 병원 시설이기도 했다.
노르매시는 서울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설립하는 재활 병원(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 중 하나)의 개원을 기다렸고,[1] 1954년 10월 17일에 마침내 노르웨이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원들은 1954년 11월 4일 한국을 떠났다.[2][3] 마지막 환자가 퇴원한 지 4일 후인 11월 10일, 모든 시설과 장비는 미군에게 반환되었다.
2. 2. 초기 활동 (1951년 - 1953년)
1950년 12월 29일, 노르웨이 적십자사는 한국에 병원 시설 도움 요청을 받았다. 1951년 첫 활동 기간 계획이 60개의 병상과 83명으로 이뤄진 미국의 육군이동외과병원을 기반으로 한 야전 병원으로 운영하기로 결정됐다.1951년 3월 2일, 노르웨이 의회는 노르웨이 야전 병원 운영 계획을 승인했다.
첫 번째 인원들이 1951년 5월 16일에 노르웨이를 출발했고, 다음 인원들은 5월 23일에 출발했다. 한국으로 향하는 여정은 시간과 거리 면에서 모두 상당히 긴 여정이었는데, 노르매시 인원들은 스타방에르에서 뮌헨, 니스, 나폴리, 베이루트, 카이로, 카라치, 캘커타, 방콕, 홍콩을 경류하여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부턴 군수송기로 서울로 이송됐다.
1951년 6월 22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1951년 7월 19일 노르매시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대략 약 19.31km 거리에 있는 의정부에 처음으로 개원하였다. 병원 시설은 니센 허트와 텐트로 이뤄졌고 4개의 수술대가 있는 진료소가 있었다. 이후에 서울에서 북쪽 약 64.37km 거리에 있는 동두천으로 옮겨졌고, 좀더 북쪽으로 몇 마일 거리의 옮겨진 곳으로 세 번째로 이동됐다.
노르매시는 첫 파견 40일 동안에 환자 1,048명을 치료했고, 이 중에 23명은 민간인이었다. 전반적으로 말하길, 노르매시가 90,000명의 치료했다고 하며, 이 중에 가장 많은 인원들은 미국군 (36%), 남한 (33%) 및 여러 영연방 (27%) 소속들이었다. 또한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 172명도 진료해줬다.
노르매시는 하루에 평균 8번의 수술을 했고, 의사들은 24시간 또는 그 이상을 전방에서 끊임없이 후송된 부상병들을 수술을 했다.
1951년 가을에 인원을 83명에서 105명으로 늘리기로 결정됐고, 1951년 10월 26일에 한국의 유엔군 작전을 위한 야전 병원을 유지하는 결정이 이뤄졌다.
노르매시는 적십자 소속 병원에서 정규 군병원으로 바뀌었고, 소속 인원들도 적십자 복장에서 정규 미 육군 복장 및 계급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들에는 노르웨이 군인들이 병원 시설의 경호를 맡는 것이 있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문이 채결되면서, 노르매시는 부상병을 받는 걸 멈췄지만, 그때부터는 상당한 수의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휴전이 발효되었지만, 휴전의 대한 안정성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었기에, 노르매시는 정전이 깨질 것을 대비하여 대기를 하고 있었다.
1953년 가을에 노르매시는 미국 제1군단 소속 네 개 사단의 유일한 병원 시설이었다. 노르매시는 서울 내 스칸디나비아 재활 병원 설립을 기다렸고,[1]
2. 3. 정전 협정 이후 (1953년 - 1954년)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노르매시는 부상병을 받는 것을 멈췄지만, 대신 상당한 수의 민간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휴전이 발효되었지만, 휴전의 안정성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었기에, 노르매시는 정전이 깨질 것에 대비하여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1953년 가을, 노르매시는 미 육군 제1군단 소속 네 개 사단의 유일한 병원 시설이었다. 노르매시는 서울 내 스칸디나비아 재활 병원 설립을 기다렸고,[1] 1954년 10월 17일이 되어서야 노르웨이 복귀 명령을 받았다.
1954년 11월 4일 노르웨이로 출국했으며,[2][3] 마지막 환자가 퇴원한 지 4일 뒤인 11월 10일에 모든 시설 장비는 미군에게 반환되었다.
2. 4. 철수 및 해체 (1954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문이 체결되면서 노르매시는 부상병을 받는 것을 중단했지만, 이후 상당수의 민간인을 치료했다. 휴전이 발효되었지만, 그 안정성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노르매시는 정전이 깨질 경우를 대비하여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1953년 가을, 노르매시는 미 육군 제1군단 소속 네 개 사단의 유일한 병원 시설이었다. 노르매시는 서울 내 스칸디나비아 재활 병원 설립을 기다렸고,[1] 1954년 10월 17일이 되어서야 노르웨이 복귀 명령을 받았다.
노르매시 인원들은 1954년 11월 4일 노르웨이로 출국하였다.[2][3] 마지막 환자가 퇴원한 지 4일 뒤인 11월 10일, 모든 시설 장비는 미군에게 반환되었다.
3. 인원 구성 및 희생
정전 이전 5번을 포함하여 총 7번이 넘는 파견 동안 623명의 남녀가 노르매시에서 활동했다. 파견 활동 중 총 3명의 노르웨이인이 사망했다. 1951년 8월에는 노르매시를 수송하던 상선의 선원 Reidar Georg Tveit가 사망했고[4], 1952년에는 운전기사 Arne Christiansen이 총격으로 전사했으며, 1954년에는 임상병리사 Brit Reisæther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망자 중 Reidar Georg Tveit는 부산에 위치한 재한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4. 수상 내역
노르매시는 미국 육군 부대 표창(Meritorious Unit Commendation)을 수상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2회 수상하였는데, 수상 일자는 각각 1952년 10월 6일과 1953년 11월 23일이다.
5. 의의 및 평가
노르매시는 미국 육군 부대 표창(Meritorious Unit Commendation)과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2회(1952년 10월 6일, 1953년 11월 23일) 수상하였다.
참조
[1]
웹인용
National Medical Center, Seoul
http://www.norway.or[...]
2012-02-24
[2]
뉴스
"「오스로」市長(시장)에 幸運(행운)의열쇠傳達(전달)"
https://newslibrary.[...]
1954-11-06
[3]
뉴스
많은功績(공적)남기고
https://newslibrary.[...]
1954-11-06
[4]
웹사이트
유엔기념공원 잠든 노르웨이 참전용사 트베이트 씨
https://www.bsnamgu.[...]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